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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21:1-9) 죄악의 집중 호우, 선민이 더 악한 이유
말씀중심으로 <죄악의 집중 호우, 선민이 더 악한 이유>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죄악의 집중 호우, 선민이 더 악한 이유'
오늘 9절에 “므낫세의 꾐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여러 민족보다 더 심하였더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신 너무나도 악하고 문란하고 더럽고 추잡해서 눈뜨고 볼 수 없는 그런 짐승 같은 종교행위와 우상숭배를 하던 사람들보다, 선택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더 악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더군다나 제14대 왕이었던 히스기야의 아들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다윗 왕 이후로 그래도 괜찮은 왕으로 신앙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숭배하고 여호와 신앙을 지켜나가는 면에서 괜찮은 왕이었는데 그의 아들 므낫세가 열두 살 어린 아이로 등극해서 55년 나라를 다스리는데, 어떻게 이방민족보다 더 악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본받는 것을 넘어서서 더 악했다는 겁니다.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리고 악한 왕이 통치는 왜 이렇게 오래 합니까?
남 왕국 유다에서 55년 동안 제일 오래 했습니다. 다윗보다 오래 했습니다. 솔로몬보다 오래 하고. 이유를 알기가 쉽지 않고 궁금하기는 되게 궁금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여러분! 므낫세의 악행, 그리고 므낫세 통치시절에 유다 백성들이 이방인 보다 더 악한 영적인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서 '집중호우'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집중호우, 문자 그대로 집중해서 비가 쏟아지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하늘에서 물을 퍼붓는다.' 혹은 '물 폭탄'이라고도 말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2년도에 태풍 루사가 몰려오면서 강원도 강릉일대에 물 폭탄이 떨어집니다. 그때 집중호우의 강우량이 870mm가 하루에 쏟아졌습니다. 우리나라 연평균 강수량이 1300mm입니다. 그런데 일 년 강우량의 5분의 3 될까요? 870mm가 하루에 쏟아져 내렸습니다.
제가 그때 캐나다에 있을 때 TV를 통해서 뉴스를 보았는데 강릉 인근에 어떤 마을 하나가 통째로 떠내려갔습니다. 옆집의 철수네, 영자네, 영희네 모든 집이 길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같이 떠내려간 겁니다. 무서운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선민들에게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악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왕왕 있습니다. 그 이유가 집중호우입니다. 죄악의 집중호우. 죄가 다른 게 아니에요. 꼭 도둑질하고 강도질하고 사람을 죽이고 거짓말하고 해서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성립은, 그냥 우리 생긴 대로 나라 법을 따라서 준수하고 근면하게 열심히 잘 살고 내 생긴 모습대로 내 욕망대로 내 소원대로 내 이상과 내 비전을 따라서 살면 그게 다 죄악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떨 때 집중호우현상이 생깁니까? 억압되는 겁니다. 억압돼 있다가 죄의 샘물에서 뱃속에서 천년 묵은 괴물이, 내 마음의 지하세계에서 죄의 뿌리로부터 계속해서 죄적인 욕망이, 하나님을 내 기쁨의 원천으로 삼으려는 마음이 아니고, 히스기야처럼 이 세상의 가치관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고 싶고 자기를 꽃피우고 싶은 그런 심정,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그것들을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이 계속해서 일어나는데 선민에게 있어서 그게 억눌려 집니다.
"근면 하라. 절제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나를 사랑하는 것도 바쁜 사람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라. 안식일을 지켜라."라고 합니다. 골프 치러 가고 싶은데 억누릅니다.
"망할까봐, 교통사고 날까봐, 터질까봐."라고 하는데 그런 것들이 다 모아졌다가 한꺼번에 터져나갈 때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느 단체도 대한민국 아니면 한국 사람들의 교회만큼 분열의 분열을 거듭하는 교회가 없어요. 세상의 단체도 그런 단체는 없습니다. 싸웠다가도 화해합니다.
우리나라 노조가 세고 현대중공업 노조가 그야말로 짜증이 날 정도로 파업을 많이 일으킵니다마는, 교회 안에서의 싸움보다 더 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노사 간의 합의점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합의가 없어요. 그리고 교인들이 내 잘난 맛에 사는 것은 그 누구도 말릴 수가 없어요. 내가 일단 잘난 겁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뜻에 맞지 않으면 그냥 관두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나가서 도둑질 하지 않습니다.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착실하게 삽니다. 그런데 그게 다 눌려 있다가 교회 안에서 터져 버리는 겁니다.
오늘 므낫세가 어느 정도로 악행을 행하였느냐? 자기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을 재건합니다. 열두 살에 등극한 이 왕이 몇 살에 다시 세우는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북 왕국의 아합을 본받아서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다시 도입합니다. 일월성신을 숭배합니다. 점치고 사술을 베풀고 그들을 존경하고 다시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악은 어디까지 가느냐? 여호와 성전 뜰에 바알의 단을 쌓고 아세라의 목상을 세워두고 일월성신에게 제사 드리는 단을 세웁니다. 어떻게 이렇게 까지 할 수가 있습니까? 이건 마치 분노가 폭발한 것 같아요. 분노가 뭡니까? 목표를 도달하기 위한 나의 마음과 행동이 저지당했을 때, 생기는 공격적인 마음상태입니다. 뭔가 이루고 싶은데 저지당합니다. 억압을 당합니다. 그때 나오는 공격적인 행위, 이게 억압을 당하다가 터져나가는 겁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죄악의 표현이, 일 년 강수량 1,300mm가 골고루 나온 것이었다면, 므낫세는 잘 믿는다고 여겨졌던 히스기야 왕 밑에서, 아버지 밑에서 이 억압을 당하고 백성들도 똑같이 억압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지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닙니다.
산당을 제거해 버리니 이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나를 뽐내고 싶은 그 마음의 욕망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지, 하나님을 잘 섬겼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대로 하려니 답답하고 짜증나는데 내 멋대로 제사를 드리고 싶었던 욕망이 억눌려져 있었던 것이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행복과 기쁨을 찾았던 것이 아닌데 이게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히스기야 왕을 보면 참 잘 믿었다고 하고 히스기야의 기도가 기도의 모범인 것처럼,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도의 모범으로 죽을병에 걸렸다가 15년 연장을 받았다고 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포커스가 그게 아니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무화과 반죽을 종처에 바르자, 무화과 반죽을 발라서 낫다고 할 경우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낫게 하신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고, 정말 그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이 약속을 하신 것인지 미덥지가 않아서,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갔던 해의 그림자를 뒤로 십도 물러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렇게라도 해서 어쨌든 하나님을 찾았아요.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찾는데 보면 어떨 때 찾느냐? 꼭 세상의 일이 막혔을 때 그리고 바벨론 사신들이 왔을 때, 바벨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맞게 자기를 증명합니다.
너희들이 돈을 중요시 하지? 내가 돈이 있어.
너희들이 훌륭한 무기를 중요시 하지? 내가 그 무기를 가지고 있어.
너희들이 보물과 재물과 무슨 명성을 좋아하지? 나도 그것 있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으로 자기를 증명해 내는 것이에요.
이 세상일에 조금만 풀어 놓으면 히스기야는 곧바로 빠져나가는 거예요. 그런 상태의 신앙으로 산당을 제거하고 우상을 제거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숭배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만남 속에서 기쁨을 찾았던 게 아니라 행복을 누렸던 게 아니라, 단지 하나님을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속에 죄적 욕망이 억눌려지고 있었습니다. 억눌려 있다가 집중호우로 나타난 것으로 막나가는 겁니다. 여호와의 성전 안에 일월성신의 제단을 만든 적은 없었거든요. 바알제단은 만든 적은 없었거든요. 앗세라 목상을 여호와의 전에 세운적은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끝. 간. 데. 까지 간 것입니다.
여러분! 경험적으로 저의 집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언제가도 그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상하게 주일날만 되면 어머니가 교회 갔다 오시고 나서 더 짜증이 많으신 거예요. 저 어렸을 적 기억이 납니다. 교회 다녀오시면 헌금봉사 하시기 때문에 한복을 입으시고 버선을 신으면, 벗을 때 힘을 들여서 벗지 않습니까?(버선을 신었다가 벗을 때는 땀이 차서 잘 벗겨지지 않음.) 그러면 어머니께서 버선을 벗으셔서 방바닥에 패대기를 치시는 겁니다. 예배드리고 오셔서 왜 그러실까? 우리 어머니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서 그러실까? 믿음이 없어서 그러실까? 아니에요.
여전도회장에, 건축위원회 한다고 하면 여자로서는 혼자 들어가셨습니다. 워낙 장부시고 사리분별이 명확하시고 교회 안에서 장로님과 목사님으로 이루어진 건축위원회에 여자 혼자 대표로 들어가셨어요. 똑똑하십니다. 믿음이 좋으셨습니다. 다 그렇게 얘기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교회만 다녀오시면 짜증이 많으시고 신경질이 많으셨을까 제가 이제야 알겠습니다.
교회가 도덕적으로 "이거해라. 저거해라. 열심히 충성해라. 봉사해라.’라고 하는데 마음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죄적소원을 풀어주지 못할 때 억압이 됩니다.
그러면 요즘 죄적소원을 풀어주는 충성하고 봉사하라는 대신에 무슨 얘기합니까?
당신들 세상에 나가서 원하는 것, 자기증명하고 싶은 소원 다 할 수 있다고 풀어줍니다.
또 결국은 억압된 것을 풀어준다고 하는 것이 이쪽으로(세상으로) 넘어와 버린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나갑니까? 눌렸던 것이 나가다 보니 어쩌면 이 세상보다, 믿는 사람들이 더 돈, 돈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믿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자기의 입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삐치고 더 악할 정도로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우고 하는데 다 억압되고 눌려서 그런 겁니다. 교회 가도 결국은 눌려서 옵니다. 행복감이 없어요. 쾌감이라는 게 없잖아요.
베드로가 "회개하라. 그러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임하리라."라고 하는데 이 유쾌함이 없어요.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말씀을 들어도 유쾌함이 없어요. 왜 그래요? 억압돼서 그렇습니다.
히스기야 아버지 밑에서 므낫세가 결국은 그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유쾌함의 삶을 살지 않았던 이유 때문인지 므낫세는 눌려 있다가, "우상숭배하지 말아라. 뭐하지 말아라. 산당제사 드리지 말아라. 일월성신을 숭배하지 말아라. 점을 치지 말아라. 말아라. 말아라."라고 말만했지 뭔가 속에서 일어나는 죄적욕망대신에 욕망이 이루어질 때 느끼는 쾌감 말고, 다른 거룩한 쾌감이 있어야 했는데 이게 없었던 것이에요.
여러분! 아세요? 오쇼 라즈니쉬 인도사람이 만든 로즈명상, 미스틱 로즈명상법이라는 것을 아세요? 이게 바로 억압을 풀어내고 억압된 분노를 자연스럽게 승화시키고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려고 하는 명상법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루에 세 시간씩 일주일 동안은 아무 이유 없이 무조건 웃습니다.
어떻게 웃느냐? 야후-하고 소리를 지르며 아하하하- 무조건 세 시간씩 웃는 겁니다. 웃는 시늉을 하는 것이지요. 속에서 우러나는 웃음이 아니니까. 그 다음 주에는 세 시간씩 웁니다. 울 때는 야부- 하고 웁니다. 웃을 때는 야후-하고 하하하 웃고, 울 때는 야부-하고 웁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주 세 시간씩 무조건 침묵합니다. 억지로라도 웃어서 속에 억압된 것을 풀어내라는 것이고, 억지로라도 울어서 역시 마찬가지로 부정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그 억압의 응어리들을 다 풀어내라는 것입니다. 별의별 수단을 다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믿음을 보면서 나와 히스기야 왕의 다른 것이 무엇인가? 주님의 십자가가 있더라는 겁니다. 히스기야의 왕에게는 주님의 십자가가 없었어요.
주님의 십자가가 뭘 해 줍니까? 이 세상에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 그것들을 먹고 싶고 갖고 싶은 마음,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요. 그러면 그것이 억압입니까?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주님의 십자가는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약속을 담고 있어요.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게서 일어나는 죄적욕망이 있을 때마다, 이 세상 것으로 내가 다른 사람 앞에서 좀 잘 보이기 위해서 내가 좀 잘났다고 하고 싶어서, 그런 마음이 생길 때마다 죽으면 반드시 위에서 하나님께서 내 마음 안으로 임재 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어요.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죄악의 욕망과, 자연인으로서 어떤 비전, 소망, 소원, 계획, 생각이 죽을 때, 그것이 억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고백과 함께 하늘에서 하나님이 내려오시면서 이 세상 것을 이루었을 때 느끼는 쾌감과 행복감, 일시적이고 가짜고 허위의 쾌감 대신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서 진정한 행복감으로 승화돼 버립니다. 쾌감이 없으면 유쾌함이 없으면 결국 억압돼 버립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이유는 죽음을 통하여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오시게 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실제 하나님과 만나 유쾌해지고 실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행복해지는 그 일을 위해서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에게 십자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당을 제거하고 율법을 따라 움직여 갑니다마는, 세상 고통만 없어지면 환난만 없어지면 곧바로 세상 쪽으로 나가 버립니다. 세상에서 사랑하는 그 가치들을 같이 사랑하며 또 뛰쳐나가는 겁니다.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치고 하면서...
아니, 그렇게 잘 믿던 왕이 왜 조공을 바쳐요? 앗수르를 배척하던 사람이.
사마리아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 앗수르라고 하는 세상 힘에 또 먹혀버리고 마는 겁니다.
"과연 군사력 강한 것이 세상에서 좋은 것이구나."라고 하면서 애굽이라는 군사력을 끌어 들입니다. 히스기야의 마지막 규정, 하나님이 히스기야에게 믿음을 정하신 마지막 규정이 뭡니까?
바벨론 사신 앞에서, 이 세상 것들을 통해 나를 꽃피우고 싶었던 그 마음, 돈 많이 벌어서, 좋은 학벌 지녀서, 좋은 기술 지녀서, 멋진 아내와 결혼해서, 명품 가방과 명품 신발과 명품 옷을 입고 다니면서, 좋은 차를 타면서, 이 세상 사람들 눈앞에서 나를 꽃피우고 싶은 그 마음, 그것이 바로 히스기야의 본질인 것처럼 끝나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히스기야의 생애가.
우리가 별다릅니까? 똑같아요. 우리가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주님의 십자가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만히 연구를 해봤어요. 뭐가 다른가 하면 다윗조차도 실수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신약에서 일단 십자가 주님을 받아들이고, 오순절을 경험했던 사도들의 모습에서는 그런 실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정적인 그런 실수가.
이상하지 않아요? 똑같이 믿음의 사람인데. 구약에서는 히스기야가 계속 곤두박질하고, 그 근본적인 묶임에서 계속 풀려나오지를 못하고 바벨론 사신들 앞에서 자기를 들어내는데, 최고의 믿음의 소유자인 다윗도 실수하는데, 그런데 사도들의 모습을 보면 그런 에피소드가 나오지 않는 거예요.
이게 어디서 나오는 힘일까? 그럼 바울과 베드로와 빌립과 요한과 이런 사람들이 더 잘나서일까?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요. 복음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억압하는 게 아니에요.
"하지 말라. 하지 말라."라는 게 아니라, 아랫것을 하지 않으면 위엣 것이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그 위엣 것으로 기뻐지고 위엣 것으로 행복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 가면 위엣 것이 오지를 않아. 아랫것만 억압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눌려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기껏 풀어준다는 게 어떻게 풀어주느냐? 위엣 것이 내려와서 행복한 게 아니라, 이 아랫것들을 하나님이 이루어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해 질 것이라는 겁니다.
좋은 차타고 다닐 수 있고, 좋은 아파트에 살 수 있고, 부동산 거래가 없는 이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부동산 팔 수 있고 이 아랫것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식이 좋은 학교 들어갈 수 있고 아랫것을 해결해서 기뻐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입니까?
이제 이전에 도덕주의적인 기독교가 지나고, 거기서 억눌림이 풀려 나오다 보니까, 세상보다 세속적인 게 더 합니다. 더해. 세속적인 게 믿는 사람들이 더해요.
어저께 말씀드렸지요. 내가 번 돈 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디서 들었어요. 내가 직장에서 내 주머니 안에 벌어들인 돈이 내 돈이라는 것을 어디서 배웠어요. 언제 누가 가르쳤어요? 자본주의가 가르친 거예요. 공산주의만 해도 다른 소리 합니다. 공산주의가 옳다는 게 아니라 그 말이 절대불변의 원칙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번 돈이 내 돈이라는 사상자체가.
신본주의가 가르치는 말은, 일용할 양식 외에 모든 돈은 하나님의 뜻대로 쓰이는 하나님의 돈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돈을 벌지 못하는 게 감사합니다. 돈이 벌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고 여러분의 돈이 아닙니다. 그 돈을 내 욕망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들이 다 그 옷 입고 싶어 하는데 돈이 없어서 못 입어. 그런데 나는 입어. 거기서 쾌감을 느끼시지요. 그렇다면 히스기야에게 마지막에 내렸던 예언이 곧 나의 예언이 될 것이에요. 절대로 숟가락 하나도 여러분 마음대로 일어나는 소원대로 사서 쓰는 것 하나님이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지 마세요.
그러면 답답해서 어떻게 사느냐?
여러분! 돈 쓰면서 돈 쓰는 기쁨으로 사실래요? 그게 믿음의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갖는 기쁨으로 사는 것이지. 돈 쓰는 재미로 살아요?
사고 싶은 것 좀 사고, 먹고 싶은 것 좀 마음대로 먹는데 뭐가 문제야?
이제까지 그 재미로 살았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지요.
하나님 때문에 기쁜 게 믿음이지. 어떻게 돈 쓰는 재미로 사는 게 그게 믿음입니까?
답답해요. 그게, 돈을 마음대로 못쓰고 하나님께 물으면서 써야 되는 게 그게 답답하게 느껴집니까? 아직 믿음이 없기 때문이지요. 솔직히 인정할 것은 인정합시다. 이 말이 듣기 싫어서 안 믿는 거야 할 수 없지만 말이야 바로 해야지요.
뭐가 믿음이냐? 말은 바로 해야지요. 돈이 없어요. 돈이 없다고 인상 쓰면 인정해 주고 불쌍히 여길 줄 압니까? 그게 동정의 이유가 되는 줄 아십니까? 아니에요. 돈이 없다고 울상 짓는 것 믿음이 없는 겁니다. 돈이 있는 사람이 제멋대로 쓰는 것이나 돈 없다고 울상을 짓는 것이나 믿음이 없기로는 똑같습니다. 기독교는 그것으로 기뻐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으로 억누르는 것도 아닙니다. 돈을 마음대로 쓰지 말라는 것은 억누르는 것이지요.
그러나 돈을 쓰는 재미로 살지 말고, 하나님 버는 재미로 살아라. 이렇게 말하면 이게 기독교입니다. 억누르는 게 아니에요. 다른 재미, 하늘의 재미를 가지고 사는 겁니다.
집중호우, 억누를 때 나타나고 선민이 더 악해질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기독교는 근면, 절제, 억누름의 종교가 아닌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에 대해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고 절제하고 부정되면 하늘에 비교될 수 없는 큰 기쁨이 우리 것이 되는 것임이 복음의 능력이요. 복음의 내용인 것을 깨닫고 오늘 하루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믿음생활 똑바로 하지 않으면 엄청난 결과가 온다는 것 명심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죽은 자임을 기억하며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슬퍼하는 하나님의 삶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좇아 자녀들도 십자가의 도를 깨달아 그 길로 함께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