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사랑 분노어린 시선 1
“맘대로 해요. 죽이든 살리든 나는 여기를 뜨지 않을 테니까요. 나도 여기가 좋아요. 당신만큼 바다와 고독을 즐길 줄 안다고요.”
“그러니까 서울에 안 가겠다 그거지?”
“그래요.”
“좋아, 그럼 내가 떠나지.”
용해는 벌떡 일어난다. 서둘러 농막 밖으로 나가려 한다. 그때 미나가 옷소매를 잡는다.
“앉아봐요, 내가 떠날 테니.”
“너한테 다시는 안 속아. 정말야. 이번에 사표내면 죽는 날까지 나를 찾을 수 없을 거야. 다른 사내와 결혼해서 호적을 지우고 싶거든 내가 행방불명된 걸로 처리해 버려.”
“이제 나도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서울에 가자마자 차 이사와 결혼할래요. 우린 결혼 내락이 돼 있어요. 오빠네도 그렇게 알고요.”
미나가 팔을 끌어당기자 용해는 마지못해 자리에 도로 앉는다. 그녀는 담배 한 개비를 얻어 피우며 멍하니 바다를 바라본다.
“그 대신 한 가지 요구가 있어요. 여기서 당신과 하루만 지내게 해주세요. 성원이는 다시 안 봐도 괜찮아요.”
“뭔 수작이지?”
“다른 뜻이 아녜요. 이번에 떠나면 당신과 마지막이에요. 호적도 정리할 거예요. 그러니 우리의 인연을 끊는 마당에 하루만이라도 당신과 행복하게 지내고 싶어요. 우리는 부부였잖아요? 제 마지막 소원이에요. 당신이야 지겨운 하루겠지만.”
금세 미나의 눈자위에 눈물이 맺힌다. 용해는 그 눈물을 언뜻 보았다.
“기서 기다려, 외출 허락을 받아야 되니까.”
용해는 먼저 농막을 나가 강릉 본대로 전화를 건다. 금세 근무지 이탈을 허락받는다. 그는 조카딸에게 성원과 집일을 맡기고 미나와 함께 사천 쪽으로 걸어간다. 거기에서 버스를 타고 속초 방향으로 갈 작정이다. 아무데고 먼 곳으로 떠나는 차 안에서 시간을 소비할 참이었다. 버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설악산을 오르거나 아니면 바닷가를 거닐면 하루가 지날 터였다. 해가 지면 여관에 들어가 잠을 자고 날이 새면 떠나보내면 그만이었다.
“저어, 고단한데 잠깐 쉬게 해주세요. 어젯밤 기차에서도 한숨 못 잤어요.”
사천 면소재지에 도착하자 미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말한다. 용해는 미나의 말뜻을 알아차렸지만 오늘 하루만은 그녀의 뜻에 따라주기로 마음먹는다. 버스를 기다리던 그들은 마침 강릉에서 나온 택시를 타고 주문진으로 달려 여관을 찾았다. 해변가에 새로 지은 깨끗한 집이었다. 앞장서 여관에 들어간 용해는 침대 밑 방바닥에 앉아 창밖에 비친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뒤늦게야 맥주와 오징어를 사들고 방에 들어온 미나는 두 개의 컵에 맥주를 채웠다. 금방 맥주 두 병이 비워졌다. 취기가 오른 미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만에야 알가슴을 드러낸 채 나와 용해에게 다가갔다.
“이게 뭔 짓이야!”
용해가 소리쳤다. 하지만 미나는 요염한 미소를 흘리며 어리광을 부린다.
“내 몸 아름답죠? 한군데도 구겨진 데가 없잖아요? 누구나 내 몸을 탐낸다구요. 당신 한 사람만 빼고는.”
용해는 거침없이 달려드는 미나의 몸을 완력을 쓰지 않고는 밀쳐낼 수가 없다. 미나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진다.
“제발 한 번만 껴안아줘요.”
미나는 단말마 같은 신음소리를 토해낸다. 숫제 통곡이나 진배없는 그 처연한 목소리에 취해 용해의 몸은 풀어지기 시작한다. 용해는 미나의 마지막 소망을 채워주겠다는 정성으로 육체 깊숙이 파고든다.
“우린 운명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돼.”
몸이 풀어지자 용해는 속삭이듯 말한다.
“그건 당신이 만든 운명이죠.”
“아냐, 내가 내 운명을 만들 순 없어. 그것은 인간 능력 밖이야.”
“그 말은 변명이에요, 당신 자신과 날 위로하기 위한. 하지만 그 변명이 싫진 않군요. 어쨌든 우리의 불행에 원인규명은 있어야 되니까요.”
용해는 일어나 옷을 주워입는다. 창 밖에는 사월의 오후 햇살이 화창하다. 모래톱과 바다에 널브러진 그 햇살은 수평선과 어우러져 장엄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미나도 옷을 입고 용해의 곁에 서서 창밖에서 넘실대는 바다를 바라본다. 햇빛이 반짝이는 잔잔한 바다가 편안해 보인다. 어머니의 품속처럼 안온한 바다. 미나는 어머니의 죽음이 어슴푸레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미나는 어머니가 바다에 빠져죽었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어머니의 시신을 바닷가에서 떠메어왔다. 물 젖은 어머니의 주검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편안히 잠자는 듯한 얼굴 모습이며 물 젖은 치마저고리로 투명하게 내비친 육체의 곡선은 그 시신을 떠메어가던 꽃상여만큼이나 곱고 육감적이었다.
미나는 바다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정답게 보였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묻힐 바다인데, 미나의 눈에는 눈물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녀는 그 슬픔이 좋았다. 그 슬픔은 바로 환희였다. 그 풍성한 슬픔 속에 아주 잠겨버리고 싶었다.
그것이 용해를 영원히 소유하는 방법이다....
미나의 가슴은 점점 부풀기 시작한다. 거대한 행복감. 바다처럼 삼킬 듯한 행복감이다. 어서 가자. 그녀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멋있는 바다죠? 저기에 우리의 불행을 쓸어 묻고 싶군요. 우리의 마음을 정갈하게 닦아내자구요. 당신 말마따나 우리의 불행은 운명일지 모르죠.”
“서로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지. 하지만 나는 불행이란 말이 맞지 않다고 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시련이랄까. 더 큰 것들을 성취하기 위한 몸앓이쯤으로 여기는 게 좋을 것 같애. 나는 이 시간 당신의 행복을 빌고 있어. 그전에도 그랬고. 제발 차 이사와 행복해지기 바래. 그게 당신과 나와의 인연에 보답하는 최고의 정성이야. 아니 포원이랄 수도 있지.”
“당신은 무엇으로 행복해지겠다는 거죠?”
“다른 상대적인 조건은 없어, 있을 수도 없고. 다만 내 양심이 편안해진다는 것뿐이지.”
“양반이시군요.”
미나는 시큰둥하게 받는다. 그리고 말을 덧붙인다.
“나 뱃놀이 좀 시켜줘요. 잠시라도 좋아요. 놀다가 해가 지면 강릉에 나가 밤차를 탈래요.”
“바다에 나가면 추울 텐데 무슨 뱃놀이?”
“괜찮아요. 날씨가 얼마나 따스해요. 하늘도 맑고 뱃놀이하면 너무 멋지겠어요. 뗏마를 하나 빌려요. 뱃노리로 우리의 마지막을 장식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