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 20주년. 이번 학보는 특집 8면으로 증면되었다. 학보 명칭도 예전대학보로 바뀌었다. 기사가 많다.
4월이다.

당신은 누구 편이냐?
우리는 해방 후 투표에는 이겼으나 개표에는 진 부정선거를 여러 번 보아왔다. 예로부터 작금까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은 항시 하나의 흐름으로 조장돼 왔다. 눌리고, 짓밟히고, 헐벗음을 사회의 일반적인 분배로 알다가, 어느 날 우리는 주입식 인식에 의한 판단능력에 대해 정확한 가치 판단을 가질 수 있을 때 그 진의에 대한 항거할 수 없는 힘의 발산을 하게 된다. 엄연히 존재해야 할 본연의 권리마저 상실한 것도 모른 채 경찰국가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감시 하에 살아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민족을 팔아먹고 개인적인 유치만을 위해 제국주의에 아부하며 권력욕만 채우려는 뮤르미돈의 세상이 된다.
힘의 원리를 고수하는 사회는 언젠가는 인간의 행동권을 발산하게 되며 이상적인 정부를 둔 국가를 꿈꾸게 된다.
피지배자 계층이 지배자 계층을 무너뜨리고 이상적인 나라를 구성하는 단합적인 행사가 혁명이란 것은 대개의 사회학자들의 지론이다. 민심을 교란시키는 특권계층간의 권력쟁취로 인한 국가 전복이 쿠데타라 할 수 있다. 결국 민중의 피를 빨아 먹는 흡혈 협잡꾼들이 된다. 4·19 혁명 그 순수한 피의 대가로 대통령의 하야와 권력구조를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까지 성취했지만, 미완의 혁명이 된 안타까움이 있다. 바뀐 세상이 되지 못했지만 분명한 민족의 대행진이었다. 당시 희생된 백 수십 명의 젊은 넋을 빌어 눈물을 금할 수 없다.
당시의 혁명이 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를 사건별로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원인으로는 ‘정치 파동’, ‘한글 파동’, ‘사사오입 개헌 파동’, ‘이사 파동’, ‘특권층 및 여당 본위의 차별 정치’ 등을 들 수 있다. 원인의 하나인 정치 파동은 당시 헌법 규정에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거하는 간선제였다. 허나 국회의 세력 형편으로는 정권李가 다시 피선될 소망은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국회의원 중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공산당과 결탁하여 정부 전복을 음모한다는 이유로 잡아 가두고, 계엄령을 내리고 관제민의를 조작하여 선거구민에 반대하는 의원 ‘소환’ 시위운동을 일으키고 ‘땃벌떼’ 같은 폭력배가 횡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반대 의원이 잡히고 외국인 병원선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간선제를 논리대로 되어줄 국민 모두의 투표로 선거하는 직선제로 바꾼 후 다시 피선의 뜻이 없다는 카리스마李를 관제민의로 피선하게 했다. 한글파동은 정권 李의 오랜 망명생활을 망각하고 80년 전의 맞춤법으로 되돌아가게 현행 맞춤법을 뜯어 고치라고 백두진 국무총리 훈령 제8호를 발표하였던 것이다.
이는 학술의 자유를 권력으로 침해하려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왜정 때 우리의 말과 글을 박멸하려는 악정 밑에서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여 붙들어 온 체계 세운 맞춤법을 뜯어 고치려는 무리한 일이었다. 결국 대세를 살핌으로 한글 문제는 다시 간섭치 않게 되었다. 그리고 사사오입 개헌 파동이란 초대 대통령만은 종신제로 하자고 헌법을 고치자는 문제였다. 헌법 개정은 국회의원 3분의 2의 가표를 얻어야 개정되는 규정인데 3분의 2에 달하려면 136명이라야 통과될 수 있었다. 그러나 투표율은 135.3333…이었다. 그리하여 3분의 2가 못되므로 당시 사회자 최순주 부의장은 부결을 선언했으나 정권李는 사사오입으로 통과될 수 있다고 무리하게 주장하여 가결 선언하게 했다. 이때도 다시 관제민의로 우마차까지 동원, 유도한 시위로 인해 피선되었다. 경찰복만 봐도 입을 열지 못하는 민폐가 완연된 제3세계의 전형적인 축소형으로 실망을 안겨주었던 사건이다.
이사파동은 1958넌 12월 24일 미리 전국에서 역도에 능한 경관 3백 명을 경위로 모아 들여서는 당시 사회자 한희석 부의장은 경위를 발동하여 야당의원들을 지하실로 감금 후 여당만이 보안법이니 지방자치법 개정이니 기타 여러 법안을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이 보안법의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언론 자유를 막아 부정 선거의 여론을 누르기로 한 내정이므로 그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지방자치법은 모든 장자리를 고쳤으니 두말 할 필요가 없는 한국적 민주주의 형태였다. 미국식 민주주의 진열장이 된 카리스마李의 정권이 양성될 수 있었던 것은 민도 수준도 문제였지만, 원조물로 배부른 돼지들의 베일에 가린 신비성도 포함된다.
특권층 및 여당 본위의 차별 정치다. 행정부나 군부의 특권계급은 그 권력에 아부하여 엽관이나 이권운동을 위하여 가져다 바치는 금품도 물밀 듯 하지만은 그 권력으로 이권을 잡게 되기 때문에 모두 대기업체를 가지고 있으며 화려하고 광대한 저택을 가지고 미국 기타 등지에서 오는 원조자금이 특권층에 몇 사람의 배만 키워 주었고, 경제 자립의 기초를 닦는 생산기관은 위축되고 말았다.
「콘론보고서참조」이러한 이승만시대의 대외의존적이고 반민중적인 성격은 60년대 후반 특히 70년대에 들어와 차관재벌 중심의 경제 개발 정책으로 자립적 민족 경제를 요구하는 국민의 소외의식이 증대되고 그리하여 기본권에 대한 제약이 점점 심해지는 과정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또 부정이나 횡령의 부패상은 스무 두 돌을 맞는 4·19의 피를 결국 흘리게 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이 쌓이고 쌓여 마치 폭발하려는 화산처럼 외면으로만 평온한 듯 했던 것인데 그 폭발의 원인이 곧 ‘3·15 협잡선거’였다.
3·15의 협잡성은 지능 범죄의 최고 전형이요, 선거 사상 최악의 부정이라 할 것이다. 독재 폭정에 눌리어 신음하는 전국민의 울분을 피의 대가로 결국 지불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외침은 애초에 학원의 자유와 공명선거를 외치며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명확한 정권 교체를 할 수 있었다. 김주열군의 눈에 포탄이 박힌 채 쳐박혀 죽은 것이나 고대생의 시위후 돌아오던 길에 천일백화점 앞에서의 습격은 경찰관의 계획적인 만행 등 -유지광 진술- 평화적 시위는 언론자유와 마찬가지로 합법적이자 그 요구가 빼앗긴 자유와 권리를 되돌리라는 정당한 요구임에도 불구하고 경관은 무자비한 사격을 감행, 백 수십명의 생명을 빼앗았다.
모택동은 “정권은 총구에서 탄생한다” 고 했지만 한국 경무대의 경호진은 “정권은 총구로써만 방비되는 것”임을 실증한 것이다. -지면상 사건 생략- 무엇보다도 우리는 4·19를 민족사의 큰 흐름속에서 올바로 보아야 하며 동시에 세계사의 맥락에서도 그 적절한 위치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4·19는 아무런 집권욕이나 경제적 이해관계도 없는 학생들이 일으킨 ‘순수한 혁명’이라는 찬사를 하고 싶다. 역사적 한계를 부각시키는 이야기로서는 혁명세력으로서 사후 대책이 없었고 경제적 이해관계를 초원해 있었다는 것은 운동의 영속성이라는 면에서 치명적인 약점이다. 하지만 ‘4·19의 행적’이 항상 재평가되어 인식의 발전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문창 · 2>





첫댓글 이우근... 보고 싶다...
우와...너무 신기해요...예전의 학보사...ㅎㅎ 예민회 괜히 반갑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