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38. 파키스탄으로
라호르박물관, 마니꺌라 스투파
앙상한 얼굴 법열의 미소
‘부처님 고행상’에 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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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라호르 박물관에 진열된 불두. 세계적 명품이다. |
2002년 4월16일. 인도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간다라 불상’으로 유명한 파키스탄에 들어갔다. 인도에서의 ‘구도 취재’기간은 42일. 지난 3월4일부터 4월16일까지의, 길 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참으로 많은 것을 느꼈다. “싯다르타 태자는 왜 하필 인도(룸비니는 과거 인도 땅)에서 태어났을까, 무엇 때문에 해탈을 갈망했으며, 그가 추구한 이상은 실현됐는가, 실현되지 못했다면 그의 가르침(불교)은 왜 인도 땅에서 사라졌는가” 등등.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밝힌 것 없이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은 파키스탄으로 넘어갔다.
델리에서의 마지막 밤(4월14일), 시크교도의 성지 암릿짜르(4월15일)를 거쳐, 과거 같은 나라였다 지금은 거의 앙숙이 된 인도·파키스탄 세관(稅關)이 있는 와가(wagha)에 도착한 것이 4월16일 오전 10시. 10시30분부터 시작된 출·입국 수속을 마치고 파키스탄 영내에 들어가니 오후 2시. ‘똑 같은 땅’에 단지 국경선만 그어 놓은 것 같았다. 대지의 공기도 같고, 하늘 색깔도 같고, 영국 식민지를 경험했다는 점도 똑 같았다. 반면 사람들의 태도는 무척이나 달랐다. 인도인들과 달리 파키스탄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다. ‘한국에서 왔다’는 소리를 하자마자 “대우를 아느냐”고 물었다. 라호르·이슬라마바드 사이에 건설된 대우고속도로 때문이었다.
파키스탄인들 “대우 잘안다”
준비된 차를 타고 파키스탄 펀잡 주의 수도이자, 파키스탄 동북부 최대도시인 라호르에 도착했다. 인도사람들과 달리 우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다. 간단히 중식을 마치고, 아그라·델리에 이어 라호르에도 세워진 ‘레드 포트’(붉은 성)에 갔다. 여기서 잠깐 무굴제국(1526~1857)을 훑어볼 필요가 있다. 16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델리를 수도로 17대를 이어 간 대제국이 바로 무굴왕조. 시조왕 ‘바부르’는 중앙아시아에서 카불(아프가니스탄 수도)로 진격하여 왕조의 기반을 다진 후 인도 델리에 있던 로디왕조(1451~1526)를 멸망시키고, 무굴제국을 세웠다.
2대 황제 ‘후마윤’ 때 잠시 망명하는 수모도 겪었지만, 3대 황제 ‘악바르’(13세 즉위)때는 전 인도를 통일하는 명실상부한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악바르를 이어 자항기르, 사쟈한, 아우랑제브까지 무굴제국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던 1707년 데칸원정 당시 아우랑제브가 급사하자 왕권분쟁이 일어났고, 이후 무굴제국은 급격히 쇠퇴하다 1857년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라호르의 ‘레드 포트’는 바로 무굴제국 4대 황제 자항기르(1569~1627)가 완공한 성새(城塞)다. 대단한 업적을 남긴 황제는 아니지만, 악바르 대제를 이어 여러 종교에 관대하였고, 문학 미술 등 예술문화를 장려하여 무굴문화를 개화시킨 왕이다. 이 자항기르 대제가 완성한 라호르의 ‘레드 포트’는 델리와 아그라의 ‘레드 포트’만 못했다. 우선 보수 수리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파키스탄 사람들의 태도와 형색은 인도보다 나은데, 문화유산 관리는 인도만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음날 라호르박물관에 가보고는 그 생각마저 바꿨다.
라호르박물관은 주지하다시피 간다라 미술명품들을 많이 진열한 유명한 박물관. 1947년 영국으로부터 인도·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할 당시, 이곳에 있던 많은 간다라 불교작품들이 인도로 옮겨져, 지금 인도 꼴까타(캘커타) 인도박물관, 델리 국립박물관 등에 전시돼 있다. 건물은 낡았지만 내부 진열은 상당한 수준을 자랑했다. 특히 간다라 미술과 회교미술, 티벳 불교미술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수준의 명품들이 전시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에 속한다고 안내인은 설명했다. 물론 라호르박물관의 꽃은 ‘간다라 불교미술작품’들이다. 간다라 미술이 많기야 페샤와르박물관이 최고지만, 이곳엔 거기에 없는 세계적 명품이 있다.
피골이 상접한 싯다르타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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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상> |
사진설명: 라호르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걸작 중의 걸작. 튀어나온 핏줄, 피골이 상접한 모습,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 등에 고행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
‘부처님 고행상’이 바로 그것이다. 6년 동안 온갖 고행(苦行)으로 피골이 상접한 수행승 싯다르타를 묘사한 최고의 걸작에 속한다. 사진으로만 보던 명품을 눈앞에서 실견(實見)하니 전율이 느껴졌다. 바싹 마른 싯다르타, 핏줄은 튀어 나오고, 갈비뼈는 앙상하게 드러났으며, 눈은 움푹 들어간 고행자 싯다르타를 이보다 더 잘 묘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쑥 들어간 배, 전신에 돌고 있는 세세한 핏줄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고행하는 싯다르타’를 너무 잘 조각한 명품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고행자 싯다르타’는 그러나 처참하게 보이진 않았다. “검은 돌의 아름다운 윤기도 그러하거니와 앙상한 얼굴에 감도는 고요한 법열(法悅)의 미소, 단정하고 위엄 있는 모습 등에서 대각 직전 해탈의 모습”(동국대 문명대 교수)을 볼 수 있었다. 바라보면 볼수록 청정하고 따뜻한 느낌이 전해왔다. 고행상을 보자 다시금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싯다르타는 하필 왜 인도에서 태어났으며, 무엇 때문에 고행을 했는가. 해탈을 추구한 그의 가르침은 인도 대륙에서 왜 사라져 버렸을까. 인간의 고통은 여전한데, 고통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친 그의 가르침은 무엇 때문에 탄생지에서 소멸되는 비운을 맞았을까”등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고행상 바로 맞은편에 전시된 ‘쉬라바스티(사위성)의 기적’도 알아주는 명품이다. ‘쉬라바스티의 기적’엔 사연이 있다. 성도한 싯다르타가 교세를 넓혀가자, 라자가하·쉬라바스티 등지에선 반발이 심했다. 라자가하는 당시 세력을 뻗치고 있던 자이나교 중심지였고, 바라문 세력과 자이나교·아지비카교도 들도 쉬라바스티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것.〈불설중본기경〉·〈출라박가〉(율장소품)·〈잡아함경〉등에 따르면 라자가하에서 성취를 거둔 부처님은 아나타핀디카(수닷타) 장자의 요청에 따라 쉬라바스티에 설법하러 갔다. 쉬라바스티는 그러나 라자가하 보다 다른 교파의 힘이 훨씬 셌다. 자이나교, 아지비카 교파, 브라만교 등이 이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결국 부처님은 쉬라바스티 거리에서 망고나무를 하루 만에 성장시키고, 천 명의 부처님을 출현시키는 이른바 ‘쉬라바스티의 기적’을 보인다.
라로흐박물관에 전시된 ‘쉬라바스티의 기적’은 당시의 부처님을 조각한 명작이다. 커다란 4각형 석판 중앙에 초전법륜(初傳法輪)의 손 모양(手印)을 한 부처님이 커다랗게 클로즈업돼 있고, 주변엔 협시상 등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빽빽하게 조각돼 있다. 중앙의 부처님은 원만하고 우아한 얼굴에, 당당하면서도 균형 잡힌 몸매를 보이며, 주변의 군소무리들은 부처님을 바라보며 찬탄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아지비카 교파, 브라만교 세력들에게 위신(威神)을 보여주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된 ‘쉬라바스티의 기적’상을 보고 있노라니, 과거로 빨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이것만이 아니다. 간다라 미술관 중앙에 전시된 복발탑(覆鉢塔)도 뛰어난 명품이었다. 2단의 둥근 대좌와 부조상은 산치탑 같은 복발탑 원형에서 진전된 것인데, 원과 원이 이루는 조화미는 불교의 진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부처님 전생 이야기들을 조각화한 소품(小品)들을 모두 보고, 다시 차를 타고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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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라호르에서 아슬라마바드로 가는 도중 본 마니꺌라스투파. 사르나트의 다메크탑 만큼 거대했다. |
도로는 잘 포장돼있고, 공기는 그런대로 시원했다. 한 참을 가다, 차가 갑자기 도로를 벗어나, 평야 쪽으로 빠졌다. 원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눈앞에 갑자기 거대한 탑이 나타났다. 참으로 거대했다. 사르나트에 있는 다메크 탑과 크기가 비슷했는데, 다메크 탑보다는 오래된 탑 같았다. 안내인이 “마니꺌라 스투파”라고 소개했다. 탑 주변은 전부 논이었고, 밀을 갓 베어난 듯 이삭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탑 주변을 몇 바퀴 돌다 정상에 올라 가 보았다. 사람들이 많이 다닌 듯 길이 나있고, 정상에 도착하니 거대한 구멍이 탑 가운데 뚫려 있었다.
탑 위에서 바라본 들판은 한가롭고, 평화롭게 보였다. “이곳에 스투파를 조상한 사람은 누굴까, 무엇 때문에 조성했을까” 등의 의문이 자연스레 들었다. 이를 눈치 챈 듯 “기원 전 1세기나 기원후 1세기경 건립된 탑으로 추정된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탑 그늘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불탑이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 사라진 불교의 쓸쓸한 뒷모습을 카드놀이에서 보는 것 같아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파키스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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