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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약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약함을 회피하려는 사람과 맞서 극복하려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세계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인물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그들 나름대로 약함이 있었다는 것이며, 그들은 그것을 잘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함은 또 하나의 성공 조건일 뿐입니다. 세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인 푸치니는 이탈리아 출생의 지휘자 토스카니니를 “작곡가가 머리 속에서 생각한 것뿐 아니라 악보에 적을 수 없는 것까지도 표현해 주는 지휘자”라고 호평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당대 최고의 작곡가에게 칭찬을 받을 정도로 위대한 토스카니니는 처음부터 지휘자로 출발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촉망받는 첼리스트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함이 있었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악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근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모든 악보를 외워야 했고, 당연히 동료들에 비해서 갑절의 노력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에게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세 때의 일입니다. 한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데, 갑자기 상임지휘자가 자리를 비워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새로운 지휘자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 속에 담고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평소 모든 악보를 외워 연주하는 토스가니니를 생각해 낸 연주단장은 그에게 지휘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얼떨결에 지휘를 맡은 토스가니니는 악보 없이 세계적인 가극 “아이다”를 훌륭히 지휘해 냈습니다. 이때부터 정 지휘자로 취임한 토스가니니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치명적인 신체적 약함이 성공의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12:1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롬8:26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에게 약함은 부끄러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약함을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약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약함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함으로 인해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약함을 극복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모든 것을 갖춘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부자였고, 청년이었습니다. 거기다 관원이기까지 했습니다. 그에게도 약함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약함을 내려놓지 않고, 근심하다 주님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오늘 자신의 약함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그 약함을 극복하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성공적인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특권의식을 가진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사람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그들은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몇몇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축복해 달라고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이 아이들을 품에 안고 축복하신 것을 보면 그 가운데는 매우 어린아이도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린아이를 데려온 부모들을 책망하고 아이들을 주님께 데려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로 인해 방해받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주님을 생각한 처사였던 것입니다. 14-15절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을 강하게 제지하셨습니다. 심지어 분을 내시며, 주님께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들은 유치합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웃고 울기를 수없이 반복합니다. 금방 싸우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친하게 놉니다. 주변은 언제나 분주하고 산만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의 무죄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특징을 가진 아이들이 천국의 주인공이라는 말은 어색하게만 들립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들을 천국의 주인공으로 인정하신다면 할 말없습니다. 그래도 어딘가 부족함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또 다른 특징들이 있습니다. 단순합니다. 감사할 줄 압니다. 어른들을 신뢰합니다. 투명하고, 정직합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서 어른들에게 무엇인가 보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만약 주변의 아이들이 그렇다면 그것은 자라면서 어른들에게 배운 것입니다. 또 아이들은 자기들이 할 수 없음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어른들에게 의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인 신뢰, 곧 믿음입니다.
한 사람이 창밖에 많은 금 덩어리를 쌓아두고, 그 위에 “누구든지 한 덩어리씩 가져가시오”라고 써 붙여 놓았습니다. 그 사람은 하루종일 옆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금 덩어리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누구도 가져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이 우리를 놀리는 것”이냐고 따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꾸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저녁이 되자 그 사람은 금 덩어리를 치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아이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금 덩어리 하나를 골라 집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은 주님께서 아이들을 만져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 달리 주님은 아이들을 품에 안으셨습니다. 손을 얹어 안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껏 축복하셨습니다. 특히 "축복하심"에 해당하는 단어는 미 완료형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얼마동안 계속해서 아이들을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언제 견고히 설 수 있습니까? 언제 형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언제 임합니까?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할 때입니다. 대하20:20b절에서 여호사밧 왕은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 찌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고 외쳤습니다. 사30:15b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렘39:18절을 통해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되리니 이는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로 유업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견고히 서서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대한 것 이상의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무능력과 무기력을 인정하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성경은 주님의 축복을 받은 어린아이들과는 전혀 반대되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7절입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거리로 나가셨을 때, 부자면서 청년이요, 또 관원인 한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뛰어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께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향해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의 말을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19:16)라고 적고 있습니다. 영생에 관심을 가진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에는 무엇인가 자신감이 배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선한 선생님으로 인정한 예수 그리스도께,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선함이 무엇인지 물었던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청년의 질문을 받은 주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주님께서 자신의 선함까지 부정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청년은 주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요, 하나님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인간적인 선이란 조금 더 진보적이고, 상대적일 뿐입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일지라도 오십보 백보일 따름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선에 비추어볼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을 그렇고 그런 인간 축에 끼워놓고 있으며, 자신 또한 선한 사람임을 의연 중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예수님을 자신과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고, 그래서 자신 있게 물었던 것이고, 주님은 그러한 청년의 생각을 바꾸어 놓기 위해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19-20절입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청년은 분명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의 영향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탈무드는 “율법 외에는 선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속해서 십계명의 두 번째 돌 비에 새겨진 계명들을 하나씩 나열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님은 첫 번째 돌 비, 곧 하나님에 대한 계명들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아마도 그렇게 하실 필요를 느끼지 못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첫 번째 계명 역시 지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일4:20절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거짓말쟁이인 이유는,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첫 번째 돌 비의 내용을 말씀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 중에 특이한 것은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10계명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속여 취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 10계명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속여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레19:13)라는 말씀과 "곤궁하고 빈한한 품군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신24:14)라는 말씀을 요약한 것입니다. 곧 품꾼에게 주어야할 삯을 지불하지 않는 악한 죄를 의미합니다. 주인은 일꾼들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반드시 그 사랑을 적당한 삯으로 갚아주어야 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이웃에게서 받은 사랑은 반드시 받은 만큼 다시 갚아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었기에 오늘의 저와 여러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며, 갚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갚을 수 있습니까? 형제를, 자매를, 이웃을 사랑함으로 갚을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청년은 주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신은 어려서부터 그 모든 것을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은 영생을 얻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의 말이 매끄럽지 못하고 투박합니다. 신경질적입니다.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태는 그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마19:20)라고 주님께 반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부자였습니다. 거기다 관원이기까지 했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을 일꾼으로 고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적당한 대가를 통해 일꾼들의 사랑에 보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계명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갚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님의 말씀은 참으로 적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퉁명스럽게, 신경질적으로 ”그러면 나보고 더 이상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라고 주님께 반문했던 것입니다. 2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하시니"
주님은 청년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지적하시기 위해 그를 주의 깊게 응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드럽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재물이었습니다. 결국 그가 퉁명스럽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재물은 신뢰할 대상, 의지할 대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청년은 자신의 의에 빠져 있었을 뿐 아니라, 재물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충분히 사랑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재물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사실은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재물을 섬기는 자가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가지를 신뢰한다는 것은 다른 한가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청년의 삶은 돈과 재물이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골3:5절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무제한의 소유욕인 탐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죄악입니다. 탐심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 것들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라고 또 눅12:15절에서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은 재물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청년의 아킬레스건, 곧 치명적 약함은 재물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절에 소개되는 청년의 반응은 더욱 비극적입니다. 22절입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청년은 의기양양했었습니다. 자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무엇인가 조금만 더 덧붙이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가 의지하고 신뢰했던 모든 것들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습니다. 슬픈 기색을 하며 근심하며 주님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없었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한번 2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하시니"
주님은 청년에게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제자들과 합류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제외하고 이 같은 제안을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약함을 해결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제자들의 대열에 합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만약 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열두 제자가 아니라 열세 제자에 대해서 말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주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근심하다가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청년에게 하시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완전히 주님을 믿고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 없이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팔아 나누어주라는 주님의 말씀은 일종의 시험이었습니다. 결국 청년에게 없었던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약함이었습니다.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정작 그에게는 자신이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행함만 있을 뿐 가장 중요한 믿음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청년은 분명 계명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정할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율법의 조항들을 지킨 것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인간적인 의도였을 뿐,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없이 인간적인 의와 재물을 추구하던 그는,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근심하며 주님을 떠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자 청년은 자신의 할 수 없음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할 수 없음을 가르쳐주셨지만, 그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구원과 관계된 것과 이기는 것에 있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약함입니다. 그리고 이 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뿐입니다.
바울은 고후12:9절에서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나를 덮게 하려 함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약함은 비참하고 눈물 흘릴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랑할 일입니다. 사람들은 큰 승리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큰 실패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 안에 가득 찬 질투와 더러움과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 본 적이 있습니까?
바울은 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기를 기뻐한다고 말했습니까? “자랑”의 헬라어 원문은 “영광”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영광으로 삼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그분의 능력을 나타낼 기회를 주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자신을 덮을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약함이 없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능력이 덮을 수 없습니다. 약함이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를 덮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약함을 찾아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인 이김을 주심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약함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약함을 자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실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신뢰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의 삶을 덮을 수 있도록 맡기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약함을 이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