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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동의 기억- 영지이발관 홍종오(남, 1938년생)씨
2020.11.02
부모가 일제 말 철원으로 이주했다가 한국전쟁으로 고향 공주로 돌아왔다. 전쟁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숯가마에서 일하다 20살에 평택으로 올라와 이발사가 되었다. 평택경찰서 옆에서 비전이발관을 운영하다가 1970년 원평동으로 옮겨 양지이발관을 거쳐 영지이발관을 운영 중이다.
고향이 어디세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우리 부모님은 본래 공주가 고향요. 왜정 때 먹고 살려고 철원으로 갔지. 거기서 6.25를 맞은 거여. 전쟁 통에 철원이 살기 힘드니까 다시 고향(공주)로 내려갔지. 내가 4학년 때인데 학교도 그만뒀고. 그 때까지 학교 다닌 거지.
공주에서는 뭐하셨어요?
할 게 농사 밖에 없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다닐 때 내려갔으니께. 나도 15살 무렵부터 숯가마에서 일했어. 나무 베고 장작으로 숯 만들고 많이 했어. 학교도 중단하고.
산에서 나무는 어떻게 운반해요?
나무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서 져 나르는 거지. 그게 굉장히 힘들고 위험해요. 그러다가 부모들이 한 2년 먼저 올라왔지. 거기가 먹고 살게 없잖아요. 거기가 무지하게 산골이거든. 옛날에는 하늘에 별만 보였던 곳이여. 그 당시에 허가가 있어 뭐가 있어. 그 좋은 놈의 나무들 다 베어낸 거지. 군인들 후생사업하고 숯 다 실어 나르고 한 거여. 그러다가 1, 2년 뒤에 올라온 거지.
그 때가 몇 살 때였어요?
20살 때여. 20살 때 왔으니까 22, 23살 쯤 됐을 때지.
평택에 오셨을 때 처음 정착한 곳이 어디세요?
처음 우리 부모들은 안정리 이성재라고 있어요. 성 밑에. 그 때 미군부대 정문이 거기였다고. 바로 성 밑에. 그 당시 안정리가 일곱집메고.
집들은 어떤 모양이었어요?
성(城)은 어떻게 됐나 모르겄네. 한 번 가보고 싶은디. 집들은 모두 미군부대 박스하고 상자를 가져다가 지었고. 부대 정문 앞에는 일곱집메가 있었고. 우리동네만 하꼬방이고 일곱집메는 정식으로 집이었지.
그 때가 몇 년도예요?
얼추 1957년쯤일 꺼여. 이성재는 나는 안 살고 우리 부모들만 살았지. 부대에서 안정리 입구(극동주유소) 근방에 커다란 쓰레기장을 만들었고 그게 지금은 다 집들이 들어섰지만 다 쓰레기장이라고. 안정리 입구 쪽이여. 그 전에는 거기도 허허벌판이고 논이고 허니까. 미군들이 웅덩이 파고 쓰레기 가져다 버리고 그랬지. 어떻게 돼서인지 업체가 생겨서 쓰레기장 처리하는데 생기고. 쓰레기장에는 먹을 것도 많아. 바나나도 나오고 깡통도 줍고, 통조림도 줍고 쵸콜렛도 줍고. 쓰레기장이 대단했잖아. 쓰레기 주워다 꿀꿀이죽도 끊여 먹고.
부모님은 뭐 하셨어요?
부모님은 뭐 배운 게 있어. 노가다지 뭐 노가다. 거기(이성재) 있을 때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거 먹고 살고. 우리가 원래 피난민이니까 옛날에 개착단이라고 군문이 다리 아래에 내려가면(안성천 습지를 말함) 개척지를 만들어서 정부에서 집 짓는 재료 다 대주고 땅 개간하게 해주고 그랬다고.
그 때가 박정희대통령 시절인가요?
아니지, 이승만 때지.
정확한 위치가 어디죠?
머래라는 마을, 거기를 지금은 두리(頭里)라고 그러지. 머래 앞 한참 나와서 개울가에 거기를 뭐라고 하는데, 그래 석봉리. 석봉리 쪽에서 하천부지를 인력으로 둑을 만들어서 농토를 만들었다고.
석봉리 입구에 있었던 개척단을 말하는군요?
그렇지, 석봉리가 맞어. 거기를 간척해서 한 구간(약1~2천 평)씩을 분할해줬지. 우리가 그걸 막으면 정부에서 밀가루, 강냉이가루 줬거든. 그걸 먹어가며 간척을 한 거여.
어르신도 부모님과 간척사업을 함께 했나요?
그렇지. 평택 와 같고 1년은 거기서 일한 거여. 측량을 해가면서 일을 한 거여 이. 그런디 겨울에는 놀잖어. 그래서 놀기 뭐해 같고 이발 기술을 배운 거여. 그 당시 나는 운전수가 소원이었어. 옛날에는 자동차 운전이면 그만 아녀. 운전을 하고 싶었는디 우리 잘 아는 사람이 토요타 덤프트럭 운전수인디 잠깐 기다리라고 일자리 알아본다고 했었는디, 그 당시 그 사람 단골이발소가 있었어. 거기서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며 나한티 잠깐 일 해달라고 한 거여. 내가 노가다 출신이니께 일은 잘하지. 허지만 내 적성하고 안 맞는 거여. 그래서 나가다 안 나가다 하니께 (이발소에서)저녁에 데리러 나와. 그래서 나가고 하다 보니께 고질이 된 거여.
그럼 간척은 1년만 했네요?
그렇지 나는 1년만 일한 거지.
간척할 때는 뭐로 작업했어요?
가래가 많이 사용됐지. 그게 일을 많이 혀. 가래로 퍼서 양쪽으로 뚝을 쌓고 안 되면 지게로 져 나르고 모자르면 흙을 퍼다 돋우고 그랬지.
이발은 어디서 배웠어요?
옛날 읍사무소(평택동) 앞이 서울이발관에서 이발을 배웠는데 당시 직원이 4명이었어. 내가 20살에 시작혔는디.
그 당시 유명했던 이발관은 어디예요?
당시에는 유명한디는 없어. 7개가 있었는디 유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다 똑 같어.
그러면 처음 이발 기술을 배우려면 어떤 단계가 있어요?
처음에는 시다가 있는디 머리감기하고 청소하고, 다른 것은 못해요. 그게 발전하면 면도사. 고담 단계가 시아개.
시아개가 뭐예요?
마무리. 드라이 같은 거 하는 거. 불고대 하고 다듬기 하고. 그 다음이 기술자, 원 기술자지. 가위 잡고 머리 깎는 사람.
시다부터 기술자까지 가는데 몇 년이 걸려요?
그 당시는 몇 년이 걸렸어. 사람에 따라 달러. 빠른 사람은 2년이면 되고 늦으면 3, 4년도 걸리고 그러지. 그런디 저걸 오래혀. 면도사에서 기술(이발사)까지 가려면 오래 걸려.
어르신은 몇 년 걸렸어요?
나는 3년 걸렸나 봐요.
서울이발소에서는 몇 년 일했어요?
거기서는 오래 안 있었던 거 같어. 2, 3년 있었고 자꾸 옮겨 다니며 배우지. 시다에서 한 계단 높이려면 딴 데 옮겨서 일하고 그런 것도 있고. 기술자라는 게 한 군데 오래 안 있잖어 잉. 우린 서울도 있다 오고 그랬어. 옮겨 다녀야 기술이 느는 거여. 서울에 있다가 오며는 여기 사람들하고 차원이 달라지는 거여 잉.
군대는 언제 가셨어요?
내가 군사혁명(5.16군사정변) 나고 1961년도. 내가 딴 사람보다 늦게 갔어. 24살에 갔으니께. 기술사 되고나서 갔지.
그럼 이발병으로 갔어요?
내가 말했잖어. 본래 자동자를 원했기 땜에 병과를 받을 적에 운전병과를 받았어. 훈련소 졸업하고 부산 수송학교로 가서 12주 졸업 맞고.
군대서는 운전만 했네요?
운전만 못했지. 우리가 80명이 졸업했는데 운전만 있는 게 아니고 정비도 있어. 다들 운전을 한다고 하니까 훈련교관이 심지 뽑기를 하더라고. 나는 딱 정비가 걸렸지 뭐야 허허. 어쩔 수 없이 정비를 했지.
그 시기에 자격증 제도가 생겼잖아요?
자격증은 군대 가기 전에는 못 따고 제대 하고서 이발소 들어가서 땄어.
이발사가 싫었다면서요?
묘하게 어떻게 그렇게 되더라고. 허허
이 때 자격시험을 딴 거군요. 당시 자격시험은 뭘 시험 봤어요?
시험이란 게 위생교육하고 실습. 실습으로 평가받아서 합격증 줬지. 당시는 공부 못한 사람들이 많으니께. 군대 가면 공민학교라는 게 있어. 우리 같이 공부 못한 사람들 그런 까막눈을 가르치기 위해서 훈련소에 공민학교를 뒀어. 그렇게 까막눈을 떼고서 군대생활 하는 거여.
(임사웅)우리는 훈련소에 있었는데 미군기지에서 컴프레인이 오는 거여. 왜 무학자들을 카튜사에 보내느냐고. 그래서 그 때부터 대학교 졸업자 이상만 (카튜사)보냈다고.
그럼 어르신도 공민학교에서 글자 배웠어요?
나는 그런 건 아니지. 시골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많았지.
전역 후에는 어떤 이발소에서 일했어요?
내가 잘 아는 분이 자꾸 땡겨서 옛날 교통대(시장 입구 지하도 넘어 쌍용장 잇는 곳) 있던 곳에 대성이발관이라고 있었거든. 거기서 있다가 1968년도쯤 됐나 (평택)경찰서 앞에다가 내가 이발소를 차렸지. 경찰서 옆댕이에 내 이발소를 냈어, 비전이발관이라고. 거기서 하다가 내 친구가 여기서(원평동) 이발소를 했다고. 그래서 비전이발관이 집에서 멀고 그래서 1970년에 원평동으로 옮겼어.
이름은 본래부터 영지이발관이었나요?
양지이발관이었어. 그런디 남의 건물 세 살았잖아. 지금 여기는 내가 지은 거고. 전에는 건너편에 있었어. 내가 여기다 집을 짓고 옮겨오려고 하는데 집 주인이 간판을 못 가져가게 하는 거여. 자기가 절에다 이름을 올려놨다며 안 된다고 해. 그래서 양지하고 비슷한 이름으로 영지이발관이라고 한 거여.
이발소의 전성기는 언제죠?
아무래도 1970, 80년대가 좋았지. 그 때만 해도 여자도 미장원도 잘 안 가고 남자들도 미장원에서 머리 안 깎고 그랬으니까. 지금 우리는 1950년대 기술인디 누가 이발소로 오겠어.
이발소는 왜 쇠퇴했을까요?
아까 말했듯이 미장원은 신기술 습득에 노력하고 이발소는 퇴폐이발소로 나가면서 인식이 나빠지고 하면서 밀린 거지.
이발소가 잘 될 때는 직원이 몇 명이었어요?
비전이발관 할 때는 3, 4명씩 데리고 있었는디 여기 와서는 시다 한 명만 데리고 있었지. 그러다가 1990년도부터인가부터 나 혼자서 하게 됐어.
옛날에는 여자 면도사를 고용하기도 했는데요?
나도 비전이발관을 할 때는 (여자)면도사가 있었지. 그 뒤로는 없었지만.
여자들은 이발사를 하지 못했죠. 여자가 하면 재수 없다 그랬잖아요?
아녀, 여자들도 했어. 명동골목 안쪽에 중앙이발관이라고 있었어. 거기에는 여자이발사가 있었어. 여자들도 할 수 있었지.
지금은 전기바리깡을 쓰는데 처음에는 양손으로 사용하는 바리깡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두 손으로 하는 거? 우리 전대 사람들은 그거로 하기도 했어. 한손 바리깡은 지금도 있지(도구를 보여줌).
가위나 빗은 지금과 똑같죠?
똑같지.
바리깡이나 가위도 갈아서 사용했죠. 지금도 그래요?
그렇지. 그런디 지금은 안 돼. 쇠가 옛날에는 갈렸는데 지금은 쇠가 단단해서 안 돼. 나도 남대문에 가서 갈아와.
(임사웅)지금 이발사 중에서 최고령자가 누구여?
이달성(화성이발관)씨나 평안이발소 김양웅이, 이용협회 회장하는 사람은 나이는 우리 보다 적은디 경력은 비슷혀.
면도칼도 갈았죠. 어디에 갈았어요?
숫돌에 갈았지. 가죽은 면도 전에만 가는 거고.
1960년대 초반 이발비는 얼마였어요?
가물거리고 기억이 안나.
1960년대 후반 비전이발관 개업했을 때는요?
그 때는 2,500원.
2,500원이라면 머리 자르고 면도하는 걸 말하는 거죠?
그렇지. 이발하고 고대하고 머리 감고 면도하는 것 모두를 말하는 거지.
그래도 그 때가 돈이 되지 않았어요?
그럼. 그래도 대목 때는 줄 서서 이발했지.
여자들도 이발소에서 머리 잘랐죠?
그럼 당시에는 여자애들도 많이 왔지. 어른들은 안 오고 애들은 단발머리 자르러 왔고.
파마는 못 했죠?
그럼 파마는 못했지. 그 때는 미장원도 파마하기 힘들었어.
남자들은요?
상고머리 아니면 빡빡머리. 처음에는 빡빡머리가 있다가 나중에는 상고머리를 했지. 어른들은 머리 자르고 고대하고 포마드 바르고. 빡빡머리 없어지고는 리브가리 많이 했지.
리브가리는 뭐예요?
빡빡머리 보다 조금 긴 것. 짧은 상고머리 같은 거지.
스타일 변화를 보니까 확실히 이발소가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이용협회도 있던데 함께 논의해보지는 않았어요?
그런 게 없었다니까. 연수하거나 신기술은 안 하고 퇴폐 쪽으로 머리 쓰고 하니 잘 안 되지. 이용협회는 내가 처음 시작할 때도 있었는디.
명동골목에 퇴폐이발소가 많았던 거 같은데요?
그렇지. 그 쪽에 많이 몰렸지.
결혼은 언제 했어요?
31살에 했지. 아들은 하나고.
(임사웅) 이 사람은 젊어서 댄스에 빠져서 늦게 했어.
이발사는 사회적으로 먹고 살만한 직업이라고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았어요?
뭐 인정받기는.... 이발사라고나 했나. 다들 이발쟁이라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