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비열전 21-1
제21대 영조(이금)의 여자들
정성왕후 서씨!
정순왕후 김씨!
후궁 4, 자녀 2남 7녀
영조!
불세출의 행운아다.
조선 사회에서는 아이가 출생하면
배우자의 낮은 쪽으로 신분이 결정된다.
아마 지배 계층인 양반의 수를
늘리지 않기 위한 방편이리라.
잘 알다시피 영조의 엄니는 최무수리다.
인현왕후의 빨래담당 하녀였다.
으리(?)가 있어 궁에서 쫓겨난 인현왕후를
생각하여 그녀의 생일날 촛불을 켜놓고
왕후 무사안녕을 빌다가 숙종 눈에 띄였다.
장희빈에게 염증을 느끼고 심심해서
궁을 한번 돌아보다가 우연히
최무수리가 기도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날밤 그 자리에서 합방을 하고
태어난 왕자가 연잉군(영조)이다.
단 한번으로 만리장성(?)을 쌓은 것이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첫 해
왕세제 시절 반대파였던 소론의
김일경과 묵호룡을 친국하게 되었다.
그때 김일겸이 영조에게 맞짱을 떴다.
"역대 왕들께옵서는 수염이 많지 않았소.
그러나 나리는 얼굴에 수염투성이오.
그러니 나리는 왕실의 자손이 아니란 말이오.
이래도 나리가 선왕의 혈통이라 하겠소?
무수리 최 숙빈이 임금님 성은 한번에
나리를 잉태할 수가 있소~?"
김일경.
죽을려면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영조 컴플렉스는 자신이 서자 출신이라는 것.
그 열등감에 휘발유를 끼얹으니
그 결과는 뻔하지 않겠는가~?
댕강 목이 잘렸다!
자고로 남의 아픈 곳(raw)은
절대로 건드리면 안된다.
영어로 raw는 생치기가 난 것을 말한다.
거기다 소금을 뿌리면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러니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삼가해야 한다.
아니면 저 김일경처럼 목을 내놓고 하든지..
만약 숙종이 아니었다면
영조는 노비가 되어야 맞다.
참 운이 좋았다.
노비가 될 운명이 성은을 입어 왕이 되었으니.
그래서 영조는 힘도 세고 건강하여 장수했다.
83세까지 살았고 왕으로 52년,
최장수 왕으로 오랫동안 권력을 누렸다.
왕이 되기 전 경종의 왕세제로 임명되어서
왕위를 이어 받았지만
참 아슬아슬한 고비를 많이 넘겼다.
노론과 인현왕후 덕택으로...
일도 많이 하셨다.
1. 백성들의 세금을 줄여주는 균역법 시행
2. 가혹한 형벌 금지
3. 탕평책
4. 사치금지
5. 금주령 등등
아쉬운 것은
늦둥이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것이다.
영조도 아들 문제로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원인은 불통이었다.
통하지 못해서...
모 재벌 회장님도
골프와 아들,
그리고 미×만은 맘대로 안 된다고 했다.
세상에 어디 쉬운 것만 있겠는가~?
옆집 형님 말씀대로 나이 66세에
15살의 계비 정순왕후를 맞아들여
기를 보충해서인지 83세라는 조선왕조
기네스 장수 기록에 등재하셨다.
정성왕후 서씨!
숙종 18년(1692년) 12월 본관이 달성인
서종제와 어머니 우봉 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친정오빠 서명백은 구한 말의 개화파 정치인
서재필의 7대조이며 서광범의 6대조가 된다.
숙종 30년에 13살에 당시
11살 연잉군(영조)와 혼인한다.
혼인 첫날 밤 연잉군이 그녀의 손을 보고는
왜 이리 곱냐고 물어보자 고생을 안한 덕에
손에 물을 묻히지 않아 그리하였다고 대답하니
연잉군이 자기 어머니 숙빈 최씨를 깔본 것으로
간주하고 이후로 찾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1721년,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세제빈(世弟嬪)이 되어 1724년, 경종이
승하하고 왕세제인 연잉군이 조선의 21대
국왕(國王)으로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66세까지 살아 조선 역대 왕비 중
왕비 재임기간(33년)이 긴 왕비가 되었다..
불행하게도 정성왕후는 석녀였다.
다 좋은데 자식을 갖지 못했다.
안타깝다. 어질고 너그러운 성품을 가져서
생전에 정빈 이씨의 소생인 효장세자와 영빈
이씨 소생인 사도세자를 친아들처럼 대하였다.
현모양처형 이셨다.
비록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이 아니지만
후궁에서 난 자식들을 잘 돌보았고
남편 영조에게도 지극한 정성을 들였다.
그래서 정성왕후가 되었나?
그러나 한문은 그 정성(精誠)이 아니다.
정성왕후가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정빈 이씨
소생의 효장세자가 열살에 일찍 죽었을 때와
영빈 이씨의 사도세자가 죽었을 때였다.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서 나름대로
부자지간 화해를 도모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자기 자식도 아닌데 큰 엄마가
저 정순왕후처럼 하는 여자가 있을까~?
영조에게도 어려운 왕세제 시절에도
아낌없는 애정을 주어서 달래주었다.
영조도 정순왕후에 대해서는 예로써 대했다.
부부 사이는 좋았는데 자식이 없다.
하느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다 주시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 우리도 좀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너무 불평하지 말고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살자.
1757년 창덕궁 관리각(觀理閣)에서 66세로
시어머니인 인원왕후 보다 먼저 세상에 떠났다.
그래도 당시로 보면 거의 천수를 누리신 것이다.
남편 그늘에 가려 특별한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그 시대의 현숙한 여인이셨다.
능은 서오릉 내에 위치한 홍릉이다.
1757년 66살 나이로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아버지인 숙종의
명릉 근처에 만들고 훗날 자신이 정성왕후의
옆에 묻히기 위해 옆자리를 비워놓았다.
그러나 1776년, 영조가 승하한 뒤 손자인
정조는 당시 왕대비였던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를 의식하여 현재의 동구릉 위치에
영조와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을 조성하였고
결국 정성왕후는 옆자리가 비워진 채
홍릉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래도 원체 맘이 넖으신 분이니
다 이해하시리라.
우짜나!
외로워도 참으셔야지 요..
내일 또 계속됩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