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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라(2012.2023.10.8)
잠24:15-22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구나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살면서 실패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간혹 실패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패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고 너무도 소중한 보화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체험 속에서 확신을 가지면 실패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실패를 경험 삼아 더욱 큰 성숙과 발전의 열매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성공의 사람들은 실패란 과정을 슬기롭게 잘 겪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실패 속에서 얻는 보화가 있습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실패는 내일의 성공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많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살지만 더욱 나약해져갑니다. 작은 실패와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좌절합니다. 특히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산다는 성도들조차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넘어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가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여러분 때로는 힘들고 지쳐 있는 인생들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말씀하시는 음성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등뒤에서 도우시면서 ‘일어나 걸으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다시 용기와 새 힘을 얻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특권이요, 믿음의 신비인줄 믿습니다.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실패 속에서 낙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실패 속에서 얻는 보화가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십시오. 완전주의자는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인간은 이 땅에 없습니다. 실패는 오히려 우리에게 좋은 스승이 됩니다. 성공적인 사람은 실패를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실패한 인생에게 중요한 처방을 내려주는데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귀한 능력과 진리를 붙들고 나가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악인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15절‘악한 사람아, 의인의 집을 노리지 말고, 그가 쉬는 곳을 헐지 말아라’ 했습니다. 살다가보면 신의를 저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간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의조차 내던지고 자기 잇속을 차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정말 정나미가 뚝 떨어집니다. 악인은 한마디로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입니다. 그들은 자기보다 강한 자들에게는 납작 엎드리지만, 자기보다 약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피라냐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습니다. 그들은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올라서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먹힐 수도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배려와 존중 혹은 연민은 약자들의 윤리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악인들은 의인들을 조롱하고 멸시합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런 삶이야말로 심판받은 삶이라고 말합니다. 요3:19-20절‘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악인들은 빛을 미워합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악인들에게 의인의 집을 노리거나, 그가 쉬는 것을 헐지 말라고 엄히 경계한 후에 툭 던지듯 말합니다. 16절‘의인은 일곱 번을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은 재앙을 만나면 망한다’ 대체 의인과 악인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의인은 하늘의 뜻을 자기 삶의 준거점으로 삼습니다.
구약의 지혜자는 놀라운 소망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6절‘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별칭입니다. 이 말씀은 의인이 쉽게 넘어진다거나 넘어져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들도 신앙생활 하다가 여러 가지 일로 인하여 넘어지고 자빠질 때가 있습니다. 넘어지신 분은 일어나시기를 축복합니다. 넘어지지 않은 사람은 언제든지 나에게도 넘어짐이 찾아올 수도 있으니 말씀 붙잡고 기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일곱 번 넘어져도 오늘 주시는 말씀으로 은혜받고 일어서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약성경에 꿈쟁이 요셉이라는 사람도 엄청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팔려가기도 하고 누명을 쓰기도 하고 옥에 갇히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사자굴과 풀무불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굳게 믿음을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의인은 잘 넘어지지 않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주를 붙들고 죄악의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하여 처신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의인은 이 세상에서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도 아닙니다. 의인도 사람인 이상 또 세상에서 사는 한 그런 장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넘어져 실수한 일이 있고, 성군이란 다윗도 넘어져 실수한 일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실수하여 넘어진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택함 받은 자라도 넘어지게 하려고 비상한 수단을 동원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넘어질 경우 악인의 경우 보다 충격이 훨씬 더 큽니다. 그 이유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 하다가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넘어졌다는 것은 자타가 함께 치명적인 수치로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지는 충격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이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반드시 다시 일어난다고 보증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유의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그리스도인은 항상 악한 자의 포위망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악한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마귀는 언제든지 노리고 있습니다. 15절‘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이 말씀은 엿보는 세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 ‘엿보다’(아라브)는 말은 ‘잠복하다. 숨어 기다리다’뜻으로 당당하게 보지 못하고 몰래 숨어서 은밀히 동태를 살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 목적은 의인을 해하고 의인의 집을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해하고 차지하려고 엿보는 원수가 있습니다. 사탄의 세력입니다. 사탄이 틈을 타면 아무리 의롭게 살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엡4:27절‘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벧전5:8절‘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틈을 찾습니다. 틈이란 어떤 약점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틈을 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틈을 주면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틈을 주면 시험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지혜를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사를 구해야 합니다. 질고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 큰 능력 받고 쓰임 받은 사람이 나이 많아져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좀 놔 주세요. 저도 나이가 많아졌어요. 이젠 좀 놔주세요’그런데 하나님께서 놔주셨는지 모르지만 옛날 그 근신은 사라지고 잘못된 일로 세간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울도 그런 기도했다가 ‘네 은혜가 족하도다 네가 약한데서 온전해 진다’는 주의 음성을 듣고 그만 두었지요. 그러므로 그런 기도 하지 마세요.
‘그가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여기 ‘헐다’(솨다드)는 말은 ‘파괴하다. 압박하다. 황폐하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원수가 거짓과 무력을 동원하여 의인을 집에서 끌어내고 부당한 방법으로 가진 것을 차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즘도 악인에게 잘못 걸려들었다가는 패가망신합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 특별히 쉬는 처소라고 한 것은 악인이 성도의 영육 간의 안식을 깨뜨리려 한다는 것을 암시한 말입니다. 의인에게도 혼란스런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믿는다고 다 평안합니까? 어려운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세상은 바람 부는 날 바다와 같은데 어떻게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또 쉬는 처소라는 말에는 의인은 쉬어야 한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의롭게 살려면 마음의 평안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환경이 평안하지만은 않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의롭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시련 안 주시면 내 믿음이 잠자고 썩기 때문에 경성하라고 주신 것이다. 다 나를 꺾으시고 바른 믿음에 서게 하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가 나옵니다. 그래야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어떤 가운데서도 믿음 지키고 나갈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은 의인을 향한 악한 계획을 멈춰야 합니다. 의인의 집과 그 쉼터를 노리는 자는 반드시 멸망하고 자기 꾀에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악한 자는 의인에게 행하려던 그 재앙을 자신이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승리를 얻습니다. 의인은 일곱 번 악인의 희생양이 되어도 결국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곱 번’이란 완전수로서 철저한 몰락을 의미합니다. 의인은 완전한 파멸과 죽음을 경험하였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계속하여 군대를 파송하며 몸소 군대를 지휘하여 다윗을 추격하며 포위 하였습니다. 삼상19:11절‘사울이 전령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고 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다윗은 자기 아내 미갈의 도움으로 창으로 내려와 살았습니다. 그 후에도 엔게디 굴속이나, 마온 광야 아비라, 마온 황무지 등에서 계속 하여 사울은 다윗을 추격하여 죽이려 했습니다(삼상 23:20~29).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사 그 난국의 위기를 면하게 되었으므로 오늘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은 보호하실줄 믿습니다.
오늘 이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포위하여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시56:6절‘그들이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발자취를 지켜보나이다’라고 한 그대로입니다. 시59:3-4절‘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를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내가 허물이 없으나 그들이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편 성도의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자들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2.그리스도인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결국 넘어지지 않고 일어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줄 아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잠24:16절‘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했습니다. ‘일곱 번’은 성경에 완전수입니다(잠3:31; 26:16; 창 4:24; 욥 5:19; 마18:22). 이것은 완전히 넘어진 상태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숨기면서 엄살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은 다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시37:24절‘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욥5:19절‘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잠14:32절‘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렘8:4절‘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과학적 이론 가운데 구심력과 원심력이 있습니다. 구심력은 어떤 물체가 원운동을 할 때 중심으로 쏠리는 힘을 말합니다. 원심력은 어떤 물체가 원운동을 할 때 구심력에 반대하여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힘을 말합니다. 마치 의인은 하나님의 의를 중심하고 일어나는 원심력과 구심력을 생각하게 합니다. 의인은 결코 망하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시37:25절‘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기 때문에 절대로 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43:2절‘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고 추격하던 애굽의 바로에게는 육지를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홍해에 수장시켜 버렸습니다.
16절‘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이것을 칠전팔기라고 합니다. 칠전팔기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뜻으로 여러 번 실패하여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고 분투하는 그 정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이 말이 최초에 잠언에서 나온 말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노래도 있지요--개구리 왕눈이 노래--
개구리 소년 개구리 소년, 네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단다
비바람 몰아쳐도 이겨내고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라
울지 말고 일어나 피리를 불어라
삘릴리 개굴개굴 삘릴릴리 삘릴리 개굴개굴 삘릴릴리 무지개 연못에 웃음꽃 핀다
의인에게는 궁극적인 구원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위대한 것은 예수님을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다시 회개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도 은혜였습니다. 눅22:31-32절‘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이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있었기에 베드로가 회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넘어졌다면 실망하지 말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의인은 계속적인 하나님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 사람 보기에 실패하고 넘어지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승리합니다. 악인은 의인의 망하는 것을 보려다가 결국 제가 망하고 맙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오십 규빗이 넘는 장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만 자신이 장대 위에 달리고 말았습니다. 인생의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칠전팔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택한 자는 타락해도 한 가지의 마음의 줄은 남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도 하나님의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없다 한 것입니다. 개미처럼, 개미집을 부수면 또 다시 짓고 부수면 또 다시 짓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에게 모두 칠전팔기의 은혜를 주셨으니 다시 일어나 원수 사탄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다윗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시34:19절‘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모든 고난에서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건지시나요. 하나님이 건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이나 고난에서 우리를 능히 건지실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내 뜻을 네게 이루기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신다.’ 그러므로 의인은 넘어져도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악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일시적 외형적으로는 악인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의인이 흥하고 악인은 망합니다. 시1:6절‘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했습니다. 여기‘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는 말씀은 ‘인정하다’(히. 야다. 알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알아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안다는 말은 그냥 안다는 말이 아니라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나서지 않아야 합니다. 스스로 나설 때 그것이 시험입니다.
롬12:19-21절‘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했습니다. 악한 이 세상 신자들이 믿음 지키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원수가 없을 수 없어요. 원수 사탄에서 시작하여 사건 사고에서 나를 해하려는 세력들이 존재할 수 있는데 원수조차도 없다는 말은 말도 안 된 말입니다. 원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말려들지 않아야 믿음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 건강도 지킬 수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살 수 없습니다.
3.그리스도인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입니다.
시34:19-20절‘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했습니다. 이것을 믿고 필요한 대응 외에 일일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감정에 휘말리면 의로운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했습니다(히4:15). 많은 시험 당하고 십자가에까지 달리셨지만 시험 들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며 기도하셨습니다. 백발은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했듯 계시록에 나타난 예수님의 머리털은 양털처럼 희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본받아 원수에게 틈을 주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이해하고 믿으며 칠전팔기하고 원수를 하나님께 맡기고 선한 싸움 싸우며 한 사람도 시험에 들지 않고 의로운 길을 가는 참된 성도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
17절‘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원수들이 망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즐거워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십니다. 아무리 원수일지라도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는 함께 아파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실패에 좋아하고 손뼉 치는 오만한 마음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별꼴을 다보며 사는게 인생입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런저런 이들과 얽힌 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관계가 엇갈릴 때도 있고, 견해 차이가 커서 갈등이 빚어질 때도 있습니다. 힘의 우열이 확연한 관계 속에서 무시당하고 모욕당할 때도 있습니다. 직장인들의 꿈 가운데 하나는 자기를 괴롭히는 상사에게 사표를 내던지며 시원하게 욕을 해주고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도 직장생활을 해봐서 압니다. 이해를 합니다. 그렇게도 나를 괴롭히던 사람이 갑자기 불행한 일을 만나면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살아보려고 애쓰다가 악한 자들에게 속절없이 이용당하거나 무시당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원수들이 받는 보응을 후련하게 느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를 너무 힘들게 했던 사람이 불행에 빠진 것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응어리진 것이 좀 풀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쩌자고 지혜자는 원수들이 넘어질 때 즐거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런 마음 자체가 우리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일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자기를 초월하는데서 발현됩니다. 불의한 자들과 싸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라지기를 바라거나 그들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그들이 불의한 행실을 버리고 참 사람의 길로 접어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가 원수의 넘어짐을 즐거워하거나 기뻐하지 말아야 할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조차 하나님이 내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어긋난 길로 가고 있는 이들 때문에 애태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들의 불행을 바랄 때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십니다.
18절‘그러면 여호와께서 보고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 진노를 네게로 돌이키실지 모른다’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향해 진노하실 때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면 그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민들의 원수가 망할 때에 하나님의 영화가 드러나는 것을 보고 영적 기쁨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서 해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자기 원수가 멸망하는 것을 보고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심정이었습니다. 사울이 죽었을 때 다윗은 슬퍼했습니다. 시35:13-14절‘나는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며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 같이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은 결코 어떤 개인의 만족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그러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원리입니다.
요즘 새벽기도 시간에 오바댜를 하고 있는데 주전 6세기의 예언자인 오바댜는 에돔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엄중하게 예고했습니다. 에돔의 죄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침공을 받았을 때 에돔은 자기들과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침략자들의 폭력을 방관했을 뿐만 아니라, 유다 자손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운 비명을 질렀습니다.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들이 사이좋게 지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타국의 불행을 기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마음은 정직하게 말하면 병든 마음입니다.
오바댜는 에돔의 죄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옵1:12절‘네 형제의 날, 그가 재앙을 받던 날에, 너는 방관하지 않았어야 했다. 유다 자손이 몰락하던 그 날, 너는 그들을 보면서 기뻐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받던 그 날, 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지 않았어야 했다’ 방관하거나 조롱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은 무방비 상태에 놓인 이스라엘의 남부 성읍들을 약탈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옵1:15절‘네가 한 대로 당할 것이다. 네가 준 것을 네가 도로 받을 것이다’ 세상은 점점 에돔을 닮아갑니다.
지혜자의 말을 더 들어볼까요. 그는 악을 행하는 자 때문에 분개하지도 말고, 악인을 시기하지도 말라고 가르칩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분노할 줄 모르는 신앙처럼 무력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옭죄고 있는 성전체제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종교를 겉꾸미는 일로 바꿔놓은 세태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셨습니다. 강자들의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분노는 자기 파괴적이지도 않았고 다른 이들을 파괴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 속에서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돕기 위한 분노였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 때문에 분개하지 말라는 말은 분노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런 이들의 존재 때문에 속을 끓이다가 스스로 소진되지 말라는 말일 겁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고 부러워하지 않는 심정을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19-20절‘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악자에겐 미래가 없으며 불행 속으로 넘어져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잠깐의 악인의 형통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시험에 들지 말고 여러 환난을 만나 여러 번 넘어질지라도 마침내 다시 일으킴을 받는 의인의 길을 담대히 걸어가야 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고 부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잠24:19-20절‘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했습니다. 악인들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다닐지라도 오히려 성도들보다 세상의 명예와 물질을 마음대로 취하면서 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때 그 누구든지 분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은 악한 자의 하나님이냐고 탄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분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악인의 형통은 등불처럼 꺼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본문 말씀에는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욥20:5절‘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욥21:17-18절‘악인의 등불이 꺼짐과 재앙이 그들에게 닥침과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하게 하심이 몇 번인가.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같이 폭풍에 날러가는 겨 같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악인의 결국은 재앙으로 엎드러진다고 하셨습니다. 엎드러진다는 말은 그의 인생이 그 재앙으로 마감한다는 뜻입니다. 악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손길은 자비나 사랑이나 긍휼인 것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재앙이란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을 의미합니다. 사40:10절‘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에게는 상급이 따르고 악인에게는 보응이 따르는 것입니다. 렘17:10절에서 이르시기를 ‘하나님은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인간은 이 하나님의 심판의 보응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당하시는 고난이나 환난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으로 재앙을 만나게 하신 일도 아니며 엎드려지게 하신 일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한 역사이십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이 일곱 번 넘어져도 하나님은 다시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어떤 고난 중에도 소망을 잃지 마시고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여호와와 왕을 반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1-22절‘여호와’와 ‘왕’이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참된 정의와 은총을 시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잠언 곳곳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의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적법하게 대행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반역자들은 하나님과 왕의 정당한 권위에 굴복하지 않으며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재앙이 속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 반역자는 정치적으로 왕을 모반하는 역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숭배자, 무신론자를 말합니다.
여기‘반역자’란 말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딴 길로 가는 자’,‘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혹은 ‘왕의 생각과 다르게 생각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결코 축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한 자와 더불어 사귀지 않습니다. 시1:1절‘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는 모두 불신앙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인의 집은 일어나고 맙니다. 결국 악인의 집은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고 갈등하는 마음을 이제는 우리 스스로 그만해야 합니다. 옛 속담에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는가하면 삼대(三大) 거지 없고 삼대 부자(富者) 혹은 정승(政丞)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계속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옛 사람들은 이런 속담을 주고받으면서 어려운 처지를 극복하는 지혜로 삼았습니다. 시73:27-28절‘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리면 교회와 가까이 하고 자기 직분과 가까이 하고 목사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악한 자가 의인을 방해하려고 노려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의인은 넘어짐이 없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고 했습니다(잠 28:1).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했습니다(시 1:6).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본다고 했습니다(잠 29:16). 우리가 악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의인의 집은 다시 일어납니다.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계속해서 선을 행하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히10:38절‘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악인의 포위망 속에서 일어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선으로 악을 이깁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일어나는 법이 없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일어나는 법이 없다면 이 세상 역사는 존재의의가 없습니다. 악인 천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일어나는 이 한 가지가 역사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인이 무덤에서 부활하는 그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요셉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권능이 바벨론 천지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일어나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었습니다.
지금 의인의 등불은 가물거리고 악인의 등불은 휘황하다고 하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등불은 꺼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늘 새 일을 시작하고 계심을 신뢰하십시오. ‘로완 윌리엄스’는 믿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설명해줍니다.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도 그들이 있는 그 세계에 들어가 살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아는 것을 나도 알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마시는 샘에서 같은 샘물을 마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결단하는 것입니다.‘그들’은 우리보다 앞서 진리의 길을 걸었던 이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들이 마시는 샘에서 우리도 같은 샘물을 마셔야 합니다. 진리의 샘물, 사랑의 샘물, 평화의 샘물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그처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던 이들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히11:33-34절‘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정복하고, 정의를 실천하고, 약속된 것을 받고, 사자의 입을 막고, 불의 위력을 꺾고, 칼날을 피하고, 약한 데서 강해지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고,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은 병든 세상을 고치자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투덜거리지만 말고 작은 등불 하나라도 밝혀 들어야 합니다. 지금 뙤약볕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작은 그늘이라도 드리워주어야 합니다.
목마른 이들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이라도 건네주어야 합니다. 이 작은 소명에 충실할 때 우리 삶의 비애는 줄어들 것이고, 하늘 빛이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유입될 것입니다. 이 소망으로 기뻐하며 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일어남을 믿고, 세상과 사탄의 세력과 자신의 삶에서 승리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