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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RF 스페셜 ]
한국 기초과학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본질적 성찰 필요
연구 인프라에 투자하고 젊은 과학자 꾸준히 지원해야
* 이 글은 2016년 9월 27일 오후 2시부터 재단 주최로 대전청사에서 개최한 ‘노벨과학상 정책토론회-기다림의 미학’의 주요 내용입니다.
다이너마이트 발명가인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매해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세계에서 가장 권이 있는 상, 노벨상. 매년 10월 세계의 이목은 스웨덴의 노벨위원회의 발표에 집중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언제쯤 노벨과학상 수상이 가능할까? 재단의 설문조사(기초과학분야 수석전문위원, 전문위원 대상)에 따르면 이르면 우리나라도 6~10년 내에 한국인 최초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나올 거라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전망이 실현되기 위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변화해야 하는지 노벨과학상에 대해 얘기하는 정책토론회를 마련하여 각 분야 전문가 의견에 귀 기울여보자.
김선영 서울대학교 교수(생명과학)
2015년 일본과 중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자 사회 곳곳에서 “우리는 뭐하냐”라는 탄식과 함께 언론들은 기사와 사설을 통해 각종 비판과 주문을 쏟아내고 있다. 이제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좀 더 근본적으로 바라보고 대책을 세워야 할 때이다. 깨진 그릇에 아무리 물을 부어봐야 다시 새나가기 때문이다.
노벨과학상을 위해서는 먼저 개인보다는 인프라에 우선 투자해야 한다. 뛰어난 개인을 찾아 집중 지원하겠다는 현재의 지원책들은 우선 순위를 잘못 정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실험 인프라와 환경이 열악하다. 골프나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끊임없이 세계적 명성을 날리는 한국인들이 나오지만, 피겨스케이팅에서는 왜 김연아의 후계자를 찾기 어려운지를 비교해 보면 그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전자는 대학이나 연습장 등 교육을 포함한 각종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만 후자의 경우 제대로 된 빙상장조차 접근이 어렵기 때문이다. 놀랍겠지만 우리나라의 기초과학계가 이와 비슷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이 나오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노벨상을 많이 배출한 선진국 연구소를 벤치마킹하는 방법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상당한 규모의 예산을 기초과학에 쓰고 있지만 투자대비 생산성이 너무 낮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의학연구위원회’(MRC)와 ‘분자생물학실험실’(LMB) 연구소의 예를 보면 이 기관은 1962년 이래 13명의 노벨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 중 한명은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게다가 LMB에서 시작하거나 수행하던 연구를 갖고 다른 곳으로 가서 노벨상을 받게 된 사람도 수십 명이 되니 가히 ‘노벨상 공장’이라 칭할 만하다. 이 곳의 정부 예산은 연간 약 600억 원 정도이다. 우리나라 정부출연 연구소와 비교했을 때 중간 정도 규모에 불과하다. 예산이 그리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우선 기관장의 임기가 짧지 않다. 초대 소장 페루스는 17년 근무했고 52년 역사에도 지금까지 소장이 5명뿐이다. 임기가 3년인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또 30대 초반의 젊은 과학자들을 유치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 곳의 연구원 채용 기준은 정량적인 부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학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처럼 매우 정성적인 방법으로 연구원을 채용하고 있다. 결국 노벨과학상을 위해 당장 해야 할 것은 많은 예산 투자가 아닌 시스템의 변화인 것이다.
또 노벨과학상 수상 가능성을 높일 수 방법 중 하나는 젊은 과학자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는 데이터로 증명된다. 물리, 화학, 생리의학 등 모든 과학 분야의 수상자 평균나이는 57세 정도이지만, 그들을 수상으로 이끈 핵심 발견이 발표된 시점으로 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지난 25년 간의 생리의학상 분야를 분석해보니 40세 이하에서 발표한 성과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전체 수장자의 54%로, 평균 나이는 33세였다. 실험기간을 5년으로 본다면 프로젝트를 시작한 나이는 평균 28세가 된다. 노벨상 수상은 모두 젊을 때 까졌던 이단적 생각, 번득이는 아이디어, 실험적 집요함, 기행을 마다하지 않는 추진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젊은이의 특권을 십분 활용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노벨과학상 수상을 위해서는 △개인보다는 인프라에 우선투자하고, △선진국의 연구소의 좋은 사례를 벤치마킹하며, △젊은이에 우선 집중 투자해야 하는 노력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박배호 건국대학교 교수(물리학과)
노벨상 수상 업적에 근접하는 획기적이고 영향력이 큰 연구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독창적이고 연구 활동에 매진하는 대학원생, 신진연구자, 중견연구자, 리더연구자들의 연구생태계가 조성되고 유지 및 발전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대학원생은 졸업 후의 불투명한 진로 때문에 힘들어하고, 신진연구자 역시 불안정한 직장이나 독립적인 연구의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 한다.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이유로 연구 활동에 회의를 느끼는 대학원생이나 신진연구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중견연구자와 리더연구자는 중단 없는 연구를 위해 연구과제 수주 및 실적 늘리기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현실을 아는 젊은 학생들은 연구계에 진입하기를 꺼리고 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 다른 분야로의 진출을 희망하고 있다. 많은 학생들이 즐겁게 연구할 수 있는 건강한 연구 생태계를 조성, 유지 및 발전시키기 위해 개선해야 할 3가지 사항을 제언한다.
△대학원생들이 졸업 후 또는 신진연구자들이 보람을 느끼며 연구 활동을 할 수 있는 좋은 연구소들이 있어야 한다. △연구과제 선정, 평가 및 지원방식의 개선이 필요하다. △단기간의 성과가 아닌 장기적인 안목으로 연구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현택환 기초과학연구원(IBS) 단장, 서울대학교 교수(화학생물공학)
노벨상 수상을 위해서는 교수임용 과정의 혁명적 변화가 요구된다. 교수임용 과정에서 논문수가 적은 연구자는 아예 지원할 길이 없다. 상위 10위권 대학에서조차 지난 3-5년간 주저자로 5편 가량의 논문들을 발표해야 지원할 자격이 주어졌다. 물론 교수로 임용되어도 승진과정에서 논문숫자가 여전히 중요한 변수이다. 이제 더 이상 대학에서 숫자놀음을 그만하고, 논문수가 아닌 논문의 질 위주로 평가되는 사회로 하루 빨리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또 미국대학에서 보편화되어 있는 Start-up Fund가 반드시 지급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대학에서는 신임조교수의 경우 평균 10억 원(백만 달러) 규모의 초기정착금이 지급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국내 유수의 대학에서는 1억 원 내외의 초기정착금이 겨우 지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마치 최첨단 탱크와 구식 소총이 서로 싸우는 꼴이다. 여러 자료에서 보듯이 가장 중요한 연구결과는 교수로 임용되고 10년 이내에 거의 다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상위 10위권 안의 연구중심 대학에서는 이 초기정착금이 지급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장기간 한 연구주제를 가지고 꾸준히 연구할 수 있도록 연구비가 지원 되어야 한다. 소위 말하는 풀뿌리 연구과제이다. 일본의 저력이 바로 이 부분이다. 시대의 조류나 인기에 관계없이 연구자 개인이 좋아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과제를 꾸준히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각 대학의 초기정착금과 연계되어 이 풀뿌리 연구과제가 지원된다면 아주 이상적인 모델일 것이다.
이혜연 연세대학교 교수(의대 해부학)
과학계가 자생력 있게 인재를 기르려면 국내인재를 국내에서 육성하고 기르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현존하는 과학계 우수인력과 스타급 과학자가 대한민국의 과학계로부터 길러졌는가를 분석해 보면, 우수 인력의 대부분은 선진국에서 길러졌고, 길러진 그들을 다시 대한민국 과학계가 가져다 쓰는 형식이다. 즉 현재 과학계 인재의 대부분이 소위 용병과 같은 형태로 육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인재양성을 외국에 의존하고 용병과 같이 차용만 할 것인가? 모든 대학이 우수한 인재 양성 시스템을 갖출 수는 없어도 몇몇 우수대학은 그 인재들이 외국으로 유출되지 않고 이 땅에서 키우는 시스템을 갖추고 지원할 필요가 있다. 시급히 대학원 및 연구지원시스템을 정비하고, 우수한 과학자들이 팀을 이루어 인재를 기르고 그들의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훈련이 가능하고, 의문을 해결할 수 있도록 헌신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우수한 각 대학의 연구자와 과학자들이 각기 다른 외국 대학에서 얻어온 연구 능력만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시스템으로는 우리 과학계 안에서 절대로 우수한 인재를 만들 수 없다. 대한민국의 음악가가 줄리어드 대학에서 수학하여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된다면 그는 줄리어드의 인재일 뿐 대학민국이 키우는 인재는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의 그 많은 음악영재 중 외국에 수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자만이 세계적 인재가 될 수 있다면 한국은 음악영재들에게 불행한 나라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과학계 영재들에게도 이 땅에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렇게 길러진 인재들이 진정한 과학자로 노벨상에 도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길일 것이다.
박문정 포항공과대학교 교수(화학과)
일본의 젊은 과학자들은 연구비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도제 시스템을 동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30, 40대의 젊은 나이가 가질 수 있는 창의성과 열정을 온전히 연구에만 쏟을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부럽다. 단언컨대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젊은 과학자들이 충분히 연구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연구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다. 젊기 때문에 실패해도, 혹은 이단적인 생각이어도 남의 이목이 크게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학생들과 함께 밤 세운 적이 무수히 많은 정도로 집요함이 있었고, 결과가 궁금한 실험은 다른 선배 연구실의 연구 장비를 빌려서라도 반드시 수행했던 대단한 집착도 있었다. '젊음'의 특권을 백분 활용하여 꿈꾸던 연구를 마음껏 해볼 수 있는 연구 환경은 대한민국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일까? 노벨상을 위해 해외 유수 과학자들에게 투자하는 연구비의 규모의 10분의 1이라도 젊은 과학자들이 할 수 있는 연구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투자한다면 정말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임경순 포항공과대학교 교수(과학문화연구센터장)
과학에서 작은 차이에 대한 보상은 과학 생산성 및 과학적 평가에서 점점 더 커다란 효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태효과는 노벨과학상 수상 실적을 살펴보면 더욱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1901년부터 2000년까지 100년 동안 총 469명이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 가운데 미국은 199명(62.4%), 영국은 70명(14.9%), 독일이 61명(13.0%)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여 이들 3개국의 수상 비율은 전체의 70.3%에 해당한다. 세계 각국 노벨상 수상 비율을 놓고 보면 어떤 소득 분포보다도 불균등한 구조인 셈이다.
새로운 미래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는 과학 활동을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분야에 수요하는 노벨과학상 수상에 국가의 기초과학 정책이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노벨과학상의 수상 전략은 국가의 브랜드 향상을 목표로 해야지 국가 기초과학 연구 정책의 핵심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광복 한국연구재단 기초연구본부 본부장
노벨과학상 수상자 배출을 위해 국가와 연구지원기관의 역할은 마음껏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연구자 중심의 창조적 연구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 지원 강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따라하기 연구(Me too Research)가 아닌 해당분야를 선도하는 창의적 도전적(First Mover) 연구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선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과제의 실패를 용납할 수 있는 과제평가 및 관리방식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또 특정분야 및 주제를 대상으로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연구지원기간을 확대하여 안정적, 장기적 연구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나아가 가장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는 신진연구자에 대한 연구지원 확대를 통해 연구 인프라 강화 및 차세대 우수 연구 인력을 육성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제협력기반을 확대하여 전략적 협력 연구를 강화한다면 노벨상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