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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그리스도 복음 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산울림
2.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목회를 하다보면 얘기치 못한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한번은 안면이 있는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아주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하다보니 이야기기가 길어질 것 같아 함께 집으로 와서 교회적인 문제를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충청도 어느 시골에 나이 많은 전임 목사님이 계시지만 어려운 교회재정에 힘도 들고 해서 젊은 목사님을 모시고자해서 그분이 일선에서 물러났었는데.. 자신이 그곳에 추천받아 그 곳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조그만 시골교회인지라 이 분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의 전부를 바치는 마음으로 개척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열심히 전도하여 교인들도 많아지고 그 시골지역 학생을 위한 공부방도 만들어 그런데로 괜찮게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그 교회에 있었던 전임 목사님이 새로운 목사님이 와서 다시금 교회가 새로이 활성화 되어져 가는것을 보고는 갑자기 욕심이 생겨 권리금이나 교회세를 거론하면서 많은 금전적 요구를 하면서 그것이 안되면 나가달라는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돈도 없을뿐더러 지금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었던 터라 나가게 되면 금전적 손해도 보고 거기다가 마땅히 갈만한 곳도 없는 이러한 상황에 잠도 잘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이끄심은 늘 우리로 감사로 나아가지만 막상 이런 현실앞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너무 난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다는것은 정말 우리가 좋을때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완전한 절망이 닥쳐왔을때 모든 것을 믿고 맡김으로 응답되어진다는것을 설명하고는 성경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사실 그렇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면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지키시고 건져주시는 일들을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두려움이 되지 않았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어린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만나 죽음의 사투를 벌였던 것이며, 그후 사울의 미움을 받아 그앞에서 몇 번이나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났던 일이나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서 배신을 당하여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갔던 일이며.....이처럼 우리가 잘아는 다윗도 그 인생의 면면들을 보게되면 항상 어렵고 위험한 순간들로 되어졌다는 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울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않고 겸손과 자비와 인내로 자신을 온전히 드렸기에 우뚝 설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매일 매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을 볼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들이 자주 있었지만 그때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이길수 있었던 사실을 감사하며 간증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속에서 헤쳐나갈수 있는것은 믿고 구하기만 하면 다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의 응답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문제앞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사59장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다"는 말씀처럼 우리와 하나님사이에 죄가 가로 막혀 있다면 아무리 기도하더라도 죄가 가로막혀 단절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도우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안에서 산다고 하지만 우리의 자아가 아직도 죽어지지 않은채 자기 열심과 자기노력으로 수고하면서 그 가운데 예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삶을 살아갈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맡겨버리는게 아니라 주님의 일에도 계속적으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아가 살아있으면 그것은 내맘이지 주님의 마음이 아닌것입니다.
자기뜻이지 주님뜻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 일이지 주님일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데 거룩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우리들이 내안에 때묻은 마음으로 무엇이든 자기 스스로 해결해보고자 하게되면 하나님은 그일에 전혀 관여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때는 주님이 처음 제자들을 죄악 가운데서 부르실때는 그 당시 자신의 생업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보시고 하나하나 부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의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모든사람은 사회에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며 걸을수도 일할수도 없는 약하고 어려운병자들이 주님에 은혜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은혜의 선물로 내 행위나 내 공로가 아니기에 어느누구라도 받을수 있습니다.
잠을 자는중에 있더라도 밥을 먹는중에 있더라도 놀고있더라도 주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이 은혜의 초청에 부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후의 하나님의 일은 다른것입니다.
마음이 깨지지 않은채로 어느누구라도 주님앞에 나와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자기 마음이 깨어져 주님을 만을 바라고 의지하는 구원의 선물을 얻는 기회가 누구라도 있지만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때는 이전의 모든 방식을 다 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새 방식을 받아야 만이 감당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기를 비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할수 있도록 성령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내 노력과 내 힘이 아닌 주님이 주신 성령의 힘으로 하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역사인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힘으로 무엇을 하더라도 내가 하는것이 아니고 나는 그분의 도구로 하는것이기에 쓰일수 있다는 그 사실이 기쁘고 하나님이 순간 순간 이끌어 주시니 너무너무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닌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도 만족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만이 진정한 행복을 얻을수 있음을 알고 자기 마음을 비울때 비로소 주님은 그 안에서 역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어려운 문제뿐만 아니라 삶의 어떤 쉬운문제도 내가 해결하는게 아니라 주님이 그일을 해결하시도록 맡겨버릴때 비로소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갈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문제가 생겨 어려움을 당할때는 전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채 혼자 괴로워하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어서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 마음가운데 거하신다면, 믿는 우리에게 닥치는 문제가 어떤 문제든지 그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신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를 위해 살려고 노력하거나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제 마음을 일으키셔서 신앙생활을 직접 하시는 것입니다.
출25장에는 성막을 짓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옵니다.
출25:1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예물을 가져오라고 명하셨고, 그 가져온 예물로 출25:8절에는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셨지만,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죄많은 이스라엘 무리속에 거하실수가 없어서 그들 가운데 거할 성소를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의 애굽에서 홍해를 거쳐 택한 거룩한 백성으로 삼았기에 그들의 마음이 거룩한 성소의 전이 되어 거하시길 원하셨지만 아직까지 깨지지 못한 원석과도 같은 아담의 유전적 죄로 거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들중에 거할 성소를 지으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어느 한 아브라함의 일가족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400여년동안 애굽에서 살면서 히브리족속으로 한민족을 이루어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다가 때가되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홍해바다를 건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시내산 밑에 이르렀을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산 꼭대기로 부르셔서 모세에게 십계명 돌판을 주시고 하늘나라에 있는 성막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삼가 내가 산에서 네게 보인 그대로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25:9)
모세는 그때 사십주야를 시내산 꼭대기에 있은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두 개의 돌판을 양손에 쥐고 그의 마음속에 하늘나라에 있는 성막을 간직하고 내려왔습니다.
율법을 범한 죄인들
그런데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산 밑에서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어디 갔는지 알지 못하니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자' 고하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는 그 앞에 제사하고 춤을 추며 기뻐 뛰놀았습니다.
그 때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는데 이 모습을 본 모세는 화가 나서 하나님이 친히 손가락으로 쓰신 십계명 돌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항상 죄악이 존재했습니다.
출18장을 보면 모세는 율법이 내려오기 전에도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롬5:13절에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전에도 그들에게 죄는 있었지만 율법을 없었을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다만 양쪽을 중재하는 선에서 인간의 보편적 도덕과 윤리관으로 양심의 판단에 따라 살수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것이 430여년 동안 애굽에서 살아왔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것이 애굽의 문화 애굽의 종교 애굽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혈통과 종족은 달랐어도 히브리 민족 이스라엘 백성은 그당시 세계를 지배한 강대한 애굽의 영향아래 살았기에 모든 것이 애굽화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가운데 내려왔습니다.
'내앞에 다른신을 만들지 말라'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등 여러 가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명 즉 율법이 왔기 때문에 그들은 약속에 의해서 그 율법에 비추어 죄인이 되어진 것입니다.
율법이 내려오기전에는 비록 금송아지를 만들고 섬길지라도 자연스러운 애굽생활의 방식이었기에 그것이 죄인줄 몰랐지만 "내앞에 다른신을 두지말라"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율법이 그들 마음속에 임할 때 그들이 행한 것은 죄가 되어 버렸습니다.
율법을 가져온 첫날에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죄악이 드러나자 모세는 굉장히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대로 십계명을 주면 그들이 다 지켜 행할줄로 믿었으나 처음부터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더구나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인의 회중에 거하실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괴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모세는 어떻게 죄를 씻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냥 범죄를 회개하고, 자백하며, 죄를 씻어 달라고 간청만 할 뿐이었습니다.
*출32:32
"그러나 합의 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라는 말까지 하면서 간절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4절에 보면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고 하셨지 용서해주신다는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 레4장에 오면 죄를 지었을때 어떻게 용서받는지 그 방법을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성막의 제단 앞에 나아가는 길이 있지만 그 전에는 성막이 만들어 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눈물로 간청만 할 뿐이었습니다.
허물많은 인간들속에 거하실 하나님의 처소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를 지었을때 죄속함을 받는 방법이 레4장의 구약적 방법으로 해결할수 있는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다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죄를 지었을때 하나님께 죄를 속함받는 방법을 몰라 자기생각으로 갖가지 방법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어떤이는 율법적 방법대로 죄를 처리하는가 하면 어떤이는 자기의 선한행동으로 무마하고자 합니다.
어떤이는 반성과 일기로 대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것도 자기죄를 대신할만한 가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깊은 죄속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 이상 같이 갈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어긴죄는 십계명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죄였습니다.
그것을 어긴 죄가 드러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사자를 너희들과 함께 보내겠고 나는 같이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33:2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의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도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그래서 그들은 부지런히 성막을 만들어서 하나님이 죄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실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하실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구비된 것이 바로 성막인것입니다.
성막 바깥에는 뜰이 있고, 또 그 뜰 바깥에서는 레위 자손들이 생활하면서 범죄한 자들은 감히 성막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불편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조건이 구비된 장치 - 성막
하나님은 거룩하신분입니다.
그러므로 죄악많은 인간들과 함께 하실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이끄신 하나님은 그들가운데 함께 하시기 위해서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성막......
그곳은 외형적으로는 아무런 볼품이 없으며 마당에는 짐승을 불태우는 번제단과 손을 씻는물두멍만이 덩그러이 놓였을 뿐입니다.
성소안은 무엇으로 되었는지 알수없도록 4겹으로 덮은 천으로 가렸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화려하지도 않는 성막의 모습을 통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육신의 옷을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주님도 이땅에 오셨을때 왕으로 오신 분이시고 의의평강을 가져오신분이라 아주 모습이 당당하시면서 인자하시고 품위가 있으신 어진분으로 연상할수 있습니다만 실상 우리 주님의 모습은 전에도 이야기 했다시피 연한순같고 마른 나무에 나온 줄기와같고 고운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우리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것이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분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53:2)
물론 이 모습은 고난받는 예수의 모습입니다만 그만큼 우리예수님은 남들이 보기에 드러나지 않는 아주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잇는것입니다.
여기서의 성막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왜그렇습니까?
오직 성막안에서만이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할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그렇듯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수 있는 유일한 길인것입니다.
그 성막마당에서 번제를 통하여 죄를 속함받고 죄에서 벗어난 자유의 기쁨을 맛보듯이
그래서 예수안에서 십자가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난 자유의 기쁨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는 그 성소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온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율법에 따라 더럽고 악한죄가 수없이 있었으나, 성막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만을 바라보며 나아갈수 있었고 하나님은 아무런 불편없이 그들을 인도하실수 있었습니다.
우리역시 죄로인해 넘어지고 하지만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죄와 눈물을 십자가의 보혈로서 다 정하게 하셨기에 이후 우리 마음은 항상 예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여 나가면 하나님이 거하실수 있는 모든 의로운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기에 하나님과 화목할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속에 거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스스로를 의롭게 할수 없습니다.
우리의 어떠한 노력이나 행위나 공로로는 전부 죄악의 때묻은 더러운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될수 있도록 이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앞에 설수 있도록 온전한 의로운자가 될수 있도록 완벽한 속죄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날위해 돌아가신 그 속죄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또다시 죄를 짓고 연약함이 들어난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앞에 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한번 십자가의 속죄제사로 영원히 온전케 함으로 거룩하게 해 주셨기에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더럽고 추한 모든 죄를 씻어 주셔서 우리를 단번에 거룩하고 의롭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죄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사이에 성막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가운데 함께 거하실수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성소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몸은 예수의 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이 우리마음안에 거하시기에 불편이 없으신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때에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는 예수님의 보혈의 의로 거룩하고 의로우며 흠없이 완벽한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칭의로 얻어진 의는 어떤 선한 행위나 노력으로 된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다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서 내가 그를 믿음으로 나를 의롭게 하셨다.', 나를 거룩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내 마음안에 거하시기에 불편이 없도록 하셨다' 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그 마음은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에 머물러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비록 나는 죄의 바다 한가운데 거한자 일지라도 하나님이 내 마음가운데 거하시기에 불편이 없도록 온 인류의 죄를 속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의롭게 하신 사실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것을 믿는 믿음만이 믿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죄값을 청산하는 그 죽음으로 인해서 이제 우리도 예수님처럼 의롭게 되고 거룩케 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일때 비로소 참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