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로틴 “국가의 면도칼”
(민35:1-34)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길로틴, 국가의 면도칼>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길로틴(guillotine), 여러분 다 아시지요? 단두대라고 우리가 한국말로 번역해서 사용하는 죄수를 사형시키는 하나의 형틀입니다. 목을 걸고 그리고 위에서 아주 묵직한 칼날이 내려오면서 사람의 목을 끊어내는 그런 참담한 형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이 길로틴이라는 말이 단두대를 만든 사람의 이름입니다. 조셉 길로틴. 길로틴이라는 말을 불어로 발음하면 기요뗑이라고 하나 봐요. 전 불어를 잘 모릅니다.
근데 이 조셉 길로틴이라고 하는 사람이 사람이 사형을 받을 사람이라도 좀 고통없이 편안하게 죽을 죽음의 권리가 있지 않느냐. 그것을 헌법 의회에 주창을 하게 되면서 한 외과의사가 고안해낸 이 사형 집행장비를 선을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이제 1791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헌법 의회에서 모든 사형수는 목을 잘라 사형을 시킨다는 것이 법령으로 공포가 됩니다.
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일 수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구라파에도 그러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능지처참 식으로 사지를 말에 묶어서 사람의 몸을 찢어서 죽이는 그런 것도 있고 하여간 여러 가지가 있었던 모양인데 근데 목을 잘라 죽인다. 그러니까 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의 시간을 없애주는 거지요.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그렇게 했는데 이게 프랑스 대혁명이 끝나고 1793~4년 어간에 숙청 작업이 일어날 때 2만 여명을 이 길로틴으로 죽었다고 그래요.
길로틴은 사람이름이었는데 헌법 의회에 이 사람이 그 장비를 추천을 하게 되고 길로틴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갖고 있었던 기자가 비꼬는 식으로 신문에 사형 집행장비를 길로틴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그만 그 사형 장비의 이름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루이 16세를 비롯해서 고관대작들도 이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굉장히 많지요. 그래서 이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숙쳥을 해서 별명이 뭐냐? 국가의 면도날입니다. 사람의 명줄을 끊어내는 국가의 면도날이다 이런 뜻으로.
그러면 왜 이렇게 오늘 아침 말씀의 제목을 길로틴, 국가의 면도날이라고 했느냐?
오늘 말씀의 주 내용들이 '도피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 앞장에서 아직 요단강을 넘어가지도 않은 상태에서 싸움도 시작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벌써 땅을 제비 뽑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성전 봉사를 위하여 특별히 구분되어서 생업을 가질 수 없는 레위인들이 살아갈 방도에 대한 이야기가 뒤따라 나와야 되지요.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위해서 이제 12지파가 분배받는 성읍들 중에서 48개의 성을 레위인에게 줍니다. 그게 오늘 35장 1절부터 우리가 읽지 않은 8절까지 나와 있는 내용인데 48개의 성읍 중에서 6개의 성을 도피성으로 내줍니다.
도피성으로 요단강 동편에 3개, 요단강 서편에 3개, 이렇게 도피성을 주면 그 도피성이 뭐하는 데냐? 살인한 죄인들을 이 도피성으로 피하게끔 만들어준 성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의도적으로 살인한 사람들인 경우에 재판을 받을 때까지 머물게 한다든지 그 의도성이 확실하면 그 자리에서 다 죽입니다. 그러나 의도성이 불확실 할 때는 정말 밖으로 돌아다니다가 자기가 죽인 사람의 가족이나 친지를 만나게 되면 그 사람들이 원수를 갚으려고 그럴 거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 재판이 이루어질 때까지 숨겨둔다든지.
그런데 도피성의 주목적은 결국 어디에 있느냐?
고의가 아니게 의도성이 없이 그걸 과실치사라고 그러나요? 의도성이 없이 사람을 죽일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냥 무심코 돌을 던졌는데 숲속으로 들어간 돌이 숲속을 걷는 사람에게 맞아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도끼질을 하고 있는데 이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나가면서 앞에 있는 사람이 맞아서 죽었습니다. 이럴 경우에 이제 가족과 친지들 입장에선 어쨌든 그 사람 때문에 죽었으니까 직접적인 원인이 그 사람이니까 그 사람에게 피해보복을 하려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도피해서 있게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생각하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고 있는 것인데 재미있는 부분은 그 사람이 도피성에 들어가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언제까지냐 하면 살인이 일어난 그 당시에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있는다는 얘기에요. 이게 재미있지 않아요? 여러분? 대제사장과 그 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어서 그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있다가 도피성에서 이제 대제사장이 죽은 다음에 나오면 누가 그를 죽여도 죽인 사람이 또 죄를 쓰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도피성에서 나와서 아이고 답답하다. 나도 밭일도 해서 생업을 유지해야지... 이러고 도피성에서 나올 때 자기가 의도성이 없이 죽인 그 사람들의 친지나 가족들이 자기를 죽이면 이땐 이 죽인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도피성의 주목적이 이렇게 의도성이 없는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살인한 자들에 대해서 생명을 보존시키기 위한 것인데, 여러분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라고 하는 이 말이 '속죄'의 의미가 있는 거겠어요. 그래서 결국은 이 성경 전체를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출발점으로 바라보게 되는 거 아닙니까? 이게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을 바라보는 방식이었죠. 특히 칼빈 같은 사람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 주님을 중심으로 구약을 재편성하고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발췌해내는 거 이것이 우리의 과제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과 연관시키면 어떤 뜻이 있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이 도피성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도대체 어떠한 내용이냐 그걸 한번 살펴보면 우리한테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러분, 우리가 살인을 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명줄을 끊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두대라고 하는 것이 길로틴인데 길로틴이 사람 이름 아니었습니까? 그 사람 이름이 붙은 단두대가 국가의 면도칼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가족의 면도칼이 될 때가 많다는 것이에요.
왜 그러냐?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하나님 역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계시고 그 관심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가 계획과 뜻이 있다면 하나님은 더 먼저 계획을 갖고 계시고 뜻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갖고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들에 대해서 하나님도 관심을 갖고 계시고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요. 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뭐냐 하면 그 대상, 그 사람, 그 일, 그 과제에 명줄입니다. 생명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에덴에서 쫓겨났지 죽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목숨이 끊어진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망이었습니다.
뭐로부터 사망입니까?
자기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소원이 끊어져버리고 자기들 스스로가 계획을 갖게 된 거 이것이 자기들의 명줄을 자기 스스로 잘라낸 것이지요.
그러니까 아주 구체적으로 실감나는 예를 들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 자녀를 교육합니다. 중학생 자녀 고등학생 자녀 대학생 자녀 취직해야 될 자녀 결혼해야 될 자녀를 우리가 말을 하고 교육합니다. 이럴 때 항상 기억하실 것은 내가 우리 자녀를 사랑하고 관심을 갖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이 사랑하고 관심을 갖고 계시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게획과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 우리의 뜻과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소원들을 우리 자식들에게 주입시키고 들이댑니다. 이게 뭡니까? 그들의 명줄을 잘라내는 것이라는 거예요.
모든 살이있는 생명체에 생명줄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직도 그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목숨 자체가 죽고 사느냐를 넘어서서 우리가 인간답게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생명줄을 붙잡아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 하루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보존되어야 그게 내가 생명이 보존된 인간이라는 것이에요. 근데 우리가 그 명줄을 따내고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내가 내 뜻을 가지고 내 삶을 지배하고 내가 사랑하고 관심을 갖고 있는 내 가족들에 대해서 내 뜻을 이야기하고 내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본의 아니게 우리가 제2 제3의 길로틴이 되어 명줄을 따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지요.
그래서 이 도피성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여간 우리가 살아서 하고 있는 모든 일,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모든 대상의 생명줄을 우리가 다 따내는 길로틴이에요. 단두대에요. 우리의 뜻을 들이밀고 우리의 판단을 거기다 대고 들이밀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곳으로 향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다 잘라내는 면도칼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면도칼이 아니라 가족의 면도칼이에요. 내 자녀의 명줄을 따는 면도칼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나라는 이야기에요.
여러분, 목사가 제일 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교인들에게서부터 교인들의 자녀를 뺏어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예를 들어 우리 교인들이 우리 아이가 일류대학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막연한 소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들이댑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 소원이 생긴 경위를 한번 따져봐요. 내 자녀에게 좋은 대학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아니면 좋은 자리 취직을 했으면 아니면 세상에서 성공과 출세하는 그런 소원을 갖게되는 경위를 한번 따져보라구요.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내가 공부를 못해서 한이 맺혔거나 아니면 학부형들끼리 모여 있는 자리에서 대학이라는 것이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그 자리에서 마음에 점점 성취 의욕에 주입이 되는 거예요. 내 자녀가 이렇게 선망하는 사람들의 어떤 뜻이 모아지고 있는 그런 대학에 들어가면 얼마나 저 사람들이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또 보겠는가, 아주 사소한 데서 생기는 것이에요.
모두가 다 그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 세상에서 배운그런 경험과 그런 삶에서부터 추출되어진 추출물들을 마음에 안고는 소원을 갖고 들이대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그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 그 자녀의 생명줄을 면도칼처럼 끊어내는 작업아라는 것이에요. 우리가 무의식 중에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 죄가 그대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죄가 뭡니까?
하나님과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말하는 게 다 죄에요.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게 죄라는 것이 로마서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통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녀에 대한 소원을 갖고 바라고 말하고 간섭하는 모든 게 다 죄에요. 사업 마찬가지고 내가 하는 일, 과제 다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이게 다 뭐냐 하면 길로틴이 되어서 면도칼처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다 내 뜻으로 잘라내버리는 것이에요. 이게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피성의 의미는 어디에 있느냐?
내가 꼼짝을 못해야 된다는 거예요. 삶의 자리로 나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도피성이라는 것은 내가 그동안 살고 있던 삶의 현장에서부터 완전히 성 안으로 들어가 갇혀버린다는 얘기입니다. 도피성의 의미가 거기에 있어요. 내가 뭘 손을 댈 수가 없어요.
왜? 내가 손을 대는 일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들이밀면서 내가 다 잘라버리거든요. 의도성은 없는데 다 죽여버린단 말입니다. 그럼 죽인다는 걸 알면 죽이겠습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다 죽이고 있다는 거예요.
대제사장이 죽고서야 삶의 자리로 나간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관심을 갖고 손을 대고 우리의 뜻을 들이대는 것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것을 다 잘라내는 살인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꼼짝을 못하는 거예요. 무엇에 손을 대겠습니까? 손 대면 하나님의 뜻을 잘라버리는 건데.
대제사장, 주님의 죽음 아니겠습니까? 그 죽음을 통과한 뒤에라야 그 십자가에서 내가 죽은 뒤에라야 십자가에서 주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인 것을 내가인정하고 나서야 그리고 죽음이 내 몸에서 약발이 돋아나야 그래서 진짜 내 자녀에 대해서 완전히 죽은 사람이 된 뒤라야 비로소 자녀 앞으로 가족 앞으로 사업 앞으로 배우자 앞으로 우리가 나가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내 뜻을 들이대던 내가 죽은 뒤에라야 하나님과 통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통한 자라야만 내가 만나는 일과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뜻을 통하도록 보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죽은 뒤에라야 도피성에서 나와서 자기의 삶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이유 이게 바로 도피성의 참 의미라는 것이에요.
주님의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자녀에게 가고 배우자에게 가고 사업에 가고 일에 가고 사람 만나는 자리에 가고 모임에 가는 모든 것들이 다 나도 모르게 그 사람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뜻을 다 죽이는 거예요. 다 잘라내는 거예요. 다 면도칼 길로틴들이 된다는 거예요. 제2 제3의 길로틴들이 되어서 그들의 명줄을 계속 따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기독교도 각계각층에서 부패가 드러나고 있는데 요즘 또 보면 조계종 불교에서도 또 그런 부정부패 스님들의 권력다툼 금전을 향한 어떤 야욕들이 그냥 노출되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런 걸 보고 개탄을 합니다. 종교가 목사가 스님들이 어쩌구 저쩌구...
근데 나는 하나도 개탄이 안돼. 당연해요. 당연해. 무슨 수련을 해서 인간의 끝없이 올라오는 죄성, 내 의지를 고집하고 내 소원을 고집하고 내 계획을 고집하고, 자녀에 대해 남편에 대해 아내에 대해 내 가족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는 소원을 그저 움켜쥐고 있는 이 죄악됨이 돈에 대한 욕심이 무슨 수련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이미 죽었음을 고백하는 기도를 매 순간마다 끊이지 않고 그러니까 이 기도가 지속되지 않는 동안은 다시금 뚫고 올라와요. 하여간 100일 동안 1초도 안 빼고 계속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면 계속 죄가 눌려 있어요. 그러다가 딴 일 때문에 한 1시간 비우잖아요. 그럼 1시간 동안 죄가 올라와요. 우리 죄가 올라오면서 내 뜻을 얘기하게 되고 내 소원을 얘기하면서 또 부지불식 간에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뜻을 다 쳐죽이고 말아요.
회의때 내 의견을 얘기하잖아요? 주님의 십자가를 먼저 보고 대제사장의 죽음의 순간을 거치고 나서 도피성에서 빠져나온 상태가 아니면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내 의견을 받아들이죠? 그 회합을 다 죽이는 거예요. 그 회합에 임하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명줄을 다 따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반드시 보복이 돌아온다는 것이에요.
내가 내 자녀를 어디서 세상 구석 돌아다니다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좋은 대학 어쩌구 뭐 이런 걸 듣고 와서는 내 자식에게 그 대학 들어가자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자 이런 식의 얘기를 하나님 앞에 완전히 죽은 다음에 하나님의 뜻으로 받지도 않고 마구 들이대고 있는 그런 삶을 만약에 자녀가 받아들여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면 피의 보복이 돌아온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명줄을 딴 그 피의 보복이 삶을 통해서 반드시 불행으로 다가옵니다. 협박하는 게 아니라 이게 영적인 원리라는 것이에요.
도피성의 의미 뭐라구요?
내가 삶을 살아갈 수 없어요. 내가 만지는 것마다 의도는 그렇지 않은데 명줄을 따는 거예요. 그 명줄이 뭐라구요? 나를 향한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사업이면 사업 일이면 일 어떤 단체면 단체 그것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내가 죽이는 겁니다. 그게 관철되든 안 되든 내 속에서 내 나름대로의 뜻을 갖고 있고 내 나름대로의 소원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뜻 어느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에요. 길로틴이 된다는 것이에요.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대제사장의 죽음을 거치지 않고 자녀 앞으로 나간다면 자녀의 명줄을 따는 길로틴 단두대가 되어서 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완전히 고꾸라지고 죽은 다음에 내 뜻이 죽고 완전히 죽은 다음에 그 다음에 그 자녀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뜻을 보존시키기 위해 만나야 되고, 남편과 아내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보존시키고, 사업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보존시키기 위해 만나야 되지요.
여러분 제발 조심하세요!
하나님과 내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연합하고 십자가에서 죽고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이 죽고 하나님과 통한 상태에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나를 향한 뜻, 상대방을 향한 뜻을 따라서 살지 않고 전개되어지고 있는 지금의 모든 일들이 다 화로 변해서 다가올 겁니다. 두고 보세요.
그러므로 지금 빨리 도피성으로 들어가요. 주님의 십자가 뒤로 들어가서 손 다 떼세요. 다 떼시고 오늘 하루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가느냐? 이 말씀이 끝나자 마자 아주 아주 진심으로 기도하세요. “주님 내가 죽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을 통과해야 돼요. 사업에 대해서 자녀에 대해서 배우자에 대해 내가 죽었습니다. 완전히 죽은 다음에 죽은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마음에 내가 관심하고 있던 일들 야, 이렇게 되도 저렇게 되도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진다면 좋겠다 하는 바람이 생길 거예요. 이게 이제 하나님과 통했다는 이야기에요.
그런 소원이 진짜 생기는 거예요. 우리 아이가 내가 지금 주님의 십자가 붙잡기 전에 원했던 대학을 들어가건 말건, 그 직장을 들어가건 말건, 그 사업이 그렇게 되건 말건 망하건 흥하건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면 좋겠다 하는 소원이 생길 때 이때 나와서 사업을 하시고 이때 나와서 자녀를 만나시면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그 생명줄이 보존되고 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거치지 않은 우리 모두가 다 제2 제3의 단두대 길로틴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두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뒤로 도피하시고 주님의 죽음을 통과해서 다시 삶의 자리로 나오시는 일을 매일매일 반복하시기를 바랍니다. (2007.09.14)
†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