府使公 墓表
公의 諱는 允寧이요 字는 寧之요 본관은 豐壤이시다. 시조는 고려개국공신에 문하시중이신 諱 孟이요, 고려말의 護軍 諱 思忠은 공의 5대조요, 高祖는 諱 崇이시니 商議中樞院事인바 처음으로 상주에 거주하시었고, 曾祖의 諱는 夏이시니 佐郞이요, 祖의 諱는 瑞廷이시니 舍人이요, 考의 諱는 恢이시니 承仕郞이요, 妣는 端人 高靈申氏이시니 府使公 舟의 따님이다. 공이 성종 15년 (1484)인 甲辰에 출생하여 통훈대부에 춘천도호부사를 역임하신바 政務가 淸簡하여 관대하고 엄격함에 中庸을 얻으시니 그 聲績이 일대에 칭송되었다. 祖妣 李淑人의 喪事를 당하자 承重喪制로서 尙州 남장의 산하에서 3년간의 侍墓살이를 마치고 京城의 舊宅으로 돌아와 사시다가 중종31년(1536)인 丙申 2월 27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五十三이요, 廣州 良才 壅洞의 午向原인 이곳에 안장되시니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산30번지이다. 配位는 淑人 仁同張氏이시니 영의정 順孫의 女이다. 공보다 6년 후인 성종21년(1490)인 庚戌에 출생하시어 公이 逝去하신지 18년 후인 명종9년(1554)인 甲寅 12월 10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六十五요 公墓와 合祔이다. 모두 2남 4녀를 두었다. 장남은 禧이니 直長에 贈 左通禮요,차남 祺는 자손이 없으며 女婿는 姜希曾과 府使 閔惓과 司儀 金光啓와 僉知 李元濬이다. 左通禮는 郡守 彦卿의 女인 贈 淑人 南陽洪氏와의 사이에서 一男 光憲을 두셨으니 孝行이 있으셨으며 贈 左承旨요, 좌승지는 四男三女를 두었으니 장남 靖은 奉常寺正에 贈 李朝參判이니 곧 黔澗선생이요, 차남 翊은 掌令이니 곧 可畦선생으로서 昆季가 涑水書院에 配享되었고, 三男 竤은 直長이요, 四男은 竣이며, 女婿는 奉事 具光源과 進士 金安節과 李朂이다. 玄孫 이하는 이루 다 기재하지 못하거니와 자손이 매우 번창하고 도덕문장과 科宦이 대대로 이어져 嶺南 屈指의 名門을 이루었다. 묘소에 表石이 있기는 하나 陰記가 없으므로 여러 자손이 이것을 유감스럽게 여겨온지 오래였더니 이번에 短碣을 세워 行蹟을 顯刻하게 되었다. 그 사업을 主幹하는 宗賢들이 撰者에게 그 陰記의 제작을 의뢰하기로 삼가 世譜 世錄과 先世狀碣集 등의 기록을 詳考하여 위와 같이 略述한다. 또 살피건대 왕년에는 公의 자손 대부분이 영남에 거주하여 그 守護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근년에는 京居하여 자손이 많아지고 山下의 宗土가 市街地化함에 따라 宗財도 裕足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자손이 조석으로 내왕하며 先代에 못다한 遺志를 받들어 尊祖와 敦親에 그 정성을 다하고 있음은 우연이 아닌 것만 같으며 미풍양속이 날로 衰頹하여 가는 현세에 좋은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아울러 기록하여 陰記로 가름하는 바이다.
檀紀 4330年(1997)丁丑 7월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