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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말 낙하산을 타고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자리에 안착한 정형근은 사회보험 노동자들에게 편지 하나를 띄웠다. 그 내용의 골자는 자신이 정권의 민영화와 이를 필연적으로 뒤따를 구조조정을 막고 있으니, 사회보험 노동조합이 통합징수공단에 대해서는 자제하고 있어달라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꽂아준’ 이사장이 그 정권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나,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정형근 이사장의 말대로 의료보험 민영화에는 반대하지만 통합징수공단에 대해서는 합의하고 있는 노동조합 집행부의 행태이다. 집행부는 마치 통합징수공단과 의료보험 민영화가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행동을 취하고 있는 판국인데, 이는 철저히 진실을 호도하는 행위이다.
통합징수공단은 의료민영화의 전초전
통합징수공단을 통해 가장 먼저 징수업무가 독립될 것이다. 독립된 징수업무를 외주화하거나 정규직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것이라는 점은, 고용부문에서의 비용절감이 이명박 정권이 내세우는 공기업 선진화의 핵심이라는 것만큼이나 명확하다. 이 때 징수된 돈은 따로 관리될 것이며, 연금보험이 주가방어와 환율방어에 자금을 투입해 막대한 손실을 입은 전례를 볼 때, 건강보험 징수금 역시 무능한 현 정권의 손에서 낭비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징수업무가 독립된 건강보험공단은 그 고유 업무가 약화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슷한 예로, 현재 공단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심사평가 기능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생각해보자. 의사, 약사 등의 전문가 집단인 심사평가원은 의사, 약사를 위해 담합된 가격대에서 심사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 때문에 의료서비스의 질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심사 평가 자체가 단순히 수가만을 따지는 업무로 변질되었다. 징수업무의 분리 이후 펼쳐질 미래 역시 공단의 고유 업무를 단순한 것으로 변질시키고, 의료서비스의 질을 악화시키는 과정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공단의 돈줄을 끊고 공단업무의 고유성을 없애는 통합징수공단의 도입은, 공단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의료서비스의 질을 낮은 상태에 머물게 해서 자연스레 민간보험이 성행하게 만들고 민간의료보험 도입에 대한 저항을 없앨 것이다. 한마디로 통합징수공단은 의료민영화를 위한 길을 닦는 작업이란 얘기다. 따라서 사회보험 노조 집행부가 통합징수공단의 손을 들어주면서 의료민영화와 그로 인한 구조조정을 막고 있다는 너스레를 떠는 것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아니면 노조 집행부는 정형근 이사장으로부터 받아낸 고용 안정에 대한 서류 한 장을 가지고 조합원들의 투쟁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조합원을 무시하고 있는 것인가?
집행부는 대리주의와 무사안일 태평함을 버려라!
집행부의 이러한 태도는 갑작스레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번 일은 평소 이들의 몸에 깃든 대리주의 경향을 다시 한 번 드러낸 것일 뿐이다. 통합징수 저지투쟁에 있어 사회보험 노조 집행부의 주요 활동은 조합원과 분리되어 정책적인 부분은 일부 시민단체에 종속되다시피 한 채, 대중적 투쟁을 방기하고 국회의원들을 찾아가 로비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면피용으로 허겁지겁 정체성이 불분명한 교수나 시민단체에 수천만 원의 연구용역을 주어 징수통합에 대한 대안을 생산하려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내용들은 이미 예전에 주장되었던 것들을 짜깁기 한 것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 내용의 생산자가 이후 입장을 선회하여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자로 나타나 자신의 내용의 일관성이나 장기적 관점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까지 했다. 이런 식으로 사회보험 노조집행부는 징수통합을 막아내기 위해 조합원의 동의를 얻어 대중적 투쟁을 만들지 않고 시간만 끌다가 막상 별다른 효과가 없자, 국회상임위 등의 형식적 일정만 남았을 때가 와서야 조합원을 총동원하는 보여주기 투쟁을 배치하여 자신들의 알리바이를 확보하는데 주력하기까지 했다.
집행부가 확고한 노동자적 관점을 가지고 대중투쟁을 전개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최근의 행보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명박 정부의 건강보험공단 중심의 징수통합(안)은 내부 노동자들을 갈라놓아 노동자 저항을 무력화하여 보다 쉽게 통합징수공단을 관철시키려는 포석이었다. 그런데도 사회보험 집행부는 타 기관 보다 상대적으로 고용불안이 적을 것이라 선동하며 같은 공공노조 소속인 국민연금노조나 한국노총 소속인 근로복지공단노조의 동의 없이 통합징수공단을 수용했고, 그 결과 4대 보험 공투위가 깨졌다. 그리고 산별인 공공노조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그 후 집행부는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에 나섰는데, 사실상 의료민영화로 넘어가는 연결고리로 기능하는 통합징수에 대해 도장을 찍어주고 대중적 투쟁력을 분산시킨 후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에 나서는 것은 기만적이기 짝이 없다. 실질적으로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에 나설 대중적 투쟁력이 흩어져 버린 상황에서 어떤 종류의 투쟁을 하겠다는 것인가? 또한 통합징수 저지투쟁을 ‘밥그릇 지키기’를 위해 포기한 것은 조합원들의 의식을 일자리 지키기 수준에 머물게 할 뿐이다. 게다가 그렇게 약속하던 ‘밥그릇 지키기’마저 결국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 않은가?
사회보험 노동자들은 전면적 의료사회화 투쟁으로 나아가자!
노조 집행부가 이런 면피용 투쟁을 하는 와중에, 통합징수는 2011년부터 이루어지기로 예정되어 있으며 그에 따른 의료민영화 및 구조조정은 필연적이다. 이에 대해 조합원들을 비롯한 사회보험 노동자들은 통합징수를 저지하는 투쟁을 전개하여 자본가정권이 의료민영화와 민간보험도입을 위한 징검다리를 놓는 것을 막아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단순히 통합징수를 막아낸다거나 조합원의 고용 안정을 이루려는 투쟁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자본가정권은 언제든 의료민영화를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며, 전 사회적인 공감을 얻고 모든 노동자민중과 함께하는 투쟁이 이뤄져야 의료서비스의 공공성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사회보험 노동자들은 자본의 야욕이 침투할 수 없도록, 노동자민중의 손으로 운영되는 굳건한 공공 의료서비스의 구조를 구축하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미 사회적으로 운영되는 의료서비스를 쟁취한 외국의 노동자민중들처럼 한국에서도 사회의료시스템을 쟁취하고 그것을 방어해내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공공 의료를 사유화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움직임에 대한 유일하게 유효한 대답은 면피용 의료민영화 투쟁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과 함께 의료서비스를 사회화하고 지켜내는 투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