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세기 한문학 연구와 문화사적 시야
정민
Ⅰ. 머리말
Ⅱ. 18세기 한문학 연구의 최근 성과와 향후 전망
Ⅲ. 기성담론을 넘어 질문의 경로를 바꾸자
Ⅳ. 텍스트 순결주의와 콘텍스트 지상주의를 극복하자
Ⅴ. 동아시아적 전망과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를 회복하자
Ⅵ. 문학을 넘어 문화로 가자
Ⅰ. 머리말
이 글은 한국 한문학연구의 반성적 점검과 새로운 전망 획득을 위한 큰 기획의 전제에서 출발한다. 전체 주제는 「한국한문학 연구의 신기획 : 주제와 방법」이고, 「한국한문학연구의 현 단계와 발전적 전망」 중 단대사적 접근의 하위 주제로 작성되었다. 18세기 한문학 연구의 최근 성과와 현 단계를 점검하고, 이를 통해 향후의 발전적 전망을 가져보자는 것이 집필의 주된 취지다.
최근의 한문학연구는 특히 18세기를 대상으로 관심이 집중되어 왔다. 연구자들은 새로운 자료의 잇단 발굴과 정리를 바탕으로, 오늘날 인터넷 시대 정보화의 양태가 보여주는 18세기와의 상동성에 주목했다. 종래의 견고한 기성 담론을 넘어서는 여러 가지 생동감 넘치는 문화사적 정리 시도들이 여기에 맞물려, 앞으로도 이 시기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지속적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하지만 이러한 활발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문제 인식과 연구 태도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점이 있고,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답보적 측면이 적지 않다. 논자 또한 그간 18세기와 관련한 일련의 작업들을 진행해 왔다. 이 글은 이 과정에서 느낀 점과 이런저런 제언을 학술대회의 취지에 맞추어 거칠게 정리해본 것이다.
Ⅱ. 18세기 한문학 연구의 최근 성과와 향후 전망
최근 18세기 한문학 연구는 실로 다양한 국면에서 이루어졌다. 인터넷의 발달은 각 도서관의 낡은 서고 속에 먼지 쌓인 채 숨어있던 자료들을 속속 세상에 선뵈고 있다. 버클리 도서관에서 나온 관상용 비둘기 사육을 다룬 유득공의 『발합경(鵓鴿經)』, 앵무새에 관한 이서구의 책 『녹앵무경(綠鸚鵡經)』, 영남대 도서관에서 발견된 이옥의 『연경(烟經)』, 연암 박지원의 『소화총서(小華叢書)』 속에서 나온 정운경(鄭運經)의 제주 표류민 인터뷰집인 『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 등 10년 전만 해도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던 다양한 전적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이 중에는 화훼취미의 성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박의 『화암수록(花庵隨錄)』도 포함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발견되는 다산 학단의 풍성한 자료들은 말할 것도 없고, 19세기 자료이긴 하나, 최근에는 남녀간의 성애를 노골적으로 다룬 희곡 『북상기(北廂記)』와 또 다른 희곡 『백상루기(百祥樓記)』, 또는 평양 기생을 인터뷰한 『녹파잡기(綠波雜記)』 같은 책도 있다. 이런 자료의 잇단 소개는 이 시기 문화지형에 관한 생각을 단숨에 바꿔 놓았다.
이런 과정에서 밀랍으로 조매(造梅)를 만드는 법을 책으로 쓴 이덕무나, 그 방법을 따라 매화를 만들어 팔았던 박지원의 행동이 자연스레 재음미되었다. 이들은 상말이나 속담이나 놀이 같이 허접스런 정보들도 열을 올려 편집했다. 귀양지의 유배객이 그곳 물고기의 정보를 끌어 모아 정약전의 『현산어보(玆山魚譜)』와 김려의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가 나왔고, 이에 뒤질세라 서유구는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같은 실용서를 묶어냈다. 세상을 향한 이들의 열린 관심은 물고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들은 무엇에든 흥미를 느끼면 메모하고 기록하고 편집하고 정리했다. 꽃에 미쳐 꽃만 그려 『백화보(百花譜)』를 펴낸 사람도 나왔고, 재테크에 흥미를 느껴 『해동화식전(海東貨殖傳)』을 지은 이재운(李載運) 같은 이도 있었다. 중국 것을 보고 괜찮타 싶으면 바로 우리나라 버전으로 바꾸는 일도 열광적 환영을 받았다. 『우초신지(虞初新志)』를 본떠 중국 사람들도 못한 『우초속지(虞初續志)』를 기획했고, 이와 비슷하게 책 제목에 속편을 표방하거나 ‘대동(大東)’이니 ‘해동(海東)’이니 ‘동국(東國)’이니 하는 관형사가 얹힌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편집광적 충동이 이 시기 저작들에 넘쳐 나고 있었다.
각종 문집에 실린 원예 관련이나 정원 관련 정보, 또는 골동품 수집이나 장서 취미 등 이른바 웰빙과 관련된 정보들은 종래 우리가 생각하던 18세기에 대해 근원적인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말이 좋아 웰빙이지 유흥문화나 소비문화와 관련된 내용들이 더 많다.
자료 범위의 확대는 자연스레 관점의 확대와 논점의 변화를 가져왔다. 종래 실학이란 코드로만 설명하려들던 이 시기의 각종 문화 현상들은 이미 실학의 울타리를 벗어난 지 오래다. 앞서 든 책들은 유용성을 전제한 실학 담론, 즉 경세치용이나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논리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다. 『발해고(渤海攷)』를 쓴 유득공이 『발합경』을 쓴 것이 더 이상 실학자로서 유득공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못한다.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로 이용후생의 기치를 높이 들었지만, 그는 한편으로 중국제 물건이면 사족을 못 쓰는 당괴(唐魁) 당벽(唐癖)의 비난도 들었고, 아예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용감한 주장까지 내세웠다. 이들의 정체성을 과연 어디에다 두어야 옳겠는가? 담배에 대한 시시콜콜한 정보를 다 모아서 『연경』을 엮은 이옥은 어째서 실학자가 아니고, 집 비둘기 사육에 대해 정리한 유득공은 왜 실학자인가? 더 흥미로운 것은 앞서 든 모든 종류의 저작들이 실학이든 웰빙이든, 아니면 다산이 경학 정리에 동원한 그 엄청난 작업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정보 검색과 편집의 똑같은 프로세스를 거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모든 변화는 대부분 10년, 아니 최근 5년 사이의 연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늘 비슷비슷한 담론만 재생산 해내던 흐름이 갑자기 숨가빠졌다. 쏟아져 나오는 자료들의 의미를 정리하는 일조차 속도를 감당해내기 어려울 정도다. 새로운 자료의 등장에 따라 이전에 미처 몰랐던 내용이 밝혀지면서 고구마 넝쿨처럼 줄달아 관심사가 확장된다. 관심의 확장은 학제간의 드넓은 교섭으로 이어지고, 전에 볼 수 없던 활기를 낳았다. 원예나 정원에 관한 논의가 원예학 또는 조경학과의 긴밀한 교섭을 낳고, 회화에 대한 관심은 미술사 나아가 예술사의 학제적 관심을 유도한다. 활발한 자료가 쏟아져 나오면서, 그간 원전을 읽을 수 없어 답답하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새롭게 펼쳐지는 자료의 세계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주목하고 있다.
개인에 대한 관심의 확장은 그룹으로 이어졌다. 연암 그룹에 대한 다양한 접근시도, 다산 학단에 대한 자료 정리 작업, 김려와 이옥 등의 작업에 대한 재평가와 재음미, 각종 총서류 저작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 등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전에 익명의 편집자로만 존재하던 이들이 실명화 되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개인이 아닌 집단적 충동이 사회의 운동적 에너지로 변화해가는 과정도 조금씩 분명해졌다.
앞으로도 자료의 발굴 정리는 점차 가속도가 붙을 듯하고, 번역 작업도 여러 출판사의 의욕적 기획과 맞물려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학제간의 합종연횡도 이전처럼 아무런 소통의 장을 마련하지 못한 채 각자 제 자리에서 본 것만 떠드는 학제간이 아닌 깊이와 너비를 지닌 윈윈의 모양새를 띠게 될 듯하다.
역사학이 거대담론에 대한 미련과 사료에 대한 결벽성을 놓지 못하고, 국문학이 텍스트 지상주의와 작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이에 한문학은 성큼성큼 걸어 나가 새로운 기축(機軸)을 열고 있다. 당분간 고전 인문학의 생산적 담론은 한문학 중심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Ⅲ. 기성 담론을 넘어 질문의 경로를 바꾸자
발표자는 지난 2003년과 2007년에 두 차례에 걸쳐 18세기학회 세계대회에 참가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참관하였다. 4년에 한 차례씩 5박 6일의 일정 동안 전세계의 18세기 각 분야 연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근 1천편의 논문이 발표되는 학술 올림피아드였다.
2003년 8월에 UCLA에서 열린 18세기 세계대회는 모두 346개의 세션을 소화해냈다. “느낌의 뉘앙스: 18세기 문학의 열정과 감성”, “경제학 만들기: 18세기의 부와 번영에 관한 담론”, “교육 받은 여성들의 이미지”, “영화에 나타난 18세기 소설”, “몸과 계몽주의”, “18세기의 열정, 이성, 광기” 등등 다양한 제목 아래 훨씬 더 흥미로운 개별 주제들이 발표되었다. “18세기의 도박”, “계몽주의 시대의 여성과 교육”, “허구의 경계들: 역사와 18세기 소설” 등 이루 열거할 수 없는 다양한 분야의 주제들이 제시되었다. 2007년 8월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개최된 18세기 세계대회는 모두 251개의 세션으로 진행되었다. “계몽과 동아시아”를 주제로 한국과 일본18세기학회도 2개의 세션을 운영했다. 여기서도 “여행과 민족학”, “젠더, 전쟁, 그리고 국가”, “책과 사고의 순환”, “네트워크와 사회성”, “질병 서사에서의 굶주림과 광기”, “18세기의 식물, 정원, 조경” 등등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세션에서 다채로운 주제들이 발표되었다.
대회장에서는 종교, 철학,문학,역사,예술,의학,지리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18세기를 공동 주제로 모여 활발한 담론이 꽃피는 것을 여기저기서 목도할 수 있었다. 학문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영역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질문들은 한 분야에 갇혀있지 않고, 사소한 것에서 큰 담론을 이끌어내고, 큰 담론은 미소한 것들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 중심에 놓인 공통화두는 18세기였다.
그들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은 우리에게 몹시 낯설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들의 논문 제목을 보고 있으면 이에 대응하는 우리의 텍스트가 바로바로 떠오르곤 했다. 질문의 경로를 바꾸니 대답이 달라졌다. 늘 보던 텍스트가 문득 낯설어졌다. 더 이상 끄집어낼 것이 없어 보이던 문제들에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 해 봄 네덜란드 Leiden 대학교에서 개최된
이 일이 있기 전까지 필자는 표류 문제에 아무 흥미가 없었다. 막상 관심을 가지고 책을 들여다보니, 여기저기서 아직 연구되지 않은 관련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 여름 남경 대학에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에 갔을 때도 일본 간사이대학교 교수가 자신이 속한 대학 연구소에서 매년 1권씩 발간하고 있는 중국 표류민 관련 내용을 주제로 들고 나온 것을 읽었다. 그는 일본에 표류해온 청대 범선 관련 필담 사료에 대해 발표했다. 그때 만난 대만 학자는 대만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획주제가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내가 『탐라문견록』이란 책에 대만 표류기가 2편이나 있고 그밖에도 대만 표류와 관련된 자료가 있다고 알려주었더니 그는 대만에 와서 한번 발표해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2007년 8월 남경대학에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 때 일이다. 젊은 중국 연구자가 이규보의 작품 하나를 들고 논문 발표를 시작했다. 『동국이상국집』을 꽤 여러 번 들춰보았지만 전혀 기억에 없던 작품이었다. 이규보가 이런 글을 썼었나? 내 기억의 의외성에 놀라 나는 자꾸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논문 제목은 「李奎報 ‘東國諸賢書訣評論序並贊’ 小議」였다. 서예사를 전공하는 그녀는 이 글이 아주 흥미롭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의미를 하나하나 음미해 주었다.
몇 해 전 18세기 지식인들의 원예 취미와 정원 경영 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화훼 취미와 원예에 관한 문집 소스들을 한 자리에 모아 정리해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 문인들의 화훼와 원예에 대한 관심이 뜻밖에도 대단했다. 국화 화분 하나에서 네 가지 색깔의 국화를 피우기도 하고, 심지어 한 가지에서 두 색깔의 꽃을 피우는 기술까지 있었다. 화훼와 분재에 미친 사람들이 줄달아 나왔다. 정원 경영도 열풍처럼 번지고 있었다. 이런 시각에서 이후 당시 정원을 그린 회화를 보니 화면 속의 소품 하나하나가 모두 문집 속에 기술된 내용과 일치하고 있어 또 한번 놀랐다. 이런 내용들을 정리해서 발표했다. 반응은 한문학에서보다 조경학과 원예학 쪽에서 먼저 왔다. 한번도 이런 내용을 들어본 적이 없어 충격적이라는 말도 덧붙었다.
1996년 우리나라 역대 산수유기 자료를 지역별로 모아 『한국역대산수유기취편』 10책을 펴낸 적이 있다. 즉각적인 관심을 보였던 곳은 한문학계가 아닌 산림청이었다. 한문학 자료 속에 보이는 새 관련 한시와 설화 등을 모아 새 그림과 함께 분석한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2책을 2003년에 펴냈다. 회화 연구자들은 도상의 상징성에 흥미를 보였고, 조류 연구자들은 우리 고전 속에 새 관련 자료가 이렇게 풍부한 것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간 한문학계는 문집 자료에 실린 문학 외의 다양한 주제들에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역사학자들도 이들 자료가 공식 기록 아닌 개인 문집에 실려 있으므로 사료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렇듯 우리 한문학 유산 중에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한 번도 조명을 받지 못한 내용과 분야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생각만 바꾸면 널린 게 연구 거리다. 한문학이 소화해 낼 수 있는 영역은 가히 전방위적이고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학문 연구에서 분야와 영역의 경계는 이미 여기저기서 허물어지고, 또 소통되고 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잠깐 유행하다 말 일과성적 현상도 아니다.
Ⅳ. 텍스트 순결주의와 콘텍스트 지상주의를 극복하자
한문학 연구도 이제는 문학작품을 감상하고 분석해야 한다는 텍스트의 억압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한문학 연구가 문예미를 갖춘 시문 연구에만 국한될 이유가 전혀 없다. 한시를 주제로 한 연구 논문의 목차를 눈에 띄는 대로 들춰 보니 ‘핍진한 경물 묘사’니 ‘이별과 그리움의 정한’이니, ‘애민의식의 시적 표현’ 또는 ‘토풍민물에 대한 관심’ 등 작품 줄거리 따라가기 바쁜 내용들이 많다. 묘사 없는 한시가 어디 있고, 그리움의 정한을 외면한 시가 있을 까닭이 없을진대, 이것이 무슨 대수로운 이야기 거리겠는가? 애민의식이나 토풍민물을 담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담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도 연구자들은 자꾸 담았다고만 하지 ‘어떻게’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이는 마치 환경은 소중하니까 보호해야 한다는 식의 동어반복뿐인 학생들의 논술답안이나 다를 바 없다. 밥 먹으니 배 부르다는 말은 하나마나 한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작품 연구는 감상이나 해설 차원에 그치고 만다. 그렇지 않으면 작품을 통해 작가의 생애를 복원하는 일에 매달린다. 작가론을 주제로 삼은 학위논문은 으레 작가의 생애를 배열해 놓고, 형식별 내용별 분류를 통해 텍스트의 내적 질서를 복원하려는 노력만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작가의 생애는 작품 이해의 절대적 지침이 되고, 연구자는 작가의 생애 궤적에 따라 정확하게 대응하는 작품을 꼼꼼하게 챙겨낸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앞뒤 맥락도 없이 작가만 따로 떼어 놓으니, 으레 자신이 연구하는 작가가 최고라는 사실로 논문은 귀결된다. 작가 연구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좀 더 편하고 쉬운 것은 코드로 접근하는 방법이다. 한때 대단히 성행했던 위항문학 연구자들은 그들의 신분적 갈등으로 인한 사회에 대한 분노와 체재비판의 목소리를 찾기에만 열중했다. 정작 당대적 환경에서 자신의 문집을 펴낼 정도였다면 그의 경제적 위치나 신분적 위상이 여느 양반 이상이었고, 그들의 의식 또한 더욱 양반연 하는 연장 위에 놓여있었을 것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수백편의 작품 중 단 몇 작품만을 가지고 그들의 좌절과 신분적 갈등을 성급하게 일반화 시키는 오류를 지금까지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다. 과거 한 시기의 한문학 연구는 작가의 대사회적 비판 발언의 수위에 따라 문학성의 고하가 매겨지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순문예적 지향의 작가나 작품들은 연구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매도되기 일쑤였다.
한 작가의 문학론이나 문예인식에 관한 연구에서도 이런 오류는 반복적으로 답습된다. 시대에 대한 선입견과 작가에 대한 몰이해가 맞물려, 단지 몇 구절을 단장취의(斷章取義)해서 침소봉대(針小棒大) 함으로써 보수적인 문인이 급진적 성향의 개혁 문인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한 예로 김시습이 방외인이라는 규정은 『매월당집』의 다채로운 양상들을 모조리 사상(捨象)시켜 버린다. 앞서 실학의 코드로만 18세기를 재단한 결과 많은 작가들의 작품들은 특정 부면에만 집착하여 과대포장 되어 온 측면이 많다. 불리한 논점은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입맛에 맞는 자료만으로 논단하는 것은 텍스트 순결주의에 이은 콘텍스트 지상주의가 낳은 한 폐해다.
최근 몇 년간의 연구 경향을 보면 실학 연구가 퇴조하면서 경화세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사회성과 풍자성에 경도되던 문학 연구는 소품문 연구에 자리를 내준 형국이다. 경화세족에 대한 관심은 이 시기 실학 코드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 일정한 전망 수립을 가능하게 했다. 웰빙이나 마니아 코드로 들여다 본 18세기의 문화현상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일에 조금도 다를 게 없음을 확인시켜 준 점도 있다.
그동안 방치되어온 분야이니 더 많이 연구되고 더 깊이 살펴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소품문 연구가 사소한 일상사에 대한 맹목적 예찬에 머물거나, 최근의 웰빙 붐이나 마니아 열풍에 편승한 호기(好奇) 취향으로 흐르는 것은 곤란하다. 이러한 연구들은 그 시대의 실상에 좀더 핍진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편향과 외곬수는 또 다른 독선을 낳는다. 이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18세기 한문학 연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다.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좀 자유로워질 때가 된 것이 아닌가? 서포 김만중이 제창한 민족어문학에 대한 가치 선언도 막상 그의 전체 문학주장의 맥락에서 따져 보면 대단히 돌출적이고 자기 부정적인 발언이다. 조선시나 조선풍의 선언도 지나치게 과장된 감이 있다. 왜 우리 것은 늘 저들보다 우수해야 하고, 지고지순해야 하는가? 왜 실상을 말하면 욕을 먹고, 왜곡하면 칭찬을 듣는가? 민족주의의 강박관념보다 중요한 것은 당대적 실상이요, 현재적 함의이다.
필자는 2006년 10월 이덕리(李德履)의 『동다기(東茶記)』 발굴을 계기로 조선 후기 차문화사의 정리에 몰두하고 있다. 달리 그리된 것이 아니라, 이 자료의 해설을 위해 그간 차계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다가 오류와 왜곡 투성이의 현실에 크게 놀랐기 때문이다. 다산이나 초의가 마신 차는 요새 우리가 마시는 녹차가 아니라 반발효의 떡차였다. 이런 것에 대해 문헌 근거에 바탕해서 글로 발표 하면 차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차문화의 고전이 되는 글들은 오역 투성이고, 초창기의 오류는 수십년간 정설로 답습되어 반론을 허락지 않는다. 일본의 차문화도 전부 백제 때 건너간 우리 차문화니까 일본 다도의 원류는 한국에서 찾아야 한다는 식의 외곬수와 맹목적 자존감이 민족주의의 미명 아래 당연시 되고 있다. 우리의 차문화가 일본보다 훨씬 더 뒤떨어진 것은 문화의 차이일 뿐 민족의 우열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그런데도 이것이 잘 납득되지 않는다.
학문 연구가 우리 민족문화의 긍정적 가치만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믿음은 일종의 강박증이다. 긍정부정에 앞서 정작 필요한 것은 실상이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자료를 정리하고 객관적 실상을 파악하는 일이 가치 평가에 선행되는 것이 마땅하다. 반성과 점검 없이 고양과 선양만으로 치닫는 것은 학문의 길이 아니라 종교의 방식이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인식이 있다면 버리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들의 주장이라면 무조건 어긋장을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도 좋지 못한 습관이다.
18세기에 실학 담론의 다른 한 모퉁이에서 과소비의 골동 취미와 원예 취미, 호화사치의 소비문화가 흥성한 것은 사실의 문제이지 가치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하나를 부각시키기 위해 어느 하나를 외면하거나,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피해의식에 입각한 민족주의 논리의 맹목적 집착은 일부 젠더 담론을 통해 보듯 또 다른 폭력 기제로 변질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Ⅴ. 동아시아적 전망과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를 회복하자
안식년으로 외국에 나가있으면서, 또는 국제학술회의에 여러 차례 참석하면서 번번이 드는 생각은 외국학자들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우리와는 참 다르다는 것이었다. 논문의 깊이를 떠나 그들의 질문은 늘 실상에 바탕을 둔 구체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18세기 당시 일본을 체험했던 조선 지식인들은 『화국지(和國志)』니 『일본록』이니 『청령국지(蜻蛉國志)』니 하는 보고를 다투어 펴냈다. 상대를 바로 알고 제대로 알자는 생각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18세기 지식인들의 일본학에 관한 연구는 얼마나 중요한 테마인가? 다행히 이들 자료들이 최근 잇달아 번역되어 나왔지만, 막상 이에 대한 변변한 연구 성과는 아직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일본 쪽의 풍성한 자료들도 이제 겨우 자료를 소개하기 시작한 걸음마 단계에 와 있다.
앞서 말한 표류 문제와 관련된 연구도 그렇다. 표류문학은 단순히 문학성을 운위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동아시아 문화 교섭 또는 교류의 문제가 놓이고, 국제 인식과 다층적인 문화사적 시야와 안목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껏 표해록에 관한 연구는 번번히 양식적 특성이나 따지고 구성과 주제의식을 살피는데 그쳤다. 더 큰 전망의 획득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몇 해 전 100권으로 편집 간행된 『연행록전집』의 경우를 보자. 지난번 남경대학에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에서 좌강(左江)이란 젊은 중국 학자는 「연행록전집 고정(考訂)」이라 하여, 100권 책 중에 작가 비정이 잘못된 것, 연행록 아닌 내용이 엉뚱하게 끼어든 것, 그리고 연대가 잘못된 것 등을 낱낱이 목록화하여 논문으로 발표했다. 자료의 엄청난 학술 가치에 비해 우리 쪽의 정리 방식이 너무 서툴고 기본적인 오류가 많아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이 자료집은 뜻밖에 중국과 일본 쪽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한 일본 학자는 이 자료집을 보고 18, 19세기 연행록 자료에 나타난 북경의 공연문화를 연구하겠다고 팔을 걷고 나섰다. 당시 북경에 대한 넘치는 정보들은 중국학자들이 그들의 국내 자료에서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생생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국내 학계의 자료 활용은 아직 적료한 실정이다. 자료를 애써 모아 놓고, 그 열매는 오히려 중국과 일본 학자들이 거두고 있다. 이 역시 동아시아적 안목의 결여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이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 하고 자료집으로 정리해 연구에 선편을 잡아보려는 노력은, 우리 것 하기도 바쁜데 남의 것을 왜 우리가 정리하느냐는 나무람으로 되돌아온다.
미국 동아시아 학과에서 이루어지는 강의 제목은 예로 들어 ‘동아시아의 귀신 이야기’나 ‘동아시아의 젠더 담론’ 등이다. 모든 강의는 영어로 진행되고, 텍스트도 원어가 아닌 영어 텍스트로 제공된다. 중국 쪽의 귀신 이야기는 『태평광기』나 『요재지이』를 비롯해 여러 가지 텍스트가 영역되어 있고, 일본 쪽의 귀신 이야기도 워낙에 다양하게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의 귀신 이야기는 하다못해 『금오신화』 조차도 번역되어 있지 않아, 동아시아의 귀신 이야기 강의에서 한국문학은 한 번도 끼어보지 못한 채 한 학기 강의가 끝난다. 그런데도 정부기관의 지원은 한국어 교육 쪽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고작 해야 3,40대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에만 열중한다. 고전은 번역하려고 해도 신뢰할만한 한국어 번역 텍스트조차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제 우리 한문학 연구자들도 민족주의의 틀을 벗어나 좀 더 큰 시야를 갖출 필요가 있다. 같은 질문도 큰 맥락에서 바라보면 의미와 함축이 완전히 달라진다. 비교의 시야를 가질 때 실상은 더 구체화된다. 특히 한국문화에 전혀 무지한 서양학자들에게도 18세기 한문학 자료들이 던지는 생생한 질문들과 다채로운 자료들은 늘 놀라움과 경이의 대상이 되곤 한다. 한국 한문학은 이제 이런 수요에도 대응하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학제간, 다학문간의 집체 작업도 더 활발해져야 한다. 앞서 원예와 조경에 관한 예를 들었지만, 그간 일본 학자들이 쓴, 한국은 아예 빠져 있거나 건성으로 다룬 동양원예사나 동양조경사를 번역해서 그것으로 교재를 써오던 해당 분야 연구자들이 최근 한문학계의 연구 성과에 고무되어 이 방면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은 상징적인 일이다. 정원이나 조경, 화훼와 원예에 관한 수많은 1차 자료들은 여전히 이들의 손이 닿지 않은 먼 거리에 놓여 있다. 그간의 학제간 연구가 저마다 제 분야에서 제 소리만 하다가 끝나고 마는 일방적 성격이었다면, 앞으로의 학제간 연구는 서로 윈윈의 상승효과를 가져오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 앞장에 우리 한문학이 놓여 있는 것은 재론이 필요 없다.
우리가 문학의 순수 혈통주의에 집착하고 민족주의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동안, 과거 전통시대 지식인의 통합적 인문정신은 사라지고 말았다. 어째서 전방위적 편집 역량을 갖춘 다산 같이 탁월한 지식경영자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나 서유구의 『임원십육지』 같은 기획은 왜 불가능해졌는가? 그 방대한 18세기 총서의 기획들은 어째서 오늘날 다시 시도되지 않는가? 일제시대 최남선이나 문일평, 이능화 또는 신채호 같은 통합적 지식인은 어째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가? 우리의 학문 방법과 태도를 심각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각종 논문집에 쏟아지듯 발표되는 학술 논문들을 보면 무겁고 답답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소통을 거부하는 완고한 언어의 바벨탑 앞에 서면 특히 그렇다. 왜 젊은 연구자들의 목소리는 조금도 젊지 않고, 오히려 구태의연한가? 왜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번번이 제로베이스에서 시작되는 공부를 반복하는가? 질문은 어째서 쟁점으로 점화되지 않고 늘 원론에서만 맴돌고 마는가? 논문의 숫자는 열 배 이상 늘었는데 학문은 왜 점점 후퇴하는 느낌을 갖게 되는가? 어째서 현상은 일과성으로 끝나고 의미는 파편적으로 부여되는가?
동어반복의 확대재생산은 이제 지겹다. 용사와 신의에 관한 지루한 논의나, 의고와 반의고에 얽힌 답답한 논전은 잠시 미뤄두어도 좋을 것 같다. 주자냐 반주자냐 탈주자냐를 가지고 다투기에 앞서 전인미답의 수많은 자료들 위에 앉은 먼지부터 털어낼 필요가 있다. 시작하기도 전에 결론이 이미 내려진 연구, 어떤 경로를 거치든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는 논문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지역학도 소중하고 문중학도 필요하지만 그 접근의 방식은 참으로 구태의연하고 답답하다. 번번이 학회지의 특집란을 장식하지만 한 번도 재미를 못 본 것이 바로 문중학이다. 안동에서는 퇴계학만 하고, 진주로 가면 남명학만 하며, 충청도에서는 우암학만 하는 기형적 구도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우상이다. 위인전만 쓰다가 끝나고, 문중의 재력에 따라 연구대상의 위상조차 견인되는 공부는 학문의 국제화 세계화의 심각한 걸림돌이다.
문제의식이 소멸된 자리에 새로운 담론은 없다. 질문의 경로를 바꾸지 않고는 앵무새의 되풀이를 벗어날 길이 없다. 쏟아져 나오는 논문들은 고작 10명 안쪽의 독자를 만나면 다행이거나, 출간과 동시에 지식 폐기물이 될 것들이 적지 않다. 변할 줄 모르는 틀과 전혀 새롭지 않은 발상, 쓰면서도 무슨 말인지 종잡지 못하는 논의들, 대저 이런 논문들의 나열은 연구자를 지치게 하고 식상하게 한다. 긴장을 하면서 글쓴이의 가쁜 호흡을 느끼고 밑줄을 연신 그어가며 읽어야 할 논문과 더 자주 만나고 싶다.
Ⅵ. 문학을 넘어 문화로 가자
볼 것을 못 보면 못 볼 것을 본다는 말이 있다. 무엇을 볼 것인가? 어떻게 볼 것인가? 오늘날 문학 연구가 문화 연구로 확장되는 것은 필연의 추세다. 문화사적 시야를 지닐 때 한국 한문학의 비전은 무한대로 확산된다. 열린 눈으로 텍스트를 보면 문화의 새 길이 보인다. 패턴으로 읽으면 흐름이 드러난다.
최근 연구와 자료 정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다산 학단의 예를 들어 보자. 우이도 에서 새롭게 발견된 이강회(李綱會)의 『유암총서(柳菴叢書)』, 최근 강진에서 공개된 윤종진(尹鍾軫)의 『순암총서(淳菴叢書)』와 『순암수초(淳菴手鈔)』, 윤종삼(尹鍾參)의 『춘각총서(春閣叢書)』와 『춘각수초(春閣手鈔)』, 황상(黃裳)의 『치원총서(巵園叢書)』, 황취(黃취)의 『양포총서(양圃叢書)』등의 자료들은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것이 더 많지만 이들 자료의 존재는 다산 학단의 자료정리 방법과 학문 특성을 일관된 방식으로 증언한다. 자료 공개 이후 본격적인 논의가 보태지면 다산 학단 뿐 아니라 다산의 학문 방식에 대한 논의도 훨씬 깊어질 것이다.
앞서 말한 『연행록전집』에 실린 고북경의 골동품과 서점 거리인 유리창(琉璃廠) 관련 정보만 해도 그렇다. 중국 쪽에서 그간 간행된 유리창 거리에 관한 단행본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들 자료 속에 조선 문인들이 쓴 유리창에 관한 실로 풍성한 자료들은 단 한 줄도 인용되어 있지 않다. 각각 다른 시점에 기록된 이 자료들을 한 자리에 모을 때 당시 이 거리에서 영업 중이던 각종 서점의 이름을 시기에 따라 순서대로 재구성해 낼 수 있을 정도다. 그 안에서 이루어진 각종 서적판매 및 물품 구매와 관련된 활동도 그간 중국 쪽의 자료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운 내용들이 담고 있다. 유리창의 문화사를 정리하는 데 연행록의 여러 기록들은 가히 절대적이다.
그밖에 18, 19세기 고북경의 문화사를 기술하려면 우리 연행록의 각종 기록들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그뿐인가? 이 속에 담겨있는 당시 지식인의 국제정세 인식이나, 외부에서 온 타자로서 내부를 바라보는 분석의 시선, 심지어 이방인의 눈에 비친 그들의 일상사에 이르기까지 실로 문화사의 깊이와 너비를 확장시켜주는 자료의 보물창고인 셈이다. 이『연행록선집』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난리가 났는데, 정작 우리는 왜 가만히 있는가? 이것이 한국한문학이 다룰 범주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너무 안타까운 말이다.
그밖에 열녀 담론, 에로티시즘, 풍속화, 일상사의 각종 층위 등 문화사적 시야로 바라 볼 때 전혀 새롭게 음미될 자료들은 우리 한문학 유산 속에 너무도 많다. 연구자의 손길을 거쳐 되살려야 할 가치들이 실로 무진장이다. 차문화사를 정리하면서, 결국 원전 자료를 찾아내고 정리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한문학자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음을 절감한다. 원예사, 조경사의 바탕이 되는 1차 자료의 정리, 그 밖의 각 분야사의 기본 자료를 소개하는 일도 우리 한문학 연구자들이 떠안고 가야 할 책무가 있다.
우리 문화사에 대한 역사학계의 침묵은 생각 외로 길고 깊다. 거대담론이 무너진 빈터에 문화의 꽃밭을 일구자. 질문의 방식을 바꾸고 접근의 경로를 고쳐, 신발끈을 새로 매자. 두서없는 글을 이렇게 맺는다.
참고문헌
高橋博已(2003), 「Korean Envoys and Japanese Confucians」, 국제18세기학회 발표요지, 미국 UCLA.
구지현(2006), 『계미통신사 사행문학연구』, 보고사.
김영진(2003a), 「『虞初新志』의 판본과 조선 후기 문인들의 明淸小品 閱讀」, 『조선후기 소품문의 실체』, 태학사.
김영진(2005), 「조선후기 실학파의 총서편찬과 그 의미」, 『한국한문학연구의 새 지평』, 소명.
김영진(2003b), 「조선후기의 명청소품 수용과 소품문의 전개 양상」, 고려대 박사논문.
박찬기(2001), 『조선통신사와 일본근세문학』, 보고사.
심경호(2001), 「화원에서 얻은 단상-조선후기의 화원기」,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소명, 89-132면.
안대회 엮음(2003), 『조선후기 소품문의 실체』, 태학사.
안대회(2004), 「18․19세기의 주거문화와 상상의 정원」, 『진단학보 』 제 97호, 진단학회, 111-138면.
안대회(2005a), 「18세기 마니아의 세계와 그 현대적 의미」, 『디지털과 실학의 만남』, 이지엔, 12, 70-106면.
안대회(2005b), 「다산 제자 이강회의 이용후생학」, 『한국실학연구』 제 10호, 한국실학학회, 289-321면.
안대회(2001), 「조선후기 소품문의 성행과 글쓰기의 변모」, 『한국한문학연구』 28집, 한국한문학회.
안대회(2005c), 「패림과 조선후기 야사총서의 발달」, 『남명학연구』 제 20집,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99-328면.
안대회(2006), 「평양기생의 인생을 묘사한 소품체 녹파잡기 연구」, 『한문학보』 제 14집, 우리한문학회, 273-308면.
안대회(2008), 『연경, 담배의 모든 것』. 휴머니스트.
이혜순(1996), 『조선통신사의 문학』, 이화여대출판부.
이훈(2000), 『조선후기 표류민과 한일관계』, 국학자료원.
정민(2005), 「18, 19세기 문인지식인층의 원예취미」, 『한국한문학연구』 제 35집, 한국한문학회, 35-77면.
정민(2001), 「18세기 산수유기의 새로운 경향」, 『18세기연구』 제4호. 한국18세기학회, 95-125면.
정민(2002),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癖’과 ‘癡’ 추구 경향」, 『18세기연구』 제 5호, 한국18세기학회, 5-29면.
정민(2003a), 「18세기 지식인의 玩物 취미와 지적 경향」, 『고전문학연구』 제 23집, 한국고전문학회, 327-354면,
정민(2003b), 「화암구곡의 작가 柳璞(1730-1787)과 화암수록」, 『한국시가연구』 제 14집, 한국시가학회, 101-133면.
정민(2007),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 휴머니스트.
정민(2006), 『다산선생지식경영법』. 김영사.
정민(2008), 『탐라문견록, 바다 밖의 넓은 세상』. 휴머니스트.
정우봉(2002), 「『東國金石評』의 자료적 가치」, 『민족문화연구』 제 37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75-95면.
池內敏(1998), 『近世日本と朝鮮漂流民』, 일본: 臨川書店.
한일관계사학회 편(2001), 『조선시대 한일표류민연구』, 국학자료원.
한태문(1993), 「위항문인의 壬戌使行記 연구」, 『국어국문학』 제 30집, 부산대 국어국문학회, 195-213면.
한태문(1997), 「이언진의 문학관과 通信使行에서의 세계인식」, 『국어국문학』 제 34집, 부산대 국어국문학회, 41-60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