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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 불린 천주의 성 요한. 교황 비오 5세는 그를 『교회의 뜨락을 온전히 꾸미는데 없어서는 안될 한송이 꽃』이라 칭했다. |
어린시절 순례자 따라 가출
인생의 본질 깨닫는 계기돼
1550년 3월 8일 스페인 남부 도시 그라나다에서는 아침이 오자마자 한 부음(訃音)이 날아 들었다.
『천주의 성 요한이 돌아가셨다.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본명 후안 시다데(Juan Cidade), 1540년 투이(Tuy)의 라미레스(S. Ramirez) 주교가 경의의 표시로 내린 「천주의 성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던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날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임종했다.
심한 울혈증과 관절염 그리고 안구 이상 등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쉬지 않고 자신이 세운 「자선의 집」에 기거하는 사람들을 위해 음식과 구호 물품을 구걸하는 등 이웃을 위해 살았던 그였다.
선종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사람들은 그의 동료들과 병원 환자들, 그리고 그가 돌봤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집 앞에는 군중이 몰려들었고 그들중 대부분은 하류 계층에 속하는 어려운 이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 아버지가 우리들 곁을 떠나버렸으니 이제는 누가 우리를 보살펴 준다지?』
생존시 직접 수도회를 창설하지는 않았지만 사후에 그의 모습을 보고 따르던 이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수도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낳았던 천주의 성 요한(1495∼1550). 교황 비오 5세(1566∼1572)는 그를 가리켜 『교회의 뜨락을 온전히 꾸미는데 없어서는 안될 한송이 꽃』이라 칭했다.
그가 보였던 것은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철저하게, 질서 정연하게 정비돼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거칠기만 했던 사회에 피웠던 진정한 사랑의 불꽃이었다.
그에게는 거지들이 그냥 거리에 방치되는 것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또한 병자들이 병원에 실려와 인간적 대접을 받지 못한채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도 하느님 뜻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적 질서로 정비된 국가였으나 「카리타스」(Caritas)라는 진정한 사랑의 정신이 결여돼 있음을 보았고 가진 것 없고 버려진 이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파악, 효과적으로 돌보는 것이 거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자선의 집을 통해 가난한 사람의 벗이 됐던 천주의 성 요한은 자신에게 오는 이들은 어떤 이든지 깨끗한 환경 속에서 하느님의 어린이와 같이 다루며 몸의 상처를 봐주고 부스럼과 딱지들을 씻어내고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며 충분히 먹고 간호를 받을 수 있도록 돌봤다. 그에게 있어 모든 이들은 하느님의 어린이들이었다.
1495년 3월 8일 포르투칼 몬데모르오노보(Monte-Mor O Novo)에서 태어난 천주의 성 요한은 8세 되던해 자신의 집에서 거주하던 한 순례자를 따라 가출한 어린 시절을 갖고 있다.
비교적 중산층에서 자랐던 요한은 집안 사업이었던 농작물 판매상을 물려받아 편안하면서도 평범한 삶을 살아갈 운명처럼 보였지만 이 사건으로 그의 인생 진로는 바뀌게 된다.
요한을 데리고 나온 순례자는 그를 국경 너머 스페인에 있는 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오로뻬사 백작의 영지까지 대략 300km를 여행하여 백작을 섬기고 있는 측근인사 돈 프란치스코 데 에루즈에게 키우도록 맡겼다. 페르난도는 자기 집에 요한이 살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사춘기가 되자 「마요랄」이라 불리던 목양 감독관의 감독아래 목동으로 일했다.
1523년에 스페인황제 까를로 5세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양측 군대는 스페인 북부에 위치한 푸엔타라비아에서 접전을 벌였고 요한은 오로뻬사 군대에 편입, 스페인 방어를 위해 진군했다. 2년동안 지속된 장기전 속에서 전세는 스페인의 승리로 거의 굳어져 가는 상황이었고 이 시기에 훗날 자신의 장래에 영향을 미칠 커다란 두 사건을 경험한다. 덧없고, 쉽게 무너지기 쉬운 인생의 본질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요한이 프랑스 국경 근처에서 마초징발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중 말등에서 떨어지며 일어났다. 당시 떨어진 충격으로 의식을 잃었던 그는 자신이 적의 손에 잡혀 죽을지도 모를 심각한 위험상태에 놓여 있음을 깨달았고 공포와 절망 가운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 구원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점차 머리가 맑아지면서 다행히 아군의 진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남은 생애 내내 자신이 구출된 것을 이같은 마리아의 중재 덕분으로 여겼다.
두 번째 사건은 요한이 병영에서 노획물들을 지키는 야간보초 임무를 맡던 때였다. 어느날 그가 보초를 서는 동안 지켜야 할 물건들을 도둑 맞았고 요한의 직속상관은 이같은 도난 사건에 격노, 사형을 명했으나 요한이 교수대에 올라 목에 올가미를 걸고 있을 때 근처를 지나던 한 장교의 판결 취하 요청으로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곧 전쟁이 승리로 끝나고 그는 감사 기도를 드리기 위해 스페인 북서부의 꼼뽀스텔라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요한은 많은 시간을 묵상과 기도로 보낼 수 있었던 이때의 성지순례는 앞으로의 인생에 새 장을 여는 출발점과도 같은 것이었다.
광주에 있는 천주의 성 요한 병원 전경. 수도회는 전 세계에 200여개의 병원을 열고, 장애인 등 소외된 이들을 위한 치료활동을 벌이고 있다. |
병자 치유의 카리스마 실천
정신병자로 오해받아 병원서 채찍질당해
병자 정성껏 돌보기 위해 자선의 집 마련
스페인 콤포스텔라로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천주의 성 요한은 더욱 기도와 묵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 그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아프리카 수타 지역으로 떠나게 됐고, 여기서 잠시 생활하다 그라나다로 돌아와 엘비라 성문 옆에 성물 가게를 열고 책과 십자가, 성물 등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후 천주의 성 요한은 본격적인 회심의 생활로 접어드는 전기를 마련한다. 1539년 1월 20일 성 세바스티아노 축일을 맞아 「순교자들의 암자」 성당을 찾은 요한은 성 세바스티아노가 보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과 용기에 감명을 받고 성인전을 여러 차례 탐독하면서 보다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요한의 변화된 삶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켰고 정신병에 걸린 것으로 여겨졌다. 왕립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모든 시설이 열악한 이곳에서 작은 방에 갖혀 옷을 벗긴 채로 모진 매를 맞는 등 치료라고 할 수 없는, 학대에 가까운 대우를 받아야 했다.
기둥에 묶어놓고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 미치광이를 치료하는 가장 일반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던 당시였다.
그같은 비참한 생활 안에서도 요한은 다른 환자들을 배려했고 그들이 좀 더 편안하고 양호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할 일은 무엇이며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병원에서 퇴원한 요한은 이미 45세의 나이에 접어든 상황이었지만 자신이 해야할 어떤 일에 대한 의문은 계속되고 있었다.
퇴원과 함께 영적 지도자인 아빌라의 요한 신부를 찾아간 그는 요한 신부의 지도로 1개월간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졌고 이후 과달루페 성모성지로 순례를 떠났다. 그곳에서 요한은 3개월 동안 예로니모회 수도회들이 운영하는 병원 및 의학 학교에 머무르며 병자 간호에 필요한 기본적인 일들을 배웠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당시의 병원들이 오늘날 볼 수 있는 병원들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명색은 병원이었으나 병을 치유하는 곳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병을 전염시키고 키우는 곳이라 설명될 수 있었다.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울 정도의 지저분함과 더러움의 대상이었고 의학적 지식의 측면도 형편없을 정도였다.
요한이 입원했던 그라나다의 왕립 병원도 별 다를 바가 없어 병자들과 노숙자들과 떠돌이들이 북적거리고 있었고, 진심어린 간호나 봉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불쌍한 이들은 더욱 더 불쌍하게 됐고 죽음을 앞둔 환자들은 임종을 재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539년 12월말 요한은 모아진 돈과 지원금 등으로 루세나 길(Lucena-Gasse)에 「자선의 집」을 개원했다. 베네가스(Venegas)라는 은인의 도움으로 빌린 2층 건물이었다. 또 그라나다의 주교는 침대와 담요를 사도록 비용을 지원했다.
요한이 병자들을 돌보는 방법은 당시 병원 사정을 감안할 때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가난하거나 범죄자이거나 무일푼이거나 사기꾼이거나 불량배를 가리지 않고 환자들을 동등하게 대했는데 이러한 모습에 대해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고 한편 영혼의 소리를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그는 자선의 집에 기거하는 사람들을 위해 매일 거리에 나가 음식과 구호 물품을 구걸했고 후원자들을 찾아 그라나다외 여러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다. 세사 공작 부인은 요한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며 평생 은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요한은 또 잠시 그라나다에 머물고 있던 당시 왕국의 총비서 돈 세바스찬 라미레즈 주교에게 병자들을 위한 도움을 청했고 이 주교는 상편에서 언급됐듯 요한에게 「천주의 요한」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하사했다. 수도자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수도복을 입도록 명하는 것과 함께.
1546년 말경 안톤 마르틴과 페드로 벨라스코에 의해 그라나다 고멜레스 언덕에 두 번째 병원이 세워지는 것을 지켜본 요한은 1550년 3월 8일 「철저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는 그의 업적을 마감한다.
1630년 9월 21일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된 그는 1690년 10월 16일 교황 알렉산데르 8세에 의해 시성됐다.
교황 레오 13세는 병자와 병원을 위한 천상의 수호성인으로, 교황 비오 11세는 1930년 병자를 돌보는 사람들과 그들의 협회들을 위한 천상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또 교황 비오 12세는 1940년 그라나다를 위한 제2의 수호성인으로 정했으며 1953년에는 스페인의 소방수를 위한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한편 천주의 성 요한의 정신에 충실하면서 시대적 표징에 일치하는 방법으로 병자 치유를 위한 카리스마를 실천하는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는 1571년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공동체로 인정됐고, 1586년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정식 수도회로 승격됐다.
수도회는 특히 개발도상국 등 전 세계에서 200여개의 병원을 열고 있으며 장애인 노인 노숙자 만성병자 등 소외된 이들을 위한 치료와 각종 사회복지시설 등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