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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 두려움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 디모데 후서 1장 7절
할렐루야!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일마다 때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승리하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사랑의 실천이 율법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늘 이루어질 수 있게 우리의 심령에 성령을 주시고 늘 충만한 삶을 살게 하소서!
샬롬! 밖에 나가면 밀림이 된 강산이 온통 붉게 물이 들었습니다. 맑고 높은 가을 하늘과 시원한 바람과 깨끗한 공기, 그리고 들에는 추수가 한창이고 온갖 과일이 무르익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이 절로 나옵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한국에서 살게 해 주신 데 대해서 감사가 절로 납니다. 우리는 이런 귀한 땅과 하늘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말씀을 모든 국민이 잘 공부해서 모두가 실천을 함으로써 온 세상의 강대국의 도전을 다 극복하고 후손에게 자랑스럽게 물러주어야 할 것인데 이렇게 하자면 성경의 정의가 흘러넘치고 모두가 한 민족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그리고 이런 복은 주신 하나님만 잘 섬기고, 율법의 실천을 통한 맑고 깨끗한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올바른 성경의 이해와 공부는 가장 모든 분야에 앞서서 많은 투자와 뛰어난 인재의 영입이 시급합니다. 오천만의 로마서는 이런 일을 하고자 합니다. 많은 기도와 격려를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그리고 근신하는 마음이라는 디모데 후서 1장 7절의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말씀에 대한 좋은 설교한 편과 근신의 의미에 대한 다른 분의 글을 읽고서 그리고 이 말씀의 현실에의 적용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을 여러 버전으로 보시고 두 편의 글을 보시겠습니다.
딤 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7.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은 우리에게 비겁한 마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를 주십니다.
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이다.
(개역개정, 개역한글, 공동 번역, 표준 새 번역)
7. For God did not give us a spirit of timidity, but a spirit of power, of love and of self-discipline.
7. For God hath not given us the spirit of fear; but of power, and of love, and of a sound mind.
7. For God has not given us a spirit of timidity, but of power and love and discipline.
(NIV, NASB, KJV)
1. 한 편의 설교와 근신의 한문 의미
1) 능력, 사랑, 근신하는 마음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오늘은 세례 주일로 예배를 드리게 된다. 말씀 그대로,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받는 귀한 예배가 되기를 소원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과 반대되는 의미는 두려움일 것이다. 두려움은 모든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피할 수는 없어도 그것이 지배하게 놓아둔다면 그것은 우리 인생 전체를 지배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소명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주신 사명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본문에 나오는 디모데도 두려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는 건강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많은 pressure로 인해서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핍박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때에 사도 바울이 그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다. 바울의 요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spirit이라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두려움이 많이 있다. 특히 우리는 불확실한 내일과 환경에 대하여 많은 두려움을 느끼며 살고 있다. 어려운 소식과 경제적인 압박 때문에도 적지 않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결코 두려움의 spirit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의 소명을 더 발휘해야 할 때이다. 오늘 세례를 받는 자들과, 이를 목격하는 자들이 모두 이런 은혜로 가득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1) 능력
능력이란 상황을 극복하는 힘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결코 상황의 지배를 받으면 안된다. 왜 그런가? 우리 주님은 상황과 환경보다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상황과 환경을 그대로 보고 인정하지만 결단코 그것과 함께 머물러 있지는 말아야 한다. 위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바울도 그의 상황을 어려워 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고 그곳에서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딤후 4:6을 보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그는 자신의 순교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는 내일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딤후 1:12를 보자.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그의 순교와 임종이 다가오고 있을 때였지만 그는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신이 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능히 지키실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But God’의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미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극심한 상황보다도 더욱 확실한 상황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상황을 이길 수 있었다. 문장은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장을 쓰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환경을 이길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환경을 부인할 필요가 없다. 물론 우리에게도 두려움이 있다. 이것을 부인하라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란 현실 속에서 그 중심 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능력이 되는 것이다. Christian들에게 주어진 능력이란 ‘Nevertheless’의 신앙이며 ‘But God’의 신앙에서 비롯된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상황이 무서워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는 것이다.
(2) 사랑
우리는 어떻게 사랑으로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끔찍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인간 된 주님도 그 상황이 두려웠을 것이다. 엄청난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위에서 모든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다. 그 분이 끝까지 사명을 다 이룰 수 있었던 능력은 바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면서도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할 만큼 우리 주님에게는 큰 사랑이 있었다.
또한 어떻게 기독교가 주후 400년까지 로마와 전 유럽으로 확장될 수 있었는가? 그 기간 동안 유럽에는 2~3 차례의 큰 역병이 돌았다. 역병이 돌면 보통의 사람들은 대개 이성을 잃게 된다고 한다. 당시에는 부모가 병든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병든 부모를 버리는 것이 보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누구를 버리지도 않았고 그들을 피해 도망가지도 않았다. 그들은 아픈 형제 자매와 이웃을 간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자신들이 역병에 전염되면 그들은 담대히 죽음의 길을 걸어갔다. 이런 사랑의 실천을 보면서 어떻게 로마가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사랑은 이같이 모든 두려움 속에서도 담대한 능력을 준다. 오직 사랑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오직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현실을 이겨야 한다. 이것이 몸 된 교회가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다. 두려움 앞에서 사랑의 action이 있어야 한다.
(3) 근신하는 마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복음으로 사는 삶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려운 상황을 능력과 사랑으로 이기고 근신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삶을 의미한다. 세상을 사는 성도들이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다. 두려움에 지배를 받게 되면 우리는 쉽게 믿음의 focus를 잃게 된다. 그러나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된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똑바로 걸어가는 것이 우리 믿는 성도들의 자세이다.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깨닫는 것이 근신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바로 주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sound mind (견고한 마음) 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sound mind를 가지고 가운데 길을 걸어가야 한다.
찬송가 470장은 이러한 은혜를 가장 잘 담은 찬양 중 하나이다. 이 찬송을 작사한 스패포드는 시카고 대화재로 인해서 자신의 재산을 일주일 사이에 모두 잃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프랑스로 향하던 배가 충돌사고로 인해서 침몰되게 되는데 이 사고로 인해서 그는 자신의 네 아이를 모두 잃게 되었다. 그야말로 일주일 사이에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상황에서 이 찬송가의 가사를 작사하였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이러한 마음의 평안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가? 아니다. 어떤 이는 이런 상황을 보고 ‘운명론’을 말하기도 한다. 운명론이란 ‘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이를 꽉 물고 견디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찬양은 결코 운명론으로 설명될 수 없다. 운명론자들은 찬양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찬양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근신하는 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며, 모든 삶 속에서 찬양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한 밤 중에 주시는 근신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올리는 자들이다. 평화로 말미암아 부르는 찬양이다. 우리에게는 캄캄한 밤에 깨닫고 부르는 찬양이 있다. 그 밤 중에 우리는 진정한 고백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우리가 모든 것을 잃게 되어도, 그리고 홀로 남아도 우리는 ‘God is enough’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다. 우리 인생의 한 밤 중에도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두려움 가운데에서도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엄청난 은혜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때로는 병과 궁핍함으로 우리가 스스로 handle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도 되지만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붙잡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위로로 담대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아멘.
2) 근신(謹愼) 뜻
학창시절 무기정학, 유기정학, 근신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가수 비(雨)는 일주일 근신 처분을 받았다. 처분(處分)은 처리를 했다는 행정적 절차이고, 국방부의 행정 효력이 미친다는 뜻이다. 재건축 재개발에서 조합설립 인가도 행정처분을 받게 된다.
근신(謹愼)은 도대체 뭘까? 말만 들어도 아주 묵직한 표현이다. 마음으로 반성하고 뉘우치고 깊게 회심하라는 뜻이 들어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한자로 풀어보자.
근(謹)은 ‘삼가다’는 뜻이다. 말씀 언(言)과 진흙 근(堇)의 합성이다. 진흙 근(堇)과 힘 력(力)이 합쳐지면, 부지런할 근(勤)이 된다. 진흙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부지런히 힘쓴다는 뜻도 되고, 진흙 같은 옥토 밭에 ‘쟁기(力)’로 밭을 갈므로, 부지런하다는 뜻도 된다. 말(言)과 진흙이 합쳐졌다.
진흙 같은 말? 또는 찰흙 같은 언어? 말을 함에 있어서 ‘진흙처럼’ 하라는 뜻이다. 즉, ‘삼가다’는 뜻은 ‘말조심’이다. 진흙은 ‘진짜 흙’을 의미하고, 말을 함에 있어서 진짜 흙처럼 말을 하라, 말로서 흙을 빚듯이 말을 하라. 말과 흙을 섞어서 그릇을 만들 듯 조심스럽게 말을 하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말조심’ ‘입조심’이다. (나도 근신해야겠다.)
신(愼)도 ‘삼가다’는 뜻이다. 마음 심(心)과 진리 진(眞)이 합쳐진 글자이다. 진리 진(眞)은 발이 셋 달린 솥(제사용鼎)의 반만 표시한 글자이다. 솥 위에 숟가락을 그려놓았다. 진리란 바로 솥단지에 새겨진 문장이며, 또한 솥단지에서 제사 음식의 맛을 보는 마음가짐이다. ‘삼가다’는 뜻은 곧 ‘제사를 지내는 마음가짐’이다.
근신(謹愼)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사람들을 삼가고 오직 신(神)만을 의식하라는 뜻이다. 제사를 지낼 때, 제사장들은 세속적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 냉수 목욕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낸다. 언어 조심, 몸조심, 행동 조심이 필요하다.
가수 비에게 내려진 근신(謹愼) 처분은 다름이 아니라, 세속적 생각, 세속적 언어, 세속적 행동을 모두 단절하고 오직 국가적 책무에만 집중하라는 것이다. 군인으로서 노래가 국가적 책무라면 그것만 해야지 사적인 여자 친구 사귀는 것은 공적 책무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근신(謹愼)은 제사장이 거룩한 제사를 지내듯 군 생활에는 군 생활만 하고 사적인 일은 제대 후에 하라는 것이다. 7일간 근신 처분, 남은 7개월 동안 군대 생활에 더욱 책임감 있게 임해야 하지 않을까? 가수 비(雨)가 정말로 세계적 공인으로서 비(rain) 라면...
/ 장창훈 기자
2. 본문의 현실에서의 적용
1) 일반적인 적용
성경 말씀은 다른 말로 성령 말씀의 검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삶을 살 때에 예수를 믿기 전에는 본능에 충실해서 혹은 주변의 조언이나 자신이 배운 사상적인 원리에 따라서 자신에게 유익이 되도록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이는 믿지 않는 분들이 삶을 사는 방식이며 이렇게 사는 자신이 정당하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고 굳게 믿고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사는 것이 죄가 됨을 절대로 잘 알지 못하니 이런 죄로 물든 사람들과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은 후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들에게 인내하면서 사랑을 베풀면서 이들을 주께로 인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분은 먼저 자신이 예수님께 죄인임을 알고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십니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살겠다고 하나님께 약속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의 자신의 욕망대로 산 것이 죄 됨과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면 과거에 자신과 같이 살면서 죄가 죄 됨을 알지 못하고서 나보다도 잘 살고 있고 나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서 나를 훈계하고 나를 가르치려 하고 나를 자신들이 사는 방식으로 끌고 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삶에 동조하지 않고 이들의 주장을 따르지 않으면 왕따도 당하고 승진에 불이익 있고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이 따라옵니다. 거룩한 백성이 거룩을 추구하면서 과거에 자신의 삶에서 떠나고자 하면 당연하게 따라오는 유혹들입니다.
때로는 박해가 옵니다. 형제의 버림이 있습니다. 모두가 제사로 모이는데 가지 않으면 저절로 형제로부터도 따돌림이 옵니다. 그리고 이들을 사랑하면서 이들을 주께로 인도하려고 하면 다양한 반대가 있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을 왜 이렇지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믿으면 당연하게 따라오는 현상이며 우리는 이 싸움을 기도로 인내로 사랑으로 주님과 함께 지혜롭게 이기면서 이들을 주께로 인도할 사명자입니다. 모든 믿는 분이 져야 하는 당연한 짐입니다.
사도는 이런 짐을 잘 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짐을 지고 가는데 가장 힘이 되는 도구가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적 전투는 혈과 육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기도로 그리고 주님과 함께 성령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새로운 직장을 갈 때도 그렇고 면접을 볼 때도 그렇게 유난히도 괴롭게 하는 사람을 만날 때도 그렇게 그리고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일과 시간도 마귀의 간계로 찾아옵니다. 그리고 정말로 어려운 일로 법정에 설 수도 있고 경찰서에 갈 수도 있고 폭력이 올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박해의 시기에 쓰진 서신서입니다.
이 두려움에 올 때 먼저 우리는 이 말씀으로 이겨야 합니다. 두려움은 두려운 마음이 나에게 생겼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반드시 이 말씀을 묵상하며 알아야 합니다. 이를 알게 되면 이 두려움이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니요 또 좋은 것도 아님을 알게 되며 이 마음 상태를 속히 다른 마음가짐으로 바꾸어야 됨을 알게 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은 무엇인가 생각할 때 다음 구절의 능력과 사랑과 그리고 근신하는 마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기에 이런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함을 알게 되고 속히 두려움에서 기도하면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설명이 길어서 그렇지 이 말씀의 묵상과 동시에 두려움을 털고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주실 능력에 대해서 확신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근신하는 마음을 속히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영적은 전투는 마음으로 하는 전투가 참으로 많은데 성령께서 이렇게 하도록 말씀도 생각나게 하시고 격려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절대로 홀로 하는 전투가 아니기에 우리는 언제나 승리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도 수도 없이 두려움이 올 때 이런 방법으로 이 말씀으로 승리했습니다. 두려움에 쌓여서 어떤 승리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이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님을 속히 아시고 또 굳게 믿으시고 다음 구절의 마음으로 이동을 하셔야 합니다.
두려움을 이겨야 사랑도 할 수가 있습니다.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은 절대로 사랑이 아니며 굴복이며 비겁이며 죄 된 것들로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두려움이 언제나 우리에게 엄습할 때가 있는데 속히 물러쳐야 합니다. 어떤 어두운 격리된 공간에 홀로 가야 하는 경에 머리털이 쭈뼛하는 경우도 있는데 속히 기도로 물리치고 주님이 늘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음을 잊지 말고 속히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상대도 속히 사랑을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전도하다 보면 괴롭히는 사람을 오래 참고 있으면서 사랑을 해야 되는 경우가 많은데 쉽지 않지만 이때도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이겨내야 합니다. 그리고 죄인의 과거의 모습을 버리고 순해지고 착해지고 용서하다 보면 그리고 잘 대해주다 보면 이를 자신을 사랑해서 그렇게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고 교만해서 자신이 잘 나고 나는 못나서 그렇게 나는 해야만 되는 사람으로 당연시 대하는 세상의 사람이 참으로 많으니 이도 절대로 나를 종으로 부리도록 용납지 말고 반드시 깨어서 지혜롭게 이도 이겨야 하는데, 모든 일에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인도해 주시니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한 시도 벗어나서 살 수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시도 때도 없이 주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묵상하고 그리고 주님을 의지해야만 승리할 수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라며 이를 바울 사도께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표현을 했다고 봅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전투이기에 주님께서 전투를 주관하시고 우리는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해야 하고 그리고 주님과 하나인 성령의 충만과 인도를 또 받아야 하며 반드시 어떤 경우에도 말씀을 묵상하면서 말씀으로 싸워야 하며 이는 두려운 마음에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기에 속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닌 두려움 마음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의 말씀이 제 모든 오천만의 로마서의 핵심이 될 것인데 이 말씀대로 성령께서 선물로 오시기 때문이며 이런 전투를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세상의 삶에서 하도록 주님께서 성령을 가장 좋은 선물로 주시는데 회개가 없어서 이 귀한 선물을 놓치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마귀와 싸우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금방 아셔야 되는데 우리는 이런 전투에서 멀어져서 세상의 연락에 취하고 물질에 취하고 명예에 취하고 사상에 취해서 이런 멋지고 귀한 주님의 일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있고 영생과 천국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된 삶은 멀리하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이렇게 사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귀가 주는 두려움은 속히 떨치고 하나님께서 후히 주시는 사랑과 능력과 근신하는 마음으로 속히 승리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과 능력에 대해선 대부분의 분들이 잘 알고 있으니 근신하는 마음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2) 구체적인 적용 사례
주차 경비원 박과 김은 아파트 주차장 출입 주차 경비를 합니다. 2인 일조가 되어서 근무를 하는데 한 사람이 한 시간씩 투입이 되어서 주차원 박스에서 고속도로에서 오는 차량의 출입의 통제를 하고 또 아파트에서 시내로 가는 길의 차량의 통제를 한다고 합시다. 지금은 모든 시설이 자동으로 되어 있어서 차량을 인식하고 차단기 자동으로 올라가고 내려가는데 예전에는 모두가 사람이 수동으로 했습니다. 과거의 예입니다. 이 아파트는 큰 산 아래에 잘 지어졌고 도시와는 조금 떨어져 있으며 고속도로에서 진입하는 길이 있고 이 두 길만이 아파트로 갈 수가 있는 유일한 길이라 차에 대해서는 이 두 주 차 요원이 일만 잘하면 아파트 주민은 참으로 편안하게 생활을 할 수 있는 좋은 아파트라고 합시다.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빨간색 두 좁은 사각형이 수동 차단기로서 박과 김은 각자 차량이 들어오는 방향의 차량을 차단기로 통제를 하는 일이 부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에서 진입하는 차량은 별로 많지가 않고 시내로 왔다 갔다 하는 차량이 좀 더 많은데 근무의 성질이 이러하니 두 사람이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씩 교대로 근무를 하루에 8시간씩 하고 있다고 가정을 합니다.
박은 열혈 크리스천이고 김은 불신자입니다. 박은 젊고 활동적이고 김은 나이가 좀 더 많고 비활동적이며 동작이 느립니다. 하루는 이 둘이 각자의 자리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먼저 김이 A 쪽의 근무를 담당하고 당연히 박은 B 쪽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주민들이 시내로 출입이 잦아서 김 씨의 일이 많고 반대로 박 씨는 일이 별로 없어서 김 씨 쪽을 같이 보다가 돕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김 씨의 친구가 찾아와서 대화를 길게 하면서 차단기를 올려둔 채로 상당한 시간을 그대로 있기에 감독자가 이를 보면 또 문책을 할 수가 있기에 도와준다고 참다가 나가서 차량이 오는 것을 살피지 않고 차단기가 내려가는 버턴을 갑자기 눌렀습니다. 열혈 크리스천 박은 이렇게 김 씨를 돕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아파트에서 시내로 내려오던 차량에 그 아파트에 사는 정부 고위직에 근무하는 분이 기사의 운전으로 같이 타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니 차단기가 올려져 있어서 그냥 그대로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이 박 씨와 기사가 동시에 한 사람은 차단기를 주변의 살핌 없이 내리려 하고 또 기사는 그냥 통과하려다가 차단기가 내려올 때 차의 앞 부분 후드를 통과하고 앞 유리에 걸치게 되었습니다. 마침 박 씨가 나중에라고 눈치를 채고 소리를 급하게 지르고 운전기사도 속히 차량을 정지를 했습니다. 그냥 지나갔으면 차단기도 휘고 우리도 깨어지고 안에 탄 고위 공무원도 깨어지는 유리에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다행히 박 씨가 급히 차단기를 올리는 버턴을 눌러 차단기를 올리고 차를 살피니 큰 피해가 없습니다. 기사도 내려서 차를 살피니 차단기가 내려오면서 닿은 유리 부분도 이상이 없고 유리와 연결된 철부분이 살짝 흠이 났는데 이도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찾을 수가 없는 작은 흠이었습니다.
급히 박 씨는 운전자에게 흠을 고쳐주겠다고 하니 운전자는 별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차가 오는 것을 보고 차단기를 내려야지 한마디 하고 다시 차를 몰고 떠났습니다. 고위 공무원은 안도하며 아무 말 없이 없었다고 합시다.
이것이 사실 팩트입니다. 이제 문제를 해결을 해야 합니다. 고위 공무원이 관리실에 연락을 해서 주차원이 근무에 소홀히 한다고 하면 이런 사실을 보고하면 박 씨는 문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거짓 증거의 위험에 대해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박 씨가 자신의 주의를 살피는 임무를 소홀히 한 것을 숨기고서 자신의 양심에 반하게 이렇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는데 자신은 차량이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서 차단기를 내렸는데 운전자가 차단기 앞에서 저속으로 살피면서 지나가야 하는데 너무 속히 지나가고자 해서 생긴 일이다. 즉 운전자가 차단기 앞에서 멈추는 임무를 소홀히 한 것이다라고 주장을 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면하고자 할 것입니다.
김 씨는 자신이 친구와 오랫동안 대화를 하면서 차단기를 내리는 임무를 소홀히 한 것을 숨기고 자신의 근무시간과 장소에 권한이 없는 박 씨가 함부로 일을 하려다가 발생한 일이니 박 씨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을 할 것입니다.
운전기사는 당연히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 차단기가 분명하게 올려져 있었는데 주차요원이 주위를 살피지 않고 급히 내려기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책임을 ㅁ면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참으로 거짓 증거를 하면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이렇게 되면 모든 법이 어긋나게 됩니다. 10계명의 9계명에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팩트보다도 더 변론의 우세가 먹히는 세상입니다. 변호사는 팩트를 발견하고 팩트에 의거해서 법을 집행하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정의가 섭니다.
자 다시 우리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열혈 크리스천 박 씨는 사랑하는 마음이 많습니다. 동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일을 할 능력도 있습니다. 젊고 또 경험도 있고 그리고 순발력도 좋습니다. 사랑과 능력이 있는 크리스천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을 하려고 능력을 사용하다가 이렇게 낭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박 씨는 정직해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해도 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주위를 살펴야 하는 주차원의 의무를 행치 않았다고 다행히 손실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잘못으로 인정을 해서 모두가 책임을 면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박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번 일로 묵상을 하다가 디모데 후서 1장 7절 이 말씀이 갑자기 생각이 나면서 사랑도 하고자 했고 젊은 경험과 능력으로 힘껏 돕고자 했지만 마지막 근신하는 마음을 지키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근신하는 마음은 절대로 조급한 마음이 아닙니다. 근신하는 마음은 질서를 지키는 마음입니다. 근신하는 마음은 함부로 나서는 마음이 아닙니다. 근신하는 마음은 모든 법을 지키는 마음입니다. 근신하는 마음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근신하는 마음은 좋은 일이고 사랑을 하는 일이고 큰 능력이 있다고 자의 자행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렇다 할지라도 여전히 주님의 눈치를 보고 주님의 동행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말씀의 의미를 디모데 후서 1장 7절을 통해서 교훈으로 받은 박 씨는 이제는 절대로 함부로 차단기를 내리거나 올리지 않고 반드시 주변을 살피고 그리고 김 씨의 형편을 살펴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김 씨와 어떤 고속도로에서 잘못 진입한 여인 운전자와 실랑이가 붙었습니다. 김 씨는 이곳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여자 운전자를 다구치고 여자 운전자는 다시 후진을 고속도로로 들어가기가 무섭다고 차단기를 올려달라고 소리를 치다 결국 웁니다.
이제 박 씨는 전과 같이 함부로 참견하지 않고 주님의 눈치를 보면서 어떻게 도울까 먼저 기도하고 그리고 도울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경찰을 부르고 어쩔 줄 몰라하는 여 운전자를 안심시키고 지나가는 주민 두 분에게 부탁을 해서 차를 후진해서 고속도로에 잘 진입하도록 놓고서 그 두 분이 앞과 뒤를 보아주고 무사하게 그여 운전자를 돌려보냈다는 이야기가 또 전해졌습니다. 잘났다고 자신의 근무를 외면한 채 그 여자의 차에 올라서 스스로 운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를 통해서 근신하는 마음의 자세에 대해서 같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무엇에 빠지면 근신하는 마음 즉 자신을 살피고 조심하는 마음의 상태가 무너지고 그리고 이렇게 잘못을 행하면서도 잘못도 인식을 못 하게 되고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능력이 있다고 즉 교회의 대형화로 큰 능력이 생겼다고 근신하는 마음의 자세를 잊은 목자는 세상의 욕도 모르고 교인들의 욕도 모르고 무엇에 도취가 되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세 가지 모두를 묵상하면서 능력이 생겼다고 즉 물질이 많아졌다고 절대로 가난하고 어려운 형제나 이웃 앞에서 뻐기고 또 움켜쥐고 죄를 지으면서 불의 한 삶 속으로 절대 나아가지 않아야 하는데 근신하는 마음에 대한 묵상은 이런 죄를 이기는 힘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한다고 능력이 있다고 취하지 말고 늘 겸손하고 주님의 눈치를 보는 자세를 읽지 않고 그리고 행동이 착각으로 법을 위반하지는 않는지 살피고 그리고 사랑을 받고 능력의 행함을 받을 상대방의 처지도 반드시 배려해야겠으니 이는 근신하는 마음 즉 이도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니 반드시 성급함과 교만과 도취의 마음을 이기고 늘 근신하며 주님과 언제나 동행하며 언제나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늘 고난을 함부로 버리지 말고 또 주를 위해서 고난의 자리로 차처하고 살아야 하는 것은 취한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만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갖추고 편히 살고 있다면 고난 받는 형제를 외면하시고 살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 근신에 대해서 묵상하시고 내가 너무나 옳다고 믿는 인생이나 삶에서 취한 부분이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시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를 위해서 오천만의 로마서에 취하지 말게 기도를 또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