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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인식과 시적 표상
-김종 시인의 시 세계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시가 갖는 속성이 말의 표정보다 이면에 함의된 언표를 통해 구현된 언어체계라고볼 때, 인간의 내면에 감춰온 말들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것을 천박하거나 날 이미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언어로 전달하려는 시인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시라는 구조가 나와 너의 관계로 시작해서 밋밋하게 끝나지 않는 것도 그 이유다. 나와 너라는 관계에서 형상화되는 우리라는 대상으로 확장을 거듭하여 공감을 통해 사회적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미 세계 안에서 견고하게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것들도 알고 보면 과정의 반복에서 축적된 것들이다. 그 과정을 더 많은 확신과 신뢰를 담보하기 위해 상고사의 신화를 인용하는 것도 시적 진실성을 부가해주는 데 하나의 방편일 수 있다. 그런 결과를 위한 시간의 속도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신화적 서사로 재현되는 과정을 중시하는 것도 효과를 상승시키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렇게 과거로부터 순연된 시간의 결과는 현실에서 다수의 공감을 통해 수긍하게 된다. 요즘 시의 대세가 속물적 도시를 배경으로 감성과 무감한 채로 강박과 불안에 기초한 다양한 인간성의 심리적 출현을 보여주고 있는 데 반해 김종 시인은 그것 들에 대한 관심과 함께 개별성을 띤 의식의 변화가 먼 미래 인간의 삶에 미치는 것까지 예측하고 있다. 그 안에서 기존의 체계가 새로운 변화에 흡수되거나 아니면 더 나은 진전을 이루는 것은 아주 일반적이다. 그것은 도시화라는 사회체계에서 허용된 언표 위주의 질서를 수용해버린 허위성보다 인간의 내면적인 본성이 우위에 있다는 보편의 가치를 보여주려는 시인의 의도일 것이다. 금번 호에 출연한 시 다섯 편은 어쩌면 그런 보편성에 대한 가치를 비유하기에 적절한 시라고 여겨진다. 웅녀의 출현은 신이 욕망한 산물이다. 신들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라면 결국 남자가 욕망한 세계이며 불변의 결과로 나타날 때가 있었다.
겁대가리 없는 미련곰텡이라도 그라제
워메, 거그가 시방
깝깝한 어둠 속이 징허지도 안허던가
매웁고도 독헌 스무하렛날의 거시기를
얼척도 없는 쑥허고 마늘로만
어찌 군말 없이 살궈냈으까 잉
내 맴이 짠해서 어째야쓰까 모르겄네
-<동굴의 심(力)_웅녀에게> 부분
단군신화 속 웅녀설화의 한 부분을 인용한 듯한 시 한 편이다. 그렇다면 웅녀 설화의 기저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를 살펴본다면, 동굴에 들어간 곰과 호랑이는 그 시대의 고통받는 나약한 민중으로 표상할 수 있다. 식량이라곤 쑥과 마늘로 백일 동안 살아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시간을 암시하고 있다. 그중 곰만 살아남았다는 것은 우직한 것이 아니고 지혜를 짜내 동굴 속 남은 식량을 여성성이 갖는 은근함과 지혜를 통해 현명하게 대처했다는 뜻일 것이다. 다행스럽게 백일을 예상한 환난의 시간이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어차피 설화의 속성이 시간의 적층이라면 필자의 상상을 더한 것도 우려할 만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시인은 “겁대가리 없는 미련곰텡이라도 그라제/ 워메, 거그가 시방/ 깝깝한 어둠 속이 징허지도 안허던가”라는 말에서 고통스럽지만 참고 묵묵히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조상들의 삶의 시간과 유사하다. 멀리 보지 않더라도 해방 전후 배고픈 민중의 삶과 6·25 전쟁을 통한 고통의 긴 시간은 우리의 부모 세대라면 일상처럼 겪어왔고, 먹고사는 절박한 순간의 기억을 가슴 아프게 간직하고 있다. 그런 부모 세대들의 고통을 감내한 시간이 있었기에 현재의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시적 환유를 통해 발설하고 있다. 어차피 시간은 흘러가는 속성을 가졌다. “지침소리 쿨룩이는 사람”도 언젠가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말겠지만,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질긴 유전자를 물려준 우리 어머니들이란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지금도 주변에는 웅녀처럼 고통을 마다치 않고 묵묵히 감내하면서 살아가는 어머니들이 많다. 설화적 서사를 현대인의 삶에 비유해서 유추해가는 김종 시인의 시적 세계는 고루하지만, 사뭇 진지하다. 그런 경향은 다양하게 나타나는 현대 사회의 변화를 근거로 한다. 그중 산업 사회의 고도성장과 도시화로 인한 생활 패턴의 변화로 페미니즘 의식의 급속한 성장에서 실제로 기인한다. 그로 인한 기성세대의 심리적 위축도 상당하거니와 세대에 따라 공감하는 편차도 다를 수밖에 없다.
남자여 화장실 너무 믿지 마라
달래지도 고백하지도 마라
유사 이래 그대들의 소변법은
미증유의 전술전략에 포위되었다
어쩌면 진작부터 부러웠을지 모를
여자들의 앉은 자세 소변보기가
단 한 번의 충돌도 없이
산보다 조용히 산불보다 맹렬히
자진 선착순으로 타들어간다
서서보기로 해결하는 소변법 보단
앉은 자세가 백번 수월하겠지
실속파들은 벌써부터 실행에 옮기는지
차별 없는 평등세상을 예찬하고 있다
이리되면 그간의 서서보기 소변이란 게
이쪽 차별인지 저쪽 차별인지는 애매하다
-<은근한 불평등> 부분
앞서 밝힌 사회 환경의 변화를 감안한다고 해도 능청을 은근하게 깔아 해학적 유머까지 담보하고 있는 ‘은근한 불평등’은 남성의 소변보기 모티브를 담고 있다. 남녀의 성 의식이 내재되어 있는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쉽지 않은 데도 과감하게 시를 통해 담론화하고 있다. 그만큼 김종 시인은 시적 사물이나 대상으로 다가가는 시선이 남다른 면에서 개방적이다. 인간적인 고민을 변화하는 세대의 도래를 통해 들여다보며 사태에 대한 본질에 접근하려 한다. 앞서 발화된 ‘웅녀설화’의 한 부분은 여성의 강인함과 지혜를 바탕에 두고 있다. 그에 반해 남성 우위의 한 상징인 ‘소변 서서 보기’의 형태를 두고 시 전반을 구성하면서, 오래도록 유지해온 생리 현상의 처리 방법까지 위태롭게 바라보는 현실에 대한 세태를 시사하고 있다. 김종 시인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 사회가 빠르게 여성 우위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녀의 다름의 문제가 성 평등으로 간단히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소신을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남성의 소변 서서 보기의 오랜 전통은 주거 환경보다 생존의 문제가 결부된 것임을 간과하고 있다. 그야말로 남성 우위 사상에서 굳어진 습관도 그렇지만, 생존을 위한 거친 환경도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쳤을 것이다. 치열한 사냥(전쟁)터에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생존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신체 활동의 과도한 반복도 편리한 습관으로 고착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에 대한 이유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런 유구한 습관도 남자라는 것이 더는 우대받지 못한 현실에서 존재의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는 세태가 변해 몸보다는 머리로 생활하는 사회 현실에서 남성들이여 바쁠 것도 없으니 천천히 더 여유롭게 앉아 소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고지하고 있다. 현실 앞에 무력해진 남성의 시대가 기울고 있음을 김종 시인은 눈치를 진즉 챘을 것이다. 남자에게 힘을 상징하는 곳은 어깨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야만 진정한 남자로 대접받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용이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친애하는 나의 오른쪽 어깨가
밤새도록 지독하게 울었다 군소리 한번 모르던
어깨의 지난날의 과로를 돌이키며
질세라 나도 울었다 밤낮 없이 부려먹은
어깨의 그간의 산전수전을 함께 울었다
잠들 수 없는 허탈을 뼛속 깊이 울었다
육십을 넘기면서 처음 울었다
앙당 문 이빨들을 쏟아내듯 울었다
은하수도 어깨의 대성통곡을 반짝여 주었다
수말스럽기에 통곡할 일이란 없겠거니 했었다
섭섭한 생각 따윌랑 접었거니 했었다
-<어깨 나이 육십의 고백> 부분
김종 시인은 당당한 어깨를 통해 남자가 갖는 힘이라는 근육질을 드러내려 하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 다행스럽게 아직은 근육질이 험하게 이완되지 않았지만, 예전 같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통증이라는 고통을 통해 어느 순간부터 확신하게 된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기력이 쇠해지며 무기력해진 것은 누구나 겪는 생로병사의 과정이다. 그런 징후는 오래전부터 있었고, 사는 것이 바빠 느끼지 못했거나 참아온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작지 않다는 것을 보면서 ‘어깨 나이 육십의 고백’을 통해 시인의 나이도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시인은 어느 날 오른쪽 어깨가 몹시 아파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 통증을 통해 참담하게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본다. 어쩌면 생존을 위해 혹사한 쇠락해진 몸에서 보낸 신호를 이제야 감지한 것이다. 물불 가리지 않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갖 고통을 감내하면서 앞만 보고 살아온 회사형 인간들의 전형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고, 김종 시인과 다르지 않다. 굳이 오른쪽 어깨라는 신체 부위를 지칭하며 “어깨의 지난날의 과로를 돌이키며/ 질세라 나도 울었다 밤낮없이 부려먹은/ 어깨의 그간의 산전수전을 함께 울었다”라며 가슴속에 묻어둔 소회를 풀어놓지만, 단순히 ‘오른쪽’ 어깨의 고통스런 증상만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오른쪽 어깨는 자신의 좌우명일 수 있는 바른 삶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바른 삶은 선과 악의 분별뿐만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정신적인 고통도 감내해야 하는 현대인의 비애까지 함의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막상 그렇게 살아왔지만 남은 것은 만신창이가 된 몸만 남았다는 무상감을 토로하고 있다. 그것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아부하듯 오른쪽 팔을 무조건 들어야만 하는 현대인들의 비애인 자서이다. 그마저도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첨단 기능에 무방비로 노출된 기성 세대의 소외나 부적응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사람이 그립다고 노숙하는 바람의 다리를
무지개처럼 아이패드가 밟고 지나간다
넘어질 뻔한 아이패드는
노숙자가 깔고 앉은 박스를 매몰차게 차버린다
IP주소 없는 바람을 바라보는 눈길은 마냥 차갑다
모든 친구들은 페이스북에 있으므로
목하 친구를 찾습니다 친구가 맞는지 확인해 주세요
광고를 클릭해야 귀신이 된 친구가 나온다
손을 맞잡고 방방 뛰는 친구는 귀신 세상에는 없다
귀신들은 정온동물이 아니므로
스킨십을 하면 얼어 죽거나 타죽는다
부모들은 견고한 플라스틱관에 들어가서야
귀신이 된 아이들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다
소셜속의 소설을 읽느라 논픽션은 더 이상 팩트가 못 된다
140자를 넘어서 말하면 즉사하는 귀신나라도 있다
규칙을 잘 지키는 귀신들은 하느님도 못 죽이는 불사신이다
사통팔달이 바야흐로 귀신들 세상이다
순간 거울을 본다
치매환자처럼 낯선 얼굴에 비명을 지른다.
-<귀신이 되다> 부분
지금껏 지구를 지배해온 인간의 우월한 정신 영역에 이상한 기류가 포착되기 시작했다. 그 이상한 징후는 편리성을 추구한 인간의 욕망과 딱 맞아떨어진 첨단 전자 메커니즘으로 탄생한 지능형 휴대폰이 원인이다. 그런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인간의 창조적 사고 능력이나 공감 인지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변화된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유한 이름 대신 필요한 “IP주소 없는” 접근은 아예 허용이 안 된단다. 그러고서 인간의 무한한 사유 능력도 “140자를 넘어서”면 안된다. 지금껏 맘껏 누려온 인간의 자유로운 사유체계를 버리고 ‘아이패드’에 내장된 규칙을 준수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적응해야 전혀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인간과 인간의 친연성에 바탕을 둔 본성은 와해되고 가벼운 손 터치로 각자도생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사람을 만나 무언가를 논쟁하며 지혜를 묻는 담론의 시대가 아니라 첨단이 만들어낸 아이패드라는 휴대폰을 통해 허용된 만큼의 기계적 일상을 살아간다. 웃거나 슬픈 것마저 단순해져 감정선에서 예민하게 동작하는 희로애락과 오욕칠정마저도 무의미해진 것도 시간문제다. 애당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단순히 즐거워하고 크게 웃거나 크게 울거나 천박하게 방방 뛰거나 이 모든 것도 아이패드 안에서 기계적으로 이뤄진다. 인간성이 사라져 버린 현실을 보며 “치매환자처럼 낯선 얼굴에 비명을 지른다”라는 대상은 ‘나’이면서 ‘너’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휴대폰 안의 일상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며 사회관계를 단절해가는 비정상적인 현실에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환각적인 사회 현상으로 보고 사실적 언어로 심각성을 사태로 바라보도록 시인은 환기한다. 그 이유는 ‘나’와 ‘너’라는 관계 사이에 “견고한 플라스틱”이라는 아이패드를 개입시켜 다자원적인 현실로 재현하고 그 폐해가 주는 후유증이 단발적이지 않고 위험한 시대의 도래를 경고하고 각성하도록 한다. 현대문명의 총아라는 휴대폰을 주변적인 도구로 단정하지 않고 그것이 개입되어 발생되는 사회 변화에 경계심으로 바라보려 한 것이다. 휴대폰으로 구축된 사회 현상을 정상적인 인간의 상호작용으로 볼 수 없다는 시인의 각성과 그것으로 파생될 사회 문제에 대한 우려를 예민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좀비가 사는 세상은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휘청거리는 달빛이 소주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하룻밤의 숙면을 위해
김씨는 중얼중얼 폐가의 헛청에 몸을 눕혔다
오래된 처마의 한쪽 모퉁이가
오십견에 걸린 팽나무처럼 추욱 처져 있다
여러 계절의 비바람을 그렇게 버텼을
기울어진 처마의 안온함에 기대어
시간의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하룻밤을 넘겼다
간질이는 햇살에 김씨의 목울대가 출렁거렸다
어젯밤 뜯어먹다 던져둔 단팥빵봉지는
복닥거리는 개미들의 먹거리장터가 되어있었다
새카만 먹성에 섬뜩해진 김씨는 생수를 병째로 들이부었다
달려 나온 물대포는 개미핥기처럼 빵봉지를 핥더니
내친 김에 담벼락 아래 개미집까지를 쓸어버렸다
쓰나미에 휩쓸린 지지난 여름의 악몽 때문에 한곳에 오래 머물지를 못하는 김씨는 정든 집을 버렸다. 어느 절대한 분 의 재채기에 자신의 지구가 떠내려 간 것처럼 생수 한 병의 노여움으로 개미의 지구를 휩쓸어버 린 김씨는 창졸간에 개미의 하느님이 되었다.
대명천지에 외로워진 개미 한 마리가
삐져나온 김씨의 구두밑창을 필생의 힘으로 기어오른다
저 개미에게도 오늘밤의 달빛은 김씨의 달빛처럼 휘청거릴 것인가.
-<개미 하느님> 전문
막말로 술 한잔 거나하게 먹고 취중 길가 빈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면 낭만으로 치부할 수 있다. 하룻밤이 지나면 술이 깨듯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김씨’는 그럴 수 없는 처지다. <개미 하느님>에서 “하룻밤의 숙면”과 “폐가의 헛청”까지 드리운 “오십견 걸린 팽나무”마저 암울한 이미지를 더해주고 있다. 3연에서 결국 인간이나 개미나 먹고사는 문제와 결부되어 사단이 생긴 것이다. 한 조각의 빵을 놓고 벌어진 폭력(위력)의 행사로 쏟아부은 생수 한 병이 안온한 개미들의 생활 터전을 일거에 휩쓸어 파괴해 버린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깨닫게 되는 인간의 욕망과 자연의 상충되는 힘의 역지사지를 깨닫게 된다. 하룻밤 취객의 신세로 그곳에서 묵게 된 처지인 ‘김씨’지만, 지난 여름에 몰아닥친 ‘쓰나미’로 인해 안타깝게도 생활 터전을 잃어버린 불우不遇가 가슴에 깊기 때문이다. 나약함을 확인 이후 김씨는 무신론적 입장에서 신의 존재를 기어이 긍정하고 만다. 혼돈과 무질서로 표출되는 자연 현상도 우리 삶의 본질에서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존을 위해 이뤄지는 행위가 다름 아닌 타자에게는 무한한 혼돈과 혼란의 시간으로 전가된다는 것까지 다다른다. 쓰나미는 사전적인 자연재해가 아닌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가한 폭거임을 말해준다. 그렇게 “쓰나미에 휩쓸린 지지난 여름의 악몽 때문에 한곳에 오래 머물지를 못하는 김씨는 정든 집을 버렸다”며 병적 증후가 도진다. 이 시는 허름한 빈집에서 보낸 취객의 하룻밤 단잠에서 깨어난 뒤 몽유夢遊로 시작된다. 몽롱하게 환기되는 현상을 통해 인간이 갖는 폭력의 후유증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자기중심적 사고가 주는 폐해를 각성케 한다. 김종 시인은 바라보는 사물에 대하여 즉물적 사고보다는 전환적 사고로 접근하여 관념의 허위성보다는 공감의 언어로 다가간다. 이를 위해 시인은 살며 경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본질로 편입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수시로 나약함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 대신 시선을 바꾸는 것이 합리적이란 것도 알고 있다. 시적 소재를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부딪치는 사건들을 천착하며 시적 상상력으로 마주한다.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시적인 것의 본질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대신 그것은 인간의 소중한 생명의 탄생을 통해 유전된 존엄이 정신주의적 가치와 별개가 아니라는 것까지 인식하고 있다.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와 시적 주체성은 동일한 시의 언어 범주에 들기 때문이다. 시적 대상에서 관념과 사실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의미망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까지를 관련지어 말한다. 흔히들 시의 상징이나 상상력은 우리의 삶과 별개인 것처럼 바라본다. 김종시인도 시적인 것의 근원이 일상으로 행위된 언행에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의 표정 뒤 감춰진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 골몰하고 있을 시인을 상상해본다.
출처 ; 사람의 깊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