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타락 잘못된 ‘구원론’ 때문” 목소리 이어져
한국개혁신학회 발제 신학자 및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등 쓴 소리
애물단지 보듯 한국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선과 한국교회를 향한 질타가 쏟아지고 가운데 그 원인을 그릇된 구원론에서 찾는 목소리가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이신칭의’의 잘못된 이해로 행함과 믿음이 분리된 탓이라는 것이다.
감리교는 물론 한국교회 젊은이들 사이에서 진정성 있는 설교자로 잘 알려진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는 13일 주일 설교에서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현실과 관련 바른 ‘이신칭의’ 신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 목사는 “오늘 한국교회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많다. 변명할 말이 없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라고 물은 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오용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또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은 무능하지 않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가 기뻐하는 일을 위해 자기를 바친다”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선이거나 거짓”이라고 밝혔다. 이어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이다. 행함이 믿음을 증거한다”며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이들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긴다는 말을 심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5일 서울 신반포중앙교회(김성봉 목사)에서 개최된 ‘한국개혁신학회 학술발표회’에서도 이러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대속적 이해가 가지는 신인식의 문제 – 믿음에 대한 인식과 경험의 한계성 패러다임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제한 조현철 교수(연세대)는 신학적 차원에서 좀 더 깊은 논의를 이어갔다. 김 교수는 한국의 기독교가 신뢰성을 상실하고 있는 이유를 ‘삶의 변화 없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마치 천국을 소유한 것처럼 당당히 말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는 그것을 용인하는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김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 근원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오해’에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자신의 범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속’이라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모든 범죄가 소멸되고 그리스도가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여기는 그릇된 ‘구원의 확신’은, 기독교의 근본을 흔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신의 뜻에 일치시키며 살아가는지보다 ‘가시적 교회 성장’을 더 우선시하고, 그러한 ‘가시적 교회 성장’이 당연히 ‘신과의 관계성’을 가진 것이라고 여기는 순환 고리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쓴소리했다. 그는 이에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당연히 천국 가는 것으로 여기는 비상식적 오해로부터 피조물의 자리로 되돌아와, 그동안 자신과 타인과 집단에 거침없이 행했던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한 인식적ㆍ경험적 판단을 중지해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깔뱅이 말하는 ‘잘 정돈된 삶’(la vie bien ordonée)으로서의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이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한 김신권 박사(호남신대)도 이러한 점에 동의했다. 김 박사는 “복음은 말의 교리가 아니라 삶의 교리이다. 우리는 기독교 종교에 이 복음 교리를 가장 높은 자리에 배치했다. 왜냐하면 이 복음 교리가 우리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이 복음 교리는 우리 마음속으로 깊숙이 완전하게 들어와야 하며 우리의 생활 속에서 복음 교리의 능력을 드러내야 한다”면서 “게다가 이 말의 교리가 아닌 삶의 교리는 우리를 진정으로 변혁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죽는 것은 필수적”이라면서 “복음의 효과와 능력은 결국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변혁하는 데서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병왕 기자, 뉴스앤넷 2014년 4월 8일 기사
8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안일한 구원론, 단박구원론
얼마 전 천로역정 연극을 관람하였습니다. 천로역정의 구원론은 청교도적입니다. 대략 70년대 이전 한국교회가 보편적으로 주장한 전통적인 구원론이지요. 일제시대 때의 간증집인 안이숙 사모의 '죽으면 죽으리라'에도 잘 나와 있지요. 그러나 변화는 80년대 일부 미국의 부흥사들과 새로운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서 부흥집회와 전도를 하며 안일한 구원론을 가르치면서부터입니다. 과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가르쳐준 청교도적인 구원론을 지켜온 한국교회를 그들은 율법주의로 몰아세웁니다. 한국엔 복음이 이제야 퍼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이후 한국교회에는 번영신학과 함께 안일한 구원론, 단박 구원론(easy believism)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안일한 구원론, 단박구원론을 가장 확고하게 수용하는 곳은 구원파입니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천로역정의 구원론은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온 아주 오래되고 전통적인 기독교의 구원관에 근거합니다. 구원이란 과정을 통해 이루어 나가는 것이며 기독교인의 목적입니다. 오직 순종과 제자의 삶으로만 가능한, 고난 가운데서도 충성하는 자에게만,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이기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물론 신앙의 여정에는 항상 하나님의 도움이 있지요.
한국교회에 퍼진 구원론의 문제는 이신칭의에 대한 오해에 있습니다. 이신칭의는 (특정한 상황에서 특히) 구원의 길을 설명하는 아주 강력한 도구이지만 구원에 관한 모든 상황에 적합한 설명은 아닙니다. 특히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상당수의 구원 길에 대한 설명에는 이신칭의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신구약 성경 다른 곳에서도 비슷합니다. 한국교회는 구원을 이신칭의로만 설명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수많은 내용을 균형있게 보는 것이 아니라 이신칭의 이외의 것들은 아예 외면합니다.
구원받기 위해 요구되는 의롭게 되는 길은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됨에 관해 믿음과 행위의 대조를 통한 설명이 오해되어 하나님 중심의 순종과 충성의 행위의 필요를 마치 행위구원인 양 매도하고 거부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절대로 믿음(원인)이 행위의 열매(결과)로 증명될 수 없는 수준이라면 신자는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행위 없는 믿음이란 죽은 믿음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신학은 바울신학의 옛 관점이나 새 관점 모두 환영하는 시각입니다. 유독 안일한 믿음주의가 판치는 우리나라 교회의 상황에서나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지요.
오늘날 천로역정은 비록 때론 지나치게 율법주의적인 측면이 있고 신학적으로 세부적인 문제는 있긴 해도, 구원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에 중독된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성경에서 말하는 정직한 구원의 길에 대한 그림을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민규 교수(한국성서대학교 성서신학) 페이스북에서
첫댓글 구원의 확신이란 말의 의미, 달리기에 비유되는 구원의 소망을 이뤄가는 신앙생활, 구원이 시작된 출애굽 후 '광야 이스라엘'로 지칭되는 교회에서 구원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승리한 자들만이 들어가는 가나안 땅, 결국 교회에 준 신약성경은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전제만 갖고 읽으면 잘 이해되지 않고 긴장감있게 접수되지도 않는 말씀투성이라는 사실들을 환기시켜주며 믿음과 행함이 일치되는 참신앙인의 삶을 제시해주는 귀한 메시지들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과 진리는 말씀으로 풀어야지,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풀면 끝이 없습니다. 성경이 기준입니다.
신앙생활의 표준은 성경(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모든 교파와 교단들의 교리도 진리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특별히, <구원관>에 대하여는 성경적인 바른 정립이 필요합니다. 구원의 복음 곧 은혜의 복음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논문표절이 드러난 오정현 목사님의 변명에 기가 찼습니다
여러 책을 그대로 베끼다시피한 논문이 성령께서 감동주어서 그렇게 쓴것이라고 자기도 어쩔수 없다는 듯이 마치 하나님의 알수없는 섭리인양 말하는 모습을 보았을때 저분이 구원파의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지신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습니다. 이단들을 판단할것도 비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믿음이나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구원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사건이다.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자녀가 된다는 것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는 것이다.언제 생명책에 기록됩니까 세상에 있으면서 기록되는 것입니다.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우리는 율법시대 사람들이 아니고 성령시대 사람입니다.지금 주장하는 것은 율법시대 율법주의자들에게 적용할 말씀을 성령시대에 적용하니까 확신이 안생기지요.구원 받으면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믿으면 구원 받고 구원 받으면 천국갑니다.그렇다고 방탕해지면 어떻게 될 지는 하나님만 아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