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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시간에 이어 페르시아 제국의 이야기를 함께 봅니다.
Bc 500년경의 페르시아 제국이 욕심을 갖게되고 크세르크세스( Bc 486- Bc 465)와 다리우스( Bc 550- Bc 486)의 시기에서도 드러난다.
그리스마저 지배하고픈 '낙타의 등은 마직막 한 짐에 무너진다.'라는 말처럼, 별의미 없는 것을 욕심내다 무너지게 된다는 뜻이다.
사탄이 인간을 유혹할 때 '금 99덩이를 주어서 금 백덩이를 만들고 싶어하게 한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집착이 생겼을 때의 그러한 마음, 막상 다 채워졌을 때 별반 다를리 없을텐데...
페르시아도 역시 그리스에게 아주 관대한 척 제의를 한다.
"너희는 우리에게 조공을 바칠 필요도 없고, 우리가 너희에게 군사적 개입도 하지 않을 것이고, 단지 너희가 페르시아 제국에 부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만 해라.'는 제안,
당시의 그리스는 작은 도시 국가로 이루어져있었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철학적 발전도 발달된 상태였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그리스지역에서 시작되었고, 이상적인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었다.(오늘날의 모습은 대의민주주의, 공화정 형태로 볼수 있다) 그런 그리스에게 페르시아 제국의 제안은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쟁이 일어나고 페르시아에서 적어도 6만에서 10만정도의 군대가 갔을거라고 역사학자들은 짐작한다( 50~60만을 말하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그리스에 주류인 두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다.
싸움을 잘했던 스파르타의 문제는 우생학적인 생각으로 아이가 태어났을 때, 변변치 않고 약한 아이는 숲속에 유기하는 문화가 있었고 따라서 인구가 늘어나지 않았다. 전쟁에 나가 남자들이 죽어버리면 큰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몇년 전에 나온 영화"300"은 역사적 고증에서 잘못된 이야기로, 당시의 '레오니다스 (?~ Bc 480년 스파르타의 왕)'는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고 전쟁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 생기자, 미혼인 300명을 데리고 전쟁을 치르게 된다(기혼남성은 자녀를 출산해야 해서)
그때 스파르타의 어머니들이 했던 말은"살아서 돌아오지 마라!"(명예를 지켜라)였고, 북쪽으로 올라간 스파르타군이 테르모필렌 지역에서 전략적인,
테르모필레 전투((Bc 480년) - 페르시아 제국과 스파르타 중심의 그리스 연합군이 테르모필레 고개에서 사흘간 벌인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 지역은 아주 좁은 길로 한쪽은 낭떠러지(높은 산이 깎여진 절벽),반대쪽은 바다로 떨어지는 낭떠러지로 병사들이 3~5명이 있으면 길이 막히게 되는 지역이다. 병사의 수가 6만이던지 300명이던지 싸우는 것은 앞의 5명이었다.(뒤쪽의 병사들은 소리만 지르고)
첫날 전투에서 육상전투에서 아주 특별한 전술을 갖고 있던 스파르타는 다치지 않고 페르시아군은 좁은 지역에서 전쟁을 치르는 경우라 압사를 비롯한 큰 손실을 보게된다. 하지만 어느 그리스 농부하나가 돌아가다가 페르시아군에게 뒷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둘째 날 전투에서는 페르시아군이 양쪽으로 협공하여 스파르타군이 제대로 싸우지 못하게 된다.
영화 '300'의 또 다른 잘못된 설명은 레오니도스 왕이 끝까지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와 달리 둘째 날 전투에서 상당히 이른 시간에 레오니도스가 죽고만다.
고대 세계에서는 왕이 죽으면 전쟁이 끝나는 것이었지만, 스파르타군은 죽은 레오니도스왕의 시체를 뺏기지 않기 위해서 끝까지 싸우다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고 말았다는 것이 이 전투의 일화이다.
영화 "300"의 잘못된 이야기 또 하나는 영화처럼 스파르타군의 노출된 옷차림이 아니라 아주 무거운 갑옷을 입고 싸웠고, 당시의 페르시아군은 야만적인 군대가 아니었다. 고고학적인 발견으로 페르시아군의 군복은 비단이었다.
그리고 페르시아군대가 엄청난 손실후 물러났다가 이후 바다로 쳐들어 가는데 바다에서는 아테네의 해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살라미스 해전(Bc 480년) -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승리한 페르시아 제국이 아테네 중심의 그리스 연합 해군에게 참패한 전투)
페르시아가 그리스 지역에서 패하게 되자, 다른 소수민족도 용기를 내서 저항하기 시작한다. 이후 페르시아제국이 쇠약해 지게 되고 이런 문제에 정신을 뺏기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었던 마케도니아의 '필립'이라는 왕이 등장하게 된다.
그 필립왕이 마케도니아를 통해서 그리스 반도를 통일하고, 내전에 휩싸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롯 전체적인 그리스를 통일하며 영토확장의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시기에 다 이룰수 없을 거라 생각하여 아들인 알렉산더( 알렉산드로스 대왕, Bc 356~Bc 323년; 마케도니아 제국을 건설한 왕으로 막강한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다)에게 과외 선생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소개시켜 교육받도록 하였다.
그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철학, 음악, 문화, 공학, 전쟁 전략 전술에 대한 교육을 받은 알렉산더는 모든 면에서 준비된 왕이었다.
필립왕이 죽자, 알렉산더는 동쪽으로 나가 이집트까지 원정하고, 바빌론을 정복한 다음, Bc 333년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다(아수스 전투에서 모든 패권이 알렉산더에게 넘어간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알렉산더는 정복자로서 면모가 아닌, 정복한 지역에 대해서 약탈하지 않고 윤리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당시 각지역의 하층계급들은 상류 계급들에게 수탈당하는 상황이었기에, 알렉산더의 그러한 모습은 그들에게 약탈자가 아니라 해방자의 존재였다.
알렉산더의 침략은 두려움이 아닌, 환영의 상황이었다. 바빌론 침략때도 군사들에게 여성에 대한 약탈, 폭행등을 금지시킨다.
더불어 학자들을 대동하여 그곳의 문화적인것들을 흡수하여 융합을 시도한다.
역사상 환영받았던 정복자는 알렉산더와 민주정을 주장한 나폴레옹이었다. 후에 왕이 되려는 나폴레옹에게 많은 이가 실망하고 그를 위해 헌정곡을 만들었던 베토벤은 교향곡을 찢어 버렸다.
나폴레옹은 실패했지만 알렉산더는 해방자로 불리우며 성공한 듯 했지만, 인도까지 욕심내게 된다.
하지만 인도는 알렉산더가 지니고 있는 전략과 전술로는 정복할 수 없었던 습지가 많은 지형이었다. 정복에는 성공하지만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없는, 전투에서는 승리하지만, 전쟁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던 결과를 가지고 바빌론으로 돌아와 죽고만다(병으로 죽었다고 전하지만 젊은 나이에 죽었음으로 독살설도 있다) 서른셋에 알렉산더가 죽고 이후 고대근동의 모든 영웅들은 33살에 죽는다. 예수님도 또한,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Bc 323년)- 이후 마케도니아 대제국에서 셀레우코스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분리되어 독립한다."
Bc 333~Bc 160년경의 헬레니스트 제국은 페르시아 제국보다 더 큰 모습이다.
알렉산더의 죽음이후 제국은 5 혹은 7로 나뉘면서 그 후계자들이 각각의 제국을 나눠갖게 된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갈라진 두 제국사이에 끼이게 되어 위쪽은 셀레우코스왕조가 남쪽은 프톨레마이오스왕조가 다스린다. 알렉산더의 후예들은 백인들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군사적으로 더 우세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은 프톨레마이오스왕조에 부속되고 100년~150년의 시간이 흐른후에 군사력을 키워 세력을 넗혀가는 셀레우코스왕조에 편입된다.
* 유다의 지배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BC 301- BC 198년
셀레우코스 왕조 BC 198 - BC 164년
셀레우코스의 왕인 안티오코스 4세( 재위 Bc 175- Bc 164년)는 군사력을 유지하여 정복전쟁을 성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군대를 이끌 돈이 없었기에( 사람들에게 세금을 통해 얻는 돈은 한계가 있었기에, 그리고 반발때문에) 자기가 정복한 셀레우코스 지역안의 성전의 기물들을 기부하도록 하는 정책을 펴다가 성전의 것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본래의 성경속 십일조는 유다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십일조를 레위지파를 다른 열한 지파가 도와준다는 유다 역사안의 변형이 있지만,
과거의 다신적 신관에서 두 나라가 싸웠을 시 이긴 나라가 자신의 신에게 약탈한 전리품의 십분의일을 신에게 바쳤다. 그러한 신전에 모여진 전리품을 신전을 관리하는 사제와 수도자들은 잘관리하였기에 축적된 십일조를 수탈하여 병력을 키울 생각을 한 안티오코스 4세, 모든 지역에서 성공하였는데,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수탈을 참지 못한 유다인들(성전에 대한 그리고 야훼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안티오코스 4세는 성전의 수탈 뿐만 아니라 약탈한 성전에 자신의 신상을 놓기도 하였다. 스스로를 에피파네스(현시, 발현.이라는의미)라 부르며 자신을 신격화하는 안티오코스 4세를 참지 못하고 일으킨 유다는 마카베오 혁명을 일으킨다.
* 마카베오 혁명 - 셀레우코스 왕조의 유다교 말살 식민정책에 맞서 사제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이 벌인 독립 전쟁( 마카베오는 '망치'라는 의미, 별명)"
이 혁명은 성공을 하고, 내란에 휩싸인 셀레우코스 왕조가 그 유다지역의 왕으로서 마카베오 가문을 인정하게 되어 하스모네아 왕조가 생기는데,
* 하스모네아 왕조( Bc 142 - Bc 63년) - 마카베오 혁명에서 승리한 후 세운 고대 이스라엘의 마지막 독립 왕조
왕조로서 인정을 받게 되자, 혁명때의 순수성을 잃고 정치가로 돌변하여 마카베오 혁명을 도왔던 오직 야훼만을 생각하는 순수한 "하시딤'이 하스모네아 왕조에 적대감을 갖게되고 심지어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공격을 해달라고 서신을 보낸다( 황사영 백서)
하스모네아 왕조와 함께 전부터 있었던 귀향에서 돌아온 주도세력인 사제계급은 하스모네아 왕조와 왕과 대사제 관계를 유지하면서 왕국의 기득권인 주도 세력으로 남게 된다.
따라서 하스모네아 왕조 시대의 두 지배 계급이 생기고 사제 계급(왕조 중심)과 하시딤(기층민을 중심으로 순수한 야훼사상을 보존하려는 이들)
* 하스모네아왕조 시대의 두 지배 계급
사제 계급( → 사두가이), 하시딤(→ 바리사이)"
예수님 시대에 유다의 상류층이었던 사제 계급인 사두가이, 하시딤의 후예들은 백성들의 신뢰와 함께 하층민을 대표하며 수적, 정신적인 측면에서 유다 세계를 지배하는 바리사이로 자리잡았다.
이와 같은 하스모네아왕조는 정치적인 힘을 통해 주변 세계를 정복하고, 팔레스타인의 남쪽 지역인 에돔(에사우의 후예)까지 정복한다.
에돔 지역을 대표하는 헤롯가문은 유다교로 개종하였다(하스모네아 왕조는 정복한 주변국을 유다교로 개종시킴)
* 헤로데 가문 - 에돔의 영향력 있던 가문이었지만 하스모네아 왕조와 합병돼 유다교로 개종"
이후 하스모네아 왕조는 몰락하고, 그 마지막 과정중에 로마세력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로마제국은 지중해의 모든 지역을 정복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도 정복당하게 된다. 결국 주전(Bc 63년 혹은 64년)에 하스모네아왕조는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멸망한다.
그 상황에 능수능란했던 헤로데가 폼페이우스가 유다 지역을 점령하는 그 시기에서 부터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통해 그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된다.
* 헤로데 가문 - 로마가 팔레스티나의 지역을 점령한 후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했다."
전체적인 로마의 지역의 사진,
폼페이우스 이후 율리우스 시저(Bc 100~ bc 44년 , 고대 로마의 장군)가 등장하고 공화정을 무시하고 황제가 되려다가 암살당한다(' 브루투스 너마저도 ....') 시저 죽음 이후, 로마는 두개의 세력으로 나뉘게 되고, 서쪽 지역은 시저의 조카뻘인 옥타비아누스에 의해서, 동쪽 지역은 시저의 오른팔이라 불리우는 안토니우스에 의해서 지배하고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결혼한다( 안티오키아에 신혼집을 마련하고)
그런 상황에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바람을 피우는데, 그와 더불어 정치적인 양립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치려 계획하고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기다리다 옥타비아누스 함대를 보자마자 도망간다.
결국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죽게되는 이야기.
이때의 헤로데는 안토니우스를 지지했다가, 옥타비아누스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용서를 구하자, 모든 지역을 정복한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그 지역의 왕으로 임명한다( 헤로데 대왕 - 재위 Bc 37년~ Bc 4년)
그러면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이름을 아우구스투스(Bc 63년 ~ Ad 14년 로마의 초대 황제, 본명은 옥타비아누스), 라틴어로 '드높은 자'라는 뜻으로 바꾼다. 자신을 황제를 뛰어넘어 신격화한다.
인류역사상에서 자신을 신으로 기억,표현하는 이는 율리우스 시저와 그의 조카인 아우구스투스이다.
본래 로마의 달력은 1월부터 6월까지는 그들이 믿고 있던 신들의 이름으로, 7월부터 12월은 숫자로 되어있었다. 율리우스시저가 7월을 차지하고(7월 July), 아우구스투스는 8월을 차지하며( 8월 august), 라틴말로 sept, 7이 9월이 되어 September, Octo 8은 10월로, nove 9인데 11월로, decar는 10인데 12월이 된다( 달력상 숫자 11,12가 쓰이지 않았다)
율리우스 시저는 7월이 31일까지 있었는데, 로마달력에서 8월은 30일까지인 것에 자존심이 상한 아우구스투스는 2월에서 하루를 더 가지고와서 8월을 31일로 하게한다( 역사적으로 고증된 이야기는 아니다)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이 헬레니스트 제국에서 로마제국으로 까지 이어진다.
유다인들은 신학적인 전환을 하면서 그들이 지닌 전체적인 유다신학은 " 우리 하느님 야훼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 로 요약함으로 이러한 인간을 신격화하는 제국주의 신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온갖 박해를 감수하며 그들을 하느님으로 고백하지 않는 유다의 순수한 야훼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들이 싸우게 된다.
이것이 또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와 분리되는 신학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후에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역시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유일신관에서 출발한 유다신학의 틀이 없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순교하는데는 유다인들이 지켜온 유일신관으로 부터 출발한 신학적인 틀이, 온전한 하느님을 만나는 이스라엘의 길이었지만, 정작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을 알아보는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시대에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인해 여러곳에서 일어나는 국지전(첫 번째 사진의 네모의 지역은 국지전이 일어난 곳)이 없었다- (저항이 불가한 시대,)
따라서 로마에서는 이때를
* 팍스 로마나(Pax Romana) - 강력한 로마의 힘으로 평화가 유지된 시기, BC 27~ AD 180년 )라고 부른다. 인류역사상 유일 무이한 시기에 팔레스타인의 작은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이름이 예수였다.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을 있는 부분이라 설명하심
복음서에 등장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중에 하나가?
"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아느냐? 나는 세상에 칼을 주러 왔다.불을 주러 왔다."이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모든 전제군주시대인 팍스 로마나의 평화였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그와 같은 평화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사람이 힘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고 섬기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요한 14,27 : 성령을 약속하시다)
그 예수님, 아이가 태어난 지역이 베들레헴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 베들레헴( בית לחם )
* בית 벳 : 집
* לחם 레헴 : 빵
- 마태 2,5; 마태 2,6; 마태 2,8 ; 마태 2,16;
- 루카 2,4 ; 루카 2,6 ; 루카 2,15; 요한 7,42
* 헤롯 대왕의 시기
* 요셉과 마리아
* 마태오와 루카(에수님의 탄생과 유년사는 요한과 마르코에는 전하지 않는다)
베들레헴 - 창세기
* 창세기 35,19
라헬은 이렇게 죽어, 에프라타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가에 묻혔다.
* 창세 48,7
내가 파딴에서 가나안 땅으로 와서 길을 가던 중, 에프랏까지는 아직 얼마 더 가야 하는 곳에서
그만 라헬이 죽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에프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옆에 그를 묻었다.
( 라헬이 벤야민을 낳고 죽은후 묻힌곳, 다윗이 태어난 곳, 예수님이 태어난 것도 다윗왕과 연관)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성당, 본래의 예수 탄생 성당은 헬레나가 지었다(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가 지은 성당의 개축된 모습, 문이 좁은 이유는?
- 신학적인 의미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큰 문이 있었는데, 십자군 전쟁이후 무슬림과 그리스도인의 전쟁이 심각해져서 항상 점령되었던 지역이고 항상 말을 타고 그 안으로 들어와서 말의 출입을 막기 위함이었다.
중앙의 모습이 보이고, 중앙제대(촛불, 향), 자세히 보면 별모양( 동방박사, 목동 인도) 구멍을 통한 아래층에 예수님의 구유가 있다
- 별모양의 바닥-
- 예수님의 구유-
- 팔레스타인 지역은 나무가 귀한 지역으로 구유는 주로 돌을 파서 만들었다.-
- 베들레헴의 척박한 땅-
- 양치는 모습-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동방박사들은, 목동들은 별의 인도를 받고 하느님의 천사의 부름을 받아 베들레헴의 구유속 아기 예수님을 만나야 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선택이라 설명하셨다. 인류역사상 아우구스투스라는 전무후무한 제국주의의 독재자가 있던 팍스로마나, 그와 같은 권력의 집중의 상황에서 정반대의 돌로 만든 구유에 자신의 삶의 장소로 선택하셨다는 예수님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성경은 우리가 만나고 싶은 예수님을 위해 베들레헴으로 향해 떠나라고 하였음을 설명해 주셨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 위치한 베들레헴은 어디일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내 인생의 베들레헴은 과연 어디일까?" 라는 화두를 가져보며...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사건까지 어떤 관련, 어떤 역사적 흐름위에 있는지에 관해서 되짚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