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관 시인이 본 53 선지식 32차. 39, 불교여 민중을 생각하라
불교여 민중을 생각하라
민중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불타의 교설을
부정하고 있는 자들의 말을 수행하고 있는
참으로 거짓스러운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네!
부처님은 한시도 민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면서 중생의 고행을
벗어나게 하려고 설법하였다네
한국의 수행자들이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자아를 발견한다는 수행을 하면서
민중들의 고통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안락을 설법하면서
벽을 바라보면서 자아를 발견한다고
뜰앞에 잣나무라고 화두를 관하였다.
그런데 뜰앞에 잣나무라는 화두는 없고
문자를 해결하지도 못하는 가짜 화두를
자아를 발견하는 도구로 삼고 있었으니
그것이 수행자의 전부인 양 떠들고 있는
한국의 선승들에게 있어서는 잘못한단
차라리 뜰앞에 감나무라고 칭하련다.
서울역에서 노숙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불교계에서는 그들에게 무엇을 후원하고 있나!
날마다 신음하고 있는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노숙하고 있는 이들에게 부처님을 어떠한 관계인가?
자비심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진실로
목마른 자들에게 먹을 물을 공양했던가?
자신이 거처하고 있는 장소에서는 자신만의 터전을 마련하고
거리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인간이란 이름으로 국가로부터 탄 앞 받고 인권이 무시된 시점에서도
불교계는 무엇을 하였던가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군부 독재자들을 찬양하고 있던 불교계는
군부를 찬양하고 미·중을 억압하는 편에서
민중을 탄압하는 대열에 서있다가
그날을 반성하면서 나선 것은 민중을
자기 몸으로 고찰했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는 겨울 서울역 지하도에서 노숙하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물이 나는데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전생에 맺은 인연을 생각하게 하였네!
인연이 있다면 전생에 지은 업
업보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나!
나는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전생에 지은 인연의 산업을 받고 태어난 몸
어쩌면 슬픈 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
그것을 고찰한다면 나는 행복함이네
서울지하철 안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잠을 청할 수 없는데
사찰의 담벼락에서라도 잠을 청하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들보다는 전생에 산업을 지은 인연이라고 말한다.
나는 나를 지키는 자의 몸으로 수행을 중심에
나를 두고 있음이니 지하철 안에서라도 전진을
그러한 정진을 하는 수행자라면 어떨까?
2024년 1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