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삼일공원이다.
청주 삼일운동의 상징이기도 한 횃불이 먼저 눈에 띈다. 낮 시간 뿐 아니라 밤에도 횃물만세운동을 하였다는 청주의 만세운동을 상징하는 것이다. 각 마을에서 수십 개소의 봉화가 올랐다고 하니 충북지역 주민들이 삼일운동 참여가 얼마나 들불처럼 일어났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뒷쪽으로는 당시 삼일만세운동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옆으로는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충북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동상도 나란히 세워져 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 신석구, 정춘수 등 6인이 포함되어 있어 충북지역이 일찌기 있었던 의병운동과 더불어 항일독립운동에도 주체적으로 앞장섰던 곳임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6인의 동상을 세웠으나 친일행적이 드러난 정춘수의 동상이 철거되어 현재 5인의 동상이 있다.)
바람이 매서웠다. 한살림 활동가들이 순례자로 함께 했다. 종교인모임 때문에 아침 일찍 전주에 간 도법스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공원근처 카페에서 이야기마당을 가졌다. 20대에서 50대까지의 활동가들과 은빛세대의 대화는 약간은 띄엄띄엄했다. 전쟁이니 한반도 평화니 통일이니 하는 주제들이 2-30대의 젊은이들에게는 대화주제로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터였다. 그 간극을 메워주는 것은 80년,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선배활동가들이다. 이야기를 경청하는 청년들도 진지한 자세도.
다시 삼일공원으로 올라가 순례시작.
청주를 비롯한 충북 각 지역에서의 삼일운동은 3월 중순부터 시작되어 4월까지 이어졌다.
청주농업학교 학생들, 면서기들, 무엇보다도 농민들의 참여가 높았다. 그리고 천도교도들의 활약. 청주의 석교동 시장, 북일면 등은 천도교도들이 만세운동을 벌였는데, 그 수가 수백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청주읍성 남문터를 향하여 걸었다. 날씨가 매우 추웠지만 남문터로 가는 길은 젊은이들이 많이 오갔다. 춥지만 봄은 이미 왔다는 듯 옷차림도 얼굴도 밝다. 성안길은 읍성의 남과 북을 연결해주던 큰 길. 일제 강점기에 둘레길이가 약 1.7km이던 청주읍성의 성벽이 다 헐렸고, 성안에 있던 관아와 병영시설들도 사라졌다. 현재는 표석들만 남아있다.
(청주읍성/남문터 사진)
마지막으로 순례자의 발걸음이 도착한 곳은 모충사다. 광무9년 10월, 동학농민군에게 희생된 관군을 위한 사당이다. 장교 3명과 병사 70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 그러나 관리가 부실해보여 마음이 쓰였다.
모충사라는 이름이 동학농민혁명의 정당성에 부정적 느낌을 준다고 하여 이 사당을 달갑지 않게 보는 이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꽤 많을 수 있겠다 싶다. 그렇다 해도 뒤틀린 문틀과 처마를 보면서 마음이 한없이 쓸쓸했다. 그 시절 관군은 누구였을까. 그 관군의 어미 아비 역시 농민이지 않았을까. 군에 지원했을 때 동족을 향해 칼과 활을 겨누겠다고 생각하고 병영에 들어온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인간의 선택은 그 선택 자체가 너무 극단적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 상황의 인간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만,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조건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