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군왕검의 탄생과 성장 국조 단군왕검은 거불단 한웅과 천모(天母)님 사이에서 신묘년(B.C. 2,370) 5월 2일 인시(寅時), 박달나무 밑에서 태어나셨다. 즉 천손족(天孫族)의 족장이며 배달국의 수장이신 한웅 천황과 지손족(地孫族)인 웅족(熊族)의 여인이었으나, 깨달음을 얻어 천손(天孫)이 되신 웅녀 공주 사이에서 세상에 나오신 분이다. 단군왕검은 어려서부터 신인(神人)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14세 되던 갑진년(B.C. 2357)에 외할아버지인 웅족의 왕은 그의 신성함을 알아보고 비왕(裨王 : 왕을 보좌하는 부왕)으로 삼았다.
(2) 단군조선의 건국 개천(開天) 1565년(무진(戊辰)년, B.C. 2333) 상월(上月 : 음력 10월) 3일에 이르러, 신인(神人) 왕검이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에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잡고,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님께 제사를 올려 단군조선이 시작되었다. 단군왕검께서는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으며,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라와 백성을 다스렸다. 구한(九桓)의 백성들은 모두 그를 마음으로부터 따랐고, 단군왕검을 천제(天帝)의 화신이라 여겼다. 단군왕검은 신시(神市)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이름했으며, 비왕의 자리에 24년, 제위에 93년 있고 130세까지 사셨다.
(3) 단군왕검의 가르침-단군칙어(檀君勅語) 단군께서 개국하실 때 모든 백성들에게 내린 가르침의 말씀이 있었는데, 이를 단군칙어(檀君勅語)라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너희는 지극히 거룩한 한얼님의 자녀 됨을 알아라. ② 너희는 영원토록 자손이 계승할 때에 터럭 만한 것이라도 다침이 없고 이즈러짐 없어라. ③ 너희는 한겨레로 일체가 되어 의좋고 정답게 서로 손을 잡고 같이 살아라. ④ 너희는 조심하라, 조심하라. 내 땀방울이 적시우고, 내 피가 물들인 강토에 혹여나 더러운 때 묻힐세라. ⑤ 너희는 네가 해야할 일은 너희 손으로만 하게 하라. 그리하여 각기 너희 할 직분을 지켜라. 너희 할 책임을 견뎌라. ⑥ 네가 가질 것은 남에게 주지 말고, 네가 할 일을 남이 하지 말게 하라. ⑦ 너희는 이 나라 기슭, 한군데도 빠짐없이 하늘 은혜와 땅의 이익 두루 받았음을 알라. 너희 것 삼아 쓸데로 써서 너희 생활이 항상 풍족하거라. 넉넉하거라. ⑧ 너희는 내가 오늘 훈칙한 이 알림이 할 일로써, 천하만민에게 고루 알리어 주거라. 또 단군왕검의 가르침은 민족의 3대 경전중의 하나인 <참전계경(參佺戒經)>이라는 경전으로 전해진다.
2) 단군조선의 발전
(1) 신선도의 제천의식 - 천제(天祭) 첫 민족국가로써 신선의 나라를 세운 왕검께서는 정신적 상징으로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참성단(塹城壇)이라는 제천단을 쌓게 했다. 그리고 나라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나 5월 단호제와 10월 상달제 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 민족의 근본에 보답하였다. 이때는 제천권을 가진 천자(天子)였던 역대 단군들이 천제를 주관했다.
(2) 단군시대의 제천행사
① 2대 부루단제 26년(B.C. 2215년) 하늘신 공경에 대한 석자장(石子丈)의 건의를 받아들여 천하에 조서를 내리고, 삼신전(三神殿)과 삼성사(三聖祠)를 세워 한인, 한웅, 단군의 삼신위를 봉안하여 백성들에게 경배하게 하였다.
② 11대 도해단군 원년(B.C. 1891년) 단제께서는 열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택하여 국선(國仙)의 소도(蘇塗)를 설치하도록 하셨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에 그 중에서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한웅의 상(像)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 지내며 웅상(雄常)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한웅천황을 모시는 대시전(大始殿)을 세워 한웅 천황을 모시게 하였다.(이 전각은 그 뒤 한웅전, 대웅전으로 바뀌었으며, 불교가 우리 나라에 전래하여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석가 세존을 모시는 법당도 선불습합(仙佛習合)의 영향 속에 대웅전이란 이름으로 남았다) 한편, 천부인(天符印)이 표시된 커다란 원 하나로 된 그림을 누각(樓閣)에 걸어 두었으며, 이를 거발한(居發桓)이라 하였다.
③ 16대 위나단제 28년(B.C. 1583년) 구한의 여러 한(汗)들이 영고탑에 모여 삼신 상제께 제사를 지냈으며, 한인, 한웅, 치우로부터 단군왕검까지 모셨다.
④ 24대 연나단제 2년(B.C. 1160년) 여러 한(汗 : 제후국의 왕)들은 단제의 지시를 받들어 소도를 증설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 또는 재해가 있을 때마다 소도에서 기도하여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⑤ 33대 감물단제 7년(B.C. 813년)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甘勿山) 아래 한인, 한웅, 단군을 모시는 사당인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지냈다.
⑥ 44대 구물단제 2년(B.C. 424년) 예관이 청해 3월 16일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행했다. 단제가 친히 행차해 삼육대례(三六大禮)로 경배했다.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 : 부여의 영고제도로서 삼신을 섬기는 제천행사이며, 행사를 지낸 후 연일 마시고 먹으며 노래하고 춤추며 북을 쳤다)는 북을 두드리면서 삼신을 맞는 제례이다.
⑦ 47대 고열가단제 14년(B.C. 282년) 단군왕검의 묘(廟 : 사당)를 백악산에 세우고, 유사에게 명을 내려 한 해에 네 번씩 여기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단제께서도 1년에 한 번씩 친히 제사를 지냈다.
(3) 체제 단군은 정치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요, 종교적으로는 최고 지도자요, 교육적으로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큰 스승이었다. 그러므로 단군은 신정(神政)을 베풀어 선계(仙界)를 지향하였으며, 동시에 지상에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그 목적에 적합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단군조선의 통치체제는 1단군(檀君), 3한(韓), 5가(加), 64족(族), 3사(1伯, 2師), 6사(事)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3한(韓)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이며, 광대한 땅을 셋으로 나누어 진한은 단군의 직할통치 지역이었고, 나머지 마한, 번한은 비왕들을 두어 간접 통치했다. 22대 색불루단제 이후에 막조선, 진조선, 번조선의 삼조선(三朝鮮)으로 개편되었다. 5가(加)는 우가(牛加), 마가(馬加), 저가( 加), 구가(狗加), 양가(羊加)이며, 64족은 단군조선을 이루고 있는 부족이다. 3사6사(三師六事) 제도는 배달국 이래로 이어져온 중앙행정체제로 3사(師)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말하고, 6사(事)는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형(主刑), 주병(主病), 주선악(主善惡), 주병(主兵)을 말한다. 또한, 제위의 계승과 같은 중대한 국사(國事)에 대한 의결기관으로는 3한(韓) 5가(加)로 구성되는 화백회의(和白會議)가 있었는데, 한국 배달국 이래의 전통이었다. 최고 통치자인 단군의 제위(帝位)는 대체적으로 단군의 장자(長子)를 통하여 계승되어 왔으며, 장자에게 문제가 있거나 특별히 뛰어난 인물이 있을 때는 화백회의에서 그를 추대하여 단군의 제위를 계승하였다.
(4) 경제 및 산업 단군조선의 경제적 기초는 농업이었으며 그밖에 유목, 사냥, 고기잡이, 채집이 병행되었다. 토지제도는 균전제(均田制)를 채택하였으며, 세율은 매우 낮아 8대 우서한단제 원년(B.C. 1993년)에는 1/20 세법(二十稅一之法)을 채택하였으며, 15대 대음단제 원년(B.C. 1661년)에는 1/80 세제(八十稅一之制)를 채택하였다. 단군조선에는 교환경제가 발달하였으며, 교환의 기준을 위한 도량형 즉 쌀되와 저울 등을 이미 통일하였고, 패전. 패엽전. 자모전. 공방전 등 화폐의 개발이 이루어졌다. 또 이 시대에는 이미 산업이 발달하여 11대 도해단제 때는 공창(工廠)을 건설하여 종이, 베, 선박 등을 생산하였다. 또 농업국가의 기본인 치산치수(治山治水)에 성공하여 단군왕검의 장자인 2대 부루단제 3년(B.C. 2238년)에는 치산치수 사업의 지식을 그 무렵에 9년 동안의 홍수로 고생하고 있는 하(夏)나라의 우(禹)에게 팽오로 하여금 치수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단군조선은 고도의 정신문화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아주 풍요로웠던 나라였다.
▶ 단군조선 경제발전의 기록 ① 2대 부루단제 3년(B.C. 2238년) 쌀되와 저울 등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베와 모시의 가격이 다른 곳이 없고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았다. ② 4대 오사구단제 5년(B.C. 2133년) 패전(貝錢)을, 14대 고불단제 42년(B.C. 1680년)에는 자모전(子母錢)을, 19대 구모소단제 10년(B.C. 1426년)에는 패엽전(貝葉錢)을, 37대 마물단제 5년(B.C. 642년)에는 방공전(方孔錢) 등 화폐를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 단군조선의 발명품과 만국박람회 11대 도해단제 56년(B.C. 1836년)에는 송화강 연안에 기계공창을 설치하여 각종 기계를 제조하였고, 새로운 기계발명상을 받은 발명품이 나왔다. 황룡선(黃龍船), 양수기(揚水機), 자행륜거(自行輪車), 경기구(輕氣球), 자발뢰차(自發雷車), 조담경(照膽鏡), 천문경(天文鏡), 자명종(自鳴鐘), 양우계(量雨計), 측풍계(測風計)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물건들이 발명되었다고 한다. 또 도해단제 38년에는 수도인 평양에서 만국박람회를 크게 개최하여, 여러 나라의 진기한 물품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와서 산더미같이 진열되었다. 단군조선은 신선도를 수련하는 도인들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당연히 상단전이 열려 하늘의 메시지를 받고 우주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초능력자들이 많았으며, 그로부터 수많은 발명품 등 각종 이기들이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국시대의 12한국을 통해서 세계각지로 이동한 9한족(九桓族)들과 수메르국, 아유타국 등 혈연을 같이하고, 문명의 교화를 받아온 수많은 제후국들이 모여 만국박람회를 열었다고 놀랄일은 아니다. "14대 고불단제 56년(B.C. 1666년)에는 호구(戶口)를 조사하였는데 단군조선의 인구는 총 1억 8천만 명이었다."는 기록도 모든 제후국들을 총 합한 숫자일 것이다.
(5) 단군조선의 문화 ① 가림토 문자 단군조선시대에는 선대인 배달국으로부터 계속 사용해온 진서(眞書), 즉 녹도문자가 있었다. 그러나 텔레파시와 같은 고도의 의사전달 방법을 깨우치지 못했으며, 배움이 부족한 일반 백성들이 녹도문을 사용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또 음문자이며 만물을 형상화한 뜻글자인 녹도문만으로는 완전한 문자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렇게 해서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조선의 문자인 가림토(加臨多) 문자가 탄생하게 되며, 가림토 문자(38자)를 토대로 더 쉽게 정리하여 4177년 뒤 재창조된 것이 바로 훈민정음(28자)이다.
② 가림토 문자는 훈민정음의 원형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가림토 문자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원형이다. 그리고 근세조선 시대 세종 때에 이르러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로 재창제 되었으며, 최근에는 주시경 등에 의해 24자로 재정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림토는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일본에도 전해져 신대문자(神代文字)인 아히루(阿比留)문자가 되었다. 또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분국이었던 몽고로 건너가 "파스파"란 고대문자가 되었으며, 배달국의 분국이 있었으며 그 후예들이 살고있는 인도로 건너가 산스크리스토 알파벳과 구라자트 문자의 원형이 되었다.
▶ 가림토 문자 창제동기 단군조선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B.C, 2181년)에 갸륵 단제께서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다. "아직 풍속은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해도 옆에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多)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다." (한단고기-단군세기편)
▶ 훈민정음 재창제의 증거 ①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언문은 전조선 시대에 있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 (세종실록 103권 ; 세종 23년에 발표한 글) ②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 여덟 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이다.(세종실록 25년 ;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첫 발표문) ③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옵서 정음 스물 여덟 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를 들어서 보이시면서 이름지어 가로되 훈민정음이라 하시니, 상형하되 글자는 옛날의 전자(篆字)를 본따고...(정인지(해례서문) : 현재 고려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음) ④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과 합자가 전혀 옛것과 반대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한글 재창제를 반대하는 최만리와 당대 유학자들의 집단 상소문 중에서)
▶ 해외에 남아있는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 그러나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은 한단고기 뿐 아니라 일본, 인도, 몽고 등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나라들에 풍부하게 남아 단군조선 시대와 그 영향력을 지금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다만, 우리만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공식화하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
▶ 일본의 신대(神代)문자 일본에는 한글을 닮은 고문자가 있다. 대마도의 아히루 가문에서 전해져왔기 때문에 아히루 문자라고 하며 신들의 시대에 신들이 쓰던 문자라 해서 신대문자라고 한다. 일본의 고대 신들이 쓰던 문자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그것이 고대한글이라는 실제적 사실과 우리의 조상들이 일본을 건설했고 엄청나게 발전시켰다는 우리측 주장을 연결해 보면 그 일본의 고대 신들은 고도의 문화를 갖고 일본땅에 들어간 한국인들임에 틀림없다. 신대문자는 지금도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 등에 아직 보관되어 있다. 일본 이세신궁에 소장된 신대문자의 기록은 서기 708년의 유물이다. 서기 700년 무렵은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 후 발해를 건국했을 무렵이며, 세종대왕은 1446년에야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단군조선 시대가 신화였고, 가림토 문자도 한단고기에 나왔으니 믿을 수가 없다고 전제한다면, 1446년의 훈민정음에서 708년의 신대문자가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렇다면 일본의 신대문자에서 훈민정음이 나왔는가? 실제로 일본의 오향청언(吾鄕淸彦 고쿄 기요히코)이란 학자 등도 708년의 신대문자의 유물을 증거로 들면서 "일본의 신대문자가 조선으로 건너가 훈민정음을 낳게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고 그것을 연구한 결과, 자신의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조선 훈민정음의 뿌리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신대문자의 원형인 원시한글이 한단고기에 수록되어 있다."고 인정했다. 일본의 천황가 자체를 비롯, 일본이 단군조선이래 한국인이 건너가 세운 나라라는 것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일본인들에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것을 인정하기를 기본적으로 꺼릴 뿐 아니라 오히려 기회만 있으면 거꾸로 왜곡하려고 애를 써왔다. 그런데 그런 풍조 속에서 일본의 학자가 그때까지 자신의 주장을 뒤엎고 가림토 문자에서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나왔고 그 뿌리임을 학자적 양심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통 사학계와 국어학계에서는 아직도 "훈민정음이 세종대왕 혼자서 만들었는지 신하들과 함께 만들었는지" 논쟁 중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수 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 가림토의 고향인 우리 나라에서는 단군조선 시대를 신화 속의 시대로 치부하는 후손들이 아직 많은데, 지금의 일본 땅에는 단군조선의 가림토 문자가 신격화되어 신사와 박물관에 보전되어 있고 비석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제를 입증해준다. 단군조선이 있었다면 단군할아버지도 실제하셨던 민족의 조상임을 믿을 수 있고, 가림토 문자가 발견되는 곳은 단군조선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단군조선의 가림토가 일본에 보급되어 아히루 문자가 된 것이다. ▶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인도의 남방 구자라트 주에서 쓰이는 문자는 우리의 한글과 흡사한데 자음은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 같다.(ㄴㄷㅌㅇㅁㅈㅂ 그리고 ㅏㅑㅓㅕㅗㅛㅡㅣ등) 이 지역은 배달국 시대 우리 민족이 인도로 이동해가서 세운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의 후예가 사는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자라트인들이 사용하는 타밀어에 문자뿐 아니라 발음과 뜻이 비슷한 단어들(나-난/너-니/엄마-엄마/아빠-아빠/보다-봐/날-날/오다-와/나라-나르/너 이리와-니 잉게와 등)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 산스크리스트어 알파벳은 우리가 국민학교 때 배운 한글과 너무나 흡사하고 (찌커거.., 쪄쳐져..., 떠터더..., 뻐퍼버..., 셔허), 우리 한글처럼 "ㄱ"에서 시작해 "g"으로 끝난다.
▶ 영어와의 관계 가림토 문자에는 X O M P H I 등 알파벳의 자모도 여러 개 보인다. 가림토 문자가 4177년 전에 만들어진 반면, 알파벳의 역사는 겨우 3000년을 넘지 못한다. 제후국의 왕 또는 어떤 지역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말인 한(汗)은 하늘을 뜻하는 글자인 한(桓)에서 나온 이름이다. 즉 한(桓)에서 한(韓), 한(漢), 한(汗)이 나온 것이다. 또 한(汗 : HAN)이 몽고로 건너가 칸(KAN : 징기스칸)이 되었으며, 징기스칸의 유럽 정복 때 서구로 건너가 킹(KING)이 되었으며, 그후에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하버드대학에서의 연구결과로도 발표된 바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우리말과 우리의 고문자는 한단시대의 영역을 통해 전세계로 전파되면서 각 지역의 독특한 환경과 조건들에 따라 변화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다.
(6) 문화와 교육
▶ 천문역법 단군조선에도 태음력(太陰曆)과 태양력(太陽曆)에 의한 달력이 있었다. 2대 부루단제 12년(B.C. 2229년)에 신지 귀기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正圖)를 만들어 바쳤다. 5대 구을단제 4년(B.C. 2096년)에는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세수로 세는 육십갑자(六十甲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19대 구모소단제 54년(B.C. 1382년)에는 지리숙이 태양을 중심으로 달과 별이 그 궤도를 한 바퀴 도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태양력인 주천력(周天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저술했다.
▶ 단군조선의 노래 2대 부루단제 때의 어아가(於阿歌), 16대 위나단제 때의 애한가(愛桓歌), 34대 오루문단제 때의 도리가(兜里歌)등이 즐겨 부르던 노래이다.
- 어아가(於阿歌) -
신시(神市)이래로 하늘에서 제사지낼 때마다 백성들이 모두 모여 함께 노래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덕목을 다졌다. "어아"는 사람이 기뻐서 내는 소리라고, 2대 부루단군 제위 기간중의 기록에 나온다.
"어아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시 은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마세 어아어아, 착한 마음 큰 활이고 나쁜 마음 과녁이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줄처럼 똑같으며, 착한 마음 곧은 화살 한맘으로 똑같아라. 어아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 되어 과녁마다 뚫고 지고, 착한 마음 끓는 물은 한덩이 눈과 같은 악한 마음 다 녹이네 어아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만년 크신 은덕, 한배검이시여, 한배검이시여."
- 애한가(愛桓歌) -
16대 위나단군(B.C. 1583년)때 노래이다. 무궁화꽃은 한국시대 이래로 나라꽃이었으며. 한화(桓花) 혹은 천지화(天地花)로 기록되었으며, 꽃이라고 불렀다. 곧 무궁화를 지칭하는 꽃이란 말이 오늘날 "꽃"이란 이름의 기원이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그루 심고 올해 또 만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 저술 단군조선 때는 인문, 사회, 자연과학에 관계된 저술이 수없이 많았다. 그 서적들의 이름과 저서는 다음과 같다. 3대 가륵단제 6년(B.C. 2177년) 신지고결의 배달유기(配達留記 : 최초의 역사서) 19대 구모소단제 51년(B.C. 1385년) 목아득의 우주원리론 40세 달음단제 때 윤지복의 도덕경 42대 을우지단제 때 백호돈의 지리학(地理學)과 광물학(鑛物學) 43대 물리단제 때 장자학의 설명학(說明學) 44대 구물단제 때 최화덕의 동물학(動物學)과 식물학(植物學), 서백원의 태양-태음-소양-소음의 사상의학(四象醫學), 황운헌의 백과서(百科書), 류종득의 이재학(理財學), 적우순의 심리학(心理學) 45대 여루단제 때 장소부의 의학대방(醫學大方), 홍문선의 태학조문(太學條文), 조대휴의 자본론(資本論) 47대 고열가단제 때 소정국의 건축학(建築學), 구로선의 종수학(種樹學)
▶ 단군조선시대의 교육 단군과 신하들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들이었으며, 백성들은 단제를 깨달으신 성인으로, 한인 할아버지-한웅 할아버지-단군 할아버지로 이어지는 얼의 어버이로 믿고 섬겨왔다. 그러므로 역대 단군으로부터 제자들로써 법(法)을 전수받고 100%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랐기에 단군조선과 같은 방대한 신성제국이 2000년이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온 나라의 백성들 남녀노소 모두 신선도를 수련하여 몸과 마음을 닦았으며, 단군조선이란 나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학교이자 수련장이었다.
▶ 단군조선 교육의 특성 단군조선시대에 이루어진 교육의 특성은 신선도를 전국민이 닦음으로써, 신성을 깨닫고 하늘과 통하는 종교교육과 지덕체를 연마하는 사회교육이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데 있다. 그래서 제천행사를 주관하는 성소(聖所)인 소도(蘇塗)옆에는 교육기관인 경당이 함께 설치되어 청년들을 교육시켰다.
▶ 교육제도 나라의 인제를 양성하는 제도로 국자랑(또는 천지화랑)이 있었으며, 화랑의 총사령관이 국선(國仙)이었다. 제천기간 동안에는 화랑들이 하늘에 제를 지내는 소도의 행사를 주관하였으며, 평소에는 소도가 화랑들의 회의장소로 쓰여졌다. 이렇듯 단군조선시대 교육의 역할을 담당했던 기관으로는 소도, 국자랑, 경당 등이 있었으며, 14대 고불단제 때(B.C. 1670년)는 국립대학이 설치되었다.
▶ 소도(蘇塗) 소도에서 지내는 제천(祭天)행사와 의식은 곧 고구려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다. 그로부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힘을 합하고 이웃을 위하여 있는 이와 없는 이가 서로 도와 문명한 나라를 이루고, 개화 평등하여 온 세상에 제사의 예를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소도가 세우지면 그 안에서는 계를 지켜야하는데 바로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이며 천지화랑들의 계명이기도 했다. 소도의 곁에는 반드시 교육기관인 경당이 세워진다.
▶ 천지화랑(국자랑 : 國子郞) 13대 흘달단제 20년(B.C. 1763년)부터 시행된 신라 화랑제도의 기원으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던 미혼의 자제들을 말한다. 국자랑이 출행할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天地花 : 무궁화)를 꽂았기 때문에 천지화랑이라고도 했으며, 화랑들의 총사령관을 국선(國仙)이라 했다. 천지화랑은 후대 고구려의 조의선인이나 신라의 화랑도로 이어졌다. 여자낭도를 원화(源花)라 했고, 남자를 화랑(花郞)이라 했으며,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하사받은 이를 천왕랑(天王郞)이라고 했다. 이들은 신선도의 오상(五常)을 지켰는데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으로 신라 때 원광법사가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진 세속오계의 원형이다. 소도는 화랑도가 모여서 회의를 하는 곳으로도 쓰여졌다.
▶ 경당 단군왕검 제위시절 2대 부루단군이 아직 태자였을 때 태자의 명으로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삼신을 태산에서 제사지냈다. 결혼하지 않는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 가지의 기예를 익히며 심신을 수련했다. 11대 도해단군 시절에도 경당을 설치하여 칠회제신의 의식을 정하고, 삼륜구서의 가르침을 강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하여 한도(桓道)문명의 번성이 먼 나라까지 들려, 하나라 13대왕 근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고 한다. 경당은 고구려 때까지도 평민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교육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7) 단군조선의 강역 단군조선의 영토는 치대 캄차카반도, 연해주를 비롯한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와 제주도, 일본, 몽골, 티베트와 중국의 중동부(하북성, 하남성,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 산서성, 섬서성, 감숙성, 호북성, 호남성 등)까지, 그리고 최소 만주대륙 전체와 한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북아시아 대륙을 대통일한 민족국가였던 것이다. 단군왕검은 천하의 땅을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며, 삼한은 5가(加) 64족(族)으로 이루어졌다. 삼한은 진한, 마한, 변한을 말하며, 진한은 단군왕검께서 직접 다스리셨고, 마한은 고시씨의 후손인 옹백다를, 번한은 치우천황의 후손인 치두남을 봉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8) 단군조선의 대외관계
① 중국과의 관계 단군조선 시대에 요나라를 비롯한 역대왕조는 모두 단군조선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고 당연히 친선관계에 있었다. 조선은 자비와 의로움(仁義)로써 주변국들을 대했으며, 항상 아낌없이 도움을 주었다. 시대적으로 요-순-하-은-주나라로 왕조가 바뀌어갔으나 이 국가들이 모두 중국의 한족(지나족, 서토족, 하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며, 대부분 동이족의 국가가 많았으므로 현재 중국 한족의 시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나라들은 지도층에 불의한 일이 있어 민심을 얻지 못하고, 살기가 어렵게 되면 멸망의 길은 걸으며, 여러 왕조가 바뀌어갔다. 중국 역사상 3백년 이상 지속된 나라가 없었다. 최초의 봉건국가로 알려져 있는 주나라는 단군조선의 체제를 모방해 여러 봉토를 왕실의 친척에게 나누어주고, 공·백 등의 작위를 주어 제후로 다스렸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경우 단제께서 성인(聖人)이었으며, 동시에 제후들과 신하들의 스승이기도 하여 군신간에 절대적인 믿음으로 연결된 관계였었기에 한 나라가 2천년이 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주나라의 제후들은 그러한 신뢰들이 없었으므로 세월이 흐르면서 왕실을 무시하고 다른 욕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주나라는 270여 년만에 멸망하고 수많은 나라들로 분열, 마침내 춘추전국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면서 이합집산을 계속하다가 뿌리 국가인 단군조선을 침범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전국시대의 7개 국가 중 가장 동쪽에 위치했던 연나라와 제나라가 주로 조선에 도발을 하였다. 그러나 한번 조선을 침략하면 그들 국가의 수도까지 함락당하는 등 철저하게 응징당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단군조선이 멸망하고 조선이 열국으로 분열하여 힘이 급속도로 약화되어 갈 때, 반면 중국은 주로 200년 주기의 왕조의 변화 속에서 팽창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 왕조들도 한족(漢族) 만의 역사가 아니라, 동이계열이나 거기서 갈라져 나간 유목민족의 왕조가 많았다. 중국역사는 한족에 의한 왕조와 동이족 출신 유목민족에 의한 왕조<연(燕), 수(隨), 위(魏), 원(元), 금(金), 청(淸) 등> 간의 투쟁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② 주변국과의 관계 캄차카반도, 연해주를 비롯한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와 제주도, 일본, 몽골, 티베트와 중국의 중동부에 이르는 동북아시아 대륙 전체를 장악하고 있던 단군조선은 그 영토의 크기만큼 주변국과의 크고 작은 관계도 활발하였다. 몽고, 말갈, 흉노, 선비, 돌궐(투르크)등 모두 동이의 혈통에서 갈라져 나갔으며 각 지역의 토착종족들과 문화와 혈통이 섞이면서 근본을 잃어버리고 야만화되었다. 그러나 단군조선은 넘볼 수 없는 뿌리의 나라요, 스승의 나라였다.
▶ 단군조선의 도인정치 단군조선 시대에는 정신적·육체적으로 힘을 기르는 신선도의 수련이 국가적으로 시행되어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러한 신선도의 정신은 국제관계에서도 지도원리가 되었다. 주변국들 특히 지나족(漢族)들이 무도(無道)하고 그저 세상적 욕심으로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이고, 어버이 나라인 조선의 변방을 틈틈히 쳐들어오는 동안에도 단군조선의 역대 단군들은 홍익인간의 정신을 전수해주고 이화세계를 이루려는 마음으로 그 나라들을 인도하였다. 즉 국제적인 관계도 도(道)에 기준을 두고 전개되었던 바, 주나라의 경우처럼 전수받은 정신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면 내 일처럼 기뻐하셨고, 도리에 어긋나는 정치를 할 때면 그러한 나라들을 치기도 하셨다. 불가피하게 전쟁을 수행하게 되면 그러한 무도한 나라를 하늘을 대신해서 정벌한다하여 그 군사를 천군(天軍)이라 했으며, 행진해갈 때는 참나(본성)를 되찾는 구도가인 "아리랑(我理朗-나를 찾는 즐거움의 노래)"을 부르며 전쟁에 임했다고 한다. 그러한 큰 도의 기준을 갖고 전투에 임했기 때문에 싸움마다 연전연승이었으며, 그 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지나족 등 지손들을 무도한 야만인으로 간주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기백은 고구려시대까지 이어졌다. 한국-배달국시대에도 그러한 도의 기준으로 지구촌 곳곳에 정신문명을 전파하여 스승의 역할을 해왔고, 그렇게 면면히 이어진 전통이 찬란하게 꽃피운 나라가 단군조선이었다. 이렇듯 모든 것이 천도(天道)에 기준을 두고 행해졌던 아주 특별했던 나라였으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강대국의 모범이었다.
▶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의 기원 전체적으로 볼 때 단군조선 2천년의 역사 가운데 24회의 대소전란과 군대파견이 있었다. 그중 외국과의 싸움이 14회가 있었는데, 그것도 대부분 무도한 나라에 대한 징벌이요, 침략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러나 백년에 한번 꼴로 전란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며, 단군조선의 폐관이래 지금까지 2천년간 1000여 회의 외침과 전란이 있었다니, 단군조선 시대가 얼마나 태평성대였는지 알 수 있다.
(9) 여러 민족과 각국의 기원
▶ 티벳 배달국 15대 치액특천왕은 티베트 즉 치액특에 신선도를 전해주었으며, 티벳의 신선도가 인도로 전해지고 힌두교의 사상이 합쳐져 불교가 탄생하게 된다. 티벳(西藏)의 수도는 장당경(라싸로 추정됨)으로, 치우천황 때부터 8백년간 티벳을 직접 통치하였다고 한다. (일붕 서경보 박사의 증언) 단군조선때에는 3대 갸륵단군 이래, 5대 구을단군, 22대 색불루단제, 43대 물리단군, 44대 구물단군(B.C. 425)까지 장당경으로 수도를 이전하는 등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한단고기에 나오는 단군시대의 티벳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단군조선 3대 갸륵단군때 강거의 반란을 티벳에서 토벌하였다. - 이 기록을 통해 그때까지도 티벳이 단군조선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 5대 구을단군 16년(B.C. 2084년) 단제께서 친히 장당경(티벳)으로 행차하여 삼신의 제단을 봉축하고 많은 한화(桓花 : 무궁화꽃)을 심었다. 22대 색불루단제 원년(B.C. 1285년)에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여 묘를 세우고 조부인 고등왕의 제사를 지냈다. 43대 물리단군 36년(B.C. 426년) 우화충의 난이 일어나고 서북 36군을 함락시키자, 욕살 구물이 어명에 따라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을 점령하니 다른 지역의 군사들이 병력을 보내 원조했다. 44대 구물단군 원년(B.C. 425년) 우화충의 난을 진압한 욕살구물이 단제로 등극하였으며, 여러 장수들의 추대로 3월 16일 제단을 쌓고 천제를 지낸 후 장당경에서 즉위하였고, 나라이름은 대부여-삼한은 삼조선으로 바꿔 불렀다. 삼국유사에도 기원전 425년(44대 구물단제 무렵) 나라이름을 대부여라 바꾸고 수도를 장당경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티벳의 신선도가 인도로 전해진 후 인도의 불교가 거꾸로 티벳에 전해져 티벳불교(라마교)가 되었으며, 그 라마교가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국교가 되어 다시 우리 나라의 고려조에 들어왔다. 결국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가 동족간의 교류였다. 라마교 이전의 티벳 전통신앙인 뵌 종교가 아직도 전해지고 있는데, 달라이 라마 치하 때만 해도 국가 무당이 초의식 상태에서 하늘의 메시지를 받아 정치에 자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금의 티벳, 네팔의 풍속과 사람들의 생김새가 우리 나라의 그것들과 비슷하며, 드라비다족과 몽골리안이 주종을 이루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말갈족 단군왕검께서는 방대한 영토를 공적에 따라 신하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 북동의 땅을 주었는데 산하가 웅장하고 풍기가 굳세어 숙신(肅愼)이라 했다. 대체로 땅이 몹시 추워 농사가 제대로 안되고 목축이 적당하므로 백성들에게 활을 메고 칼을 차며 사냥을 하게 하였다. 후세에 백성들이 점점 흑수(黑水 : 시베리아) 땅으로 옮겨가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주업을 삼게 되었고, 매우 건장하고 용감하여 점점 멀리 진출해갔으나 글을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북쪽의 야만인과 섞이면서 점점 동이족의 풍속을 잃게 되어 오랑캐라는 지탄을 받게 되었다. 후세에 한(漢)나라에서는 숙신을 읍루( 婁)라 불렀고, 위(魏)나라와 원(元)나라에서는 물길(勿吉)이라 칭했으며, 수(隨)나라와 당(唐)나라에서는 말갈(靺鞨)이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열국시대에 동예(東濊), 맥(貊)이라 불리워졌다. 맥족(말갈족)은 고구려에 통합되었으며, 이러한 민족의 동질성이 있었기에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들인 부여족과 말갈족, 거란족은 힘을 합해 대진국(발해)를 세운다. 발해 멸망과 함께 거란족, 말갈족 등은 독립적 세력으로 떨어져 나갔고, 근본을 잃고 한족과 섞이면서 동화된 말갈족이 여진족으로 커져 세운 나라가 금나라이며, 후에 다시 만주족의 청나라로 발전했다.
▶ 몽고족 한단고기에서는 "4대 오사구단제 원년(B.C. 2137년), 큰아들 구을(丘乙)을 태자로 삼고,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몽고지역의 왕으로 삼으니, 오사달은 몽고인의 조상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훗날 몽고의 부족장들이 테무진을 징기스칸으로 추대한 것은 1206년이며, 원나라는 한족의 송나라를 멸망시킨 후 1279년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최대의 제국을 이루었다.
▶ 흉노족 2대 부루단제 6년(B.C. 2235년) 요동의 태수 삭정(索靖)의 치적이 착하지 못하고 나쁘므로 단제께서 크게 노하시어, 삭정을 약수(弱水)에 유배하였으니, 삭정은 흉노적의 조상이다.(한단고기) 예로부터 쓸모 없는 사람을 가리켜 "삭정이 같은 놈"이라 함은 이에 연유한다. 35대 사벌단제 제위시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이렇듯 흉노의 추장들은 단군조선에 공물을 바쳤 왔으며, 그후 흉노족이 세운 나라가 연나라이며, 세력이 커지면서 고조선의 변방을 자주 침범하였다. 속임수로 번조선을 망하게 하고 위만조선을 세운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었으며, 그러한 혈통의 연관이 있었기에 위만은 상투를 틀고 조선으로 망명해왔으며 받아들여진 것이다. 또 거짓으로 항복한 연나라 장수 진개가 단군조선의 내정을 염탐하여 앞장서서 쳐들어옴으로써 위만조선은 멸망하게 된다. 동이족의 변방족인 동호(東胡)가 흉노족의 모둘선우에게 패한 뒤 양분되어 선비족과 동오족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 선비족 한국시대에 12한국의 하나인 선비국이 있었다. 한자로 통고사국이니, 퉁구스족(돌궐, 오늘날 터키의 뿌리)의 기원임을 알 수 있다. 15대 대음단군의 동생인 대심(代心)을 남선비(南鮮卑)의 대인으로 삼았다.(한단고기-B.C. 1661년) 남연왕 모연씨도 선비족 출신이다. 선비족의 민족적 대영웅은 2세기 중엽의 선비군장인 단석괴(檀石槐)이며, 선비족은 흉노족과 흥망을 함께 했다고 한다. 훗날 선비족의 후예가 수양제와 백만대군으로 유명한 수(隨)나라를 세웠다.
〔중국의 기록에서 찾은 동이족의 역사들〕
① 황제는 백민에서 태어났고, 동이족에 속한 사람이다.<초사(楚史)> ② 요임금은 황제헌원의 5세손이다.<사마천의 사기> ③ 순임금은 풍(風)에서 태어났고 부하(負荷)로 이주하였으며 명조(鳴條)에서 죽었다. 명조는 모두 동이족의 땅이며 순임금은 동이족이다. <맹자(孟子) 이루장귀(離婁章句) 下에서> ④ 주나라를 세운 문왕(文王)은 기주에서 태어났고 필영에서 죽었다. 그곳은 서이(西夷-동이족의 한 지파)의 땅이다.<맹자(孟子) 이루장귀(離婁章句) 下에서> ⑤ 공자는 스스로 "구(邱 공자의 자)는 은나라의 후예다."<공자세가> 공자는 은족이다. 곡부에서 태어났다.<예기(禮記) 3편 단궁 상(上)> ⑥ 동이사람인 신농과 황제헌원의 시대에, 동이족의 갈래인 여묘족이 중국의 남부땅까지 차지하여, 대저 한 옛적에는 양자강과 한수지역에 여(黎)의 땅이 있었다. <중국 학자 임혜상, 중국 민족사, 상권 제4장 동이계> ⑦ 한(漢)족이 아직 중국땅에 들어오기 전에 앞서, 중국의 중부와 남부는 본시 동이겨레의 갈래인 묘족이 살던 땅이었다. 그런데 한(漢)족이 들어온 뒤로부터 (동이족과 한족은) 점점 접촉하게 되었다. <일본학자 조거룡장, 출전 : 겨레역사 6천년> ⑧ 세석기 시대의 문화부족이 맨처음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방에 살았는데, 그들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염제신농의 본족이다. 그런데 이 문화부족이 서전 우공편에서 말한 동이겨레의 갈래인 도이, 조이, 우이, 내이, 회이와 은나라의 갑골문자로 적은 이방, 토방, 길방, 귀방, 강방과 주나라 때 이(夷), 적(狄), 험윤( 允), 진한 때 호(胡), 맥(貊), 흉노(匈奴), 위. 진나라 때 오환(五桓), 선비(鮮卑) 등의 원종족이다. <중국학자 서량지> ⑨ 진(秦)나라의 선조는 황제, 전욱, 고양씨이며, 묘족(苗族)의 후예다. 진(秦)나라와 조(趙)나라는 모두가 모계혈통이나 그 모계의 아버지는 전욱이다. 소호(小昊)씨는 영씨 성을 가진 족으로, 진나라 조상의 할아버지가 소호씨이다. <사기(史記) 진 본기(本紀)> ⑩ 중국 고대사는 모두 동이족의 역사다. <중국 북경대학교 고고학과 엄문명 주임교수의 증언>
(10) 단군조선의 멸망 그런데 후단군시대에 접어들면서 세력이 커지게 된 장수들이 차츰 말을 잘 안 듣게 되었고, 개인적인 욕망에 따라 이합집산하게 되었다. 말기에는 실제로 반란까지 일어나게 되고, 고열가 단제때에 이르러서는 그 법통으로 연결된 끈이 없어져 버렸으며, 종래에는 멸망에 이르게 된다.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 단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셨다고 기록은 말한다. 하지만 그 시기는 이미 성인(聖人)이 실제로 정치할 수 있는 시대-천시(天時)는 끝난 것이었다. 너무나 욕심으로 어지러운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세상 이치대로 하자면 그러한 시기는 강력하고 세속적인 지도자가 나와야 할 시기였다. 그래서 고열가 단제께서는 천시를 보신 후 때가 지났음을 알고, 영적인 눈으로 새로운 천시가 이천 년 후에나 이 민족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보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시고는 "너무나 타락해서 고귀한 법을 전수해 줄 수 없다."고 하신 후 고열가 단제께서는 절망으로 통한의 가슴을 안은 채, 2천년 신선의 역사를 폐관하시고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셨다.(B.C. 238년 3월) 하늘의 법이 공식적으로 끊어진 이 날은 민족 최대 통한의 날로써, 이후로는 천화한 사람이 없었다.
3) 고열가 단제의 폐관
단군조선은 고도의 정신문화와 함께 엄청난 부를 누렸다. 중앙 아시아를 지배하며 2000년간 태평성대를 누린 끝에 사람들은 사치해지고, 나태해지고, 게을러졌다. 정신을 잃어버리고 욕망에 빠져 살게 되었으며, 그들의 이기심은 끝이 없었다. 본래 단군조선의 방대한 강역은 후기에 들어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중 진조선은 단군의 직할통치 구역이었고, 번조선·막조선은 비왕을 두어 간접통치 했었다. 진조선은 B.C. 238년 47대 고열가 단제의 폐관으로 문을 닫았다. 번조선은 B.C. 194년 동이족의 모습을 한 연나라 사람 위만의 책략에 멸망했다. 마지막 42대 기자인 기준은 배를 타고 한반도로 피신하여 목지국의 금마군으로 가서 마한이란 나라를 세웠다.(백제에 흡수된 직산마한). 제가(諸家)들은 한반도의 월지로 건너가 나라를 세워 익산 마한이 되었다. 막조선은 B.C. 238년 35대 비왕 맹남을 마지막으로 진조선과 함께 막을 내렸다. 위만조선은 번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의 정권을 찬탈한 위만으로부터 3대 우거까지를 말하며 내부분열 끝에 한나라에 항복했다.
4) 단군조선 시대의 역대기
37대 단군 2096년간 지속되었던 고조선의 역대 단군은 다음과 같다. ( )안의 숫자는 재위기간과 재위 원년이다.
(1) 단군왕검의 탄생과 성장 국조 단군왕검은 거불단 한웅과 천모(天母)님 사이에서 신묘년(B.C. 2,370) 5월 2일 인시(寅時), 박달나무 밑에서 태어나셨다. 즉 천손족(天孫族)의 족장이며 배달국의 수장이신 한웅 천황과 지손족(地孫族)인 웅족(熊族)의 여인이었으나, 깨달음을 얻어 천손(天孫)이 되신 웅녀 공주 사이에서 세상에 나오신 분이다. 단군왕검은 어려서부터 신인(神人)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14세 되던 갑진년(B.C. 2357)에 외할아버지인 웅족의 왕은 그의 신성함을 알아보고 비왕(裨王 : 왕을 보좌하는 부왕)으로 삼았다.
(2) 단군조선의 건국 개천(開天) 1565년(무진(戊辰)년, B.C. 2333) 상월(上月 : 음력 10월) 3일에 이르러, 신인(神人) 왕검이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에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잡고,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님께 제사를 올려 단군조선이 시작되었다. 단군왕검께서는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으며,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라와 백성을 다스렸다. 구한(九桓)의 백성들은 모두 그를 마음으로부터 따랐고, 단군왕검을 천제(天帝)의 화신이라 여겼다. 단군왕검은 신시(神市)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이름했으며, 비왕의 자리에 24년, 제위에 93년 있고 130세까지 사셨다.
(3) 단군왕검의 가르침-단군칙어(檀君勅語) 단군께서 개국하실 때 모든 백성들에게 내린 가르침의 말씀이 있었는데, 이를 단군칙어(檀君勅語)라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너희는 지극히 거룩한 한얼님의 자녀 됨을 알아라. ② 너희는 영원토록 자손이 계승할 때에 터럭 만한 것이라도 다침이 없고 이즈러짐 없어라. ③ 너희는 한겨레로 일체가 되어 의좋고 정답게 서로 손을 잡고 같이 살아라. ④ 너희는 조심하라, 조심하라. 내 땀방울이 적시우고, 내 피가 물들인 강토에 혹여나 더러운 때 묻힐세라. ⑤ 너희는 네가 해야할 일은 너희 손으로만 하게 하라. 그리하여 각기 너희 할 직분을 지켜라. 너희 할 책임을 견뎌라. ⑥ 네가 가질 것은 남에게 주지 말고, 네가 할 일을 남이 하지 말게 하라. ⑦ 너희는 이 나라 기슭, 한군데도 빠짐없이 하늘 은혜와 땅의 이익 두루 받았음을 알라. 너희 것 삼아 쓸데로 써서 너희 생활이 항상 풍족하거라. 넉넉하거라. ⑧ 너희는 내가 오늘 훈칙한 이 알림이 할 일로써, 천하만민에게 고루 알리어 주거라. 또 단군왕검의 가르침은 민족의 3대 경전중의 하나인 <참전계경(參佺戒經)>이라는 경전으로 전해진다.
2) 단군조선의 발전
(1) 신선도의 제천의식 - 천제(天祭) 첫 민족국가로써 신선의 나라를 세운 왕검께서는 정신적 상징으로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참성단(塹城壇)이라는 제천단을 쌓게 했다. 그리고 나라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나 5월 단호제와 10월 상달제 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 민족의 근본에 보답하였다. 이때는 제천권을 가진 천자(天子)였던 역대 단군들이 천제를 주관했다.
(2) 단군시대의 제천행사
① 2대 부루단제 26년(B.C. 2215년) 하늘신 공경에 대한 석자장(石子丈)의 건의를 받아들여 천하에 조서를 내리고, 삼신전(三神殿)과 삼성사(三聖祠)를 세워 한인, 한웅, 단군의 삼신위를 봉안하여 백성들에게 경배하게 하였다.
② 11대 도해단군 원년(B.C. 1891년) 단제께서는 열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택하여 국선(國仙)의 소도(蘇塗)를 설치하도록 하셨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에 그 중에서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한웅의 상(像)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 지내며 웅상(雄常)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한웅천황을 모시는 대시전(大始殿)을 세워 한웅 천황을 모시게 하였다.(이 전각은 그 뒤 한웅전, 대웅전으로 바뀌었으며, 불교가 우리 나라에 전래하여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석가 세존을 모시는 법당도 선불습합(仙佛習合)의 영향 속에 대웅전이란 이름으로 남았다) 한편, 천부인(天符印)이 표시된 커다란 원 하나로 된 그림을 누각(樓閣)에 걸어 두었으며, 이를 거발한(居發桓)이라 하였다.
③ 16대 위나단제 28년(B.C. 1583년) 구한의 여러 한(汗)들이 영고탑에 모여 삼신 상제께 제사를 지냈으며, 한인, 한웅, 치우로부터 단군왕검까지 모셨다.
④ 24대 연나단제 2년(B.C. 1160년) 여러 한(汗 : 제후국의 왕)들은 단제의 지시를 받들어 소도를 증설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 또는 재해가 있을 때마다 소도에서 기도하여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⑤ 33대 감물단제 7년(B.C. 813년)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甘勿山) 아래 한인, 한웅, 단군을 모시는 사당인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지냈다.
⑥ 44대 구물단제 2년(B.C. 424년) 예관이 청해 3월 16일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행했다. 단제가 친히 행차해 삼육대례(三六大禮)로 경배했다.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 : 부여의 영고제도로서 삼신을 섬기는 제천행사이며, 행사를 지낸 후 연일 마시고 먹으며 노래하고 춤추며 북을 쳤다)는 북을 두드리면서 삼신을 맞는 제례이다.
⑦ 47대 고열가단제 14년(B.C. 282년) 단군왕검의 묘(廟 : 사당)를 백악산에 세우고, 유사에게 명을 내려 한 해에 네 번씩 여기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단제께서도 1년에 한 번씩 친히 제사를 지냈다.
(3) 체제 단군은 정치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요, 종교적으로는 최고 지도자요, 교육적으로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큰 스승이었다. 그러므로 단군은 신정(神政)을 베풀어 선계(仙界)를 지향하였으며, 동시에 지상에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그 목적에 적합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단군조선의 통치체제는 1단군(檀君), 3한(韓), 5가(加), 64족(族), 3사(1伯, 2師), 6사(事)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3한(韓)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이며, 광대한 땅을 셋으로 나누어 진한은 단군의 직할통치 지역이었고, 나머지 마한, 번한은 비왕들을 두어 간접 통치했다. 22대 색불루단제 이후에 막조선, 진조선, 번조선의 삼조선(三朝鮮)으로 개편되었다. 5가(加)는 우가(牛加), 마가(馬加), 저가( 加), 구가(狗加), 양가(羊加)이며, 64족은 단군조선을 이루고 있는 부족이다. 3사6사(三師六事) 제도는 배달국 이래로 이어져온 중앙행정체제로 3사(師)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말하고, 6사(事)는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형(主刑), 주병(主病), 주선악(主善惡), 주병(主兵)을 말한다. 또한, 제위의 계승과 같은 중대한 국사(國事)에 대한 의결기관으로는 3한(韓) 5가(加)로 구성되는 화백회의(和白會議)가 있었는데, 한국 배달국 이래의 전통이었다. 최고 통치자인 단군의 제위(帝位)는 대체적으로 단군의 장자(長子)를 통하여 계승되어 왔으며, 장자에게 문제가 있거나 특별히 뛰어난 인물이 있을 때는 화백회의에서 그를 추대하여 단군의 제위를 계승하였다.
(4) 경제 및 산업 단군조선의 경제적 기초는 농업이었으며 그밖에 유목, 사냥, 고기잡이, 채집이 병행되었다. 토지제도는 균전제(均田制)를 채택하였으며, 세율은 매우 낮아 8대 우서한단제 원년(B.C. 1993년)에는 1/20 세법(二十稅一之法)을 채택하였으며, 15대 대음단제 원년(B.C. 1661년)에는 1/80 세제(八十稅一之制)를 채택하였다. 단군조선에는 교환경제가 발달하였으며, 교환의 기준을 위한 도량형 즉 쌀되와 저울 등을 이미 통일하였고, 패전. 패엽전. 자모전. 공방전 등 화폐의 개발이 이루어졌다. 또 이 시대에는 이미 산업이 발달하여 11대 도해단제 때는 공창(工廠)을 건설하여 종이, 베, 선박 등을 생산하였다. 또 농업국가의 기본인 치산치수(治山治水)에 성공하여 단군왕검의 장자인 2대 부루단제 3년(B.C. 2238년)에는 치산치수 사업의 지식을 그 무렵에 9년 동안의 홍수로 고생하고 있는 하(夏)나라의 우(禹)에게 팽오로 하여금 치수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단군조선은 고도의 정신문화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아주 풍요로웠던 나라였다.
▶ 단군조선 경제발전의 기록 ① 2대 부루단제 3년(B.C. 2238년) 쌀되와 저울 등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베와 모시의 가격이 다른 곳이 없고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았다. ② 4대 오사구단제 5년(B.C. 2133년) 패전(貝錢)을, 14대 고불단제 42년(B.C. 1680년)에는 자모전(子母錢)을, 19대 구모소단제 10년(B.C. 1426년)에는 패엽전(貝葉錢)을, 37대 마물단제 5년(B.C. 642년)에는 방공전(方孔錢) 등 화폐를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 단군조선의 발명품과 만국박람회 11대 도해단제 56년(B.C. 1836년)에는 송화강 연안에 기계공창을 설치하여 각종 기계를 제조하였고, 새로운 기계발명상을 받은 발명품이 나왔다. 황룡선(黃龍船), 양수기(揚水機), 자행륜거(自行輪車), 경기구(輕氣球), 자발뢰차(自發雷車), 조담경(照膽鏡), 천문경(天文鏡), 자명종(自鳴鐘), 양우계(量雨計), 측풍계(測風計)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물건들이 발명되었다고 한다. 또 도해단제 38년에는 수도인 평양에서 만국박람회를 크게 개최하여, 여러 나라의 진기한 물품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와서 산더미같이 진열되었다. 단군조선은 신선도를 수련하는 도인들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당연히 상단전이 열려 하늘의 메시지를 받고 우주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초능력자들이 많았으며, 그로부터 수많은 발명품 등 각종 이기들이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국시대의 12한국을 통해서 세계각지로 이동한 9한족(九桓族)들과 수메르국, 아유타국 등 혈연을 같이하고, 문명의 교화를 받아온 수많은 제후국들이 모여 만국박람회를 열었다고 놀랄일은 아니다. "14대 고불단제 56년(B.C. 1666년)에는 호구(戶口)를 조사하였는데 단군조선의 인구는 총 1억 8천만 명이었다."는 기록도 모든 제후국들을 총 합한 숫자일 것이다.
(5) 단군조선의 문화 ① 가림토 문자 단군조선시대에는 선대인 배달국으로부터 계속 사용해온 진서(眞書), 즉 녹도문자가 있었다. 그러나 텔레파시와 같은 고도의 의사전달 방법을 깨우치지 못했으며, 배움이 부족한 일반 백성들이 녹도문을 사용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또 음문자이며 만물을 형상화한 뜻글자인 녹도문만으로는 완전한 문자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렇게 해서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조선의 문자인 가림토(加臨多) 문자가 탄생하게 되며, 가림토 문자(38자)를 토대로 더 쉽게 정리하여 4177년 뒤 재창조된 것이 바로 훈민정음(28자)이다.
② 가림토 문자는 훈민정음의 원형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가림토 문자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원형이다. 그리고 근세조선 시대 세종 때에 이르러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로 재창제 되었으며, 최근에는 주시경 등에 의해 24자로 재정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림토는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일본에도 전해져 신대문자(神代文字)인 아히루(阿比留)문자가 되었다. 또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분국이었던 몽고로 건너가 "파스파"란 고대문자가 되었으며, 배달국의 분국이 있었으며 그 후예들이 살고있는 인도로 건너가 산스크리스토 알파벳과 구라자트 문자의 원형이 되었다.
▶ 가림토 문자 창제동기 단군조선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B.C, 2181년)에 갸륵 단제께서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다. "아직 풍속은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해도 옆에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多)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다." (한단고기-단군세기편)
▶ 훈민정음 재창제의 증거 ①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언문은 전조선 시대에 있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 (세종실록 103권 ; 세종 23년에 발표한 글) ②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 여덟 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이다.(세종실록 25년 ;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첫 발표문) ③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옵서 정음 스물 여덟 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를 들어서 보이시면서 이름지어 가로되 훈민정음이라 하시니, 상형하되 글자는 옛날의 전자(篆字)를 본따고...(정인지(해례서문) : 현재 고려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음) ④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과 합자가 전혀 옛것과 반대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한글 재창제를 반대하는 최만리와 당대 유학자들의 집단 상소문 중에서)
▶ 해외에 남아있는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 그러나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은 한단고기 뿐 아니라 일본, 인도, 몽고 등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나라들에 풍부하게 남아 단군조선 시대와 그 영향력을 지금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다만, 우리만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공식화하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
▶ 일본의 신대(神代)문자 일본에는 한글을 닮은 고문자가 있다. 대마도의 아히루 가문에서 전해져왔기 때문에 아히루 문자라고 하며 신들의 시대에 신들이 쓰던 문자라 해서 신대문자라고 한다. 일본의 고대 신들이 쓰던 문자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그것이 고대한글이라는 실제적 사실과 우리의 조상들이 일본을 건설했고 엄청나게 발전시켰다는 우리측 주장을 연결해 보면 그 일본의 고대 신들은 고도의 문화를 갖고 일본땅에 들어간 한국인들임에 틀림없다. 신대문자는 지금도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 등에 아직 보관되어 있다. 일본 이세신궁에 소장된 신대문자의 기록은 서기 708년의 유물이다. 서기 700년 무렵은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 후 발해를 건국했을 무렵이며, 세종대왕은 1446년에야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단군조선 시대가 신화였고, 가림토 문자도 한단고기에 나왔으니 믿을 수가 없다고 전제한다면, 1446년의 훈민정음에서 708년의 신대문자가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렇다면 일본의 신대문자에서 훈민정음이 나왔는가? 실제로 일본의 오향청언(吾鄕淸彦 고쿄 기요히코)이란 학자 등도 708년의 신대문자의 유물을 증거로 들면서 "일본의 신대문자가 조선으로 건너가 훈민정음을 낳게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고 그것을 연구한 결과, 자신의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조선 훈민정음의 뿌리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신대문자의 원형인 원시한글이 한단고기에 수록되어 있다."고 인정했다. 일본의 천황가 자체를 비롯, 일본이 단군조선이래 한국인이 건너가 세운 나라라는 것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일본인들에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것을 인정하기를 기본적으로 꺼릴 뿐 아니라 오히려 기회만 있으면 거꾸로 왜곡하려고 애를 써왔다. 그런데 그런 풍조 속에서 일본의 학자가 그때까지 자신의 주장을 뒤엎고 가림토 문자에서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나왔고 그 뿌리임을 학자적 양심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통 사학계와 국어학계에서는 아직도 "훈민정음이 세종대왕 혼자서 만들었는지 신하들과 함께 만들었는지" 논쟁 중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수 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 가림토의 고향인 우리 나라에서는 단군조선 시대를 신화 속의 시대로 치부하는 후손들이 아직 많은데, 지금의 일본 땅에는 단군조선의 가림토 문자가 신격화되어 신사와 박물관에 보전되어 있고 비석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제를 입증해준다. 단군조선이 있었다면 단군할아버지도 실제하셨던 민족의 조상임을 믿을 수 있고, 가림토 문자가 발견되는 곳은 단군조선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단군조선의 가림토가 일본에 보급되어 아히루 문자가 된 것이다. ▶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인도의 남방 구자라트 주에서 쓰이는 문자는 우리의 한글과 흡사한데 자음은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 같다.(ㄴㄷㅌㅇㅁㅈㅂ 그리고 ㅏㅑㅓㅕㅗㅛㅡㅣ등) 이 지역은 배달국 시대 우리 민족이 인도로 이동해가서 세운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의 후예가 사는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자라트인들이 사용하는 타밀어에 문자뿐 아니라 발음과 뜻이 비슷한 단어들(나-난/너-니/엄마-엄마/아빠-아빠/보다-봐/날-날/오다-와/나라-나르/너 이리와-니 잉게와 등)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 산스크리스트어 알파벳은 우리가 국민학교 때 배운 한글과 너무나 흡사하고 (찌커거.., 쪄쳐져..., 떠터더..., 뻐퍼버..., 셔허), 우리 한글처럼 "ㄱ"에서 시작해 "g"으로 끝난다.
▶ 영어와의 관계 가림토 문자에는 X O M P H I 등 알파벳의 자모도 여러 개 보인다. 가림토 문자가 4177년 전에 만들어진 반면, 알파벳의 역사는 겨우 3000년을 넘지 못한다. 제후국의 왕 또는 어떤 지역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말인 한(汗)은 하늘을 뜻하는 글자인 한(桓)에서 나온 이름이다. 즉 한(桓)에서 한(韓), 한(漢), 한(汗)이 나온 것이다. 또 한(汗 : HAN)이 몽고로 건너가 칸(KAN : 징기스칸)이 되었으며, 징기스칸의 유럽 정복 때 서구로 건너가 킹(KING)이 되었으며, 그후에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하버드대학에서의 연구결과로도 발표된 바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우리말과 우리의 고문자는 한단시대의 영역을 통해 전세계로 전파되면서 각 지역의 독특한 환경과 조건들에 따라 변화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다.
(6) 문화와 교육
▶ 천문역법 단군조선에도 태음력(太陰曆)과 태양력(太陽曆)에 의한 달력이 있었다. 2대 부루단제 12년(B.C. 2229년)에 신지 귀기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正圖)를 만들어 바쳤다. 5대 구을단제 4년(B.C. 2096년)에는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세수로 세는 육십갑자(六十甲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19대 구모소단제 54년(B.C. 1382년)에는 지리숙이 태양을 중심으로 달과 별이 그 궤도를 한 바퀴 도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태양력인 주천력(周天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저술했다.
▶ 단군조선의 노래 2대 부루단제 때의 어아가(於阿歌), 16대 위나단제 때의 애한가(愛桓歌), 34대 오루문단제 때의 도리가(兜里歌)등이 즐겨 부르던 노래이다.
- 어아가(於阿歌) -
신시(神市)이래로 하늘에서 제사지낼 때마다 백성들이 모두 모여 함께 노래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덕목을 다졌다. "어아"는 사람이 기뻐서 내는 소리라고, 2대 부루단군 제위 기간중의 기록에 나온다.
"어아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시 은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마세 어아어아, 착한 마음 큰 활이고 나쁜 마음 과녁이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줄처럼 똑같으며, 착한 마음 곧은 화살 한맘으로 똑같아라. 어아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 되어 과녁마다 뚫고 지고, 착한 마음 끓는 물은 한덩이 눈과 같은 악한 마음 다 녹이네 어아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만년 크신 은덕, 한배검이시여, 한배검이시여."
- 애한가(愛桓歌) -
16대 위나단군(B.C. 1583년)때 노래이다. 무궁화꽃은 한국시대 이래로 나라꽃이었으며. 한화(桓花) 혹은 천지화(天地花)로 기록되었으며, 꽃이라고 불렀다. 곧 무궁화를 지칭하는 꽃이란 말이 오늘날 "꽃"이란 이름의 기원이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그루 심고 올해 또 만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 저술 단군조선 때는 인문, 사회, 자연과학에 관계된 저술이 수없이 많았다. 그 서적들의 이름과 저서는 다음과 같다. 3대 가륵단제 6년(B.C. 2177년) 신지고결의 배달유기(配達留記 : 최초의 역사서) 19대 구모소단제 51년(B.C. 1385년) 목아득의 우주원리론 40세 달음단제 때 윤지복의 도덕경 42대 을우지단제 때 백호돈의 지리학(地理學)과 광물학(鑛物學) 43대 물리단제 때 장자학의 설명학(說明學) 44대 구물단제 때 최화덕의 동물학(動物學)과 식물학(植物學), 서백원의 태양-태음-소양-소음의 사상의학(四象醫學), 황운헌의 백과서(百科書), 류종득의 이재학(理財學), 적우순의 심리학(心理學) 45대 여루단제 때 장소부의 의학대방(醫學大方), 홍문선의 태학조문(太學條文), 조대휴의 자본론(資本論) 47대 고열가단제 때 소정국의 건축학(建築學), 구로선의 종수학(種樹學)
▶ 단군조선시대의 교육 단군과 신하들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들이었으며, 백성들은 단제를 깨달으신 성인으로, 한인 할아버지-한웅 할아버지-단군 할아버지로 이어지는 얼의 어버이로 믿고 섬겨왔다. 그러므로 역대 단군으로부터 제자들로써 법(法)을 전수받고 100%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랐기에 단군조선과 같은 방대한 신성제국이 2000년이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온 나라의 백성들 남녀노소 모두 신선도를 수련하여 몸과 마음을 닦았으며, 단군조선이란 나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학교이자 수련장이었다.
▶ 단군조선 교육의 특성 단군조선시대에 이루어진 교육의 특성은 신선도를 전국민이 닦음으로써, 신성을 깨닫고 하늘과 통하는 종교교육과 지덕체를 연마하는 사회교육이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데 있다. 그래서 제천행사를 주관하는 성소(聖所)인 소도(蘇塗)옆에는 교육기관인 경당이 함께 설치되어 청년들을 교육시켰다.
▶ 교육제도 나라의 인제를 양성하는 제도로 국자랑(또는 천지화랑)이 있었으며, 화랑의 총사령관이 국선(國仙)이었다. 제천기간 동안에는 화랑들이 하늘에 제를 지내는 소도의 행사를 주관하였으며, 평소에는 소도가 화랑들의 회의장소로 쓰여졌다. 이렇듯 단군조선시대 교육의 역할을 담당했던 기관으로는 소도, 국자랑, 경당 등이 있었으며, 14대 고불단제 때(B.C. 1670년)는 국립대학이 설치되었다.
▶ 소도(蘇塗) 소도에서 지내는 제천(祭天)행사와 의식은 곧 고구려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다. 그로부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힘을 합하고 이웃을 위하여 있는 이와 없는 이가 서로 도와 문명한 나라를 이루고, 개화 평등하여 온 세상에 제사의 예를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소도가 세우지면 그 안에서는 계를 지켜야하는데 바로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이며 천지화랑들의 계명이기도 했다. 소도의 곁에는 반드시 교육기관인 경당이 세워진다.
▶ 천지화랑(국자랑 : 國子郞) 13대 흘달단제 20년(B.C. 1763년)부터 시행된 신라 화랑제도의 기원으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던 미혼의 자제들을 말한다. 국자랑이 출행할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天地花 : 무궁화)를 꽂았기 때문에 천지화랑이라고도 했으며, 화랑들의 총사령관을 국선(國仙)이라 했다. 천지화랑은 후대 고구려의 조의선인이나 신라의 화랑도로 이어졌다. 여자낭도를 원화(源花)라 했고, 남자를 화랑(花郞)이라 했으며,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하사받은 이를 천왕랑(天王郞)이라고 했다. 이들은 신선도의 오상(五常)을 지켰는데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으로 신라 때 원광법사가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진 세속오계의 원형이다. 소도는 화랑도가 모여서 회의를 하는 곳으로도 쓰여졌다.
▶ 경당 단군왕검 제위시절 2대 부루단군이 아직 태자였을 때 태자의 명으로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삼신을 태산에서 제사지냈다. 결혼하지 않는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 가지의 기예를 익히며 심신을 수련했다. 11대 도해단군 시절에도 경당을 설치하여 칠회제신의 의식을 정하고, 삼륜구서의 가르침을 강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하여 한도(桓道)문명의 번성이 먼 나라까지 들려, 하나라 13대왕 근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고 한다. 경당은 고구려 때까지도 평민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교육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7) 단군조선의 강역 단군조선의 영토는 치대 캄차카반도, 연해주를 비롯한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와 제주도, 일본, 몽골, 티베트와 중국의 중동부(하북성, 하남성,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 산서성, 섬서성, 감숙성, 호북성, 호남성 등)까지, 그리고 최소 만주대륙 전체와 한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북아시아 대륙을 대통일한 민족국가였던 것이다. 단군왕검은 천하의 땅을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며, 삼한은 5가(加) 64족(族)으로 이루어졌다. 삼한은 진한, 마한, 변한을 말하며, 진한은 단군왕검께서 직접 다스리셨고, 마한은 고시씨의 후손인 옹백다를, 번한은 치우천황의 후손인 치두남을 봉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8) 단군조선의 대외관계
① 중국과의 관계 단군조선 시대에 요나라를 비롯한 역대왕조는 모두 단군조선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고 당연히 친선관계에 있었다. 조선은 자비와 의로움(仁義)로써 주변국들을 대했으며, 항상 아낌없이 도움을 주었다. 시대적으로 요-순-하-은-주나라로 왕조가 바뀌어갔으나 이 국가들이 모두 중국의 한족(지나족, 서토족, 하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며, 대부분 동이족의 국가가 많았으므로 현재 중국 한족의 시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나라들은 지도층에 불의한 일이 있어 민심을 얻지 못하고, 살기가 어렵게 되면 멸망의 길은 걸으며, 여러 왕조가 바뀌어갔다. 중국 역사상 3백년 이상 지속된 나라가 없었다. 최초의 봉건국가로 알려져 있는 주나라는 단군조선의 체제를 모방해 여러 봉토를 왕실의 친척에게 나누어주고, 공·백 등의 작위를 주어 제후로 다스렸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경우 단제께서 성인(聖人)이었으며, 동시에 제후들과 신하들의 스승이기도 하여 군신간에 절대적인 믿음으로 연결된 관계였었기에 한 나라가 2천년이 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주나라의 제후들은 그러한 신뢰들이 없었으므로 세월이 흐르면서 왕실을 무시하고 다른 욕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주나라는 270여 년만에 멸망하고 수많은 나라들로 분열, 마침내 춘추전국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면서 이합집산을 계속하다가 뿌리 국가인 단군조선을 침범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전국시대의 7개 국가 중 가장 동쪽에 위치했던 연나라와 제나라가 주로 조선에 도발을 하였다. 그러나 한번 조선을 침략하면 그들 국가의 수도까지 함락당하는 등 철저하게 응징당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단군조선이 멸망하고 조선이 열국으로 분열하여 힘이 급속도로 약화되어 갈 때, 반면 중국은 주로 200년 주기의 왕조의 변화 속에서 팽창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 왕조들도 한족(漢族) 만의 역사가 아니라, 동이계열이나 거기서 갈라져 나간 유목민족의 왕조가 많았다. 중국역사는 한족에 의한 왕조와 동이족 출신 유목민족에 의한 왕조<연(燕), 수(隨), 위(魏), 원(元), 금(金), 청(淸) 등> 간의 투쟁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② 주변국과의 관계 캄차카반도, 연해주를 비롯한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와 제주도, 일본, 몽골, 티베트와 중국의 중동부에 이르는 동북아시아 대륙 전체를 장악하고 있던 단군조선은 그 영토의 크기만큼 주변국과의 크고 작은 관계도 활발하였다. 몽고, 말갈, 흉노, 선비, 돌궐(투르크)등 모두 동이의 혈통에서 갈라져 나갔으며 각 지역의 토착종족들과 문화와 혈통이 섞이면서 근본을 잃어버리고 야만화되었다. 그러나 단군조선은 넘볼 수 없는 뿌리의 나라요, 스승의 나라였다.
▶ 단군조선의 도인정치 단군조선 시대에는 정신적·육체적으로 힘을 기르는 신선도의 수련이 국가적으로 시행되어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러한 신선도의 정신은 국제관계에서도 지도원리가 되었다. 주변국들 특히 지나족(漢族)들이 무도(無道)하고 그저 세상적 욕심으로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이고, 어버이 나라인 조선의 변방을 틈틈히 쳐들어오는 동안에도 단군조선의 역대 단군들은 홍익인간의 정신을 전수해주고 이화세계를 이루려는 마음으로 그 나라들을 인도하였다. 즉 국제적인 관계도 도(道)에 기준을 두고 전개되었던 바, 주나라의 경우처럼 전수받은 정신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면 내 일처럼 기뻐하셨고, 도리에 어긋나는 정치를 할 때면 그러한 나라들을 치기도 하셨다. 불가피하게 전쟁을 수행하게 되면 그러한 무도한 나라를 하늘을 대신해서 정벌한다하여 그 군사를 천군(天軍)이라 했으며, 행진해갈 때는 참나(본성)를 되찾는 구도가인 "아리랑(我理朗-나를 찾는 즐거움의 노래)"을 부르며 전쟁에 임했다고 한다. 그러한 큰 도의 기준을 갖고 전투에 임했기 때문에 싸움마다 연전연승이었으며, 그 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지나족 등 지손들을 무도한 야만인으로 간주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기백은 고구려시대까지 이어졌다. 한국-배달국시대에도 그러한 도의 기준으로 지구촌 곳곳에 정신문명을 전파하여 스승의 역할을 해왔고, 그렇게 면면히 이어진 전통이 찬란하게 꽃피운 나라가 단군조선이었다. 이렇듯 모든 것이 천도(天道)에 기준을 두고 행해졌던 아주 특별했던 나라였으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강대국의 모범이었다.
▶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의 기원 전체적으로 볼 때 단군조선 2천년의 역사 가운데 24회의 대소전란과 군대파견이 있었다. 그중 외국과의 싸움이 14회가 있었는데, 그것도 대부분 무도한 나라에 대한 징벌이요, 침략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러나 백년에 한번 꼴로 전란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며, 단군조선의 폐관이래 지금까지 2천년간 1000여 회의 외침과 전란이 있었다니, 단군조선 시대가 얼마나 태평성대였는지 알 수 있다.
(9) 여러 민족과 각국의 기원
▶ 티벳 배달국 15대 치액특천왕은 티베트 즉 치액특에 신선도를 전해주었으며, 티벳의 신선도가 인도로 전해지고 힌두교의 사상이 합쳐져 불교가 탄생하게 된다. 티벳(西藏)의 수도는 장당경(라싸로 추정됨)으로, 치우천황 때부터 8백년간 티벳을 직접 통치하였다고 한다. (일붕 서경보 박사의 증언) 단군조선때에는 3대 갸륵단군 이래, 5대 구을단군, 22대 색불루단제, 43대 물리단군, 44대 구물단군(B.C. 425)까지 장당경으로 수도를 이전하는 등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한단고기에 나오는 단군시대의 티벳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단군조선 3대 갸륵단군때 강거의 반란을 티벳에서 토벌하였다. - 이 기록을 통해 그때까지도 티벳이 단군조선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 5대 구을단군 16년(B.C. 2084년) 단제께서 친히 장당경(티벳)으로 행차하여 삼신의 제단을 봉축하고 많은 한화(桓花 : 무궁화꽃)을 심었다. 22대 색불루단제 원년(B.C. 1285년)에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여 묘를 세우고 조부인 고등왕의 제사를 지냈다. 43대 물리단군 36년(B.C. 426년) 우화충의 난이 일어나고 서북 36군을 함락시키자, 욕살 구물이 어명에 따라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을 점령하니 다른 지역의 군사들이 병력을 보내 원조했다. 44대 구물단군 원년(B.C. 425년) 우화충의 난을 진압한 욕살구물이 단제로 등극하였으며, 여러 장수들의 추대로 3월 16일 제단을 쌓고 천제를 지낸 후 장당경에서 즉위하였고, 나라이름은 대부여-삼한은 삼조선으로 바꿔 불렀다. 삼국유사에도 기원전 425년(44대 구물단제 무렵) 나라이름을 대부여라 바꾸고 수도를 장당경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티벳의 신선도가 인도로 전해진 후 인도의 불교가 거꾸로 티벳에 전해져 티벳불교(라마교)가 되었으며, 그 라마교가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국교가 되어 다시 우리 나라의 고려조에 들어왔다. 결국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가 동족간의 교류였다. 라마교 이전의 티벳 전통신앙인 뵌 종교가 아직도 전해지고 있는데, 달라이 라마 치하 때만 해도 국가 무당이 초의식 상태에서 하늘의 메시지를 받아 정치에 자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금의 티벳, 네팔의 풍속과 사람들의 생김새가 우리 나라의 그것들과 비슷하며, 드라비다족과 몽골리안이 주종을 이루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말갈족 단군왕검께서는 방대한 영토를 공적에 따라 신하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 북동의 땅을 주었는데 산하가 웅장하고 풍기가 굳세어 숙신(肅愼)이라 했다. 대체로 땅이 몹시 추워 농사가 제대로 안되고 목축이 적당하므로 백성들에게 활을 메고 칼을 차며 사냥을 하게 하였다. 후세에 백성들이 점점 흑수(黑水 : 시베리아) 땅으로 옮겨가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주업을 삼게 되었고, 매우 건장하고 용감하여 점점 멀리 진출해갔으나 글을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북쪽의 야만인과 섞이면서 점점 동이족의 풍속을 잃게 되어 오랑캐라는 지탄을 받게 되었다. 후세에 한(漢)나라에서는 숙신을 읍루( 婁)라 불렀고, 위(魏)나라와 원(元)나라에서는 물길(勿吉)이라 칭했으며, 수(隨)나라와 당(唐)나라에서는 말갈(靺鞨)이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열국시대에 동예(東濊), 맥(貊)이라 불리워졌다. 맥족(말갈족)은 고구려에 통합되었으며, 이러한 민족의 동질성이 있었기에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들인 부여족과 말갈족, 거란족은 힘을 합해 대진국(발해)를 세운다. 발해 멸망과 함께 거란족, 말갈족 등은 독립적 세력으로 떨어져 나갔고, 근본을 잃고 한족과 섞이면서 동화된 말갈족이 여진족으로 커져 세운 나라가 금나라이며, 후에 다시 만주족의 청나라로 발전했다.
▶ 몽고족 한단고기에서는 "4대 오사구단제 원년(B.C. 2137년), 큰아들 구을(丘乙)을 태자로 삼고,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몽고지역의 왕으로 삼으니, 오사달은 몽고인의 조상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훗날 몽고의 부족장들이 테무진을 징기스칸으로 추대한 것은 1206년이며, 원나라는 한족의 송나라를 멸망시킨 후 1279년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최대의 제국을 이루었다.
▶ 흉노족 2대 부루단제 6년(B.C. 2235년) 요동의 태수 삭정(索靖)의 치적이 착하지 못하고 나쁘므로 단제께서 크게 노하시어, 삭정을 약수(弱水)에 유배하였으니, 삭정은 흉노적의 조상이다.(한단고기) 예로부터 쓸모 없는 사람을 가리켜 "삭정이 같은 놈"이라 함은 이에 연유한다. 35대 사벌단제 제위시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이렇듯 흉노의 추장들은 단군조선에 공물을 바쳤 왔으며, 그후 흉노족이 세운 나라가 연나라이며, 세력이 커지면서 고조선의 변방을 자주 침범하였다. 속임수로 번조선을 망하게 하고 위만조선을 세운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었으며, 그러한 혈통의 연관이 있었기에 위만은 상투를 틀고 조선으로 망명해왔으며 받아들여진 것이다. 또 거짓으로 항복한 연나라 장수 진개가 단군조선의 내정을 염탐하여 앞장서서 쳐들어옴으로써 위만조선은 멸망하게 된다. 동이족의 변방족인 동호(東胡)가 흉노족의 모둘선우에게 패한 뒤 양분되어 선비족과 동오족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 선비족 한국시대에 12한국의 하나인 선비국이 있었다. 한자로 통고사국이니, 퉁구스족(돌궐, 오늘날 터키의 뿌리)의 기원임을 알 수 있다. 15대 대음단군의 동생인 대심(代心)을 남선비(南鮮卑)의 대인으로 삼았다.(한단고기-B.C. 1661년) 남연왕 모연씨도 선비족 출신이다. 선비족의 민족적 대영웅은 2세기 중엽의 선비군장인 단석괴(檀石槐)이며, 선비족은 흉노족과 흥망을 함께 했다고 한다. 훗날 선비족의 후예가 수양제와 백만대군으로 유명한 수(隨)나라를 세웠다.
〔중국의 기록에서 찾은 동이족의 역사들〕
① 황제는 백민에서 태어났고, 동이족에 속한 사람이다.<초사(楚史)> ② 요임금은 황제헌원의 5세손이다.<사마천의 사기> ③ 순임금은 풍(風)에서 태어났고 부하(負荷)로 이주하였으며 명조(鳴條)에서 죽었다. 명조는 모두 동이족의 땅이며 순임금은 동이족이다. <맹자(孟子) 이루장귀(離婁章句) 下에서> ④ 주나라를 세운 문왕(文王)은 기주에서 태어났고 필영에서 죽었다. 그곳은 서이(西夷-동이족의 한 지파)의 땅이다.<맹자(孟子) 이루장귀(離婁章句) 下에서> ⑤ 공자는 스스로 "구(邱 공자의 자)는 은나라의 후예다."<공자세가> 공자는 은족이다. 곡부에서 태어났다.<예기(禮記) 3편 단궁 상(上)> ⑥ 동이사람인 신농과 황제헌원의 시대에, 동이족의 갈래인 여묘족이 중국의 남부땅까지 차지하여, 대저 한 옛적에는 양자강과 한수지역에 여(黎)의 땅이 있었다. <중국 학자 임혜상, 중국 민족사, 상권 제4장 동이계> ⑦ 한(漢)족이 아직 중국땅에 들어오기 전에 앞서, 중국의 중부와 남부는 본시 동이겨레의 갈래인 묘족이 살던 땅이었다. 그런데 한(漢)족이 들어온 뒤로부터 (동이족과 한족은) 점점 접촉하게 되었다. <일본학자 조거룡장, 출전 : 겨레역사 6천년> ⑧ 세석기 시대의 문화부족이 맨처음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방에 살았는데, 그들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염제신농의 본족이다. 그런데 이 문화부족이 서전 우공편에서 말한 동이겨레의 갈래인 도이, 조이, 우이, 내이, 회이와 은나라의 갑골문자로 적은 이방, 토방, 길방, 귀방, 강방과 주나라 때 이(夷), 적(狄), 험윤( 允), 진한 때 호(胡), 맥(貊), 흉노(匈奴), 위. 진나라 때 오환(五桓), 선비(鮮卑) 등의 원종족이다. <중국학자 서량지> ⑨ 진(秦)나라의 선조는 황제, 전욱, 고양씨이며, 묘족(苗族)의 후예다. 진(秦)나라와 조(趙)나라는 모두가 모계혈통이나 그 모계의 아버지는 전욱이다. 소호(小昊)씨는 영씨 성을 가진 족으로, 진나라 조상의 할아버지가 소호씨이다. <사기(史記) 진 본기(本紀)> ⑩ 중국 고대사는 모두 동이족의 역사다. <중국 북경대학교 고고학과 엄문명 주임교수의 증언>
(10) 단군조선의 멸망 그런데 후단군시대에 접어들면서 세력이 커지게 된 장수들이 차츰 말을 잘 안 듣게 되었고, 개인적인 욕망에 따라 이합집산하게 되었다. 말기에는 실제로 반란까지 일어나게 되고, 고열가 단제때에 이르러서는 그 법통으로 연결된 끈이 없어져 버렸으며, 종래에는 멸망에 이르게 된다.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 단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셨다고 기록은 말한다. 하지만 그 시기는 이미 성인(聖人)이 실제로 정치할 수 있는 시대-천시(天時)는 끝난 것이었다. 너무나 욕심으로 어지러운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세상 이치대로 하자면 그러한 시기는 강력하고 세속적인 지도자가 나와야 할 시기였다. 그래서 고열가 단제께서는 천시를 보신 후 때가 지났음을 알고, 영적인 눈으로 새로운 천시가 이천 년 후에나 이 민족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보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시고는 "너무나 타락해서 고귀한 법을 전수해 줄 수 없다."고 하신 후 고열가 단제께서는 절망으로 통한의 가슴을 안은 채, 2천년 신선의 역사를 폐관하시고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셨다.(B.C. 238년 3월) 하늘의 법이 공식적으로 끊어진 이 날은 민족 최대 통한의 날로써, 이후로는 천화한 사람이 없었다.
3) 고열가 단제의 폐관
단군조선은 고도의 정신문화와 함께 엄청난 부를 누렸다. 중앙 아시아를 지배하며 2000년간 태평성대를 누린 끝에 사람들은 사치해지고, 나태해지고, 게을러졌다. 정신을 잃어버리고 욕망에 빠져 살게 되었으며, 그들의 이기심은 끝이 없었다. 본래 단군조선의 방대한 강역은 후기에 들어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중 진조선은 단군의 직할통치 구역이었고, 번조선·막조선은 비왕을 두어 간접통치 했었다. 진조선은 B.C. 238년 47대 고열가 단제의 폐관으로 문을 닫았다. 번조선은 B.C. 194년 동이족의 모습을 한 연나라 사람 위만의 책략에 멸망했다. 마지막 42대 기자인 기준은 배를 타고 한반도로 피신하여 목지국의 금마군으로 가서 마한이란 나라를 세웠다.(백제에 흡수된 직산마한). 제가(諸家)들은 한반도의 월지로 건너가 나라를 세워 익산 마한이 되었다. 막조선은 B.C. 238년 35대 비왕 맹남을 마지막으로 진조선과 함께 막을 내렸다. 위만조선은 번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의 정권을 찬탈한 위만으로부터 3대 우거까지를 말하며 내부분열 끝에 한나라에 항복했다.
4) 단군조선 시대의 역대기
37대 단군 2096년간 지속되었던 고조선의 역대 단군은 다음과 같다. ( )안의 숫자는 재위기간과 재위 원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