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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2: 1-10 예루살렘 회의 ( 2 )
갈 2: 4 거짓 형제들 -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
1]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거짓 형제'의 헬라어 '프슈다델푸스'(*)는 '프슈데스'(*)와 '아델포스'(*)의 합성어이다. '프슈데스'는 '거짓 사도', '거짓 선지자'등에서 처럼 '거짓'이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로 사용되었다.
* 고후 11: 13 -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 벧후 2: 1 -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바울은 본 절에서 '파레이사크투스'(*, 가만히 들어온)와 함께 이 말을 사용하여 은밀하고 은근하게 복음을 훼손시키는 거짓 교사들의 교활한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바울이 1: 11에서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된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라고 부른 것은 그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본 절에서 유대주의자들을 향하여 '거짓 형제'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 속에 그들이 설 자리가 없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들은 최소한 내부에서 믿음을 배반한 사도들이나 성도들은 아닐 것이다(Lenski). 아마 '거짓 형제'는
(1)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하며 모세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 자들이거나, 그리스도 성도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킨다.
* 행 15: 1, 24 -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 공의회의 결과가 갈라디아와 안디옥 교회에 소개되었다.
* 행 15: 30 -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에는 계속해서 교인들을 미혹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케 된 성도들을 다시 율법 아래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신자인 것처럼 가장하여 열심은 있으나 실제로는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였다.
* 고후 11: 26 -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 벧후 2: 1 -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이러한 갈라디아 교회의 형편가운데서 디도가 할례 받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은 자유 얻은 자로 하여금 자유를 잃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2]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바울은 이제 그가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던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었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그들은 교회에 당당히, 공개적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이 마귀의 전술 전법이다. 마귀는 자기 사람들을 마치 비밀 첩보원들과 같이 가만히 교회 안에 투입시킨다.
오늘날도 기독교계 속에 많은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진실한 자들은 그들을 분별할 것이다. 저희가 들어온 목적은 바울과 성도들의 자유를 엿보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함이었다.
3]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바울의 표현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드러낸다.
그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할례의 규례와 의무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구약의 모든 의식적 율법들, 예를 들어 성전 의식들, 제사 의식들, 절기들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율법의 완전한 의를 이루셨기 때문에, 그리고 죄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기 때문에 우리가 얻고 누리는 자유이다.
물론 우리가 가진 자유가 구약의 도덕적 율법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는 방종에 빠지게 하는 자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의를 행하게 하는 자유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우상 숭배하지 말아야 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 증거하지 말고 탐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도덕적 율법들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義) 안에서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이지,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서 무거운 짐을 진 심정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거짓 형제들은 가만히 들어와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파괴시키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 거짓 형제들은 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유대교인들에 불과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유의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도리어 오해한 자들이며,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아군들이 아니고 적군들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건설자들이 아니고 파괴자들이었다.
그들은 주께서 피 흘려 사신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고 실상 미워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긍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안에 사는 자들이 아니고 아직도 사망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이었다.
갈 2: 5 복음의 진리 -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
1]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복종을 요구하던 자는 디도에게 할례를 요구했던 무리들로 국한시켜 이해하기보다는 더욱 광범위한 의미에서 유대주의화를 꾀하던 '거짓 형제'들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사도 바울 일행은 위의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이나 율법을 강조하는 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도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함으로 복음 진리의 자유를 파수하였다.
유대주의자들은 예루살렘 원 사도들(베드로, 요한)의 이름을 이용하고 또한 배경으로 하여 바울의 전도를 막으려고 하였다.
어떤 사본들에서는 '호이스 우데'(*, ...한 자들에게 조금도... 않다)가 생략되어 본 구절이 '잠시 동안만 복종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사본에 의하면 바울이 잠시 동안만 평화를 위하여 타협할 수도 있었던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베자(Bezae) 사본을 제외한 언셜(Uncial) 사본과 오래된 파피루스 사본(P46), 그리고 고대 헬라교부의 번역에서 '호이스 우데'는 생략되어 있지 않다.
본장의 문맥상 바울이 거짓 형제들과 조금이라도 타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 헛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할례는 초대 교회의 최대 논쟁이며 또한 복음에 대한 최대의 도전(挑戰)이었다. 이 논쟁 앞에서 바울이 진리를 양보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Lenski).
2]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복음의 진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알레데이아 투 유앙겔리우'(*)는 본 절과 14절에만 나온다.
결함이 전혀 없는 복음(Lightfoot) 또는 진리가 담겨 있고 진리에 속해 있는 복음(Burton)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복음을 들어 언급하는 것은 디도의 할례 문제는 한 개인의 구원 문제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 문제에 직결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울은 그 거짓 형제들을 알아차렸고 그들에게 한 순간도 복종치 않았다.잠언 25: 26은 말씀하기를,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워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고 했다.
진리를 가진 자는 비진리를 가진 자 앞에 굴복할 필요도 없고 굴복해서도 안 된다. 그 거짓 형제들의 사상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 진리와 배치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 곧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이 진리가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가 전도하여 믿게 된 모든 성도들에게 있게 하기를 원하였다.
갈 2: 6 사람의 외모 -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
1]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이 문구의 헬라 원어(*, 호이 도쿤데스)를 알기 쉽게 번역하면, '유명한 여김을 받는 자들'이다. 곧, 유대주의 기독교 신자들로 말미암아 유명히 여김을 받는 자들(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예루살렘 원 사도들)을 말한다.
이 명칭은 유대주의 기독 신자들이 사용하였던 것인데 바울은 그것을 인용한 것뿐이다.
그가 이런 명칭을 인용한 것은 직접 예루살렘 원 사도들에 대하여 풍자(諷刺)하는 뜻을 가짐이 아니다(Lightfoot).
풍자가 있었다면 그들의 이름을 빙자하여 바울의 권위를 깎으려 했던 유대주의 기독 신자들에게 대하여 있었을 뿐이다.
바울은 세 번에 걸쳐 '호이 도쿤데스'(*, 유력한 자들)를 사용하여(2절)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예루살렘의 사도를 지칭하였다(9절).
이러한 호칭 후에 곧바로 하나님은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언급하는 것을 보면 바울이 이 호칭을 풍자적 의미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Cole).
2] (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본래 어떤 이들인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이 말은 앞에 기록한 '유명하다는 이들'이란 말에 대한 설명구이다.
이들이 예수님의 원 제자들인 고로 유대주의자들은 그들을 유명히 여겼다. 그러나 바울의 사도직이 그들에게 종속(從屬)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직접 바울에게 주신 사도직의 독립적 의의(意義)는 상실될 수 없다.
3]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지 아니하시나니' - 곧, 사람들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는 베드로나 요한의 명성과 같은 외부적 사항에 따라 하나님은 어떤 가치를 더하시지 아니하신다는 뜻이다.
여기 '외모'란 말은 본질적인 것과 대조되는 외부적인 형태를 가리키는 말이다.(Greijdanus, galaten, 1936, p.147).
* 롬 2: 9-12 -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4]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헬라어 본문에 나와 있는 후치사 '가르'(*)는 선행 구절을 보다 충분하게 설명해 주는 삽입구가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 구절은 선행 구절에서 제시된 '외모를 취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어떤 유명한 자들일지라도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과 동시에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전혀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바울은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비록 그들이 귀한 분들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신앙은 오직 성경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만 사람에게 신앙을 주실 수 있고 그 신앙을 자라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직분보다도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다 형제들이며 한 식구들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저 유력한 이들은 바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로 주신 바울의 복음이 충족했음을 입증하는 말씀이다.
주께서는 본래의 사도들에게 깨닫게 하셨던 그 복음 진리, 그 동일한 진리를 바울에게 계시하여 주셨던 것이다. 바울의 복음과 열 한 사도들의 복음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출한 그 복음의 내용은 바로 열 한 사도들이 깨닫고 전파하였던 그 복음이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감으로써 바울의 복음에 어떤 수정이나 보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복음과 열 한 사도들의 복음이 동일하다는 것이 증거 되었을 뿐이다.
갈 2: 7 무할례자 -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
1]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여기서 '할례자'와 '무할례자'는 구체적인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킨다.
* 롬 4: 9 -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 엡 2: 11 -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유대주의자들은 베드로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서로 다른 것이 있다고 주장한 것 같다(Lenski).
그러나 바울은 사역상 서로 다른 책임이 있을 뿐 어디까지나 복음의 내용은 동일(同一)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바울이 할례자에게 복음 전하는 자로 열 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를 대표로 내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Lenski, Huxtable).
그러나 전재는 타당하지 않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가이사랴와 다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또한 그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 행 15: 7 -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바울 역시 이방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한바 있다.
* 행 23: 11 -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그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 행 26: 20 -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본 절에서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 자신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