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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8년(2014년) 2월 27일 후기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17)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2월 27일 후기.hwp
서울경기강원지역방 2772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772
의 후속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열일곱 번째로 읽었습니다. 오늘 불서읽기에는 환희장엄 법우와 저 관문, 이렇게 두 명이 참석했습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Thich Nhat Hanh,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중 Part Three Other Basic Buddhist Teachings: Chapter Twenty The Three Bodies of Buddha 와 Chapter Twenty-One The Three Jewels 를 읽었습니다. 관문이 가지고 있는 책으로 156 페이지 첫줄부터 164 페이지 7째 줄까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읽는 동안의 후기는 저희가 그 날 읽은 부분의 영어 본문과 그 번역서인 <진현종 옮김, 틱낫한 스님의 아! 붓다, 반디미디어> 의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PART THREE Other Basic Buddhist Teachings
제3부 기타 불교교리
Chapter Twenty The Three Bodies of Buddha
20장 부처님의 삼신(三身)
It is natural for human beings to want to fify qualities like love, freedom, and understanding. It was in this spirit that the Buddha came to be represented as having "three bodies": Dharmakaya, the source of enlightenment and happiness; Sambhogakaya, the body of bliss or enjoyment; and Nirmanakaya, the historical embodiment of the Buddha viewed as one of the many transformation bodies sent forth by the Dharmakaya. Kaya means "body."
사람들이 사랑, 자유 이해 같은 훌륭한 특성을 의인화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부처님은 ‘3신(三身)’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이 나오게 된 것이다. 3신은 깨달음과 행복의 원천인 법신(法身)과 지복(至福) 또는 환희의 몸인 보신(報身) 그리고 법신(法身)이 보낸 여러 가지 변화신(變化身) 중의 하나로 간주되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부처님인 화신(化身)을 말한다.
When he was about to pass away, the Buddha told his disciples, "Dear friends, my physical body will not be here tomorrow, but my teaching body (Dharmakaya) will always be with you. Consider it to be the teacher who never leaves you. Be islands unto yourselves, and take refuge in the Dharma. Use the Dharma as your lamp, your island." The Buddha meant that in order to have nirvana available to us in every moment, we have to practice the Dharma, the Way of Understanding and Love. That is the birth of Dharmakaya, the body of the teaching, the body of the Way, the source of enlightenment and happiness. The original meaning of Dharmakaya was quite simple — the way to realize understanding and love.
부처님이 막 입멸하려고 할 때,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벗들이여, 나의 육신은 내일이면 이곳에 있지 않겠지만, 가르침의 몸[법신(法身)]은 언제나 그대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 법신(法身)을 절대로 그대들을 떠나는 일이 없는 스승으로 삼아라. 스스로를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 법을 등불로 삼아라.” 부처님은 어느 때나 열반에 들 수 있으려면, 사랑과 이해의 길인 법을 수행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가르침의 몸, 길의 몸, 깨달음과 행복의 원천인 법신(法身)이 탄생하게 된다. 법신(法身)의 본래 뜻은 매우 간단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해와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었다.
The Dharmakaya is the embodiment of the Dharma, always shining, always enlightening everything. Anything that can help us wake up is part of the Dharmakaya —trees, grass, birds, human beings, and so on. When I hear a bird sing, if I return deeply to myself and breathe and smile, that bird reveals the Buddha's Dharma body. People who are awake can hear the Dharma being preached in a pebble, a bamboo, or the cry of a baby. Anything can be the voice of the Dharma if you are awake. Every morning, when you open the window and see the light streaming in, know that it, too, is part of the Dharmakaya.
법신(法身)은 언제나 빛을 발하며 만물을 깨달음으로 인도해주는 법이 구체화된 것이다. 우리의 깨달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나무, 풀, 새, 사람 등등을 비롯해서 무엇이나 법신(法身)의 일부이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와서 숨을 쉬고 미소를 짓게 된다면, 그때 그 새는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깨달은 사람은 자갈, 대나무 또는 갓난아이의 울음 속에서도 법을 설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 무엇이나 법의 소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침이 되어 창문으로 햇빛이 비칠 때, 그것 역시 법신(法身)의 일부로 알아야 한다.
Opening the window,
I look out onto the Dharmakaya.
How wondrous is life!
Attentive to each moment,
my mind is clear like a calm river.1
창문을 열고
법신을 바라보네.
삶은 정말 불가사의한 것!
매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니
내 마음은 잔잔한 강물처럼 맑네.
1 Thich Nhat Hanh, Present Moment Wonderful Moment, p. 4.
The living Dharma is not just a library of sutra books or audio or video cassettes of inspiring Dharma talks. It is mindfulness manifesting in your daily life. When I see you walking mindfully in peace and joy, a deep presence is also awakened in me. When you walk like this, the sun of the Dharmakaya in both of us shines brightly. When you take good care of yourself, your brothers, and your sisters, I recognize the living Dharma. When you are really there, the Dharmakaya is easy to touch.
살아있는 법이란 그저 경전 더미 혹은 영감을 주는 설법이 담겨있는 오디오나 비디오카세트가 아니다. 살아있는 법은 일상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알아차림이다. 그대가 평화스럽고 기쁜 모습으로 마음을 집중해서 걷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 속에서도 심오한 기운이 깨어남을 느낀다. 그대가 그런 식으로 걸을 때 우리 안에 있는 법신(法身)의 태양이 눈부시게 빛난다. 그대가 자신과 형제자매를 잘 보살필 때 나는 살아있는 법을 본다. 그대가 정말 그렇게 할 때 법신(法身)을 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Dharmakaya is expressed not only through words and actions, but also through non-action. Look at the tree in the garden. An oak tree is an oak tree, and that is all it has to do. Every time we look at it, we feel stable and confident. It offers us air to breathe and shade to protect us during the summertime. If an oak tree is less than an oak tree, we will all be in trouble. We can learn the Dharma from an oak tree, so we can say that it is part of the Dharmakaya. Each pebble, each leaf, and each flower is preaching the Saddharmapundarika Sutra.2 The Buddha has his Dharma body, and we Buddhas-to-be must express the Dharma through our own Dharma bodies. When someone says something challenging, if we can smile and return to our breathing, our Dharma will be a living Dharma, and others will be able to touch it. Sometimes, through non-action, we can help more than if we do a lot. Like a calm person on a small boat during a storm, just by being there, we can change the situation.
법신(法身)은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행동이 아닌 것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정원에 있는 나무를 쳐다보라. 떡갈나무는 떡갈나무일 뿐이고, 그것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없다. 떡갈나무가 늠름하게 서있는 모습을 보면 안정감과 신뢰감이 느껴진다. 그것은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공기와 여름에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한다. 만일 떡갈나무가 떡갈나무 역할을 못한다면, 우리는 곤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떡갈나무에게서 법을 배울 수도 있으므로 그것은 법신(法身)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자갈, 나뭇잎, 꽃들은 모두 법화경(法華經)을 설하고 있다.(주2) 부처님은 당신의 법신(法身)을 가지고 계시므로 앞으로 부처가 될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법신(法身) 통해 법을 드러내야만 한다. 어떤 이가 도전적인 말을 할 때, 우리가 웃으면서 호흡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우리의 법은 살아있는 법이 될 것이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때로는 행동하지 않고서도 분주하게 움직일 때보다 더 많이 남을 도울 수 있다. 폭풍우가 치는 동안 작은 배에 앉아 있으면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단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상황을 바꿀 수도 있는 법이다.
2 See Thich Nhat Hanh, "Beckoning," in Call Me By My True Names, p. 107.
주2) Thich Nhat Hanh, Call Me By My True Names, p. 107에 있는 "Beckoning"을 보라.
The Dharma body is the Buddha that is everlasting. Mahayana Buddhists later began to call the Dharmakaya Vairochana, the ontological Buddha, the soul of the Buddha, the spirit of the Buddha, the true Buddha, the ground of all being, the ground of enlightenment. Finally, Dharmakaya became equivalent to suchness, nirvana, and Tathagatagarbha ("the womb of the tathagata").3 This is a natural development. But if we spend too much time talking about these things, it will be less valuable than learning how to touch our own Dharma body through dwelling in peace and mindfulness. When you touch the Dharmakaya, you touch the Buddha. The Buddha said very clearly that his Dharma body is even more important than his physical body. For his Dharmakaya to continue, the Buddha relies on us, on our practice.
법신(法身)은 영원한 부처님이다. 나중에 대승불교도들이 법신(法身)을 존재론적 차원의 부처님, 즉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Vairochana)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 칭호에는 부처님의 영혼, 부처님의 정신, 진정한 부처님, 모든 존재의 근거, 깨달음의 근거라는 뜻이 들어있다. 결국 법신(法身)은 진여, 열반, 여래장(如來藏)(주3)과 똑같은 것이 되었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논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평화스럽게 알아차림으로써 자신의 법신(法身)을 접하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유익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법신(法身)을 접하는 것은 부처님을 접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당신의 법신(法身)이 육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당신 법신(法身)의 영속을 위해 우리 다시 말해 우리의 수행에 기대를 걸고 계신다.
3 Tathagata is a title of the Buddha meaning "he or she who has come from the world of suchness (ultimate reality)."
주3) 여래는 부처님을 일컫는 칭호의 하나로 ‘진여(궁극적 실재)의 세계에서 온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The Sambhogakaya is the Buddha's body of bliss, enjoyment, celebration, results, or rewards. Because the Buddha practices deeply, he experiences boundless peace, joy, and happiness; and Sambhogakaya is the fruit of his practice. When we practice mindfulness, we, too, can enjoy this fruit. Breathing in and looking at the blue sky, drinking our tea in mindfulness, we can feel happy just being alive. This is our body of enjoyment, Sambhogakaya.
보신(報身)은 지복(至福), 환희, 축하, 결과 또는 보상(報償)으로 이루어진 부처님 몸이다. 부처님은 철저하게 수행하셨기 때문에 한량없는 평화와 기쁨 그리고 행복을 얻게 되셨는데, 보신(報身)은 바로 그러한 수행의 결과이다. 우리가 알아차림을 수행할 때, 우리도 그러한 결과를 누릴 수 있다. 알아차림 속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 차를 마신다면, 우리는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이 때 우리의 몸은 기쁨으로 이루어진 몸, 즉 보신(報身)이 된다.
I once read a story about a Christian man whose faith in God was not firm. He was hunting in the jungles of Africa when he lost his way. After some time, still lost, he decided to pray for help, but because his faith was weak, he prayed weakly. "God, if you exist, please come and save me now." As soon as he finished speaking, an African man appeared. The man showed him the way to a village, and he was saved. But then he wrote in his diary, "I called upon God, but only a Negro appeared." In fact, the man who saved him was God himself, but because he was ignorant, he failed to see that. We can say that the man who saved him was the Sambhogakaya Buddha. Buddha and God appear in many forms. The Buddha is not only in the cloud. He is in our hearts, and in the hearts of many others.
신에 대한 믿음이 그다지 굳건하지 않은 기독교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사냥을 하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얼마 후 여전히 길을 찾지 못하자, 그는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기로 했는데, 믿음이 약한 탓에 기도 역시 대충 했다. “하나님, 당신이 계신다면 지금 오셔서 저를 구해주십시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아프리카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이 마을로 가는 길을 가르쳐준 덕분에 그 기독교인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하나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는데, 흑인이 나타났을 뿐이다.” 사실 그 기독교인을 구해준 이는 바로 하나님이었지만, 그는 무지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사람을 구해준 흑인은 보신불(報身佛)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부처님과 하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부처님은 구름 위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우리 마음속에,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계신다.
Every time we touch something beautiful, in harmony and peace, we touch the Sambhogakaya Buddha. This is called "self-enjoyment." When we feel happy and peaceful, our happiness and peace radiate around us, and others can enjoy it as well. This is called "the enjoyment of others of our body of bliss." When we do this, many Sambhogakayas are born into the world. Each of us has the capacity to bring joy toothers and to help relieve them of their suffering, if we know how to cultivate the seeds of awakening within ourselves. Like the Dharmakaya, the Sambhogakaya body of the Buddha is available, if we know how to touch it.
조화와 평화를 잃지 않고 아름다운 것을 접할 때 우리는 보신불(報身佛)을 접하게 된다. 이것을 일러 ‘스스로 즐김[自受用(자수용)]’이라고 한다. 우리가 행복과 느낄 때, 그 행복과 평화는 주변에 발산되고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그것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을 일러 ‘지복(至福)으로 이루어진 우리 몸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타수용(他受用)]’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수많은 보신불(報身佛)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깨달음의 씨앗을 기르는 법을 알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부처님의 보신(報身)은 법신(法身)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것을 접하는 법을 알고 있는 한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Shakyamuni, the historical Buddha,is the Nirmanakaya, a beam of light sent into the world by the sun of the Dharmakaya to help relieve the suffering of living beings. Shakyamuni Buddha was a real human being, and the Dharmakaya was embodied by his presence. The living Buddha is still available to us as an embodiment, as a ray of the sun of the Dharmakaya. If that ray is not apparent to you, don't worry. There are many other rays, or transformation bodies, expounding the Dharma — the trees, the birds, the violet bamboo, and the yellow chrysanthemum. Shakyamuni is just one of these transformation bodies. You can be in touch with the Nirmanakaya through him or through any of these others.
역사적 부처님이신 석가모니는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법신(法身)이라는 태양이 이 세상으로 쏘아 보낸 한 줄기 빛, 즉 화신(化身)이다. 석가모니불은 진짜 인간이셨는데, 그것은 바로 법신(法身)이 사람의 모습으로 구현된 것이다. 우리는 법신(法身)이라는 태양의 한 줄기 빛이자 구현인 살아계신 부처님을 지금도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그 빛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걱정할 것은 없다. 법을 설하고 있는 다른 빛 또는 변화신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나무, 새, 보랏빛 대나무와 노란 국화 등이다. 석가모니는 이러한 변화신 중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석가모니나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화신(化身)을 접할 수 있다.
Each of us has three bodies —a Dharma body, an enjoyment body, and a physical body. Please discover your own Dharma body, your own body of bliss, and your own body of transformation. These bodies are deep within you; it is only a matter of discovery. When you practice walking meditation and release some of your sorrow and your anger, when you look deeply into things and shed some of your misperceptions, cravings, and attachments, you discover the body of the Dharma, the body of bliss, and the body of transformation within you. When you touch these three bodies of yourself and of the Buddha, you will suffer less. The Dharmakaya, Sambhogakaya, and Nirmanakaya are available. Allow yourself to be struck by the beams of light emanated by the Buddha and to be transformed. When we know how to discover the seeds of enlightenment within ourselves, we realize our capacity to transform many others as well. The Buddha depends on us to live mindfully, to enjoy the practice, and to transform ourselves, so we can share the body of the Dharma with many other living beings.
우리 모두는 삼신(三身), 즉 법신(法身), 보신(報身) 그리고 육신(肉身)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법신(法身), 보신(報身) 그리고 변화신(變化身)을 찾아보라. 이 삼신(三身)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있기에 다만 발견의 문제일 뿐이다. 걷기 명상을 하면서 슬픔과 화를 어느 정도 벗어던지고, 사물을 깊숙이 들여다봄으로써 착각과 갈망, 집착을 어느 정도 떨쳐버리면, 자기 안에 있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그리고 변화신(變化身)을 발견하게 된다. 자기 자신과 부처님의 삼신(三身)을 접하게 되면 고통이 줄어들 것이다. 법신(法身), 보신(報身) 그리고 화신(化身)은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부처님이 발산하는 빛을 받아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한다. 자기 안에 있는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하는 법을 알게 되면, 다른 수많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부처님은 우리가 법신(法身)을 수많은 다른 중생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알아차리는 자세로 살아가면서 수행을 즐기며 스스로를 변화시킬 것을 믿고 계신다.
CHAPTER TWENTY-ONE The Three Jewels
21장 삼보(三寶)
I take refuge in the Buddha,
the one who shows me the way in this life.
이번 생에 가야할 길을 보여주신
부처님께 귀의(歸依)합니다.
I take refuge in the Dharma,
the way of understanding and love.
이해와 사랑의 길인
법에 귀의(歸依)합니다.
I take refuge in the Sangha,
the community that lives in harmony and awareness.
화합과 깨달음 속에 살아가는 공동체인
승가에 귀의(歸依)합니다.
Taking refuge in Buddha, Dharma, and Sangha is a fundamental practice in Buddhism. These are universal values that transcend sectarian and cultural boundaries. When we were in our mother's womb, we felt secure, protected from heat, cold, hunger, and other difficulties. To seek for refuge means to look for a place like that that is safe, a place we can rely on.
부처님, 법, 승가에 귀의(歸依)하는 것은 불교에서 근본적인 수행이다. 이것은 종파와 문화적 경계를 초월해서 보편적으로 중시되고 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우리는 더위, 추위, 배고픔, 기타 어려운 일과 맞닥뜨릴 일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의지처를 구한다는 것은 안전한 곳, 즉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곳을 찾는다는 뜻이다.
Faith (shraddha), in Buddhism, does not mean accepting a theory that we have not personally verified. The Buddha encouraged us to see for ourselves. Taking refuge in the Three Jewels is not blind faith; it is the fruit of our practice. At first, our Buddha may be a book we've read, our Dharma a few encouraging words we've heard, and our Sangha a community we've visited once or twice. But as we continue to practice, the Buddha, the Dharma, and the Sangha reveal themselves to us more fully.
불교에서 믿음은 우리가 몸소 확인해보지 않은 이론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우리 힘으로 알아보라고 권하셨다.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는 것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수행의 결과이다. 처음에는 부처님은 그 동안 우리가 읽어본 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분이고, 법은 어쩌다 들어본 적이 있는 조언에 불과하고, 승가는 한두번 방문해본 적이 있는 공동체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수행을 계속해 나감에 따라 부처님과 법과 승가는 우리에게 더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Faith is important for all religions. Some people say, "If we believe in God and it turns out that He does exist, we'll be safe. And if He doesn't, we won't have lost anything." Theologians speak of a "leap of faith," like a child jumping off the table into the arms of his father. The child is not one hundred percent sure his father will catch him, but he has enough faith to jump. In Buddhism, our faith is concrete, not blind, not a leap. It is formed by our own insight and experience. When we take refuge in the Buddha, we express trust in our capacity to walk in the direction of beauty, truth, and deep understanding, based on our experience of the efficacy of the practice. When we take refuge in the Dharma, we enter the path of transformation, the path to end suffering. When we take refuge in the Sangha, we focus our energies on building a community that dwells in mindfulness, harmony, and peace. When we touch these Three Jewels directly and experience their capacity to bring about transformation and peace, our faith is strengthened even further. The Three Jewels are not notions. They are our life.
믿음은 모든 종교에서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신의 존재를 믿고 있는데 신이 정말로 계신다면, 우리는 안전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 해도 우리는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다.” 신학자들은 ‘믿음의 도약’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이가 탁자에서 아버지 품으로 뛰어드는 것과도 같은 것이라 한다. 아이는 아버지가 자기를 잘 받으리라고 백 퍼센트 확신하지는 못한다 해도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머뭇거리지 않고 뛰어드는 것이다. 불교에서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나 도약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통찰력과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부처님께 귀의(歸依)하는 것은 그 동안 해온 수행의 효과를 근거삼아 아름다움, 진리, 깊은 이해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역량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법에 귀의(歸依)하는 것은 전환의 길, 즉 고통을 종식시키는 길로 들어선다는 것이다. 승가에 귀의(歸依)하는 것은 알아차림, 화합, 평화 속에 살아가는 공동체를 세우는 데 힘을 집중한다는 것이다. 삼보(三寶)를 직접 접해서 전환과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삼보(三寶)의 능력을 직접 겪어보고 나면, 우리의 믿음은 한층 더 굳건해진다. 삼보(三寶)는 관념이 아니다. 삼보(三寶)는 우리의 생명 그 자체이다.
In Chinese and Vietnamese, practitioners always say, "I go back and rely on the Buddha in myself." Adding "in myself makes it clear that we ourselves are the Buddha. When we take refuge in Buddha, we must also understand, "The Buddha takes refuge in me." Without the second part, the first is not complete. There is a verse we can recite when planting trees and other plants:
중국과 베트남에서 수행자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내 안에 있는 부처님께 귀의(歸依)합니다.” ‘내 안에’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부처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부처님께 귀의(歸依)할 때, “부처님이 내게 귀의(歸依)하신다.”는 것도 알아두어야 한다. 후자가 없으면, 전자도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 나무나 그 밖의 식물을 심을 때 이런 게송을 외어보는 것도 좋겠다.
I entrust myself to Earth,
Earth entrusts herself to me.
I entrust myself to Buddha,
Buddha entrusts herself to me.
나를 땅에게 맡기니
땅도 자기를 내게 맡기네.
나를 부처님께 맡기니
부처님도 당신을 내게 맡기시네.
To plant a seed or a seedling is to entrust it to the earth. The plant will live or die because of the earth. But the earth also entrusts herself to the plant. Each leaf that falls down and decomposes will help the soil be alive. When we take refuge in the Buddha, we entrust ourselves to the soil of understanding. And the Buddha entrusts himself or herself to us for understanding, love, and compassion to be alive in the world. Whenever I hear someone recite, "I take refuge in the Buddha," I also hear, "The Buddha takes refuge in me."
씨앗이나 묘목을 심는 것은 그것을 땅에 맡기는 것이다. 식물은 땅 때문에 살거나 죽는다. 그러나 땅도 자기를 식물에게 맡긴다. 땅에 떨어져 썩어가는 나뭇잎은 흙을 살아 숨 쉬게 만들어준다. 부처님께 귀의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이해의 토양에 맡기는 셈이다. 그리고 부처님도 이해와 사랑과 자비가 이 세상에 살아 숨 쉬도록 우리에게 당신을 맡기시는 셈이다. 어떤 이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말할 때, 내 귀에는 “부처님이 내게 귀의하신다.”는 소리도 들린다.
Going back, taking refuge in the Buddha in myself,
I vow, together with all beings, to realize the Great Way in
order to give rise to the highest mind (bodhichitta).
내 안에 있는 부처님께 귀의하며
나는 모든 존재들과 함께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고자
대도(大道)를 성취할 것을 서원합니다.
Going back, taking refuge in the Dharma in myself
I vow, together with all beings, to realize understanding and
wisdom as immense as the ocean.
내 안에 있는 법에 귀의하며
나는 모든 존재들과 함께 대해(大海)처럼
한량없는 지혜와 이해를 성취할 것을 서원합니다.
Going back, taking refuge in the Sangha in myself,
I vow, together with all beings, to help build a Sangha
without obstacles.
내 안에 있는 승가에 귀의하며
나는 모든 존재들과 함께 어떤 장애도 없는
승가를 세우는 데 협력할 것을 서원합니다.
During the Buddha's last months, he always taught, "Take refuge in yourselves, not in anything else. In you are Buddha, Dharma, and Sangha. Don't look for things that are far away. Everything is in your own heart. Be an island unto yourself." Whenever you feel confused, angry, or lost, if you practice mindful breathing and return to your island of self, you will be in a safe place filled with warm sunlight, cool shade trees, and beautiful birds and flowers. Buddha is our mindfulness. Dharma is our conscious breathing. Sangha is our Five Aggregates1 working in harmony.
부처님은 입멸을 앞둔 몇 개월 동안 늘 이렇게 가르치셨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귀의하라. 너희 안에 부처님, 법, 승가가 있다. 멀리 있는 것을 찾지 말라. 모든 것은 너희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 스스로에게 섬(의지처)이 되어라.” 혼란스럽고 화가 나거나 절망감이 들 때, 마음을 집중하는 호흡을 수행하면서 자기 자신이라는 섬에 되돌아온다면, 따뜻한 햇볕, 시원한 나무 그늘과 아름다운 새와 꽃들이 가득한 안전한 곳에 있을 것이다. 알아차림이 곧 부처님이고, 의식적인 호흡이 곧 법이며, 조화롭게 활동하는 5온(주1)이 곧 승가이다.
1 For an explanation of the Five Aggregates (skandhas), the components of our "self," see chap. 23.
주1)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인 5온에 관한 설명은 23장을 보라.
If I am ever in an airplane and the pilot announces that the plane is about to crash, I will practice mindful breathing while reciting the Three Refuges. When you receive bad news, I hope you will do the same. But don't wait until a critical moment to go back to your island of self. Go back each day by living mindfully. If the practice becomes a habit, when difficulties arise, it will be easy for you to touch the Three Jewels in yourself. Walking, breathing, sitting, and eating mindfully are all ways to take refuge. This is not blind faith. It is faith based on your real experience.
혹시라도 내가 비행기를 타고 있는데 기장이 비행기가 곧 추락할 것이라고 안내 방송을 한다면, 나는 삼귀의를 외우면서 마음을 집중하는 호흡을 할 것이다. 그대가 나쁜 소식을 들을 때, 똑같이 하기 바란다.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해서야 자기 자신이라는 섬(귀의처)으로 되돌아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알아차리는 삶의 자세를 통해 매일 그렇게 해야 한다. 수행이 습관이 되면 곤란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자기 안에 있는 삼보를 접하기가 쉬워진다. 알아차리며 걷고 앉고 숨 쉬고 먹는 일이 모두 다 귀의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실제적인 경험에 근거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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