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정치적 올바름의 무대-좌파와 우파의 정체성 정치
--------------------이졸데 카림, 『나와 타자들』, 민음사, 2019
새뮤얼 헌팅턴에 따르면 냉전 시대 사회들은 정치 이념에 따라 조직되었다. “너는 어느 편인가?”라는 질문이 냉전 시대의 유일한 질문이었다.
1939년 사치에 빠져 혁명이라는 사명을 잊은 세 명의 소비에트 동지들이 나온다. 결국 물질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자본주의를 이기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 당시 동구권, 중동 사람들이 이렇게 가지고 있던 '서구'에 대한 환상은 냉전이 끝날 때까지도 유효했지만 9.11 이후 본격적으로 깨지게 된다.
슬리퍼 에이전트에서 등장하는 테러리스트들은 서구 사회에 숨어 살며 끊임없이 이 서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결국 이들은 서구에 동화되지도 오염되지도 않는다. 이들은 서구의 행복관에 면역되었다. 오늘날 <니노치카>는 시효를 다했으며 이제 더이상 서구라는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
냉전시대 가장 유일하고도 중요했던 물음 "너는 누구편이냐" 는 말은 비대칭적이다. 구도는 사회주의(영웅주의) vs 자본주의(포스트영웅주의) 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발전은 영웅 이후 사회, 곧 포스트영웅주의 사회로 가는 과정이었다.
1993년 새뮤얼 헌팅턴은 ‘문화 전쟁’이라는 개요를 발표했다. 헌팅턴의 주장으로는 앞으로의 세계에는 "너는 누구편이냐" 는 질문이 아니라 "너는 누구냐" 는 질문을 하고 받게 된다는 말.
다극화된 갈등이 위험한 이유는 사회적 분열이나 갈등의 전선이 선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전선이 단순히 우리의 가장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dlek. 이 갈등을 '문화전쟁' 이라고 규정해 버리면 모든 문화, 문명권끼리 종교나 인종 민족에 따라 선명하게 구별되고 대치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음 '선포된 적은 적이 아님'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파리 런던 니스 테러사건, 노르웨이 우퇴위아섬 총격사건 다 같은 결과를 보이는데 선포된 적들은 서로를 겨누지 않음. 현시대 대립구도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주의자들 대 다원화된 사람들간의 대립이다. 오늘날은 다양한 정체성들의 전선이 아니라 정체성들의 다양한 방식들이 싸우는 전선.
그렇다면 좌파의 정체성 정치는 무엇인가.
1) 계급투쟁, 1세대 개인주의 시대의 투쟁
2) 2세대 개인주의 시대의 투쟁
억압의 범위와 대상의 범위가 넓어진 '신사회 운동'류의 투쟁 연대는 더이상 유사한 자들의 협력이 아닌, 유사하지 않은 자들의 연합이 됨. 해방 과정에서 자기를 찾고 완전한 정체성을 찾으려는 저항이 나타남
3) 정체성 정치
3세대 개인주의 시대의 투쟁은 모든 영역의 차별에 대해 시선을 연다, 상처받기 쉬운 정체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핵심
이러한 포스트영웅주의 사회에서 '피해자'의 역할과 위치는 변화하게 된다. 이전 시대 (희생양으로) 바쳐지던 1세대에서 피해자로 인정받는 2세대에서 오늘날 "내가 피해자다"라는 선언으로 주체의 주체성 회복까지.
이런 사회의 변화 속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쪽에서의 격렬한 반대를 경험하게 된다. 청소년들의 반발이다. 그들은 '피해자'의 단어를 욕설로 만들었다. 또한 대학에서는 '안전공간(모든 트리거가 사라진 공간)'이라는 상처와 불평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보호공간을 요구하는데 이 지점이 바로 다원화에 대한 좌파의 방어라 할 수 있다.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은 다원화에 대한 좌파의 방어이다. 억압받는 자들의 자아는 더 작은 자아가 된다, 이것이 정치적 올바름이 채우려 했던 결핍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과잉된 정치적 올바름은 감소된 자아의 방어로 '전도'된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들
우파에서: 이건 소수자 독재다! 라며 환상 속의 적을 구성하고 망상함, 그리고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이 과잉되어있는 곳과 결합해 있다. 또한 이들의 혐오 발언은 특히 백인 남성들 사이에서, 오히려 좌파의 표현 독재에 맞서서 해방, 저항의 이미지를 갖게 된다.
마크 릴라의 주장과 릴라의 비판자들: 우파의 성공(미국 도널드 트럼프 예상 밖 승리에 대해서) 에 대한 반응.
마크 릴라: 자유주의는 통합하는 힘에서 분열시키는 힘이 되었다. 특히 정체성적 자유주의 중에서도 정체성적 나르시시즘은 다양화를 위해서 공통의 문제를 포기했다. 공동선에 관심이 있는 국가 시민의 포스트정체성 자유로의 출구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고 주장.
비판자들: 문제는 다양성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이들에게 유보되어 있었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일이다.
좌파의 정치적 올바름 비판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훨씬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너는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너는 오스트리아인, 터키인, 체첸인으로 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너는 그리스도인, 유대교인, 무슬림 혹은 무신론자로서 어떻게 사는가?” 이것이 다원화 사회의 질문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핵심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