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에 갇히고 둑에 막힌 강줄기는 그 흐름을 멈춘 듯했다. 시간도 계절도 빠르게 흘러가는 지금 멈춘 풍경에 젖어 들었다. 도도한 금강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강경과 군산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쇠락 덕택에 섣부른 개발을 피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근대의 유산들이 남아있는 곳이다. 막힌 강물처럼 시간도 멈춘 곳. 금강에 깃든 애잔한 시간을 걷는다. 슬며시 빛 바랜 흑백사진의 기억이 떠오르는 걸음이다.
곰삭은 근대의 유산, 강경
금강 변에 자리한 충남 논산의 강경은 조선시대 평양, 대구와 함께 3대 시장으로 꼽혔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까지 서해의 수산물과 호남의 곡물, 포목의 교역으로 번성한 포구였다. 지금은 지방의 그저 그런 소읍의 모습이지만 예전 강경의 영화는 상상을 초월했다.
강경포구의 번영은 금강의 수운 덕이다. 1870년 무렵 강경은 900여 점포가 성업을 하고 상주인구 3만명에 유동인구가 1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강인데도 수심이 깊어 하루에도 100여 척의 고깃배와 상선이 오갔다. 내륙으로 공주와 부여, 청양, 조치원이 이어졌고 멀리는 청주, 전주 지방까지 포함하는 넓은 시장을 배후에 뒀다. 강경을 중심으로 수 백리 밖 비옥한 평야에서 나오는 온갖 곡물을 실어 날랐고 내륙으로 어물과 소금을 공급하면서 큰 교역 도시로 발달했다.
뒤이어 일제의 본격적인 쌀 수탈도 강경의 경제를 떠받쳤다. 일제는 이곳에 최신식 도정공장을 4개를 짓고 도정한 쌀을 일본으로 보냈다. 강경에 터를 잡은 일본상인은 1,500여명까지 늘어 서창동, 중앙동, 염참동 일대에 근대식 건물을 지었다. 강경 시가지엔 그들이 지은 관청, 공공건물, 학교, 각종 상점과 금융, 점포병용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충남에서 가장 먼저 우체국과 호텔이 문을 열었고, 화력발전소가 건설돼 전기가 공급됐다.
그러나 강경의 영화도 계속되진 않았다. 주변 대도시에 시장을 잠식당하고 포구의 기능마저 잃게 된다. 결국 곰삭은 젓갈로 근근이 버티는 소읍이 되고 말았다. 그 강경의 거리 곳곳에서 곰삭은 근대의 시간을 만날 수 있다.
맨 처음 옥녀봉에 올랐다. 강변에 선 강경의 전망대다. 높이는 해발 42m에 불과하지만 정점에 서면 금강과 너른 들녘, 강경읍내가 어우러진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꼭대기 인근엔 특이한 모양의 나무가 있다. 둥치만 불룩하고 가는 가지가 매달린 느티나무다. 일명 사랑의 느티나무다. 강경의 여학생들이라면 누구나 나무둥치의 텅 빈 속에 들어가 찍은 사진 한 장은 있었다고.
일본인들이 도시구획을 한 널찍한 골목 곳곳에 흩어진 옛 흔적을 찾는 시간. 한때 젓갈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던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 포구 노동자들의 근거지였던 옛 강경노동조합을 비롯해 옛 연수당 건재약방, 옛 강경상고 교장 관사, 중앙초등학교 강당, 옛 강경성결교회 등을 만날 수 있다.
근대유산 말고도 죽림서원 등 조선 선비들의 자취도 여럿 남아있다. 죽림서원 좌우엔 비슷한 모양의 정자, 팔괘정 임이정이 있다. 이중 팔괘정엔 실학자 이중환이 머물며 ‘택리지’를 썼다고 한다. 장날 객주집에 앉아 전국에서 오는 많은 상인들의 얘기를 귀동냥 해 택리지의 많은 내용을 채울 수 있었다고.
지금의 강경을 대표하는 건 젓갈이다. 생선과 소금이 차고 넘치던 시절, 자연스레 염장 기법이 발달해 지금껏 전해 내려온다. 강경읍 전체가 젓갈시장인 것처럼 골목골목에 대형 간판을 단 젓갈집들이 즐비하다. 모두 140여 곳이 넘는다고 한다.
신성리 갈대밭의 만추
강경에서 물줄기를 따라 내려오면 익산의 웅포를 지난다. 이곳 또한 예전 큰 포구였다고 한다. 웅포의 맞은편이 충남 서천의 신성리 갈대밭이다.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배경으로 등장하며 유명해진 곳이다.
비슷한 생김새로 갈대와 억새를 헷갈려 하는 경우가 많다. 억새는 상대적으로 낮고 은빛의 가지런한 느낌이라면, 갈대는 키가 크며 색이 짙고 거칠다. 누군가 갈대는 떡진머리 같고 억새는 린스까지 한 것 같다고 해 무릎을 친 적이 있다. 딱 그렇다.
금강변 19만8,000㎡넓이의 신성리 갈대밭엔 어른 키를 훌쩍 넘는 갈대들이 무성하게 자란다. 갈대꽃은 10월 중순부터 11월 초 절정을 이루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많이 졌다. 갈대 사이사이 억새가 그나마 허름한 풍경을 달래준다.
근대유산의 보고, 군산
금강의 끝자락, 바다와 접하는 곳에 군산이 있다. 1899년 일제에 의해 억지로 문을 연 개항장이다. 군산항을 통해 일제는 전북 곡창 지대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개항과 동시에 지금은 해망로라고 불리는 당시 본정통에는 미두장(쌀을 선물로 거래하는 일종의 투기장)이 들어섰고, 군산내항을 중심으로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장기18은행 등 10여 개의 은행들도 생겨났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해방 이후 한국은행, 한일은행 군산지점, 나이트클럽 등으로 사용됐다.
해망로 인근의 근대문화유산 중 보존이 가장 잘 된 곳은 구 군산세관 건물이다. 90년대까지 실제 세관 건물로 사용됐던 건물이다.
군산 내항에는 당시 3,000톤급 기선을 6척이나 댈 수 있었던 뜬다리부두(수면의 높이에 따라 위아래로 움직이도록 한 다리 모양의구조물)가 남아있다.
해망로를 건너면 옛 도심인 영화동이다. 골목에 들면 1980년대 풍경이 확 펼쳐진다. 길 끝자락에 초원사진관이 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의 무대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일제시대 포목상이었던 히로츠가 건축한 정통 일본식 저택이다. 기다란 복도와 아기자기한 정원이 인상적인 곳. 영화 ‘장군의 아들’과 ‘타짜’에 나왔던 집이다.
일본식 사찰 건물인 동국사는 조용한 주택가에 들어앉았다. 건물을 감싼 무성한 대나무숲이 인상적인 곳이다. 당시는 금강사라 했다가 한국의 불교가 인수하면서 동국사란 이름을 얻게 됐다. 마당 구석엔 평화의 소녀상이 서 있다. 작년에 세워졌다. 잔잔한 표정으로 동국사 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개정동 군산간호대에 있는 이영춘가옥은 일제시대 최대 농장주였던 구마모토 리헤이의 집이었다. 그는 약탈 수준의 고리대금업으로 땅을 그러모아 한때 여의도 면적의 10배가 넘는 땅을 소유했었다.
외곽의 임피역도 둘러볼 만하다. 일제의 쌀 수탈 때문에 생긴 간이역이다. 수확량의 75%나 되는 소작료에 반발해 농민들이 들고 일어섰던 옥구농민항쟁의 기억도 지니고 있는 곳이다. 너른 들녘을 배경으로 덩그러니 선 역사에 은행나무가 노란 그늘을 드리운다.
해질녘엔 금강하구둑 옆 금강습지생태공원을 찾아가보길. 날이 추워지며 철새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석양을 배경으로 경이로운 군무를 감상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