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김임생(69)은 제주도에서 태어나 열댓살적부터 바다에서 살다 이제는 해녀 생활 40년, 바다 밖 보다 바닷속에서 산 세월이 더 많아졌다. 해녀 엄마에게 물질을 배우며 처음엔 가장자리에서 고동을 따다가 조금 첨벙 들어가서 미역 한 올 따오고 또 조금 더 들어가서 소라 건져오고 그리고는 좀 더 숨을 오래 참아 전복을 떼왔다. 이제 완전한 해녀가 되었을 때 바위틈에 숨어있던 문어와 성게도 건져왔다.
제주에서 결혼을 하고 울산으로 왔는데 제주 해녀들은 경상도 전라도 지역으로 많이 퍼져 나갔다. 옛날에는 제주에서의 해산물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나와 육지 바닷가에 정착하는 경우도 많았다. 울산에는 미역등 해초류가 풍부했고 그 중 우뭇가사리가 많았다. 이 것을 체취하여 거의 전량 일본에 수출 했는데 이 우뭇가사리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양갱이나 기타재료로 쓰인다. 제주 역시 우뭇가사리, 앙장구등을 많이 수출하여서 4.3이후 황폐해진 제주를 부흥 시켰는데 이는 거의 해녀들의 공이었다. 임진왜란때는 물속으로 들어가 일본의 배들을 묶어서 격파를 시키기 용이하게 했으며 또 일제시대때는 비밀문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해녀의 하루는 보통 아침 7시부터 준비하여 아홉시 즈음에 바다에 들어가면 오후 세시 정도에 나온다. 여름에는 차가운 냉커피를 하루 대여섯잔씩 마시며 버티고 겨울에도 마찬가지이다. 중간 중간 간식이고 밥을 먹는 경우는 드물다. 하루 바닷속 들어가려면 약을 네가지 정도는 먹어야 한다. 진통제. 청심환, 위장약 등 그게 없으면 온 몸이 아파 일을 못한다고 한다. 물일을 마치고 나오면 온돌에 몸을 찌지는(?) 공간도 있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좋았지요. 잡을 것도 많았고."
"지금은 별로 없어요?"
"수경발이로 해서 다 잡고 없어."
"수경발이가 뭐예요?"
"아, 그, 다이버들 있잖아, 머리에 불켜고 샅샅이 다 잡아버려 없어, 그게 불법인데 밤에 몰래 하니 잡을 수가 있나. 우리는 어촌계에 돈 내고 세금 꼬박꼬박 내고 이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뭐 바닷속에 오래 있을 수 있으니 다 잡아가지. 우리는 숨을 오래 못 참으니 작은 건 두고 큰 거만 조금씩 잡아오는 거지."
"아, 그렇군요..... "
그나마도 울산 해녀의 삶의 터전은 관광개발사업으로 점점 축소되고 있다. 해녀의 집이 있던 자리는 주차장으로 변하고 주로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은 조선소가 들어섰다. 그나마 조선소가 그들이 일하도록 개방은 하고 있다. 아마 이들도 마지막 해녀가 되지 않을까.
울산에는 3개 구역에서 해녀가 활동한다. 동구 대왕암, 일산 해수욕장쪽, 그리고 북구 우가포쪽이다. 우리가 만난 해녀는 여섯명이 한 조로 작업을 하는 대왕암구역 해녀들이었다. 대왕암 바닷가에 해녀들이 직접따온 소라, 멍게, 전복, 해삼등을 파는 포차도 있다. 여름에는 아주 성황을 이룬다.
해녀의 일은 어쨌거나 극한 직업이다.
폐그물에 발이 걸려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도 있었고 쾌속선 스크류에 발이 잘리는 경우도 있었다. 오죽하면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말이 있을까.
그래도 이 일은 자유업이고 전문직이라 80까지는 할 수 있지 않겠나 하신다.
그들이 잡아온 소라, 전복, 성게들을 부지런히 까고 삶고 파는 손 놀림이 젊은이들보다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