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역 | 사역 |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 다윗의 시 1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시니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2 그분은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3 나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고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하여도 해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5 내 원수들 앞에서 친히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시니 나의 잔이 넘쳐납니다. 6 참으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의 평생에 나를 따르리니 나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 것입니다. |
오늘 낭독한 시편 23편처럼 많은 사람에게 애송된 시편은 드물 것입니다. 좋은 것은 그냥 좋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면 더 어렵습니다. 23편은 첫마디부터 좋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면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나의 목자’로서 어느 경우나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심을 생각하게 되고 그분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23편을 조용히 낭독하거나 암송할 때에 우리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느끼곤 합니다. 평온할 때에도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에 있는 양과 같은 심정으로 이 시편을 낭송하고, 또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어려운 일을 만날 때에도 이 시편에서 위로를 얻고 살아갑니다. 첫 장면에서 마주하는 목가적인 이미지는 23편 전체를 넉넉한 마음으로 읽도록 만듭니다.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시작하는 이 시편은 마지막에서도 여호와께서 원수들 앞에서 큰 잔칫상을 차려 주시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이 시편을 그저 목가적인 분위기와 잔치 이야기로만 이해하면 매우 부족하게 이해한 것이 됩니다. 이 시편의 주제인 ‘여호와’가 경시되고 그 대신 ‘내’가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시편에서 ‘나’라는 말이 주어나 소유격, 목적격으로 사용된 용례가 17번이나 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시를 처음 여는 말은 ‘여호와’이고 마지막 절도 ‘여호와의 집’으로 마칩니다. 이렇게 여호와로 시작하여 여호와의 집으로 마치면서 그 안에서 나의 삶의 의미가 해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는 여호와를 나의 ‘목자’와 ‘잔칫상의 주인’으로 묘사합니다. 여호와께서 목자이시니 그 양 무리 중 하나인 나의 존재 의미가 있고, 그분이 식탁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내가 손님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시편은 ‘여호와 안에서 나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이 시편에는 여호와와 나의 관계가 히브리어로 네 음절인 어떤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의 제목이기도 한데, ‘야훼 로이’ 곧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와 나’는 각각 3인칭과 1인칭입니다. 1-3절과 마지막 6절에서는 이렇게 여호와를 3인칭으로 서술합니다. 그런데 그 중간인 4-5절에서는 ‘이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하면서 호칭이 2인칭으로 전환됩니다. 여호와를 3인칭으로 부르다가 갑자기 2인칭으로 바꾸면서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친근하게 표시하는 것입니다. 2인칭으로 바뀌는 그 시점도 극적인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에 해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이유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 4절의 내용은 23편의 단어 수를 계산해 보면 정확히 가운데에 놓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이 구절의 앞에도 26개의 단어가 나오고, 그 뒤에도 26개의 단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주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임마누엘’이라는 또 다른 히브리어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임마누엘은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시의 처음에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심’을 노래하며 시작된 23편은, 시의 중앙에서 그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고백하고, 시의 마지막에서는 내가 나의 목자 되신 여호와의 집에 함께 거하는 것을 노래하며 마칩니다. 이처럼 시편 23편에서는 ‘나와 여호와’의 긴밀한 관계가 아름답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시편 23편은 마치 다이아몬드와 같습니다. 어떤 방향에서 보는지에 따라서 거기에서 나오는 광채와 아름다움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인칭의 변화를 중심에 두고 보면 전체를 1-3, 4-5, 6절로 구분할 수도 있고, 목자이신 여호와(1-4절)와 잔치의 주인이신 여호와(5-6절)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을 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읽는 방식은, 다음과 같이 세 ‘장면’으로 나누어서 읽는 것입니다. 1-2절은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자기 양떼를 먹이시고 쉬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3-4절은 그분이 목자로서 자기 백성을 어떤 목적지로 인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함께하시면서 보호해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5-6절은 목적지에 도달한 자기 백성을 주님의 집으로 인도하여서 잔칫상에 참여하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사실 ‘목장에서 길과 골짜기를 지나 집으로’ 이동하는 것이 유목민의 일상생활이기도 하므로, 그러한 배경에서 이 시를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인도를 받는 각 장면들을 중심으로 읽다 보면, 이 시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나간 역사를 읽어 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양 떼를 애굽에서 인도하신 것’으로 가르치기도 하고(시 77:20; 78:52-53), 또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일을 가리켜 ‘거룩한 성소로 들어간 것’으로 그려내기도 합니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 15:13). 이렇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셔서 그분의 양 떼를 거룩한 성소로 인도하신 일을 노래한 것으로 보면, 이 시편의 의미를 더욱 풍성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도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백성의 일원이기 때문에 ‘나의 목자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부르며 이 시편으로 찬송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생각할 때에, 나를 이제껏 인도하셨고 지금도 인도해 주시는 그 손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23:1-2)
1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시니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2 그분은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1절의 첫 구절은 23편의 핵심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시니” 하고 고백하면 여러분의 마음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심을 고백하는 순간에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분이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나에게는 아무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분은 나의 이름을 아시고 내 이름을 불러 양의 우리에서 인도하여 내시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시다’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는 ‘야훼 로이’라는 짧은 네 음절의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그분의 양으로 삼으시고 ‘나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따라서 나의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며, 그 결과 나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참으로 목가적이고 매우 평화로우며, 한 폭의 그림과도 같습니다.
1절에서 말하는 ‘푸른 초장’은 비가 온 후에 자라는 새싹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11월에서 2월까지가 우기이고 그 기간이 지나면서 봄에 새싹이 납니다. 겨우내 마른 풀을 먹던 양이 봄이 되어 새싹이 돋아난 푸른 초장에서 풀을 뜯습니다. 목자께서 그러한 좋은 풀밭으로 인도해 주시니까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마음껏 먹습니다. 그리고 그 초장에 누워서 따뜻한 햇볕을 즐기고 있습니다. 흡족하게 먹은 양이 풀밭에 누운 모습을 그리면서, 시인은 나의 목자께서 나로 하여금 눕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잘 시간이라고 억지로 눕히신 것이 아니고, 풍족히 먹여 주셔서 잘 먹고 드러누워 쉬게 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일 맹수라도 나타날 위험이 있다면 양이 한가로이 쉴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께서는 그러한 해악으로부터 완전하게 보호해 주시면서 양들이 평안히 누워 쉬게 하십니다.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거나 누워 쉬는 동안에 목자가 그들을 둘러 지키는 이 장면은 참으로 평화롭고 넉넉한 모습입니다.
건기가 지나고 비가 내린 그 땅에는 새싹들만 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꽃들도 활짝 피고, 나비와 벌들도 분주히 움직이면서 꽃가루들을 이리저리 나르고, 새들이 자기 짝을 찾는 소리도 공중에 울려 퍼집니다. 아가서에서는 그 계절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아 2:11-13). 푸른 풀밭에서 넉넉히 먹고 아름다운 꽃들이 뿜어내는 향기를 즐기며, 온갖 새들의 날아다니는 모습과 지저귀는 소리 가운데서 양들이 한가롭게 쉬고 있습니다.
푸른 풀밭에서 쉬던 양은 이제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가파른 곳이라면 물이 거세게 흐르겠지만, ‘나의 목자’가 인도하시는 그 물가는 잔잔한 물이 흐르는 곳이어서 평온하게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양 떼에 관하여 기록된 부분들을 살펴보면 물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예부터 양 떼에 물을 먹이는 일은 경쟁이 심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우물가에서 모세가 이드로의 딸 십보라를 만났고, 야곱이 아내가 될 라헬을 만난 곳도 바로 우물가였습니다. 그런데 시편 23편의 목자는 양떼를 우물가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시냇가로 데리고 갑니다. 거기서는 우물과는 달리 물을 자기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마실 수 있고, 때로는 발도 물에 적시면서 거기 묻은 것을 씻어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양의 체질을 잘 아시는 목자는 ‘20분 안에 풀을 빨리 먹고 물은 5분 안에 마시라’고 재촉하지 않습니다. 양이 자기 속도대로 먹고 마시며 눕기도 하도록 찬찬히 그들을 보호하며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양떼는 그러한 목자를 ‘나의 목자’라고 부르면서 넉넉한 시간을 보냅니다.
여호와께서 목자로서 양들을 돌보시기 때문에 양들의 사이도 좋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서 3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좋은 꼴 먹은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 마신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겔 34:18)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하여서 양들 사이의 관계가 저절로 좋아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시므로 곰이나 사자의 공격도 막으실 뿐 아니라 그들 사이에도 다툼이나 시기로 해 되는 일이 없도록 온전히 보호해 주십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고백합니다(참조. 신 2:7; 느 9:21).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여호와께서는 옛적에 광야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고, 또한 반석을 갈라서 물을 내셨습니다. 광야이지만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면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하시는 그곳은 곧 낙원이었고(시 78:19), 그들은 아무 부족이 없었습니다(신 2:7). 믿음의 눈으로 보면 만나는 꿀과 같이 좋은 양식이었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박한 음식이었고 힘을 돋우지 못하는 음식이라 여겨질 뿐이었습니다(민 21:5).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서 신뢰하지 못하는 그들로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또한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시면서도 ‘부족함이 없다’ 하고 노래할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불평하는 그들을 징계도 하시고 고치기도 하시면서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여호와를 향한 신뢰를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이 풍족하고 아무 고통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기도 하지만 그때에도 여전히 그에게는 아무 부족함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 자리에 목자의 참된 위로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원수의 공격이 있을 때에도 시인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지켜 주시고 원수 앞에서 잔칫상을 베풀어 주실 것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2. 의의 길과 사망의 골짜기로 인도하심 (23:3-4)
3 나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고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해 주십니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하여도
해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첫째 연은 푸른 초장이 그 배경이었는데, 둘째 연에서는 양 떼가 이동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양 떼는 ‘의의 길’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갑니다. 최종 목적지는 여호와의 집이고, 거기에 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처음의 목가적인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면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점이 여기서 좀 더 강조되고 있습니다.
앞 절에서 넉넉히 먹고 마시며 쉬었던 시인의 생명은 이제 ‘그 영혼이 소생되어’ 힘을 내어서 목자를 따라갑니다. 주께서 친히 넉넉히 먹여 주심을 경험하면 그의 영혼도 함께 소생됩니다. 혹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 징계를 받고 어려운 상황에 놓였던 사람이라면,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더욱 회복되어서 다시는 방황하지 않고 주께서 원하시는 길로 힘 있게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자신을 인도하여 가신다고 고백합니다. ‘의의 길’이라는 표현에서 이 시는 목가적인 이미지를 조금 넘어서서, 여호와께서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그분의 언약의 길로 인도하시는 점을 강조합니다. 주께서 시인을 주님의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고, 시인은 마치 양들이 다른 길로 새지 않고 목자의 인도를 따라 반듯한 길로 나아가듯이 여호와께서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인도하시는 그 의로운 길을 따라 나아갑니다. 자기 이름을 불러내시고 앞서가면서 인도하시는 그 목자의 음성을 듣고서 순하게 따라갑니다.
여호와의 인도하심은 ‘그분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중심이 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에 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하지만,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의의 길을 걷도록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로이)이시기 때문에 ‘해악’(라아)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시편 106:7-8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며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는 과정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산과 산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습니다. 풀이 많은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가려면 반드시 골짜기를 지나게 되어 있습니다. 태양이 비추지 않고 습하며 어두운 그곳에서는 어떤 악한 짐승의 공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는 실수로 덤불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그러한 양은 들짐승의 밥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골짜기를 가리켜 시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는 해로운 것들이 있고, 심지어 죽음이 생각나게 하는 일들도 있지만, 주께서 인도하시는 목적지에 이르려면 그러한 곳을 지나야 합니다.
바로 그 장면에서 시인은 여호와를 ‘주님’이라고 2인칭으로 부르면서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하십니다” 하고 찬송합니다. 주님의 함께하심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임마누엘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인데, 여기서 시인은 나의 목자이신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고백합니다.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 해당하는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서 오히려 시인은 그 자리에 자기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고 그분의 임재에 대한 이 경험 가운데서 구원을 맛보고 있습니다.
시인은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위로한다’고 말합니다. 목자이신 ‘주님’께서 그분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시인을 맹수로부터 보호하시고 또한 덤불이 있는 곳에서는 길을 열어 주시며, 길가 웅덩이에 빠지지도 않도록 보호하실 것입니다. 사실 지팡이와 막대기로 위험한 짐승들을 물리치고 풀숲에서 길을 열어 주신다고 해도 그것은 바로 앞 몇 미터의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또한 그 정도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에 해당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길을 조금씩 열어 보이시지만, 양은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여호와를 직접 불러 아뢸 수 있고, 그분의 임재와 보호하심을 매순간 경험하며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고 고백하는 시인은 그 함께하심의 결과를 ‘위로’라는 단어로 표시합니다. 개역한글에서 ‘안위’로 번역한 이 ‘위로’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구원’과 비슷한 의미로 자주 사용되곤 합니다. ‘위로’라는 말이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특별히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서의 몇 구절들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서 52:9에서는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하면서 ‘위로’와 ‘구속’을 사실상의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이사야 40:1-2에서도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면서, ‘죄악을 사함 받는 것’이 곧 ‘위로’라고 말합니다. 40:10-11에서는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하고 말합니다.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듯이 그들을 온순히 ‘인도’하신다고 말하는데,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그 장면을 마치 목자가 어린 양을 품에 안고서 오는 장면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과 그처럼 친밀하게 가까이 하시면서 인도해 주십니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사 66:13-14). 여기서 ‘연한 풀’은 23편의 푸른 풀밭과 같은 단어입니다. 고통받던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오고 뼈로 표현된 그들의 속사람은 연한 풀처럼 자라날 것입니다. 마른 뼈와 같던 그들이 마치 비 온 뒤 자라나는 풀처럼 될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66:20-21). 66장의 이 구절에서는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 열국의 영광이 함께하고, 이방인들이 그 나라에 가입하며, 또한 그들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나올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미치는 범위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지금까지 이사야서의 몇 구절을 중심으로 ‘위로’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귀환’ 사건과 관련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출애굽의 배경’에서 이 표현을 이해하도록 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렘 2:6) 그분이시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지났던 광야는 과연 ‘사망의 음침한 땅’이었습니다(참조. 신 8:15).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때에도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 그들을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후에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 15:13).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주의 성결한 처소’로 향하였습니다. 23편의 말로 하면 ‘여호와의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비록 광야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을 지나야 했지만,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여호와의 음성을 들으면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3. 여호와의 집에서의 잔치 (23:5-6)
5 내 원수들 앞에서 친히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시니
나의 잔이 넘쳐납니다.
6 참으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 평생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의의 길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서 시인이 이른 곳은 ‘여호와의 집’입니다. 그 집에 들어가니 시인의 원수들이 이미 묶여 있었습니다. 23편의 앞부분에서 시인의 원수가 실제로 시인을 공격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시인의 원수 앞에서 보란 듯이 잔치를 벌이는 것은 승전의 모습이지만, 앞부분에서 전투의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분이 친히 싸우시면서 시인을 보호해 주시고 막아 주셨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양이 푸른 초장에서 풀을 뜯을 때에도,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원수가 공격하지 못하도록 여호와께서 지켜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라는 표현이 원수의 공격을 암시하지만 실제로 싸우는 모습은 이 시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나의 목자’이며 ‘나와 함께하시는 분’으로 부르면서 그분을 신뢰하고 나아가는 동안에 자신에게 다가오던 해악들과 그것들을 막으시는 주님의 싸움을 자기 피부로 다 느끼지는 못하면서 지났던 것뿐입니다.
시인은 원수가 여호와의 집에 잡혀 와 있는 장면을 기대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이신 여호와께서는 그 원수들로부터 자기 양 무리를 이처럼 철저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우리 모두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해를 끼칠 수 없게 묶여 있는 그 잔칫집에 들어갈 때에 시인이 원수에게 어떻게 행하였겠습니까? 군밤이라도 한 대 때리고 여호와의 잔칫상에 참여하였겠습니까, 아니면 ‘꼴좋다’고 한마디 하고서 잔칫상에 나아갔겠습니까? 그 원수들이 누구인지 ‘면상(面相)이나 한 번 보자’ 하고서 그들을 쏘아보았겠습니까? 아닙니다. 시인은 그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을 사랑하여 보호하여 주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따름입니다. 그분이 차려 두신 그 상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참여합니다. ‘나에게 상을 차려준다’고 하였으나 사실 독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를 ‘나의 목자’와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는 여호와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나눕니다. 좋은 잔치에는 사람이 많이 참석하면 참석할수록 그 기쁨이 더욱 커지는 법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온 시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시고 잔에 마실 것도 넘치도록 부어 주십니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고대에 손님을 고귀하게 영접하는 의식이었습니다. 따가운 해가 내리쬐는 근동 지역에서는 물로 씻는 것도 필수적이지만, 머리에 기름을 붓고 그것으로 얼굴을 씻으면 상쾌함이 더하여졌습니다. 고귀하게 대접을 받은 시인은 이제 잔칫상에서 넉넉히 먹고 마십니다. 그의 잔은 여호와께서 부어 주시는 것으로 넘쳐납니다. 더 이상 갈증을 경험할 일이 없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시니까 시인은 아무 부족함이 없습니다.
원수가 보는 앞에서 여호와의 승리 잔치에 참여하여 넉넉히 먹고 마시게 된 것보다 시인에게 더 중요한 사실은,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시인의 평생에 계속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출애굽의 배경에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섬겼을 때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진멸하려고 하셨으나 모세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는 ‘나의 모든 선함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출 33: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34장에 가서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다는 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줄일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 자체이신 여호와께서 시인의 평생에 함께하십니다.
여기에서 ‘따른다’고 번역한 말은 ‘추격한다’는 강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원수나 맹수들이 시인을 추격해 올 법한데(시 7:5-6; 호 8:1-3), 지금 그들은 묶여 있고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추격하는 것이 있다면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추격을 당하고 붙잡힌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런 해도 상함도 없는 곳에서 시인은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만족하면서, 자신이 그분의 집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의 삶을 바짝 추격하여 붙들도록 하시며 잔칫상에 앉히시고 주님으로 기뻐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면서 그분의 사랑으로 만족하게 된 우리는 다시금 1절에서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심을 노래하게 되는데, 처음의 고백보다 더 깊고 풍부한 고백으로서 노래하게 됩니다.
4.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는 23편
시편 23편은 1절에서 ‘여호와’로 시작하였는데 6절에서는 ‘여호와의 집’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중간 부분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이 어려운 때에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고 고백함으로써, 여호와의 임재가 시편 23편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푸른 풀밭에서 시작한 이 시는 마지막에 여호와의 잔치에 참여하고 그분의 선하심과 사랑으로 만족하는 모습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근동 지역에서 푸른 풀밭은 시들기도 하고 잔잔한 물가는 때로 마르기도 하지만,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면서 살아가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이처럼 23편은 여호와로 만족하면서 그분과 긴밀한 교제를 나누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이 시편 안에는 이야기의 발전이 있습니다. 처음에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시인이 마지막에 그분의 사랑에 압도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나를 공격하던 원수는 없어지고 여호와의 사랑만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시상이 바뀌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교제가 깊어집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이 더 풍성해지고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목가적인 이미지로 시작하는 23편이 의의 길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서 여호와의 집에 이르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이 시편은,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근동 지역의 목동의 생활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23편을 해설하면서 이스라엘이 애굽이나 바벨론에서 구원을 받아 광야 길을 거쳐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인도되는 역사에 대하여서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광야를 지나서 여호와의 집으로, 거룩한 성소로 인도하셨습니다(출 15:13).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23편의 시인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또한 바벨론 포로기를 지나 거기서 위로해 주실 때에는 이방인들도 그분의 백성 가운데 가담하는 일들이 있음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사망의 그늘을 지나지만 주님의 위로가 있을 때에 그 자리에는 기쁨이 더욱 충만해집니다.
23편을 구속 역사적인 전망에서 읽을 때에, 우리는 목자이신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더 밀접해지는 것을 맛보게 됩니다. 또한 그 가운데서 나의 목자이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위해서는 나의 삶의 방향이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는 목적지와 동일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양 떼를 데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계신데, 목가적인 것을 좋아하는 어떤 양이 홀로 푸른 풀밭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23:1-2만을 암송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양은 여호와의 인도를 받지 않고 있는 것이 됩니다. 시편 23편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시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 부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서 다른 양들과 함께 한 무리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시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이용하여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 시편을 제대로 부르기 어렵습니다. 또한 나의 삶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이 시편을 부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사랑하지만, 정직히 생각하면 우리 자신으로서는 이 시편을 제대로 부르기 어렵습니다.
23편을 이루는 세 부분의 핵심은 ‘여호와’와 ‘나와 함께하심’ 그리고 ‘여호와의 집’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여호와의 집으로 인도하신다는 이 사실로 인해,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경으로 이 시편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그 하나님이 또한 나의 목자가 되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 그분의 백성 간의 관계 안에서 나의 위치를 발견하기 때문에, 우리는 목자이신 여호와를 중심에 두고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렇게 시편 23편에서 ‘목자이신 여호와’를 고백한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분은 양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서 우리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앞서가시면 양들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요 10:3-4).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하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은 양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 계실 때에 굶주린 백성을 풀밭에 눕게 하시고 넉넉히 먹이신 일이 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실 때에 그들이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셨습니다(막 6:39; 요 6:10). 그리고 그 기회에 자신이 바로 ‘생명의 떡’이심을 가르쳐 주시고 성찬의 의미도 함께 알려 주셨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에 주님은 실제로 성찬을 제정하시고, 이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을 때에 성부께서는 성자를 사랑하시어 그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요 10:15, 17). 실제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 성소로 올라가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우리’(사 53:6)을 구원하시려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사 53:7)처럼 되셔서 우리의 반역죄에 대한 죗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친히 지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도 주님을 버렸으나 예수님께서는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하시면서 그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셨습니다. 이렇게 ‘나와 함께하심’을 고백하시면서 23편의 시인이 말한 그 길을 친히 걸어가셨습니다. 목자이신 분이 각기 자기 길을 가는 양들을 구원하시려고 양의 자리에 내려오셔서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은 참된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목자로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6-17).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의 백성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해 주시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여호와께서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자기 백성을 모두 인도하시되, 그 안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가면서 인도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4-5). 우리는 우리의 전통도, 사람의 지혜로운 말도 아닌, 오직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따라갑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은 어려운 때에도 주님께서 매주일 말씀을 내려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어려운 과정을 지나서 이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지 않았습니까? 광야 같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으나, ‘임마누엘’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나의 목자’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먹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들으며 따라갑니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 길에 원수의 공격이 있지만, ‘나의 목자’께서 ‘나와 함께하시면서’ 그 모든 해악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면서 약속하신 그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까지, 이 땅에서 순례의 길을 걷는 우리는 ‘야훼 로이’를 부르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함께 우리의 목자께서 가리키시는 동일한 목적지인 여호와의 집으로 향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며 이 나그네의 길을 걸어갑니다.
23편의 시인은 ‘나의 목자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노래하였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게 여호와를 우리의 목자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눈물 골짜기 같은 이 세상을 지나면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 하면서 주님을 부르고, 임마누엘이신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을 믿고서 23편과 같은 순례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성은교회. 2019년 3월 24일; 연합 사경회. 2019년 5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