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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 2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 약 1: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2. 믿음과 지혜 ( 1: 2 – 8 )
②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③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④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⑥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⑦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⑧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 1: 2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
본서에 19번이나 사용된 형제라는 말은 초대 교회에서 성도 상호간에 사용된 친근한 명칭이다.
성도는 모두 주 안에서 형제들이다. 여러 가지 시험은 성도들에게 닥쳐오는 시험의 다양함을 보인다. 어떤 때는 육체적 질병이거나 또 어떤 때는 실직이나 부도, 파산 등의 물질적 어려움이 있다.
때로는 가족들의 질병과 사고와 죽음이 있고, 어떤 때는 친구의 비방과 배신도 있다. 어떤 때는 가정의 파탄이나 국가의 경제 공황이나 전쟁이 있다.
1] 내 형제들아
야고보는 본서를 2인칭으로 사용하여 시작함으로써 수신자들로 하여금 친근한 느낌을 갖도록 한다. '형제들'은 야고보가 자주 사용하는 어투로서 '형제'(아델포이)는 본래 유대인들이 같은 동족에게 사용하였다. 이 말은 신약 성경에 346회 사용되었고, 사도행전에만 57회 사용되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라는 말(30회)보다도 더 빈번히 사용되었다.
* 출 2: 11 -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 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 신 15: 2 -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무릇 그 이웃에게 꾸어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니라.
초대 교회에서 교인들 사이에 서로를 부를 때 사용하였던 것으로(Deissmann), 본 절에서는 야고보와 수신자 사이의 따뜻한 사랑의 관계를 시사한다(2: 1, 14. 3: 1, 10, 12. 5: 12, 19). 이것은 매우 친근한 명칭이다. 우리는 모두 주 안에서 형제들이다.
2]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는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흩어진 자들이기 때문에 먼저 그들의 최대 관심사인 시험에 대해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 마 6: 13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마 26: 41 -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일단 시험을 맞게 되면 잠시 근심하게 될지라도 그것이 뜻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기쁘게 여겨야 한다.
* 벧전 1: 6-7 -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 출 16: 4 -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 신 7: 19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목도한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그와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행하실 것이요.
* 렘 17: 10 -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 말 3: 10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고전 10: 13 -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험'(페이라스모이스)는 외부로부터 야기되는 것으로 내부로부터 오는 사람의 생각, 즉 죄의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시련'(trial)을 가리킨다(Kuhn).
* 고후 13: 5 -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 약 1: 12-13 -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말은 성도에게 닥쳐오는 시험이 다양함을 보인다. 어떤 때는 친구의 배신과 비난과 따돌림, 마음의 상함, 정신적 위협과 압박이 있다. 어떤 때는 물질적 손실, 부도, 파산, 실직이 있다. 어떤 때는 육체적 질병과 사고, 핍박과 매 맞음, 또 옥에 갇힘 등이 있다.
어떤 때는 가족들의 질병과 사고와 죽음, 남편이나 아내의 외도, 이혼, 자녀들의 탈선이 있고, 어떤 때는 교인들의 불완전, 교회의 분열이 있고, 국가적인 핍박, 전쟁, 경제 공황이 있다.
성도들이 당하는 시험은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시험을 당할 때 그것을 불평하거나 마지못해 당하지 말고 그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 그 이유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온전하고 구비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인격자가 되기 때문이다.
'만나거든'(페리페세테)는 문자적으로 '한 가운데 떨어지다'의 의미인데 본문에서는 사건에 직면한 현실을 나타낸다.
* 눅 10: 30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사람들의 내부로부터 오는 '유혹'은 육체를 파괴하고 죽이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오는 '시련'은 낙심하지 않고 이겨 내면 자신의 믿음이 연단을 받아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다. 때문에 야고보는 수신자들에게 충만한 기쁨으로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 롬 5: 3-5 -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어떻게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할 수 있는가? 이는 우리들 삶에 닥치는 모든 시험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음을 깊이 인식할 때, 또한 그런 시험이 우리를 인내하게 만들어 마침내 선을 이루는 줄을 확신할 때, 비롯되는 신앙의 기쁨이다.
약 1: 3 믿음의 시련 -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
시험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1]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시련'(도키미온)은 결과적인 의미로 '시험하여서 인정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잘 정제된 금과 같은 '믿음의 표준'이라 할 수 있다(Mayor). 그런데 시련에 대한 야고보의 표현은 바울의 표현과 차이가 있다.
바울은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 4)고 하여 '인내'(휘포모넨)를 원인적인 위치에 둔다. 그러나 야고보는 '인내'가 시련의 과정을 거친 결과로 보고 있다.
이런 상이한 표현은 강조점의 차이 때문이다. 바울은 시련의 과정을 중요시 한 반면 야고보는 고난 자체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Manton).
약 1: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1]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온전히'(텔레이온)은 '끝'을 의미하는 '텔로스'에서 유래된 말로서 '온전히 이루라'는 말은 '중도에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견디라'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성도들도 온전하여져야 함을 시사한다.
* 마 5: 48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신 1: 36 -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 겔 27: 4 - 네 지경이 바다 가운데 있음이여 너를 지은 자가 네 아름다움을 온전케 하였도다.
2]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의 '온전하고'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인내를 갖춤으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Ropes, Manton).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는 '타밈'(흠이 없는)으로 인간 생활이나 재물에 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하였다.
* 창 6: 9 -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 마 19: 21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 고후 12: 9 -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구비하여'(홀로클레로이)는 '전체'를 의미하는 '홀로스'와 '할당'을 의미하는 '클레로스'의 합성어이다. 이는 신체의 각 부분이 모두 건전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 행 3: 16 -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부분에서 갖춰야 할 것들을 시사한다. 야고보는 본 절에서 그리스도인이 지상의 생활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마음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다.
온전한 인격자가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힘써야 할 성화의 목표이다. 신앙의 인격은 시험과 시련을 통해 단련되고 성숙케 된다.
3] 시험을 기뻐하고 환영하십시오 : 김정남 목사
< 시험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
야고보는 첫 인사를 마치자 첫 주제로 시험을 언급합니다. 성도의 시험! 이 주제는 담임목사를 가장 떨리게 하고 마음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담임목사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부분도 바로 그 부분입니다.
어느 때에는 성도의 기침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덜컹 합니다. 새벽기도 안나오던 성도가 갑자기 새벽기도 나오면 가슴이 덜컹합니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 반대로 새벽기도 꾸준히 나오던 성도가 갑자기 안나오면 역시 가슴이 덜컹합니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 그런 상황에서 항상 주님께서 힘주시고 평안을 주시니까 목회를 할 수 있음을 느낍니다.
이처럼 성도의 시험을 보면서 담임목사로서 같이 가슴앓이를 하다 보니까 가끔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부흥사처럼 말씀만 전하고 그냥 가 버리면 얼마나 편할까?” 그러나 담임목사는 말씀만 전하고 가 버리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슴앓이가 심하지만 사실상 그것이 더욱 큰 축복인 줄 믿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그의 서신에서 시험의 문제를 제일 처음 논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극히 당연한 일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시험이 없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시험은 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도 시험 당하셨다는 사실을 보면 시험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하면 시험 당하지 않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40일 금식기도를 한 후에 시험을 당하셨습니다.사실상 높고 큰 사람, 그리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큰 시험 당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시험을 당하지 않는 시험 면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해도 시험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시험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시험을 당해도 시험에 들지 않는 경지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성도의 참된 능력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당한다’는 것과 ‘시험에 든다’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시험을 당합니다. 기도 많이 해도 시험을 당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시험에 들지는 않습니다.중요한 것은 시험이 있어도 시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성령 충만하면 시험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4장 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그러므로 성령 받으면 시험이 없다는 말도 틀린 말입니다. 그처럼 누구에게나 시험은 있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십시오 >
시험을 맞이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야고보는 그에 대해 말합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서 ‘여기라’는 말의 뜻은 “시험이 힘들어도 참고 기뻐하라!”는 수동적인 말이 아니라, 오히려 “시험을 기뻐하며 환영하라!”는 능동적인 말입니다. 왜 시험을 기뻐하고 환영해야 합니까? 결과가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를 뻔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 뻔한 결과란 ‘성도의 최종 승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기도하면 그 뻔한 결과가 아주 빨리 일어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그 뻔한 결과가 아주 더디게 일어납니다.
믿음은 별 것 아닙니다. 뻔한 결과를 뻔하게 일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말씀대로 온전히 기뻐하면 가장 적절한 때에 그 승리의 뻔한 결과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아버지가 이겼는데 왜 아들이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욥이 시험을 당할 때의 신앙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주님이 아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그리고 누가 단련하신다고 합니까? 주님이 단련하신다고 합니다. 마귀가 단련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단련하는 것인데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시련을 만나도 안심하고, 마음을 푹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정금 같이 되어 나오는 축복을 받을 준비만을 하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시련에 대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1장 3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이 구절은 시련을 ‘믿음의 시련’이라고 말합니다. 즉 믿음은 시련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알아야 합니다. “너희가 앎이라!”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믿음이 시련을 당한다는 것이 신앙의 기초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느냐는 말입니다.
그처럼 ‘안다’는 구절이 로마서 5장 3절에도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을 알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1장 4절을 보십시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에서 “인내하라”라 아니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권면을 하는데, 그 말은 인내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인내는 헬라어로 휘포메노라고 하는데 ‘아래에 머문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내하면 많은 것을 얻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 “인내하는 자는 그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인내하면 본문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우리에게 ‘온전, 구비, 만족’ 라는 여러 가지 가치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인격을 아름답게 빚는 영적 화장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인내입니다. 그리고 그 인내를 만들어내는 원료가 바로 믿음의 시련입니다. 어떤 고난이 있어도 인내로 영적 화장을 잘 해서 언제나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을 갖추고 축복을 예비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