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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파동 전본부교회 중심한 내적기반
1) 청파동 전본부교회 정착
1955년 10월 4일, 참아버님의 서대문 형무소 옥고 승리 출감 후 식구들은 다시 생기를 얻었다. 7일에 본부교회를 중구 장충동 1가 37번지에서 용산구(龍山區) 청파동(靑坡洞) 1가 71-3으로 이전했다. 참아버님께서 나오시자 5일에 곧 보시고 매입을 결정해 계약하고 이날 전격적으로 옮겼다. 장충동교회 전세비 2백만 원으로 옛 절간(‘절’의 俗語)인 일본인 적산가옥 목조 2층 건물을 매입해 협회 소유 건물로는 첫 정착지가 마련된 것이다. 새까만 집을 양잿물로 닦고 청소하고 수리해서 새롭게 단정했다.(430)
10월 10일 오후 6시부터 2층에서 참아버님 출감 및 본부교회 성전입당 환영 화동회가 열렸다. 참아버님께서는 자루를 끌고 다니며 튀밥과 사과를 일일이 나눠 주시고 격려하셨다. 가장 값싸고도 풍부한 선물이었다.(430)
교회구조는, 서쪽으로 좁은 출입통로가 있었고, 1층은 남북향으로 난 중앙복도가 강당과 내실을 가르고 있었다. 참아버님 방은 2층 구석진 쪽 서북 양면이 미닫이로 막힌 허술한 단칸방이었다. 거실 주변에 미닫이 벽으로 된 제자들 방 4개가 있었으며, 1,2층 다른 방은 상담실 및 직원숙소로 썼다.(431)
참부모님께서는 1966년 1월 1일, 청파동 본부교회를 세계 40개 국 120개 성지의 중앙성지로 택정하셨다. 그 후 1977년 7월 1일 청파동 2가 9-1, 현 본부교회 신축 헌당 후에 그간 구(舊)본부교회, 청파수련소 등으로 불려온 옛 본부교회 고유 명칭을 ‘전본부교회(前本部敎會)’로 확정해 주셨다. 이는 1981년 10월 20일부 협회 공문을 통해 공식 발표됐다.(432)
아버님의 말씀에 근거해 이 유서 깊은 청파동 전본부교회의 의미와 그 가치를 상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용산구(龍山區) 청파동(靑坡洞)’은 ‘최고 높은 산 푸른 언덕’으로, ‘피안(彼岸)의 이상세계를 향해 푸른 소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의 의미이다. 1가는 첫째, 71-3은 완성수 70 위에서 하나님 중심한 사위기대가 출발한다는 뜻으로서, 그 출발의 터전이 전본부교회이다.(432)
참아버님께서는 ‘여기에서 원한에 사무친 원수를 갚는다. 채찍을 쥐고 치던 무리를 굴복시킨다. 몰아내던 무리를 몰리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신념을 갖고 나오셨다. 토굴같이 지극히 작고 보잘것없는 집에 살면서도 세계를 주도할 꿈을 갖고 세상 구원의 터전을 넓혀 나오셨다.(432)
비참하고 초라한 이곳을 바라보시며 6천년의 한을 풀겠다고 나오신 하나님이 불쌍하고, 그런 참아버님 자신을 보면 눈물이 고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협소(狹小)하고 불편한 공간은 비참한 처지의 민족만이 갖는 진실된 재산이요 탕감복귀할 수 있는 재료라고 여기셨다. 장래 다가올 시련의 실전장(實戰場)에서 승자가 되게 하시려고 식구들을 고된 연단(鍊鍛)으로 무장시키셨다.(433)
이곳은 피어린 눈물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하늘땅과 뭇사람들이 심정을 털어놓고 통곡한 제단이며 피를 뿌려 몸부림치며 호소하던 자리이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곡절로 인연된 눈물자국이 어려 있는 거룩한 제단이다. 청파동 골목길을 거치면서 흐느껴 눈물로 얼룩진 걸음을 걸어야 하고, 문밖에서부터 눈물 흘리며 들어와야 할 집이다.(433)
마루에 엎드려 기도할 때, 이 자리가 아버지께서 천년만년 고대하던 소원의 터전이라는 것을 느껴야 한다. 뼛골이 울려나고 피살이 인연된 심정으로 일신(一身)의 모든 의식을 잊고 눈물만으로 시작해 눈물로 끝낼 수 없는 슬픔이 자신을 점령하고 자기 환경을 잊고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433)
또 전본부교회는 참부모님 성혼식과 4대 명절 제정, 참자녀님 탄생, 36가정ㆍ72가정 축복식 등을 거친 역사적 인연의 기원지이다. 바위굴이든 산등성이든 생수가 솟아나면 문화의 발상지, 역사의 기원지가 될 수 있다. 그렇듯이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목마른 사람이 찾아오게 될 정성과 심정의 샘터이다. 역사가 소생했고 세계의 시금석(試金石)이 생겨난 발원지이다.(433)
기도할 때는 역사적인 전통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본부교회에 대한 방향을 갖춰 자기 소속을 밝히고 해야 한다. 중요한 기도일수록 여기서 하는 것과 같은 심정이 돼야 한다. 본부교회가 지나온 역사적인 인연과 배후를 더듬어서 눈물어린 심정의 친구가 되는 자리에 하나님이 같이 하신다는 것이다.(433)
전본부교회는 세계에서 둘도 없는 가치의 성물(聖物)이며 명승지이다. 뒷마루까지도 모든 사람들이 거룩히 우러러 볼 수 있는, 어느 고층건물의 호화찬란한 자리보다 귀하다. 먼지 하나, 공기까지도 세계의 무엇보다도 무한한 가치를 지녔다. 몇 억 달러를 준다 해도 하룻밤을 함부로 잘 수 없는 때가 온다. 세계 곳곳의 뜻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자리를 역사적인 내용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알고 그리워하며 찾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개조해서는 안 되며, 개조한 부분은 원상태로 복원해놔야 한다고 하셨다.(434)
참아버님께서는 이곳의 기둥이나 문짝을 보시면 나라가 반대하던 상황과 눈물 흘렸던 깊은 사연의 역사가 회상돼 통곡이 나온다고 하신다. 역사적인 유물은 부족할수록 전통과 가치와 인연이 빛난다. 이곳의 외양은 비록 초라해도 역사의 심정이 통하는 곳, 향수 젖은 본고장이요 역사적 자료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전당(殿堂)으로서 원형을 남겨야 한다.(434)
1955년 10월 16일 서울교회 유년주일학교가 개교됐다. 교장 이소담 씨 주도로 10 명 이내의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2층 좁은 방에서 집회하곤 했다. 참아버님의 관심어린 지도 아래 이소담 씨는 이후 10년 가까이 교장을 맡았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주일학교 어린이 노래」를 지었는데, 후일 『성가』에 들었다. 23일에는 중ㆍ고등부 성화학생회가 각각 결성됐다. 지도부장은 김원필 씨, 지도위원은 이진태 씨였다. 대학교수 및 대학생 중심한 활동이 핍박으로 일단 추춤해지면서 유년과 초ㆍ중ㆍ고생 중심한 활동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0월 중에 성화청년회 사업부에서 크리스마스카드를 그려 팔았다.(434)
12월 24일에 모인 청년회원 약 50명이 25일 참아버님을 모시고 전차길을 따라 찬송가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했다. 이어서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해 구내방송을 통해 「동산의 노래」와 크리스마스 캐널을 전했다. 그리고 형무소 측의 특별청원(請願)으로 참아버님께서 장신간 눈물의 기도를 올리셨다. 이날 예배 시간에 7ㆍ4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김원필 씨가 특사(特赦)로 석방돼 귀교(歸敎)해 식구들이 모두 울음으로 환영했다. 예배 후에는 참아버님을 모시고 효창공원으로 나가 기념사진을 찍고 노래를 하는 등 위로의 시간을 가졌다.(435)
2) 내부 수습과 안정 도모
1956년은 외형상 모처럼 가진, 그리고 뜻 성사 이전엔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조용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신앙 열의나 예배, 원리강의 실시 등 실질적인 신앙생활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열렬하고 자발적이고 행복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참아버님께서는 잠바차림으로 예배를 집례(集禮)하셨다. 좁은 예배당이긴 하나 예배 때면 밤낮없이 꽉꽉 찼었다. 그중 10여 명의 대학교수들을 포함한 지적 수준이 높은 청년 대학생들이 태반(太半)을 차지하고 있었다. 1956년 상반기 식구 수는 대략 3백 명가량 됐다.(436)
원리강의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교회 2층에 마련된 강의실에서 유효원 협회장이 맡아 했다. 언제나 10명 내지 30명 가량의 청강자들이 있었으며, 이틀이면 원리의 전 코스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전도활동은 거의 자연발동(自然發動)적인 시스템에 의해 행해졌다. 이해부터 서울 일원을 약 5개 구역으로 갈라서 금요속회(金曜屬會)를 실시하고, 지도적인 위치의 선배식구들이 각각 인도케 했다.(436)
1955년 크리스마스 때 이임복 씨 주동으로 청년회 사업부에서 카드를 그려 팔아 약간의 활동기금을 마련했었다. 그런데 이 해 들어 이진태 사업부장 주도 하에 대대적이고 전국적인 우표수집운동을 전개해 적지 않은 기금을 마련했다.(437)
1956년 연초, 광림교회 속장(屬長)으로서 신앙 열이 높았던 강경렬(姜慶烈) 씨가 들어왔다. 지난해 말 유경규 씨의 인도를 받은 이화여중생인 딸 문수자 씨 권유로 전본부교회에서 원리강의를 듣고 입교한 것이다. 강씨는 이정수, 민경식, 안예경, 허일금, 유혜숙 씨 등 수십 명의 중심 권사, 집사들을 인솔해 들어왔다. 자택에서 예배를 갖고 최용석 강사 등을 초빙해 강의를 듣기도 했다. 강씨는 운영하던 포목상(布木商)까지 처분하고 헌금과 전도에 몰두했다. 또 여러 지방교회 부흥회에서 놀라운 불의 역사를 주도하며 전도바람을 일으켰다. 집안의 핍박에 못 이겨 결국 큰아들은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큰딸은 가정교사로, 둘째딸은 양녀로, 막내아들은 고아원으로 보내 놓고 뜻 일선에서 헌신했던 것이다.(437)
충현동의 양윤영 교수는 교회가 청파동으로 옮겨간 후 외로움으로 잠 못 이루는 나날이었다. 그러던 중 밤을 새우며 하늘을 사모하는 심정이 극에 달해 2개월간 심혈(心血)을 기울인 끝에 1956년 1월 15일 「맹세」(성가 13장)라는 노래를 지었다. 7ㆍ4사건 후 내심 멀어질 수 있는 마음을 달래며 스스로 뜻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마음으로 지은 노래이다. 2월 17일 참아버님 탄신일에 독창을 했고, 이후 4년간 탄식축가로 독창을 하다가 1961년에 『성가』에 편입됐다. 참아버님께서는 지방식구들이 이 노래로 많은 감명을 받았다는 말을 들으시고, “양윤영 일대(一代)의 역작(力作)”이라고 칭찬하신 적도 있었다.(437)
양 교수는 이외로도 참아버님께서 1959년 제1회 전국전도사수련회 때 지으신 「원리용사가」(9장)에 곡을 붙였으며,「찾아진 영광」,「고난의 예수」, 영광의 날」,「놀라우신(놀라운) 그 사랑」,「사랑의 봄 동산」등의 성가를 영계인도와 계시로 지었다. 늘 청아하고 아름다운 음성의 노래로써 외롭고 힘겨운 자리에 계신 참아버님께 큰 위로와 기쁨과 영광을 드렸다. 한평생 교회음악 분야에서도 공헌한 축복받은 예술인이었다.(438)
1956년 4월 1일을 기해 성화청년회가 대학생이 아닌 일반청년 식구들도 합해 활동을 강화하기로 했다. 또 음악부를 신설하고 부장(유효민)을 임명했으며, 황환채 씨의 이경(離京)으로 한동안 공석인 조직부장에 김원필 씨를 보임(補任)했다. 그 후 6월 16일에는 전도부장 유경규 씨가 원주교회 전도사로 파견돼 최용석 씨가 직무를 대리했다. 11월 21일에 김영휘 씨가 전도부장에 정식 보임됐으며, 수일 전 춘천교회 전도사로 파송된 사업부장 이진태 씨 후임으로 정수원 씨가 선임됐다.(438)
1956년 2월 12일, 제2차 협회원리시험이 67명이 응시한 가운데 실시됐다. 2월 17일 탄신일에 합격자 16명(남자5명, 여자11명)이 발표됐으며, (중략) 전도상(이신덕)과 공로상(조동석) 수상자가 탄생했다.
4월 8일에는 이인길 씨가 녹음기를 가져와 지난해 4월 7일 이북공판기념일의 원리시험 발표 및 시상식 상황 녹음을 듣고 감격했다. 유 협회장 등은 모든 말씀을 녹취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고, 이날 주일예배 설교말씀(‘승리한 하늘의 정병이 되자’)을 녹음했다. 이후 말씀 녹취작업이 이뤄졌고, 그로 인해 후일 편찬된 참아버님 말씀선집은 이날 말씀부터 수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439)
4월 17일 재경식구 152명이 참아버님을 모시고 서울교외 우이동(牛耳洞) 유원지에 나가 부활절 기념예배를 가졌다. 27일부터 5월 10일까지는 대구, 부산 등지를 순회하셨다. 부산교회 순회 중 특히 박정민(朴正敏) 씨가 말씀에 감화돼 입교했다. 박씨는 친척들을 많이 전도해 와 큰 힘이 됐는데, 그 후 딸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헌신하며 전도에 열중했다. 30일에는 전주 순회를 떠나 6월 4일 귀환하셨다.(439)
6월 7일에는 성주교(聖主敎) 정석천 씨가 협회에 헌납한 서진광산 사업이 출발을 봤다. 11일에 그 가족이 참아버님의 뜻에 따라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전본부교회에서 가까운 동자동(東子洞)에 전세를 얻어 참아버님을 매일이다시피 모시면서 뜻길에 헌신했다. 이 무렵 참아버님의 종제 문용선, 용기, 용현 3형제가 입교하면서 충난 아산군 인주면 대음 2리 145-4 소재 토기공장을 천주교회로부터 인수해 경영했다. 정석천 씨는 자금을 마련하는 등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이때 종사하는 식구들이 모여 예배를 갖고 인주교회 창립을 봤다. 정씨는 이후 초창기 경제사업 분야에서 여러모로 기여했다.(439)
6월 22일엔 여호수아 맥케이브 목사가 내한(來韓)해 9월 12일 귀환(歸還)했다. 김상철 씨가 1954년 8월부터 정부 발탁(拔擢)으로 영국에서 2년간 연구활동을 하던 중 인연된 세계사도교회의 호주 극동(極東)선교본부 대표로 온 영국인 맥케이브 목사는 당시 식구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줬다. 80일간 원리공부와 집회참석 등을 통해 깊은 이해를 가졌으나, 이후 교리상 상충(相衝)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는 성가 「주는 나의 전부라」와「생명수 마시네」를 소개하고 떠나갔다.(440)
7월 4일은 7ㆍ4수난 1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이날 원리시험 80점 이상 합격자를 발표했다. 서울 1백 명, 대구 13명, 부산 7명, 전주 5명, 무주 1명 등 총 134명이 응시했는데, 이중 서울 28명, 부산 2명, 대구 2명, 전주 1명 등 총 33명이 합격했다. 이날 중고등학생 중 원리시험성적 우수자 2명(고등부 최영자, 중등부 유수경)에 대한 표창이 있었다. 또 부인식구 2명(강경렬, 조정희)에 대한 전도상 시상도 있었다.(441)
7월부터 성화청년회 사업부 주도하에 전 식구가 동참한 소인(消印)된 우표 수집 판매사업에 주력했다. 이 사업은 이후 1960년대 전반기까지 10년간 계속 추진됐다. 매년 2월경의 참아버님 탄신기념행사 때는 우표전시회를 개최하고 성적 우수 교회와 개인을 표창하곤 했다. 당시 편지봉투엔 40장 이상의 우표를 뒷면까지 붙여 보냈고 덕분에 식구 간 심정의 편지가 오갔다. 미국 스탬프지에도 게재돼 주목받았다.(441)
참아버님께서는 7월 31일부터 전주, 군산 등을 순회하시고 8월 18일 귀경하셨다.(441)
9월 25일에 김상철 선교사와 여호수아 맥케이브 목사 협조 하에 김영운 교수 집필로 영문판 원리 책 『The Divine Principle』이 발행됐다. 이는 한국어판 『원리해설』발행보다 1년이나 앞선 행사였다. 7백 권을 인쇄해 세계기독교단체와 유명학자들에게 배포(配布)했고, 맥케이브 목사도 10권을 미리 가져갔다.(442)
9월 14일 한강 백사장에서 이북출감 6주년 기념 주일예배를 38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저녁까지 가졌으며, 이날 성화장년회가 결성됐다. 이어 21일 주일예배 후 장년회 창립총회가 있었고, 22일에는 성화중고등부 창립기념식이 있었다.(442)
이렇듯 협회 창립 초기에는 참아버님께서 식구들을 이끌고 서울교외의 산을 오르내리시는 등산훈련을 자주 하셨다. 이 모든 등산과 야외집회는 예외 없이 모두 참아버님께서 친히 인솔하시고 주재하시는 가운데 실시했다.(443)
협회의 기관지이자 성화청년회 문화부에서 발행한 등사판 「성화」는 프린트 글씨를 써서 밀기도 하고 타자인쇄를 하기도 했다. 1957년 말까지 띄엄띄엄 계속해 나온 16호에 이르기까지 그 편집은 부원들의 협조 아래 유광렬 부장이 전담했다. 인쇄는 앞뒤 몇 호를 제외한 대부분을 신흥균 씨가 가내용(家內用) 수동윤전기로써 했다.(443)
3) 초기 지방교회 개척
초창기에는 부산, 대구, 서울 교회에 이어 협회가 창립되던 해 1954년에 경북 경산군의 노변(蘆邊)교회가 창립됐다. 대구교회의 이기용 장로가 이웃의 식구 몇 명을 인도해 시작했다. 뒤이어 1954년 겨울에 전북의 무주(茂朱)교회가 설립됐다. 당시 중심인물은 부산 범냇골 토담집 시절 교분을 가진 송기주 씨의 친척 김정락(金鼎洛) 씨라는 30대 청년이었다.(444)
1955년 12월 25일엔 전북 정읍의 망담(望潭)교회가 설립됐다. 이 교회는 그해 가을에 서울에서 입교한 유종영 씨가 즉각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앞뒤 가릴 것 없이 저돌적으로 개척해서 설립한 것이다. 12월 15일 도착해 10일 후에 작으나마 교회를 발족했던 것이다.(444)
1956년 1월 29일엔 강원 춘천교회가 설립됐다. 1955년 3월에 입교한 춘천의 남궁철 씨가 홍순애 대모님과 참어머님의 입교를 계기로 춘천시 약사동 대모님 자택에서 이날 주일예배를 드림으로써 설립을 본 것이다. 한두 달 만에 교회는 인도자인 남궁철 씨의 운교동 자택으로 옮겼다.(444)
한편, 전주는 1955년 여름 7ㆍ4사건 대수난기 전후로 전도된 박헌휘 씨 부부가 서울 본부교회에 왕래하면서 신앙을 키우는 한편 강순길 씨 등 몇 사람을 전도했다. 그러다가 1956년 4월 초 한충화 씨가 정식 인도자로 파송됐다. 그래서 4월 4일 전주시 중앙동의 박헌휘 씨 댁에서 박씨 부부와 강순길, 이정옥 씨 등 몇 사람이 모여 예배하고 원리말씀을 들음으로써 전주교회가 발족되기에 이르렀다.(445)
원주교회는 1955년 3월 1일 입교한 최정순 씨가 곧바로 어린 자녀들(문순영, 문난영)과 가까운 친지들을 전도했다. 그런 가운데 주위로부터의 형용할 수 없는 핍박을 감수해 가며 자유로운 전도활동을 위해 1956년 여름 원주시 원동 산 5번지에 자택 겸 예배소로서의 건물을 세웠다. 이 성전이 완공될 무렵 부임해 초대전도사 유경규 씨가 1956년 6월 16일 도착해 17일 첫 예배를 인도했는데, 이날을 공식 창립일로 했다.(445)
충남 대전교회도 1956년 6월 강현실 전도사가 파송돼 나가 정식으로 교회를 창립했다. 처음엔 전도가 너무 안 돼 대전 시내를 일곱 바퀴씩 돌면서 기도하며 정성들였는데,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실감하며 극복했다고 한다.(445)
본부교회는 1955년 수난의 흔적을 씻고 부흥했다. 특히 인물 면에서 크게 풍성함을 나타냈다. 남녀 대학생 중심의 청년층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수준 높은 부인식구들이 많이 입교했다. 장년층에는 기라성 같은 저명지식인들이 들어와 보기만 해도 가슴 뿌듯함을 느낄 정도였다. 전(前)민의원인 건국대 교수 김정실, 건국대 교수 이대위, 전 농림부장관 김산, 국회의원 김영선, 건국대 교수 김건 씨 등이 조석으로 출입해 활기에 넘쳤다. 11월 중순엔 당시 한국일보 기자였던 장영창 씨가 입교했다.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군산의 이상헌, 부산의 송병호, 장흥의 유충택, 전주의 엄유섭, 청도의 김종삼(金鍾三) 씨(후명 金鍾新 목사) 등이 속속 입교해 전체적으로 발전하는 교세 위에 더 한층 힘을 보태고 있었다.(446)
가장 일찍 세워진 교회 중 하나인 무주교회(인도자 김정락)는 헌집을 사서 형편껏 교회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 건물이 무너져 산등성이에 자리를 펴거나 불을 밝히면서 예배를 드렸다. 1956년 4월엔 위급환자 40여 명을 치료해 성인 3백여 명, 일요학생 3백여 명, 중학생 백여 명이 모인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렇듯 성세를 보이던 폭발적 은혜역사 위에 건실한 매듭을 맺게 하려는 큰 신앙적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446)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선단리(仙壇里)교회는 꽤 드러나게 유명한 교회였다. 당초 1956년 늦봄부터 선단리의 정(鄭)마리아 속장이라는 중년부인이 식구가 돼 혼자 서울 본부교회에 왕래했다. 그러다가 8월 20일부터 1주간 심령대부흥회를 열어 성공함으로써 획기적인 발전의 기틀을 잡았다. 원래 그곳은 군부대 안에 유별나게 신앙적인 야전병원 군인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정(鄭) 속장이 그 핵심간부들과 연락이 닿아 서울 본부 부인회의 강경렬, 조정희 식구를 강사로 초청해 부흥집회를 열었다. 그래서 군인 70명을 포함한 백여 명의 회중이 크게 은혜를 받고 교회를 설립하게 됐다. 동시에 교회의 중심인물인 현역군인 김순겸, 조영수, 신명복 3인조가 몽땅 입교해 오랜만에 낭보가 전해졌다.(446)
전주교회(인도자 한충화)는 여름방학 때 최창림(최용석) 씨가 가서 원리강의를 도왔다. 그리고 엄유섭, 김윤호, 한형수, 김명득 등 유력한 청년들이 대거 입교해 크게 활기를 띠게 됐다. 1956년 11월 들어 선북(宣北)동에 성전을 새로 마련해 옮김으로써 새출발의 기틀을 갖췄다. 한편 1955년 정읍의 망담교회를 세운 유종영 씨는 1956년 서울에서 응원 내려온 정찬성 전도사와 한인수 씨와 힘을 합해 교회 발전을 이룩한 뒤 월성교회의 기초를 잡았다. 이어서 가을 들어 정읍(井邑)교회를 설립했다.(447)
춘천교회의 남궁철 씨는 고군분투하던 중 유영희 씨의 협조를 받아 활기를 띠었고, 11월 중순 이진태 씨가 새 인도자로 부임한 후 춘천여고 우등생급 10명과 수명의 농대생이 입교함으로써 비약적 발전을 가져왔다. 경북의 안동교회는 이경환 씨가 뿌리가 되고, 김경순 씨가 전도에 열성을 다해서 완전히 기반을 닦았다. 경기도 고양의 원당교회는 김희옥 권사 중심으로 이해영 씨와 한관복 씨 등 세 부인식구가 단합해 맨손으로 일으켰다. 강경렬 속장의 심령부흥 협조와 안예경 권사의 천막기증 등 물질적인 협조 등이 보태져 성전을 마련해 기반을 닦았다.(447)
평양식구인 차상순 씨는 원래 전도사로서 1954년 가을부터 경기도 화성 야목(野牧)의 감리교회를 맡아 시무했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원리를 새롭게 듣고 뜻길을 재출발한 후 음성적으로 교인들에게 원리를 중심한 뜻을 주입해 왔는데, 1955년 4월 1일 드디어 이를 양성화했다. 1955년 말에 강현실, 강경렬 씨 등이 전도 조력을 하면서 백여 명이 거의 불을 받고 계시를 받았다. 이듬해 1956년 12월 3일부터 한 주간에 걸쳐 이요한 목사, 강경렬 씨, 김순겸 씨를 초정해 심령부흥회를 개최함으로써 더욱 확고히 교회기반을 굳혔다.(447)
수원교회도 야목교회에서 입교한 조옥순, 윤복례 씨가 자원해 김복순, 김탄실 자매와 그 어머니를 전도했다. 윤복례의 동생 윤준식 씨가 수원농고를 다니며 전도와 강의를 했다. 경북 청도에서는 김종삼 목사가 들어와 김종신으로 개명하고 대한기독교협신회라는 신앙단체를 조직해 초교파운동을 전개했다. 한때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448)
김포교회는 오시환 씨가 서울에 올라가서 원리를 듣고 입교했다. 그 가정을 중심으로 10월에 강응두, 김인배 두 청년이 내려와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교회를 설립하고 귀경했고, 12월에 최창림(최용석) 씨가 인도자로 부임해 많은 청년들을 인도함으로써 확고한 기반을 닦았다. 안양교회는 여름부터 서울의 최윤화 씨가 오르내리면서 식구들을 얻었다.(448)
4) 내적 결속과 확충
1957년도는 기구조직이나 외적 형식면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반면 전도활동이나 내실 확충 등 실질적인 면에 주력한 것이 특징이었다. 1957년 1월 2일 청년회 주최 성탄전야 문화의 밤 행사가 4백여 명 식구 참석 하에 개최됐다. 본부교회 부인회가 임원을 개선하고 박봉애 씨를 새 회장으로 선임했다. 2월 5일은 참아버님 37주년 탄신일이었다. 며칠 전부터 상경한 지방 식구 69명을 포함해 식구들이 가득 모인 가운데 0시부터 6시 반까지 노래 등으로 경축의 시간을 가졌다.(449)
그간 4차에 걸쳐 총 71명의 원리졸업자가 배출됐으며, 차수별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원리졸업생 제도는 이를 마지막으로 이후 중단되고 말았다.
3월 22일부터 4월 11일까지 21일간 최창림(용석) 씨 주도로 ‘김포성화청년들의 원리무장을 위한 특별훈련’이 개최됐다. 이 수련회 형식은 그로부터 2년 후 협회공식 교육제도에 그대로 반영돼 전국적 수련회의 선구적 시범이 됐다.(450)
2월 24일 성화청년회 전도부에서 참아버님 설교말씀을 청취 또는 녹취해 등사판 「설교말씀」제1호를 발행했다. 그리고 이 해 4월 6일에 장영창 씨의 간증 겸 입교보고서인 『통일교회의 正體』가 출간되기도 했다. 이 무렵 주일예배는 480여 명(3월 24일), 450(6월 23일)까지 참석하고 있었다. 참아버님께서는 간간이 서울시내 금요속회를 주재하셨다.(450)
5월 21일엔 북한산예술학원을 방문해 말씀하셨다. 이 학원은 이화여전 음악과 출신 김선옥 여사가 정릉 어귀의 배밭 한가운데 몇 채의 집을 짓고 운영한 고아원 겸 특수학원이었다. 10세 전후 소년소녀들 2백여 명을 모아 피아노 위주로 여러 가지 기악공부와 합창지도를 하고 있었다. 1957년에서 1958년 전반기에 뜻과 연결돼, 원장 이하 원생 전원이 교회예배에 나오고, 교회 측에서도 자주 찾아가 예배인도와 그 경영일부를 돕기도 했다. 그러나 경영 현실과 관련해 결국 가톨릭기관으로 귀속되고 말았다.(451)
6월 2일 참아버님께서 삼위기대에 관해 말씀하신 후, 9일 주일예배 후 삼위기대를 조성해 주셨다. 6월 28일에는 전주의 이정옥 씨가 지난해 주신 참아버님 말씀에 따라 가산을 정리해 상경했다. 동대문의 이신실 씨 집에 기거한 지 두 달 후 전본부교회 바로 앞의 65평 한옥 기와집을 사서 입주했다. 생활형편이 어려웠던 시절 어느 식구든 들러서 먹고 쉴 수 있도록 개방했다. 이 무렵 참아버님께서는 최원복, 이득삼 씨와 삼위기대를 맺어주시어 한 마음으로 뜻을 받들며 참아버님을 모셨다. 이 집은 1960년에 헐리고, 전본부교회 대문과 차고가 설치됐다. 이정옥 씨는 남대문 시경 앞에서 약국(참아버님께서 百和藥局으로 명명(命名))을 개업했으나 별 실속이 없어 2년 후에는 청파동으로 옮겼으며, 그 수익금은 뜻을 중심하고 썼다.(452)
5) 지속적인 교회 개척과 건립
경기도 평택에서는 1956년 11월 하순 본부교회의 김학순 집사가 개척 나와 여동생 김옥순 집사를 인도했다. 그런 터 위에 서울의 홍종복 씨가 원리강사 겸 인도자로 파송돼 본격적 전도에 힘을 기울려 조순선, 최예정, 김석준 씨를 비롯 소수의 새식구가 생겼고, 김준석 장로 댁에서의 첫 예배로써 교회가 설립됐다. 인천에서는 서울에서 입교해 인천으로 이전한 김태정, 전문희 식구와 협조차 내려간 강덕자 할머니가 함께 힘을 합해 교회를 설립했으며, 서울의 정석천, 정수원 부자가 왕래하며 예배를 인도했고, 4월 초에는 김포교회의 최창림 씨가 정식 인도자로 전보돼 기반이 잡혀갔다.(452)
1956년부터 뚜렷한 싹이 텄으면서도 끝내 개화나 결실을 보지 못한 곳은, 충남 공주와 전남 장흥, 경북 청도였다. 공주의 김덕선, 장흥의 유충택, 청도의 김형업 씨는 고투했으나 끝내 결실없이 전설적인 인물로 흘러갔던 것이다.(453)
1956년 2월 17일(음1.6) 참아버님 탄신일에 이봉운 씨는 김관성 씨, 송도욱 씨와 함께 참아버님에 의해 최초 장로임직을 받았다. 그리고 1957년 3월 부산에서 상경한 뒤 충남 대천으로 전도를 나갔다. 8월 26일까지 머물며 8명을 전도했다. 뒤이어 9월 4일에는 경남 충무(통영)로 명을 받고 나가 부산의 송병호 씨의 도움으로 목조 2층 16평을 세로 얻어 중고등학생 중심으로 전도를 했다. 학생들이 많아 학생교회라고 했는데, 그해 10월 10일을 설립일로 본부에 정식 보고했다.(453)
교회 개척과 함께 성전 신축도 점차 왕성하게 진척됐다. 1951년 여름 참아버님께서 범냇골에서 토담집을 지으신 것을 특례로 친다면, 가장 먼저 성전을 지은 것은 원주교회이다. 원주의 씨앗인 최정순 씨가 1956년 6월 원주시내의 언덕 마루턱에 초가로 된 일자집 한 채를 지어 봉헌했다. 그 뒤를 이은 성전 건축은 무주교회이다. 1956년 7월 성전이 무너져 여름 동안 옥외예배로 고생하다가 10월 5일에야 식구들의 피땀의 결정으로 예배당을 신축한 것이다. 1957년 들어 경기도 강화교회는 최상원 교회장이 중심으로 식구들의 뼈와 살을 깎다시피 해 언덕 위에다 조그맣고 소박한 토담집을 지어 준공했다. 야목교회는 차상순 목사가 감리교회 담임전도사로 시무하면서 통일교회를 태동시켜 적지 않은 분란을 겼었는데, 120여 명의 거의 모든 교인들을 이끌고 나와 한때 성전없는 교회의 설움을 겪었다. 그러나 식구들의 단결된 열의(熱意)로 2백여 명을 수용할 성전을 언덕 높이 지어 5월 19일 헌당식(獻堂式)을 거행했다. 이때 인연된 다수의 식구들이 이 해 7월 전국적인 하계 전도활동에 참가했다.(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