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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 <6> 김태완 “간화선은 발심.돈오.보림의 3대 체험 거쳐야”
동국대 강사 조준호씨(2012호. 3월9일자), 선상담연구원장 인경스님(2014호. 3월16일자), 경전연구소 김재성 소장(2016호. 3월23일자), 동국대 강사 마성스님(2018호. 3월30일자), 동국대 연구교수 임승택씨(2020호. 4월6일자) 등 수행법에 관심 있는 스님과 학자들이 본지가 마련한 ‘간화선과 위빠사나, 그 교리적 근거와 차이’ 주제의 쟁론에 그동안 참여했다. 이들의 논쟁과 관련, 〈조사선의 실천과 사상〉(도서출판 장경각)을 펴낸 무심선원장 김태완씨가 의견을 보내왔다.
무위의 공부법으로 깨달음… 보림 통해 불생불멸 체득
여기에서는 필자의 공부 경험을 바탕으로 실제 간화선을 공부함에 있어서 공부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여겨지는 몇 가지 요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거론함으로써, 위빠사나를 실천하는 분들에게 자신의 공부와 대조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열과 시비를 가리자는 것이 아니라, 이 기사의 취지에 따라 한 번 대조해 보자는 것이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모색하다가, 어느 순간 홀연 의문이 사라지면서 찾는 마음도 사라지고 의심할 수 없는 자리가 확인되는 경험을 하면, 이것이 돈오이다. 그 뒤 확인한 자리를 잘 지켜 과거의 습으로부터는 멀어지고 새로 확인한 자리에 익숙해져 가는 것이 보림이다. 위빠사나의 공부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고 할 수 있는가.
이렇게 화두가 자리를 잡는 것은, 따라가기만 하면 무난히 공부의 문에 들어갈 수 있는 잘 정리된 공부방법을 얻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엇을 손에 쥘 수도 어디에 의지할 수도 없는 캄캄하고 막막한 의문 속에 떨어지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이 점은 간화선의 독특한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부분이다. 사량분별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의문 속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간화선(看話禪) 즉 조사선(祖師禪)이 가진 가장 큰 특색이다.
그러므로 〈증도가〉에서는 “망상을 버리지도 않고 진심을 취하지도 않는다”고 하고, 〈신심명〉에서는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으니 오직 취사간택만 피하면 된다”고 한 것이다. 또 선정(禪定) 속에 들어가서 망상과 실상이 둘 아님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선정 속에서는 불이의 실상이요 선정에서 깨어나면 분별망상이라고 하는, 입출(入出)의 이법(二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조혜능은 “견성(見性)을 말할 뿐 선정과 해탈을 말하지는 않는다”고 하고, 마조는 “도는 닦을 필요가 없고 단지 오염되지만 않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실상에 대한 의문에 목말라 있다가 실상을 확인함으로써 그 의문이 사라지는 것이지, 어떤 정해진 방법을 따라 노력하여 실상을 관찰하거나 부여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무위의 공부로서, 사량분별에 의지하지 않는 공부이며, 본래성불(本來成佛)을 확인하는 공부이다. 이 무위의 공부법은 육조혜능 이래로 면면히 이어 내려온 조사선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러한 주장은, 공부란 예측 가능한 길을 주어진 방법에 따라서 유위적으로 노력해 나아가야 한다는 세간의 습관적 관념에서 비롯한다. 이런 습관적 관념은 모든 세간의 유위적 공부와 출세간의 마음공부를 동일시하는 오류이다. 가슴 속에 의문을 가지고 그것을 풀려는 염원에 가득차 있는 그 자체가 바로 무위의 공부인데도, 대개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하여 무언가 유위적 행위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습관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조사선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설법과 대화를 이용한다. 올바른 공부의 길과 잘못된 공부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법의 실상을 확인하려면 무위의 공부를 통하여 직접 체험해야 함을 인식시키고, 비유를 통하여 마음법을 암시하거나, 말과 행동을 통하여 마음법을 직지(直指)하는 설법(說法)과 문답 등에 의하여, 실상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고 싶은 갈증을 키워가는 무위의 공부를 하는 것이다.
이 전환은 분별심이 유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성(自性)이 스스로 깨어나는 경험이며, 이 깨어남은 무위의 공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무위의 공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필수과정이다. 위빠사나 공부도 무위의 공부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무엇을 성취한 긴장된 상태가 아니라, 단순히 망상분별에서 풀려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본래 자리에 있는 것이고, 언제나 본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확인하는 것이고, 언제나 눈 앞이 또렷하여 다름이 없는 것이고,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무위(無爲)를 실감하는 것이고, 일법(一法)이 만법(萬法)이고 만법이 일법이며 일념(一念)이 만년(萬年)이고 만년이 일념이어서 언제 어디에서나 호호탕탕 막힘이 없는 것이다. 위빠사나에도 이러한 돈오의 체험이 있는가.
김태완/ 무심선원장 [출처 : 불교신문 2022호/ 4월13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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