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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18-2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24.12.15, 박홍섭 목사
오병이어의 표적 이후 사람들은 주님을 왕으로 삼기 위해 미친 듯이 찾으며 따랐습니다. 이 사람을 임금으로 삼으면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요 6:15). 주님은 이들을 피해 따로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무리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더러는 세례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에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은 아무에게도 이 말을 이르지 말라고 명하신 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한다며 자신이 십자가에서 고난받는 그리스도임을 일러주십니다.
누가복음은 이 시점부터 중요한 내용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예수님이 누구이며 주님의 사역이 어떤 특징으로 진행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고난받는 그리스도를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부터 고난받는 그리스도와 그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에 대해 집중적으로 가르치십니다. 그런 면에서 주님이 물으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과 “주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답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자신은 그런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사람의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메시아입니다.
사람이 기대하는 그리스도는 고난이 없습니다. 아니 고난받는 그리스도를 상상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형통함을 주고 승리를 주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힘을 가진 그리스도를 기대하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는 그리스도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과 진노를 담당하는 그리스도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인자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베드로로부터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받아낸 후 고난받는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시고 너희도 나를 따라와야 한다고 제자의 도를 말씀하십니다.
누가 예수의 제자입니까?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어지는 23-25을 보십시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고난을 피하고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목숨을 잃는다고 하십니다. 고난받는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면서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 자기 스스로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반대로 예수 때문에 다가오는 고난을 인내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입증합니다.
여기 주님께서 약속하고 경고하는 단어들은 상업적인 단어입니다. ‘얻다’는 노력이나 투자를 통해 무엇을 얻는 것입니다. ‘빼앗기다’도 돈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주님은 경제적인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임을 가르칠 때는 철저하게 상업적인 용어, 경제적인 단어들을 사용하십니다. 상업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 영원한 이익을 얻는 현명한 선택임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고난을 택하지 않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유익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산법은 다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신을 잃거나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리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고난받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이 일상의 경제적 정치적 활동을 통해 유지된다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십시오. 당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임을 보여주는 표적을 일상의 먹고 마시는 것으로 드러내셨지 않습니까? 오늘 베드로의 신앙고백도 자세히 살펴보면 정치적 활동의 무대에서 받아내십니다.
평행 구절인 마 16:13-18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누가는 생략했지만 마태는 지금 여기가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밝힙니다. 이 장소적인 배경이 중요합니다. 그냥 무작정 아무 곳이나 다니다가 즉흥적으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고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의도를 가지고 제자들을 가이사랴 빌립보로 이끌었고 거기서 당신의 교회가 세워지는 신앙고백을 베드로의 입에서 받아내셨습니다. 다른 지방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방에서 이 고백을 받아내셨을까요?
원래 가이사랴 빌립보는 이스라엘의 최북방 헐몬산 기슭 해발 345미터 지점에 위치한 작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입니다. 그런데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빌립이 헐몬상 정상의 만년설이 올려다보이는 이 작고 아름다운 마을에 도시를 건설하고 로마 황제의 이름 ‘카이사르’에 자신의 이름 ‘빌립’을 덧붙여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당시 도시에 로마 황제의 이름이나 칭호를 붙이려면 반드시 두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습니다. 첫째는 로마 황제의 위용에 걸맞은 규모를 갖추어야 했고 두 번째는 그 도시의 중심이나 가장 높은 곳에 반드시 황제를 위한 신전이 있어야 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지상의 신이었습니다. 명목상의 신이 아니라 신전에서 인간의 경배를 받는 실질적인 신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헤롯 빌립이 건설한 가이사랴 빌립보는 이 두 가지가 충족된 도시였습니다. 한 마디로 가이사랴 빌립보는 황제의 도시였습니다.
주님은 그 황제의 도시, 사람들이 가이사가 주라고 고백하면서 일상의 경제적 정치적 삶을 살아가는 그 도시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황량한 들판에서 던져진 물음이 아닙니다.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황제의 도시에서 던져졌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이 추구하고 자랑하던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힘입니다. 권력과 군사력, 경제력입니다. 이 절대적인 힘을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해 로마는 도시나 건물을 세울 때면 항상 웅장한 돌들과 화려한 대리석을 동원했습니다. 둘째는 지식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높은 학문과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도시마다 대형도서관을 지었고 가정마다 경쟁적으로 서재를 크게 지었습니다. 세 번째는 육체의 아름다움입니다. 로마는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가지는 물론이고 집 안 곳곳에 우람한 근육을 가진 남자들의 조각상과 아름다운 여인들의 몸매를 조각해서 전시했습니다. 이처럼 로마 황제의 도시는 힘과 지식과 인간 육체를 과시하고 자랑하는 도시입니다. 그 힘과 지식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황제가 신처럼 군림하는 도시입니다.
그런 황제의 도시에 비해 주님은 초라한 모습입니다. 누가 봐도 로마 황제가 가지고 있는 힘과 지식과 육체의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도시 앞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 앞에 베드로가 주저 없이 대답합니다. “주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은 권력의 힘과 지식의 힘과 외모와 육체의 힘을 자랑하고 과시하면서 전 세계를 다스리는 로마의 황제가 나의 구원자가 아니라 외모와 힘과 권력의 차원에서 아무것도 없어 보이고 너무나 초라하게 보이는 예수, 그러나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라는 고백입니다. 삼권을 장악하고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힘과 지식이 있고 육체의 모든 아름다움을 구비하였기에 인간에 의해 신이라고 추앙받는 로마의 황제가 참 신이 아니라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백은 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는 황제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주님의 논리를 따르겠다는 고백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힘과 권력과 지식과 육체의 아름다움을 구비해서 신처럼 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야 하겠다는 야망으로 가득 찬 그 황제의 도시가 추구하는 논리를 따르지 않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논리, 그 영원한 가치를 따르며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로마제국으로 대변되는 이 거대한 세상이라는 제국의 논리, 세상의 힘, 인간의 지식, 육체의 자랑과 아름다움을 내 삶의 목표로 삼지 않고 주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그 진리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목표로 삼겠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인간의 교육이나 철학이나 설득으로 나오는 고백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결과로 이런 고백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교회는 이렇게 세상을 압도하고 있는 황제의 논리, 맘몬의 논리, 황금만능과 권력 만능의 논리에 빠지지 않고 주님의 영원한 말씀의 논리를 좇아 살겠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이 고백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그 의미대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음부의 권세가 이런 고백공동체를 이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정치적 메시아, 군사적 메시아, 경제적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져 구원하는 영적 메시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의 경제적 필요와 정치적 환경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정치적인 도시에서 제자들에게 신앙의 고백을 받아내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일상은 경제적 정치적 활동이 이어지는 삶의 무대입니다. “주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라는 우리의 고백은 진공상태에서 적용되는 죽은 고백이 아닙니다. 경제활동이 이어지고 이 땅의 권모술수와 정치 권력이 다투는 정치적인 공간 속에서 적용되는 고백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어려운 경제 상황이 이어지고 혼란한 정치적인 이슈로 나라 전체가 힘든 상황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현실을 모른 척하고 따로 기도만 하면서 고고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이 현실을 살아야 합니까?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입니다”라는 우리의 고백이 여기 이 혼란한 현실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 말은 맘몬의 경제 논리나 불의한 정치 이념을 따라 살지 말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뜻을 분별해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교회는 심각한 정치화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신자를 단시간 내 가장 강하게 결속시키는 방법인 신앙과 이념을 결합시켜서 전광훈 같은 태극기 극렬 집단으로 전락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세상의 불의와 불법에 대해 입을 닫고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옹호하면서 음모론을 퍼트리는 가장 강력한 전파처가 교회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 18:17-19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의 멸망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시고 있는 장면입니다. 한 사회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죄가 보편화되면 그 안에 정상적인 사람은 살아가기가 정말 힘듭니다. 이런 곳에서는 롯 정도만 되어도 심령이 상하고 고통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계획을 알려주시면서 내가 너를 택한 이유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와 너의 후손들, 즉 믿음의 성도들을 통해 소돔 고모라 같은 이 세상에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백성을 만들기 위해 너를 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존재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의와 공도를 행하기 위해 택함을 받은 사람들, 오늘 이 엄중한 시절에 교회와 성도는 이런 우리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치 성향에 따라 불법과 불의를 동조하면서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고집을 피워서는 안 됩니다. 유투브나 카톡으로 전달되는 이상한 음모론에 경도되지 마시고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각자의 정치 성향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정치 성향대로 이끌리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 의와 공도인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로마 황제 가이사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믿고 따르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것이 황제의 도시, 정치의 도시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 주님의 의도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주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입니다”라는 우리의 고백이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는 한우리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