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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점선예수 실선예수>의 줄거리:
기계나 인테리어및 건축 설계에 있어서 점선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표시하는 반면 실선은 보이는 윤곽이나 외형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마음 속에 점선으로 자리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실선으로 그려진 이런 저런 관심사들에 밀리고 묻혀버린 상태입니다. 어떻게 해야 내 마음에서 점선예수님이 실선예수님으로 바뀌어 내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나타나 보이실 수 있을까요?
점선예수 실선예수
(행18:1~8)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점선예수, 실선예수>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점선과 실선’
점으로 점점이 이루어진 선이 점선이고 끊어짐이 없이 이어져서 그려진 직선이나 곡선이 실선입니다.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주로 설계를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이 점선과 실선의 구분에 아주 큰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합니다.
물론 도로 교통질서를 지키는 데에 있어서도 이 실선과 점선의 차이가 크지 않습니까?
그런데 두드러지게 구분되고 의미부여가 되는 곳이 바로 설계에 있어서입니다.
기계를 설계한다든지, 인테리어 설계나 건축설계에 있어서 점선과 실선의 기능이 아주 큰 차이를 보입니다.
점선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표시하기 위해서 사용을 합니다.
반면에 실선은 보이는 부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물론 보이는 부분뿐만 아니라 치수를 나타낼 때도 실선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때는 굵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가장 굵은 선, 중간선을 사용해서 실선으로 보이는 부분을 표시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정육면체인 주사위를 놓고 실제로 우리가 주사위를 보면 6면 중 3면밖에 안 보입니다.
그런데 그 정육면체를 입체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 면들을 점선으로 그려서 우리 머릿속으로 보일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점선이 들어가면 육면체의 입체감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실선과 점선의 차이가 있는데, 이 점선과 실선이 비유적으로 말해서 우리 마음에서도 똑같이 기능적으로 작용을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는 점선으로 되어있는 수많은 대상들이 창고에 물건이 쌓여있듯이 쌓여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중에서 실선으로 바뀌는 것들이 우리 생각에서 보여 지고 우리의 말에서 우리 행동에서 보여 집니다.
설계도에서 보여 지는 부분이 실선으로 표현되고, 보이지 않는 부분이 점선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우리 생각에서 보이는 것들, 우리 말에서 보이는 것들, 우리 행동을 통해 보여 지는 것들이 우리 마음에 실선으로 지금 그려지고 있는 겁니다.
마음에는 수많은 대상들이 있는데, 다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오직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들만 그렇게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보여 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어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50세가 넘었기 때문에 30년이 넘은 일이라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길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게 돼서 점심을 같이 먹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게 될 때는 고등학교 학창시절과 관계되는 일들이 마음에 실선으로 그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 속에 말 속에 그것이 다 보여 지게 되는 거예요, 고등학교 학창시절의 모든 일들과 대상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실선으로 바뀌게 됩니다.
또, 우리가 돈을 벌려고 하루 종일 뛰어다닙니다, 돈이 마음속에 실선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생각에서도 말에서도 행동에서도 돈이 보여 지는 겁니다.
그러는 가운데는 가족의 일, 자식의 일조차도 마음속에서 다 점선으로 그려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아빠들이 사업에 바쁘다보면 아이 생일을 모르고, 아이가 몇 학년 몇 반, 이런 것 전혀 모릅니다, 아이의 문제가 다 점선으로 처리되어 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도 우리 마음에서 점선으로 처리되어 있을 때가 있고, 실선으로 처리되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실선으로 그려져 있어서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 예수님이 보이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 속에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예수님이 점선으로 자리 잡고 있으면서, 실선으로 그려져 있는 다른 대상들, 돈 버는 일이나 사업하는 일 혹은 가정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의해서, 아니면 건강문제, 승진문제 등등, 이 세상에서 내 생각에서 보여 지고 있고 말에서 보여 지고 있는 실선으로 그려진 다른 모든 대상들에게 묻혀버려, 저 뒤로 밀려난 상태라는 겁니다.
어떻게 점선 예수님께서 내 마음속에서 예수님이 실선 예수님으로 그려져서 내 생각에서도 예수님이 나타나고, 내 말에서도 내 행동에서도 예수님이 보여 질 수가 있을 것인가?
이게 우리 신앙인의 과제라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가 오늘 본문에 아주 기가 막히게 그려져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에서의 사도바울의 전도활동을 소개하고 있어요.
또 이것이 헬라인과 로마시민으로 가득 차있는 고린도라고 하는 도시에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아테네가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다면 이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였고 아프로디테라는 여신을 숭배하는 우상 신앙이 편만했었는데,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신전에 천 명의 여자사제들이 있습니다, 근데 다 창녀에요.
아프로디테에게 제사를 드릴 때 종교적 의식의 하나로서 매춘행위를 하게 됩니다.
그만큼 고린도라는 도시가 돈과 물질이 풍부하고 성적으로 문란했던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이 이제 소개되고 있는 겁니다.
근데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구절이 하나 나타납니다.
5절에 보면,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떤 면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가 하면,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와서 바울을 고린도에서 만나게 되는데, 바울이 말씀에 붙잡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언한다는 거예요.
말씀에 붙잡혔다고 할 때의 말씀의 내용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에게 붙잡혔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강하게 밝히 증언하기 시작한 계기가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바울과 다시 합세하면서 그렇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이 핍박해서 베뢰아로 왔습니다.
베뢰아에 와서 또 유대인이 핍박할 때 그 제자들이 바울만 피신시켜서 아테네로 보냅니다.
결과적으로 실라와 디모데와 바울이 헤어지게 된 거예요.
그렇게 헤어진 뒤, 뒤의 서신서를 쭉 읽어가다 보면 실라는 빌립보로 가서 빌립보교회에서 선교헌금을 받아서 고린도로 오고,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로 가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는 문제들을 가지고 고린도로 와서 바울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어성경을 보면 희한하게도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와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바울이 말씀에 붙잡혔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이게 그냥 오비이락처럼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로 내려와서 바울을 만났을 때 우연히 바울이 말씀에 붙잡혔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실라와 디모데가 온 것이 바울이 말씀에 강하게 사로잡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얘깁니다.
자, 이게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이것을 쉽게 말하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만나면서 바울 속에 점선으로 그려져 있던 예수님께서 실선으로 바뀌었다는 얘깁니다.
이 점선으로 그려져 있다고 하는 얘기를 바울이 표현하기를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바로 이 기간을 말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말씀에 사로잡힌 그 다음부터는 약하고 두려워하고 떠는 그런 모습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가 바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서 일주일 내내 천막을 깁고 내다 팔고 하면서 안식일에만 회당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였고, 이때가 바로 슬럼프였다는 거예요.
그러다 실라와 디모데를 만나면서 갑자기 말씀에 강하게 사로잡혀가지고 팔 걷어붙이고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왜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게 되었습니까?
바울이 약하다고 하는 얘기는 육체가 약해졌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심리적으로 우울증에 빠졌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예수님이 점선으로 희미해진 겁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마음에서 약해진 것이 바울에게는 바로 약해진 이유가 되는 것이에요.
힘이 하나도 없어요, 그 과정을 추적해본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되었고, 왜 실라와 디모데를 만났을 때 이렇게 강하게 되어 다시 실선 예수님으로 바뀌었을까?
바울 혼자서 아테네로 쫓겨 옵니다, 아테네에 와서도 예수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머물렀다고 학자들이 추측을 해요.
머물고 있는 동안에 혼자서 아테네의 환경에 맞서게 됩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에피쿠로스철학자들과 스토아철학자들과 대화를 합니다.
자, 보세요!
아까 예를 든 것처럼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면 그동안 묻혀있던 점선으로 그려져 있던 학창시절에 대한 기억들이 실선으로 바뀌면서 생각과 말 속에서 학창시절이 보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와 나의 공통점이 고등학교 학창시절이니까, 둘이서 만나면 공통점을 얘기하게 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에피쿠로스철학자들과 스토아철학자들과 대화를 합니다, 공통점이 뭡니까? 그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아야 돼요.
그들의 공통점은 사변적인 타당성을 찾는 마음이에요.
철학적인 타당성과 가치를 추구하는 그들의 마음과 사도바울이 맞춰져가기 시작합니다.
사변적인 생각, 철학적인 생각이라면 사도바울도 한 가닥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그동안 십자가의 주님만 전하고 다녔습니다.
구약성경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예언하고 있다는 얘기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변증이 아닙니다, 그건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 그들이 추구하는 그 점에 공통적으로 맞춰줄 수 있는 것들을 맞춰주면서, 점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바울의 마음에서부터 점선으로 그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레오바고에서 한 설교를 들여다보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안 나타납니다.
단지, 너희가 이렇게 창조주를 모르고 다른 우상을 섬기면 마지막 때에 심판주로 오실 거라는 얘기만 합니다.
구체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이 빠져버렸어요,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재림주로 오신다는 얘기만 하게 되는 거예요.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나님에 대한 창조주로서의 묘사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희미해져버립니다, 주변 사람들이 갖고 있고 주변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관심사에 맞춰주면서 예수님이 점선으로 퇴색돼버립니다.
자, 그 다음에 고린도로 왔어요.
다행히 이 이방지역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요, 이들은 로마에서 이 고린도지역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인들이에요.
그래서 함께 머물게 되는데, 문제는 이들이 천막을 깁는 자들인데, 사도바울이 갖고 있던 기술도 천막을 깁는 겁니다, 공통점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주일 내내 천막을 깁습니다, 천막을 깁고 나면 그대로 쌓아두는 게 아니라 내다 팝니다, 내다 팔 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만 팔았겠습니까? 바울도 같이 내다가 팝니다.
‘아, 이거 잘 팔리네? 덜 팔리네? 천막을 기울 때 이렇게 하면 더 좋겠고 저렇게 하면 좋겠고…’
각자가 갖고 있는 기술이 서로 만나게 돼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되고, 그러면서 안식일에만 회당에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이 점선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생활을 하는 거예요.
일주일 내내 직장생활 하다가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수님 만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내려와서 바울을 만납니다.
분위기가 확 바뀌어버립니다,
실라의 관심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붙잡고 그 이교도의 세계에서 뚫고 지나가며 생활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간증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디모데도 어떻게 그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삶을 헤쳐 나가고 있는가에 대한 보고를 하면서, 그의 관심은 오직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뿐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만났을 때는 어떻게 천막을 잘 기울 수 있는가가 또 하나의 관심사였는데, 이 디모데와 실라를 만났을 때는 오직 관심사가 한 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마음으로 붙잡고, 이 세상의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만 간증하고 있는 겁니다.
이 두 사람의 관심사가 이것이고, 이 두 사람의 모든 얘기가 어떻게 데살로니가교인과 빌립보교인들이 십자가로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뿐이에요.
이때 천막을 깁고 있고, 아테네에서부터 점선으로 점선으로 퇴색돼버린 예수님의 모습이 실라가 말하는 예수님을 들으면서 실라의 마음속에 그려져 있는 오직 실라의 유일한 관심사인 예수님을 보면서, 바울의 점선의 예수님이 실선으로 바뀝니다.
디모데를 보면서 실선으로 바뀐 예수님의 모습이 굵은 실선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핵심이 되는 말씀에 완전히 장악돼버립니다.
그렇게 천막 깁던 관심사가 점선으로 처리돼버리고, 아테네서부터의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모든 관심사를 잊고, 아테네에서의 실패, 그래서 약하고 두려워하고 떨었던 그런 모든 기억이 점선으로 처리되어 뒤로 밀쳐지고, 실라와 디모데에 의해서 굵게 굵게 칠해진 실선의 예수님에 사로잡혀서, 드디어 뛰쳐나가 천막 깁던 모든 시간을 이제 예수님을 전하는 시간으로 바꿔버립니다.
여러분!
반드시 여러분 주위에 이런 형제자매들이 있어야 돼요.
이게 없으면 내 마음속에 예수님이 실선으로 그려질 수가 없습니다.
자, 명품 백에 온 관심이 다 가있는 동창들을 만났습니다.
얘기를 합니다, ‘이 백이 좋다, 저 백이 좋다, 남편이 외국 갔다 올 때 사왔다’
그 관심사에 마음이 빠져버리면 내 마음에 명품 백이 실선으로 등장을 합니다.
예수님은 밀쳐지는 거예요.
아파트 값이 오른다 내린다, 자녀를 어떻게 키우는 게 좋다, 어떤 며느리를 삼게 되었다, 이런 세상 사는 얘기들이 실선으로 등장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점선으로 처리돼버리고 맙니다.
이런 만남만을 가지고 유지해나갈 때 예수님은 스물네 시간 점선으로 처리되어서 우리의 생각 속에서도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서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보여 지지를 않는 겁니다.
그런 형제자매가 없다면, 씨를 뿌려야 돼요.
그런 형제자매들을 내가 발굴해내서라도 그런 만남이 내 주위에 있게 되어야 합니다.
혼자서 살다가, 전혀 예수님과 관계없는 관심사들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관심사에 맞춰주다가는 신앙생활을 못합니다.
반드시 실라와 디모데와 같은 친구가 옆에 있음으로서 내 마음속에 예수님이 실선으로 그려짐을 통하여, 어디를 가든지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 예수님이 보여 지는 그런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인 거예요.
여러분, 그런 형제와 자매, 만나면 오직 관심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인, 명품 백도 아니고, 아파트도 아니고, 자녀교육도 아니고, 건강관리도 아니고 오직 관심사가 그것인 형제자매들이 있어야만 됩니다.
기도하세요!
사업 해결해 달라, 건강 달라는 기도가 급한 게 아니에요.
오직 십자가 예수님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형제와 자매들을 내 주변에 허락해주시옵소서!
기도를 따라서 만나게 될 것이고 응답될 것이고, 그런 사람이 없다면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나를 통하여 말씀을 전하게 하셔서라도 그런 친구를 만들 수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어찌 하든지 점선 예수님께서 실선 예수님으로 내 마음에 그려져서 내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예수님이 보여 질 수 있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방송을 통해서라도 점선 예수님이 실선 예수님으로 마음에 그려짐을 통해 하루 종일 내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이 보여 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예ㅜ가 십자가를 통해야 그리스도가 되시네요
점선에 그리스도가 실선으로 나타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