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아파트야, 동네 공장이야, 보물창고야?_1
"날도 추운데 뭣 좀 찾았습니까?" 아파트 입구에서 만난 할아버지에게 내가 물었다. 그의 자전거 바구니에는 어느 부속품으로 보이는 주먹만 한 크기의 검은 물체 하나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오늘은 우산 하나도 나온 것이 없다며 웃었다. 그리고 내가 바구니의 물체에 관심을 보이며 뭐냐고 묻자, 자기도 궁금해서 그냥 가져와 봤다고 했다.
그렇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었을까싶었다. 올해 팔십육 세에 접어든다는 할아버지는 우리 아파트 305호에 할머니와 두 분만 사신다. 오늘 같은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개의치 않고 사시사철 눈이오나 비가 오나 하루 두 번, 자전거를 타고 동네 곳곳을 누비며 보물을 캐고 계신다.
벌써 몇 년 전 일이다. 우리 집 커피포트가 고장이 나서 재활용품 버리러 가는 길에 할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그런 걸 왜 버리느냐며 할아버지는 자기 집에 가져갔고, 다음날 인터폰 연락이 와서 가보니 감쪽같이 고쳐져 있었다.
스위치 접속 상태가 불량하여 그렇다며 그 뒤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잘 사용하고 있다. 고마움을 표시하려고 하면 막무가내로 거절하는 할아버지는 그러려면 절대로 이런 일 하지 않는다며 야단이시다. 늙은 몸이 소일 삼아 취미로 하게 되었다며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보람이라고 했다. 어쩌건 그것이 86세 할아버지의 건강 비법인 것 같았고, 나는 취재할 목적으로 3층에서 일부러 할아버지를 따라 내렸다. 당황해 하시며 집안 공개를 꺼려하셨지만 간신히 설득하여 들어가 사진 몇 장을 찍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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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가전제품회사의 기술자로 근무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도 들었지만 강원도 탄광에서 발전기 기술자로 일했다고 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이것저것 고치는 재미로 산다며, 할아버지는 남들이 수리해 놓은 물건을 찾으러 와서 시험해 보며 활짝 웃는 모습을 보게 되면 더없이 사는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할아버지의 집안은 전문 보물상처럼 온갖 보물들로 어지럽게 둘러싸여 있었고, 궁금하여 수리할 때 필요한 부속들은 어떻게 구하는지 여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웃으시며 자식들이 용돈을 주면 그것으로 가까운 00산업에 가서 구해왔는데, 이제는 중국으로 이사가고 없어 다른 물건에서 돌려막기를 한다고 했다. 때로는 규격이 서로 맞지 않아 어렵기도 하지만 크기를 잘라내기도 하고, 안 되는 것은 최대한 되게 하여 그런 것들로부터 더 재미를 얻는다는 할아버지는 만능 재주꾼이셨다.
이런 분이야말로 우리 같은 서민들에게는 웃음을 주는 맥가이버 천사라고 생각되었다. 꼭 서민이 아니더라도 고 '정주영'회장이 고물 텔레비전을 생전에 신주 모시듯 사용했다는 것처럼 오늘의 경제를 이끌어온 어려움을 아는 세대들에는 적어도 그렇지 않았을까싶었다.
여기가 아파트야, 동네 공장이야, 보물창고야?_3
방과 거실, 발코니, 어디를 둘러보아도 여기가 보물창고일 뿐이지 아파트라고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생활의 전부인 것 같았고, 이런 애지중지한 보물 상자 속에서 씨름하며 소일하다보면 세월도 비켜간 채 언제 늙을 틈이나 있었겠는가싶었다.
만년 맥가이버 소년 같은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노인정에는 가시지 않나요?"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신다. "노인정에 가면 화투나 치고 큰소리 나는데 뭐 하러 가요?" 맞는 말이다. 그것은 어느 선승과의 우문 명답이었을지도 몰랐다. 선승이 수도를 하고, 화가가 그림 속에 심취하는 것과 같아 보였다.
여기가 아파트야, 동네 공장이야, 보물창고야?_4 조금만 손을 보면 쓸 수 있는 물건도 아까운줄 모르고 생각 없이 버리게 되는 요즘 세상인 것 같다. 특히나 많이 눈에 띄는 것이 선풍기들이었다. 할아버지는 이런 가전제품이나 우산을 수리하여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나눠준다. 할아버지의 근면함과 이웃 사랑, 그리고 '아나바다' 정신은 우리 삶을 살찌게 하는 건강한 생활모습이 아니었을까.
아련한 향수가 절절이 묻어나는 가운데 현관문을 나오려니 마치 보물섬을 뒤로하고 빠져나온 선장 같은 기분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