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33:50-56, 가나안을 주신 이유, 19.5.8, 박홍섭 목사
민33장은 전반부에 광야 40년 노정기가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광야의 노정기는 은혜의식을 상기시키기 위한 내용입니다. 지난 40년의 여정을 돌아보면 패역과 불신앙으로 점철된 시간입니다. 그 걸음 하나하나가 망하고 버림받아 마땅한 걸음들이었는데 하나님은 이들을 아비가 자식을 안음같이 품에 안고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실력과 믿음과 공로로 이 땅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때문에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은혜로 들어간 가나안에서 해야 할 일들을 일러주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그 땅의 원주민을 몰아내어야 합니다(52a). 그리고 그 원주민들이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깨뜨리고 산당을 헐어야 합니다(52b). 마지막으로 지파별로 제비를 뽑아서 수가 많은 지파는 많은 땅을, 수가 적으면 작은 땅을 받아야 합니다(54). 만일 이 명령을 수행하지 않고 원주민을 다 쫓아내지 않는다면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가시와 찌르는 것이 되어 이스라엘을 괴롭힐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원주민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쫓아내실 것이라는 경고로 33장이 마무리 됩니다.
가나안 원주민을 다 쫓아내고 그들의 우상을 다 척결하라는 이 말씀은 일단 심판의 의미가 있습니다. 창15:12-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후 지금 그 땅을 주지 않고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할 때 그 땅에 들여보내겠다고 하십니다. 가나안에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400년이 지난 지금 가나안은 하나님의 기회를 발로 짓밟고 죄가 관영해져 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의 삶 자체가 죄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종교, 그들의 삶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이스라엘을 그 땅에 들여보내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 땅의 죄를 심판하는 도구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그 죄에 물들지 않기 위해 죄를 척결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서 그 땅에 들여보내는 이유는 죄로 물든 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사는 백성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다 몰아내고 훼파하고 부수고 척결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십자군 전쟁 하듯이 적용하면 곤란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 땅의 방식과 다른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는데 그 삶이 그들보다 훨씬 아름답고 존귀함을 보여 세상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세상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 땅은 목축하는 땅이 아니라 농사하는 땅입니다. 이스라엘은 농사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만 짓고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농사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다 죽이면 농사는 누구에게 배웁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다 몰아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사람들의 농사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농사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농사법은 단순한 농사가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숭배가 바탕이 된 농사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그들의 신과 우상숭배의 풍습까지도 함께 배운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가나안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대로 농사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잘 안되겠죠. 많은 시행착오를 겪겠죠.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그들만의 농사법을 만들어서 살아야 합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의 농사법대신 그리스도인의 농사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처음 몇 년은 아예 농사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광야 40년 동안 배우고 훈련한 게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신 의도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했고 가나안 원주민을 남겨두었습니다. 적당하게 타협하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경고대로 이들이 가시가 되어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하게 만듭니다. 왜 하나님의 척결하지 못했다고요? 하나님이 자신을 가나안에 왜 들여보냈는지를 잊어버리고 그 땅에 적응해서 잘 사는 것만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요즘같이 취직이 어려운 때에 회사에 들어갔다면 그 회사에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그 회사에 보내었는지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만약 그 회사의 분위기 중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분위기, 불의와 불법의 분위기가 있다면 그 분위기에 적응하고 타협할 것이 아니라 그런 흐름들을 거부하고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아니라 쉬운 길을 택해 타협하고 말았습니다. 삿2: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쩜이뇨.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타협하자 얼마 되지 않아서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사람들의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 신을 섬기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한 세대 만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삿2:11-1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들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슬프죠. 어떻게 한 세대 만에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 을 섬길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의 우상들을 철저하게 몰아내고 그들의 문화와 가치관을 세우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우상들을 섬기는 우상의 종이 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에 잘 적응하고 빨리 안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힘을 빌어서 빨리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정신이 아니라 언약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적당하게 타협하면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아 우리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의 종이 되고 맙니다. 물론 교회는 나오고 예배는 드리겠지만 일상을 살 때는 바알과 아세라의 방식대로 살면서 우상을 섬기는 비참한 현실이 됩니다.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경고와 더불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일러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