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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남 평야 말 부분인 낙동강 본류와 연접한 곳에 몇 개의 독뫼(獨山)와 나지막한 야산들이 능선을 이루면서 동산리와 북쪽 경계를 이루고 있는 동리(洞里)이다. 그런가 하면 동으로는 응천강, 남으로는 낙동강 본류, 서로는 구박천(九朴川)의 흐름으로 마치 강류에 둘러싸인 듯한 느낌이 드는 아늑한 곳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야지(野地)에 산이 있고 또 산으로 된 지명이 많으니 흥미로운 일이다. 우선 동산과는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있는 외산(外山) 본동과 오산(鰲山), 오산(烏山), 오산(吳山) 등으로 표기되고 있는 오미라는 낙동강 유역의 강마을이다. 그리고 어은동(魚隱洞)과 골안(谷內), 해동 마을들이 1914년 행정구역 정비 때에 편성된 외산리의 단위 부락들이다.
(1) 외산(外山)
외산리의 본동으로 행정 구역이 다른 東山과는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다. 들 가운데 외딴 작은 산을 배경으로 凝川江과 洛東江의 흐름을 바라보고 있는 아늑한 마을이다. 外山이란 지명에 대하여는 오산들 너머에 있는 바깥 산 마을이라는 일설과 東山 바깥에 있는 들 마을이라는 다른 일설이 전해지고 있다.
(2) 오산(오미, 吳山, 鰲山, 烏山)
외산리에서 가장 큰 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인데 오미 또는 오산(吳山)이라 부른다. 한자상의 표기로는 원래 오산(鰲山)이었다고 한다. 마을에 있는 독뫼(獨山)의 형상이 자라(鰲)처럼 생겼다 해서 생긴 이름인데 그 뒤 오산(吳山)으로 바뀌어진 것은 글자 쓰기가 너무 어려운데다가 이 마을에 오씨성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바꾸었다는 일설이 있다. 오산(烏山)이라는 지명에 대하여는 어느 때 낙동강이 범람하여 온 들판이 물에 잠겼는데 이 마을 독뫼의 꼭대기만 물 위에 나와 있어 그 곳에 까마귀들만 남아서 까옥까옥 울었다는 설화에서 기인된 것이라 한다.
오산(鰲山)과 오산(烏山), 오산(吳山) 중 어느 것이 먼저 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 가지 표기가 이 마을에서는 모두 통용되고 있다.
(3) 어은골(魚隱谷, 魚隱洞)
큰 어은동과 작은 어은동으로 땀이 나누어져 있다. 풀숲이 우거진 마을 앞 질퍽한 늪 속에 물고기가 숨어살았다 하여 어은동(魚隱洞)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이 곳의 지형적인 조건으로 보아 제방이 없었던 시절에는 낙동강 물이 밀어닥쳐 마을 앞 풀숲 속으로 고기가 숨어들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 붕어등(붕어뫼, 부魚嶝)
옛날 이 곳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밤낮 없이 찾아오는 과객들 때문에 그 치닥거리로 여간한 부담과 고민이 아니었다. 과객을 줄이기 위하여 머리를 싸매고 궁리하던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주인은 스님에게 자기의 고민을 털어놓고 과객을 줄일 방도를 의논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손님의 발을 끊어버리게 하는 것이야 쉽지만 후회하게 될 것이라 하면서 머뭇거리자 주인은 강권하다시피 그 방도를 물었다. 스님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주인더러 집 앞에 있는 연못을 묻어버리라고 일러 주었다. 주인은 하인들을 동원하여 연못에 흙을 반쯤 메웠을 때 난데없이 푸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날개 달린 붕어 세 마리가 연못에서 솟구쳐 나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 후 이 부자집에는 과연 손님의 발길이 끊어졌으나 그 대신 식솔들에게 연달아 우환이 생겨 여러 가지 재앙이 발생하더니 급기야 재물이 없어져 가세가 갑자기 기울었다. 주인은 그제서야 후회를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연못에서 날아간 세 마리의 붕어는 마을 뒷산에서 죽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어은동에는 그 연못의 자취가 남아 있고 세 마리 붕어가 죽은 곳을 붕어등 또는 붕어뫼라 전하고 있다.
(4) 골안(고란, 소쿠리굼, 고내, 谷內)
외산(外山) 동쪽 들 가운데에 있는 작은 부락이다. 골안과 같이 아늑하고 소쿠리처럼 생긴 곳이라 하여 골안, 고란, 소쿠리굼, 고내, 곡내(谷內)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 지고 있다. 고내는 谷內의 한자음이 변한 것이다.
(5) 해동(海東)
오산(吳山) 남쪽 낙동강 본류 연안에 위치한 마을로, 하남읍의 해동(海東)과는 작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다.
■ 날티끝
작은 어은골 동북쪽에 있던 마을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옛날에는 주막껄이었다고 한다. 날티(日峴)라는 고개 끝에 있었던 땀이다.
■ 부채등(扇嶝)
어은동 동쪽에 있는 등성이로 지형이 부채처럼 생겼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 외산제(外山堤)
외산에서 오산에 이르는, 1780m 길이의 제방이다. 낙동강 본류의 서쪽 제방이다.
■ 똥뫼(독뫼, 獨山)
오산(吳山) 앞 들 가운데 있는 작은 산이다. 獨山(독산)이라는 뜻이다.
■ 디깨미나루(五友津나루, 뒤끼미나루)
응천강이 낙동강 본류에 흘러드는 하구 북쪽에 있는 나루터 이름이다. 오산과 삼랑진 사이를 왕래하는 나루터로서 사람들의 출입이 많았으나 지금은 나룻배 등의 교통수단은 없어졌다. 삼랑진쪽 연안에 뒤끼미 마을이 있어 나루 이름이 그렇게 된 듯하고, 오산쪽에서는 여흥민(驪興閔)씨의 오우정(五友亭)을 따서 오우진(五友津) 나루라고도 한다.
■ 이싱이들(吳農場, 섬등)
날티끝 동쪽에 있는 들 이름인데 오농장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낙동강의 강물이 범람하면 침수가 되던 곳이다. 일제 시대 때 오태환이라는 사람이 제방을 쌓고 개간한 농장이라 하여 오농장(吳農場)으로도 부르는 곳이다. 또 섬등이라고도 하나 그 유래는 알 수 없고 이생이란 말도 이 곳 지명과의 관련을 확인할 수 없다.
■ 오산벌(吳山伐)
오산(吳山) 부락 서북쪽에 있는 들판인데 갯벌을 개간하여 농경지를 만든 곳이다.
■ 처자매등(處女墓嶝)
오산 북서쪽 동산리와의 경계 지점 등성이에 있는 큰 무덤이다. 이 무덤에 얽힌 전설로 인하여 그 지점을 처자매등이라 하고 그 무덤을 처자매라 하여 전해온다. 옛날에 외산과 하남읍 사이에 나룻배를 젓는 이씨성의 총각 뱃사공이 있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노총각이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였으나 마음씨는 매우 착했다. 어느 날 밤 꿈에 아릿다운 처녀 하나가 나타나더니 내일 홍수가 진 강물에 소녀 하나가 떠내려 올 테니 건져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사라졌다. 꿈이 하도 괴이쩍어 날이 밝기를 기다려 나룻가로 나가 보았더니 과연 홍수가 진 강물 위로처녀의 시신 하나가 떠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총각은 배를 저어 안간힘을 다한 끝에 처녀 시신을 건져 올린 다음 자기가 거처하는 방에 안치하였다. 그날 밤 꿈에 또 그 처녀가 나타나더니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자기의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면 은혜를 갚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날이 새자 곧 현몽한 대로 시신을 거두어 이 등성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는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 뒤 총각은 이 죽은 처녀의 보은으로 참한 규수를 얻어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유복하게 잘 살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난 후 이 마을에도 해마다 풍년이 들고 재앙이 사라졌다. 그 뿐 아니라 이 무덤에 가서 치성을 드리면 총각은 장가를 들게 되고, 아이 못 낳는 여자는 아이를 갖게 된다는 민속이 생겼다. 그리하여 이 임자 없는 무덤에는 늘 벌초와 성묘하는 풍습도 있어 마을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무덤은 그 봉분(封墳)이 매우 커서 옛날 이 지역의 족장의 묘라고도 하고, 처녀묘가 아니라 처사묘(處士墓)가 와전되었다는 다른 설도 있으나 확인할 수가 없다.
■ 홍정승미자리(洪政丞墓地)
소쿠리굼 서쪽에 있었던 묘로서 정승을 지낸 홍씨의 무덤이었다고 전해 오는데 장군석은 아직도 남아 있으나 동네가 형성되면서 무덤의 흔적은 없어졌다. 본래 있었던 묘비와 석물들도 동네사람들이 이 못에 쳐 넣어 무덤의 자리를 감추었는데, 그 후 홍정승(洪政丞)의 자손들이 묘를 수소문했으나 허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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