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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냄편이고 아덜이고 열썩이나 못 당허겄다, 요런 징글징글헌 눔에 시상!
마을마다 찬바람이 흽쓸고 있었다. 그것은 바뀌는 계절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사람들을 상대로 일으키는 바람이었다.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듯이 제일 먼저 불어닥친 바람이 경찰의 바람이었다. 빨갱이와 부역자 색출이라는 그 바람은 마을을 차례로 흽쓸어 갔다. 그러나 그 바람은 별로 거둬갈 만한 것이 없었다. 안창민네가 읍내로 들어오기 전에 지주나 유지들이 미리 피해버렸던 것과 똑같은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바람은 입산자 가족들을 몰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조사결과 압산자들 삼백을 넘는다는 사실에 경찰에서는 쓴 압맛을 다셨다. 그건 진짜 알맹이는 다 빠져나가 버렸다는 뜻인 동시에 자기네들의 적이 전쟁 전보다 그만큼 늘어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이 뒤늦게 놀란 것은 어떤 마을에서는 남자들이 절반이나 입산한 일이었다. 그 대표적인 마을이 들몰이었다. 들몰이 그렇게 된 것은 김종연과 서인출의 영향 탓이었다. 농지개혁을 앞두고 지주들이 자행하는 파렴치 행위를 막기 위해 집단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경찰들이 다음으로 놀란 것은 여자 입산자들이 상상 외로 많았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엄상구였다. 외서댁의 입산 때문이었다. 쌀 열 가마니로 무슨 장사밑천을 삼아 장흥에서 애나 키우고 있는 줄 알았던 외서댁이 인공치하가 되자 굳이 벌교로 돌아와 여맹에서 날뛰다가 입산까지 해버렸다는 말을 들었을때 염상구는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사기당한 기분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꼴이 웃음거리가 될 것 같은 생각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허! 그년 맘뽀가 꼭 지년 니노지맹키로 찰방지고 찔긴 모냥 아니라고? 허기야 저수지에 빠져 죽을라고 헌 독헌 년잉께. 그나저나 그 니노가 아까와 어쩌까?" 그는 혼잣소리를 씨부리며 짭짭 입맛을 다셨다.
마을마다 두 번째로 불어닥친 바람은 지주들이 일으키는 바람이었다. 지주들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농지개혁에서 빼돌린 자기네들 논을 일삼아 돌면서 헛기침을 해대고, 가래를 돋우어 내뱉고는 했다. 논에 나선 사람들은 그 속이 뻔한 시위를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 그들의 헛기침이나 가래 돋우는 소리가 '이놈들아 빨갱이들이 한 농지개혁은 다 무효야!" 하는 뜻인 것을 사람들은 다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 꼴들을 그냥 보기도 속이 꼬이는 판인데 인공의 농지개혁으로 자기 논이 된 줄 알고 열성으로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은 속이 뒤집혀도 열 번 뒤집힐 일이었다. 결국 반농사를 지어준 꼴밖에 안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소득을 반으로 나누자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품삯을 내라고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요구를 했다가 빨갱이로 몰려 경찰서까지 끌려가는 곤욕을 치른 소문이 이미 퍼져 있었던 것이다.
"이눔아, 누가 니보고 농사지라고 혔어! 니눔이 빨갱이법에 정신이 홀까닥혀서 내 논 공짜로 묵어칠라고 니눔 좋아서 진 농사제. 허고, 빨갱이눔덜이 달근마시허는 말에 잠시잠깐 고런 느자구웂고 호로시런 맘 묵었드라도 다시 대한민국으로 시상이 달라졌으면 회개허고 그못된 맘얼 고쳐묵는 것이 아니라 뎁되 반타작얼 해도라고? 고런 맘보가 무신 맘뽄지 아냐! 바로바로 빨갱이맘뽄 것이여!" 니눔언 영축웂이 빨갱이여, 빨갱이!" 이렇게 소리친 것도 모자라 지주는 그 사람을 경찰서에 고발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후퇴가 시작될 때 벌써 사람들은 인공의 농지개혁이 전면무효화라는 것을 알았다. 그 허망함을 체념하면서 자신들의 헛고생도 체념했던 것이다. 다만 어떤 성질 급한 사람이 그 말을 참아내지 못해서 당한 욕이었다.
마을마다 세 번째로 불어닥친 바람은 역시 경찰의 바람이었다. 입산자 가족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부역자 색출에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한 경찰은 그 조사대상을 각 마을사람들로 바꾼 것이다. "많이도 말고 한 사람만 대. 그럼 절대 비밀에 부쳐주고, 넌 살아나게 돼. 그렇지 않으면넌 죽어." "아 글씨, 부역헌 사람덜언 다 떠나뿌렀당께요." "너 정말 죽고 싶어! 그럼, 네가 한 부역을 대!" "아니어라, 지넌 암 일도 안허고 아그덜 키우고 밥만 해묵었구만이라." "닥쳐!" 이 대목에서 주먹이 날아가거나 몽둥이가 날아갔다. 그러나 입산자 가족들은 댈 만한 이름을 찾아내지 못했다. 사실 표나게 움직였던 사람들은 다 떠나버렸던 것이고, '부역했다'는 것이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그 범위가 모호했지만, 행동으로 협조를 하지 않았더라도 동조하는 마음까지 포함시킨다면 농지개혁을 열렬하게 환영한 소작인들 모두가 부역자였다.
"딱 한 사람만 대시오. 이건 당신과 나만 아는 절대 비밀이오. 협조하면 앞으로 많은 편리를봐줄 거요." "금메요, 부역헌 사람덜이야 다 뜨고 말었는디라이." "그럴 리가 있소? 협조를 안하면 앞으로 별로 좋잖을 것이오." "아이고 참말로, 고런 사람이 있음사 금세 대제라. 워째 스지도 안헌 애럴 나라고 그러신다요." 마을사람들을 상대로 한 이런 식의 조사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마땅하게 댈 만한 이름이 없었고, 역시 그 조사가 끝나고 엉뚱한 사람들이 끌려가는 소동이 이 마을, 저 마을에서 벌어졌다.
"역시 벌교가 제일 많군요. 이렇게 되면 우리 군에서만도 천오백이오. 군마다 이런 식이라면 도 전체를 따지면 이만이 될 판이오. 이거 보통 난리가 아니오." 남인태의 목소리가 전화 속에서 흥분기를 띠고 있었다. 무리가 아니었다. 입산자 집계결과에 자신도 놀라고 있는 참이었다. 권 서장은 숨을 들이켰다.
"사태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군요. 그런데, 도 전체의 수는 더 많아질지도 모릅니다. 화순이나 광양, 구례 같은 군은 우리 군보다 더 좌익이 강세고, 순천, 여수 같은 데가 또 있잖습니까?" 권 서장은 별로 내키지 않는 말이었지만 상황파악을 위한 예상정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그렇소. 규모가 제일 큰 광주가 있고, 목포가 또 있잖소? 이거, 이렇게 계산하면 전국적으로는 그 수가 도대체 얼마나 되겠소? 이거, 이거, 몇 십만이 되는 거 아니오? 가만 있어 보시오, 만약 인천상륙작전을 안하고 낙동강전선에서 그대로 위로 밀어붙였더라면 그것들이 다 어떻게 되겠소? 그대로 밀려 이북으로 갔을 게 아니겠소? 듣고 있소, 권 서장?" "예, 보나마나 그리 됐겠지요." "아하! 미군이 이거 큰 실수를 한 거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인천 상륙작전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밀어올렸더라면 남한 빨갱이는 하나도 남지 않고 이북으로 넘어가서 남한은 빨갱이 대청소를 하는 건데. 그리 됐더라면 고분고분 말 잘듣는 것들만 데리고 나라가 얼마나 편안해졌겠소. 괜히 그것들을 길목마다 고개마다 막아대니까 산속으로 기어들어간 것 아니겠소. 이거야 원,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전쟁이 끝나가는 게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인 거요. 참 골치 아프게 생겨먹었소." "그런데 한 가지 큰 의문이 있습니다. 겨울은 닥치는데 염상진은 어떻게 하려고 그 많은사람들을 끌고 산으로 들어갔냐 하는 점입니다." "글쎄...... 무슨 구체적인 계획이 있기야 했겠소. 다급한 김에 어중이 떠중이 몰고 무작정피하고 본 것 아니겠소?" "뭐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어쨌거나 우리 군의 입산자 수가 제일 많지나 말아야 할 텐데, 제일 많았다간 우리 싸움이 어려운 것이야 뒷전치더라도 당장 창피스러운 노릇 아닙니까?" "그 말도 맞소만, 우선 우리 군에선 한 부락 전부가 몽땅 입산해버리니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으니 그래도 창피는 면한 셈이오." "아니, 그런 부락도 다 있나요? 참 별일이 다 많군요." "나도 소문만 들어서 아직 그 부락이 어느 군에 있는 건지는 모르겠소만, 그런 기분 잡치는 일이 생긴 것만은 틀림없소." "아이들까지 당성이 강해서 그랬을 리는 없고, 대체 그 원인이 뭘까요?" "그야 보나마나 아니겠소? 도둑놈 제 발 저린다고 그렇게 내빼지 않고는 살아날 가망이없을 만큼 부락민 전부가 적극적으로 부역질을 한 게 아니겠소?" "글쎄요, 그게 뭐랄까....... 하여튼 앞으로가 큰일이군요." 권 서장은, 부역을 한 죄보다는 우리 경찰이 무서워 그런 건 아니겠느냐, 는 말을 입 안에서 죽여버렸다.
"권 서장, 큰일일 것 하나도 없소. 그전에 해왔던 방식대로 손 안에 든 것들 막 눌러대고 조이고, 입산한 것들을 부락과 완전 차단시킨 상태에서 몰살작전으로 나가는 거요. 권 서장도 다 알고 있겠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들을 절대 믿어서는 안되오. 그것들이 모두 빨갱이 물을 배가 터지게 먹은 것들이니까. 그 물을 빼자면 그것들을 빨갱이로 몰아치는 방법이젤이오." 남인태의 목소리에서는 힘이 넘치고 있었다.
"예에...... 그런데, 율어지서장 문제는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권 서장은 이야기를 돌렸다. 그에게 이근술의 문제는 단순한 흥밋거리일 수가 없었다. "도경으로 불려갔으니까 무사하진 못할 거요." "그럼, 무슨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겁니까?" "자세한 건 두고봐야 알 일이고, 경찰관이, 그것도 말단도 아닌 지서장이 빨갱이들 손에서 살아났는데, 그게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무슨 야로가 있어도 크게 있었던 게 아니겠소?" "글쎄요, 그 속을 당장 알기야 어렵겠지요. 다른 말씀 없으면 그만 전화 끊겠습니다." 권 서장은 더 전화를 끌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럽시다. 어쨌거나 야물딱지게 닦달하는 것 잊지 마시오." 남인태의 위압적인 목소리가 왈칵 쏟아지며 전화가 끊겼다. 권 서장은 귀에서 뗀 수화기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이근술 지서장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이 읍내로 다시 들어와 며칠이 지나서 듣게 되었다. 그건 곧 모든 경찰관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살아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하게 오갔다. 그 추측과 상상에 불과한 말들이 억측으로까지 변하면서 무성해진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장본인이 일체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도경의 호출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또 도경이 어떻게 그 일을 알게 되었느냐하는 데로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그 관심은 곧 사그라들었다. 내부에서 누군가가 한 짓이라는 걸 알아차렸던 것이다. 경찰관들의 관심은 그가 어떻게 될 것인가로 옮겨졌다. 권서장의 관심도 그 순서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살아나기 위해서 어떤 이적행위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거라는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진 점이었다. 그 확신의 근거는 그가 자기판단에 따라 예비검속을 명령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명령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그의 행위는 엄연히 명령 불복종이었다. 그것도 전시상황 아래서의. 그 명령 앞에서 이근술처럼 자기판단에 따라 행동한 경찰책임자가 전국적으로 몇이나 될 것인가를 권 서장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근술이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그가 엄청나게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면 바보처럼 단순한 기분파일 거라는 상반된 결론을 갖게 했다. 어찌됐든 권 서장은 이근술의 그런 행동을 통해서 자기 마음속에 남아 있던 괴로움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 행위의 후유증이 인공치하에서 여지없이 나타난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던가를 괴롭게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근술의 행동은 그 명령의 부당성을 입증하는 것인 동시에 명령수행자들의 행위를 죄악시하는 것이었다. 도경에 불려간 이근술은 사찰과장에게 몇 마디 질문을 받고 자술서를 쓰게 되었다.
"같은 경찰관끼리 일일이 주고받고, 조사형식을 취한다는 게 서로 곤란한 문제니까 자술서를 쓰시오." 사찰과장의 말이었다. 이근술도 그게 속 편한 방법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이근술은 수사실 구석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더 보태고 빼고 할 것도 없이 염상진에게 조사받았던 때의 응답과 똑같은 내용으로 자술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할 것도 없고, 꾸밀 대목도 없는 이야기라서 자술서는 그 길이에 비해 두어 시간 만에 끝내게 되었다.
"당신, 여기에 쓴 게 전부 사실 그대로요?" 자술서를 다 읽고 난 사찰과장이 물었다. "그렇구만이라. 머시가 잘못 되얐는게라?" 이근술이 눈을 껌벅거렸다. "그런 행동을 하기 전에 명령을 어긴다는 것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소?" "그것이 긍께 남 서장님이 물었든 말이나 같은 것인디, 거그 쓴 그대로구만이라." "그럼,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생각이다 그 말이오?" 사찰과장의 어조가 약간 달라졌다. "하먼 한 가지 일에 사람 맘이 같아야제 시간에 변허고 장소가 달라졌다고 이랬다저랬다 허먼, 둘 중에 하나넌 그짓말 아니겄는게라?" 사찰과장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근술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용공행위는 어떻소? 정말 아무것도 협조한 일 없이 살아났다 그 말이오?" "멀 협조허란 말도 웂었고, 무신 협조를 혀야만 살려준다고 혔으먼 그리 근천시럽게 살아날라고도 안혔을 것잉마요. 좌우당간에 요것도 거그 다 씨인 말잉께 여러 말 혀봤자 도로 그 말이 그 말이고, 그것대로 과장님이 알아서 생각허시먼 좋겄구만이라." "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오." 사찰과장이 짧은 헛웃음을 흘리며 자술서를 들고 일어났다. 그는,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일정시대부터 경찰 노릇을 해먹었는지 모르겠소, 하는 말을 참아내고 있었다. 이근술은 버려진 듯 사무실 구석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내일까지 여기서 대기하라'는 사찰과장의 한마디는 유치장에 넣지만 않았을 뿐 사람대접은 유치장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찰국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행동통제가 가해진 것이고, 반씩 교대근무를 하는 야간조가 충실한 감시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근술은 몹시 기분이 언짢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건 자신에 대한 조사가 단순한 진상조사가 아니라는 낌새가 맞걸려 있었다. 다음날 경무부장을 만났다. "이 주임에 대한 조사기록과 자술서를 읽었소. 그 내용을 다 사실이라 인정하고 생각한다하더라도, 이 주임, 이 주임은 그자들의 손에서 살아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경무부장은 신중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말이 아주 느렸다. 그런데 이근술은 그 느린말이 무엇을 묻고 있는 것인지 선뜻 잡히지가 않았다. "무, 무신 말씸이신가요?" "아, 다시 말하자면 말이오...... 경찰의 신분으로서 그렇게 된 건 모든 경찰에 대한 체면손상이라고 생각지 않느냐 그런 뜻이오." 가만 있거라, 요것이 워떻게 돌아가는 판국이냐, 이근술은 머리가 핑하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렇게 살아난 것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었다. 경찰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았으려면 그때 자폭을 하든지, 자결을 하든지, 수류탄도 칼도 없었으니 혀를 깨물어서라도 경찰답게 죽었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그물이 씌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 생각허자먼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기는 허겄구만요." 이근술은 그물을 찢어발기는 기분으로 대들고 싶은 생각을 뚝 부러뜨렸다. 혼자의 힘으로는 찢어질 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본인의 생각도 그러하다면 이 일을 조용히 해결하는 방법은 찾아진 셈 아니겠소?" 고개를 숙임막한 경무부장이 눈동자를 밀어올려가지고 이근술을 쳐다보았다. 이근술은 그 눈동자가 요구하는 말에 밀리고 있었다. 그건 그물에 싸여 내던져지려는 순간이기도 했다. "지가 사직서를 쓰먼 되겄는가요?" 이근술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경무부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근술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자신은 이미 내던져져 있었다. "종이럴 주씨요." 이근술은 만년필을 뽑아들었다.
한편, 권 서장은 별로 실효없는 부역자 색출에 진을 빼가면서 읍사무소와 협조업무로 국민병징집에 뒤를 쫓기고 있었다. 경상남도에만 국한되어 그 동안 병력충원에 애를 먹어온 정부에서는 전선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병력확보가 더욱 시급하게 되자 징집을 밤낮없이 독촉해대고 있었다. 일정한 시한도 없이 일을 몰아대는 것만이 어려운 게 아니었다. 현지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징집자 수를 할당해 놓은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어차피 징집이라는 것이 의무라는 이름을 앞세운 강제행위니까 해당자를 끌어가는 것이야 총부리 들이대면 별문제 아니었지만 머릿수를 채워야 하는 건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다가 징집종류는 전투병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병력을 뒷바라지 할 노무자들도 뽑아내야했다. 처음에 이틀이나 사흘을 앞두고 징집영장을 내보냈는데 사건이 발생했다. 몇몇이 그동안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이다. 집뒤짐 끝에 부모네들을 끌어다가 추궁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고것덜이 가기넌 워디로 갔겄소. 날개가 있으니 하늘로 솟았겄소, 발톱이 씨니 땅으로 기들었겄소. 보나마다 두 다리 갖고 산으로 짼 것이제라. 나한테 그것덜 조사럴 맡기먼 요러타께 실토럴 받아낼 것인디 말여." 염상구의 비웃음 담긴 말이었다. 염상구의 말은 추측만이 아니었다. 그의 무작스럽고 다양한 매질 앞에서 부모네들은 자식들이 산으로 내뺀 것을 실토했던 것이다. 아직 영장을 받지도 않았는데 모습을 감춘 젊은이도 있었다. 그런 그들의 아버지는 쉰이 넘지 않은 이상 제일차로 노무자 대상이 되었다. 노무자 확보와 함께 입산도주 근절책이었다. 그 징집바람은 부역자 색출만큼 거세게 모든 마을을 휩쓸어대고 있었다.
"아이고메, 징허고 징헌 눔에 시상. 일정 때넌 일정 때라고 끌어가고, 인공 때넌 인공 때라고 끌어가고,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라고 끌어가고, 나라라고 생긴 것은 해주는 것 암 것도 웂음시로 못 묵고 못입고 보존해온 생목심덜 끌어다가 쥑이는 일만 헌당께로. 냄편이고 아덜이고 열썩이라도 못 당허겄다. 요런 징글징글헌 눔에 시상!" "살아도 살아도 요리도 미꼬미 웂는 시상이 워디 또 있을까. 일정 때 징용 끌려가서 포도씨 살아와갖고 또 노무자로 끌려나가게 생겼이니, 남정네덜 살기만 팍팍헌 눔에 시상이여." 나이든 여인네들의 탄식이었다. 아들을 많이 둔 여자일수록 시름이 깊었다.
"아덜만 끌어가먼 되얐제 워째 남정네꺼지 끌어가는 기여. 한 집서 둘썩이나, 안뒤여, 안뒤여!" 회정리 삼구의 왕주댁이 눈을 흡뜬 채 경찰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앞뒤를 잘 가리고,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는 평소의 그녀 모습이 아니었다. "시상에, 끌어가도 좋고 잡아가도 존께 타작이나 끝나먼 가게 혀주씨요. 아무리 하품 나오는 농새라도 여자 혼자 심으로는 될 일이 아닌께라." 노덕보의 아내 조성댁이 경찰을 붙들고 늘어졌다. 김복동, 마삼수가 강동기와 함께 입산을할 때 못 본 척 해버렸던 노덕보였다.
"고것이 독자여, 이대독자! 애비도 웂는 이대독자랑께로오!" 칠동에서 이름난 청상과부 진도댁이 눈물범벅이 되어 울부짖었다. 남자들은 젊으나 나이가 많으나 묵묵히 끌려갈 뿐이었고, 여자들의 숨가쁜 소리들만 고샅고샅을 울리고 있었다. 피난에서 돌아온 송성일은 울적한 마음으로 병원을 찾아갔다. "말 듣든 것보담 많이 아픈갑네이?" 송성일은 최서학의 핏기없이 메말라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다 살아난 꼴 보고 그리 놀래는 것 봉께 읍내에 막 들어왔을 때 꼴 봤드라먼 기절혔겄다. 앉어라, 목수가 진 집잉께." 최서학이 반가움이 넘쳐 목소리를 높였다. 둘이는 그 동안 서로 지내온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꽤나 긴 시간을 열기에 젖어들었다. 마치 무용담을 얘기하듯 하는 최서학의 열기는 송성일을 압도했다. "근디 말이시, 징집영장은 나오고 엄니는 절대로 군대에 나가선 안된다고 야단이고, 나는 새중간에서 똑 죽을 맛이시. 엄니는 돈으로 막겄다고 허지만 아부지도 안 계시는 살림에 언제까지 돈을 써야 할지도 모르고......" 송성일은 기운없는 소리로 말했다. 그의 마음이 울적한 것은 뭉텅뭉텅 들어가는 돈도 돈이었지만, 돈을 써가며 징병기피를 하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는 고민에 빠져있었다.
"나야 괴뢰군복 입고 괴뢰군하고 싸운 반공상이용산께 해당무다마는 니넌 고민이 태산이겄다. 지끔 군대 나갔다가는 다 개죽음잉께." 최서학은 파리한 얼굴에 냉정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빌어묵을, 어째야 헐란지 환장허겄구만." 송성일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어댔다. "니기럴, 간딴헌 방법이 있다. 둘째손꾸락을 작두에다 짤라뿌러라." "머시여?" 송성일이 윗몸을 벌떡 세울 만큰 놀랐고, 최서학은 누운 채로 차갑게 웃고 있었다. "그리 놀랠 것 웂이 차근허게 생각혀서 헐 일이고, 옜다, 요것이나 똑똑허니 봐둬라." 최서학은 머리맡의 신문지를 집어 송성일에게로 던졌다. "먼디?" 송성일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신문을 끌어당겼다. "겨그 기맥힌 기사가 나왔다. 서울서 그 동안에 잡아낸 부역자들이 구천구백 놈이란다." "머시여? 구백구십이 아니고?" 송성일이 놀라며 다급하게 신문을 펼치고 있었다. "자다가 봉창 뚜딜기지 말어. 구천구백이여, 구천구백! 도망갈 놈들은 도망을 가고도 그 새끼덜이 그리 남아 있었으니 서울은 온통 빨갱이새끼덜 세상이었다 그것이여. 그 새끼덜언싹 다, 싹 다 총살시켜 뿌러야 혀." 최서학은 증오에 찬 눈으로 천장을 쏘아본 채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참말로 구천구백이시. 요것이 지대로 부역헌 사람만 골라서 잡아딜인 것일랑가?" 송성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니 시방 무신 말 허고 있냐! 허먼, 우리 쪽이 생사람 잡아다가 부역자 맹글었다 그 말이냐!"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는 최서학은 곧 일어나 앉을 기세로 몸을 들썩거렸다. "형, 너무 흥분허덜 말어, 고런 뜻이 아닝께. 형이나 나나 공산당 싫어허기는 매일반인디,아까 형이 헌 말대로 도망갈 놈들 다 도망가고도 남은 부역자들이 그리 많다는 것이 문제라 그것이시. 농사꾼들이 태반인 시골이야 농지문제가 걸렸은께 그렇다 허다라도 농사꾼들 웂는 서울에는 공산당에 부역헌 사람덜이 그리 많다는 것은 한번 뒤집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아니겄는가. 어째서 그리 됐는지 말이시." "야, 야, 그까진 거 생각혀서 젯상에 올릴라고 그러냐. 일단 빨갱이들하고 죽기살기로 맞붙은 이상 그 새끼들은 잡는 쪽쪽 쳐죽이기만 하면 돼. 니가 아무리 뒤집어 생각허고 엎어서 생각허고 혀도 빨갱이새끼덜이 니 이뻐라 안헐 것잉께 정신 똑똑허니 채려!" 최서학은 송성일을 노려보며 말했다. 송성일은 마음이 더 울적해지며 눈길을 신문으로 돌렸다. 사흘이 지난 시월 십이일자 신문이었다.
이학송 일행은 대동강을 건넜다. 다리를 다 건넌 이학송은 무심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여덟시였다. 그는 대동강을 되돌아보았다. 아침햇살이 가을빛 완연한 강 위에 내리고 있었다. 칠 년 전에 느꼈던 감회에 변함이 없었다. "평양이군요. 오늘이 십칠일이죠?" 김미선은 다리를 절룩이면서도 목소리에는 감격을 담고 있었다. "맞소, 십칠일. 평양이 처음이오?" 이학송은 앞만 보고 걸으며 물었다. "네, 처음이에요. 진작 와보고 싶었었는데......" 평양도 역시 전쟁 속에 내던져진 도시였다. 폭격을 당해 불탄 건물들이 흉측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고, 거리에는 사람들마저 드문드문해서 썰렁한 적막감이 무슨 공포감처럼 섬뜩하게 끼쳐오는 것을 이학송은 느꼈다. 평양도 으레, 아니 더 심하게 상하고 다쳐 있을 것을 알았으면서도 어쩌면 마음 한 가닥은 어떤 기대를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것이 아니면, 평양이 후퇴의 목적지가 될 수 없다는 순간적인 판단에서 오는 낙망감인지도 몰랐다. 평양까지, 위험하고 먼 길을 걸어온 것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이십이일동안 걸어서 다다른 곳, 공화국의 수도인 평양은 무의식중에 일차 목적지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머 저것 좀 보세요!" 김미선은 무슨 감탄할 만한 것이라도 찾아낸 듯 건너편을 손가락질했다. 이학송의 눈길은 지체없이 그녀의 손가락 끝을 따라 뻗어갔다. "아니, 전차 첨 보시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전차 한 대가 굴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전차밖에 안 보이세요? 남자라서 그런가? 아닌데, 남자 눈에는 더 잘 띌 텐데요?" "뭐가 말입니까?" 이학송은 전차와 김미선을 번갈아 보며 멍한 표정이었다. "이제 양키들의 폭탄세례가 확실히 효과가 있는 모양인데요. 이 동무의 빠른 눈치까지 멍하게 만들었으니 말예요." 김미선은 입을 가리며 쿡쿡 웃고는, "저 전차운전수가 안 보이세요?" 그녀는 다시 전차를 손가락질했다. "아아, 저건 여자 아닙니까?" 이학송의 어감이 달라졌다. "이제 보이세요?" "예에, 여잔데 아주 젊어보이는군요." "그래요, 스물 안팎으로 처녀 같아요." "사람도 몇 타지 않았는데...... 저러다가 폭격을 당하면 어쩔려고 저렇게 태연하게 운전을 하고 있는 걸까요?" 이학송은 멀어져가고 있는 전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서야 이 동무 눈치가 제자리를 잡은 것 같네요. 제가 왜 놀란 줄 아세요?" 김미선이 이학송을 쳐다보았다. 이학송은 그녀에게 말을 양보하느라고 고개를 저었다. "여자가 다 전차운전을 한다는 것하고요, 저런 젊은 여자가 이런 위험스런 상태에서도 자기가 맡은 바 책무를 유유하게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이학송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화국에서 진작부터 남녀평등의 노동법을 시행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저런 식으로까지 평등하게 사회진출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몰랐어요. 남쪽에선 꿈도 꾸지 못할 일 아녜요?" "그렇지요, 남녀평등이라는 말조차 쓰길 꺼리는 형편이지요." "그리고 말예요, 그 젊은 여성동무가 이런 위급한 속에서도 의연한 태도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절 감동시켰어요. 너무 멋있고 아름다워보여요." 김미선의 눈과 얼굴에는 정말 꾸밈없는 기쁨의 빛이 내비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역시 두 아이의 어머니 같지가 않았고, 저런 정열이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게 했구나 하고 이학송은 생각했다.
"저도 그 두 가지 점에 대해서 놀랐고, 김 동무와 동감이기도 합니다." 이학송은 분명 자신의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전차가 여자의 운전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감정에 밀착되지 않고 있었다. "저기 빈대떡장수가 있네요." 김미선이 눈 빠르게 말했다. "저 아주머닌 아까 그 여성운전수보다 더 여유만만하군요. 기름냄새가 시장기를 돋우는데, 드시겠어요?" 이학송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녜요, 평양이 배부르게 해요." 김미선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행은 허술한 밥집을 찾아들어 아침밥을 시켰다. 거기서 평양의 사정을 대충 들을 수 있었다. 지난 십일일에 당의 피난 권유가 있어서 많은 시민들이 피난을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서울 쪽에서 후퇴해온 사람들은 모두 강계와 신의주 두 방향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밥집을 나와 동평양으로 방향을 잡았다. 피난민들이 아까보다 더 많이 눈에 띄었다. 방금 도착하고 있는 사람들일 터였다. 흐트러진 피난민 사이를 대오를 갖춘 군인들이 소규모로 또는 분대규모로 뛰어서 지나가고는 했다. 시가지 여기저기에서는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었다. 대동강의 변함없는 정취에 비해 시내는 살벌한 전쟁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율리에 있는 로동신문사에 도착되었다. 신문사는 폭격의 피해를 당하지 않고 있었다. 시멘트 삼층건물인 신문사의 규모와 시설을 둘러본 이학송은 자못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쪽의 그 어느 신문사 시설보다 나았던 것이다. 제작시설뿐만 아니라 이층에 자리잡은 각 부서의 사무용품이나 소파 같은 것도 고급스러웠고, 삼층에는 기자들의 휴식을 위한 넓은 댄스홀도 갖추어져 있었다. '신문은 조직자이며 선동자이다.' 그런 시설들을 살펴보며 이학송은 마르크스의 말을 상기하고 있었다. 해방일보 일행은 곧 평남도당의 지시를 받아 그날부터 도당 기관지인 평남로동신문을 발간하게 되었다. 이원조가 총책임인 주필이 되었다. 전시신문답게 타블로이드판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심적 부담 없이 그 신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비록 등사판신문이나마 매일 몇 십장이고 해방일보를 만들어내고 있던 구성이라서 타블로이드판의 지면을 메우는 기사작성은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이학송은 기사를 쓰고 남는 시간에 평양거리를 배회했다. 공습의 위협 속에 후퇴하고 있는 기관사람들을 더러 볼 수 있었고, 일반인들의 모습은 전날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그와 반대로 바리케이드 수는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전쟁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는것을 여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 급박한 변화를 전혀 느낄 수 없다는 듯 무표정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러 종류의 장수들이었다. 그들이 벌여놓고 있는 저잣거리만을 보자면 전투의 위협이 가까워지고 있는지 어쩐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피난민들 상대라서 그런지 밥집이 많았고, 닥치는 겨울을 민감하게 의식한 상흔인지 겨울옷을 내다건 집들도 상당수였고, 후퇴해가는 사람들에게 헐값으로 사들인 것이 분명한 시계들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엉뚱하게 나무자루의 칫솔과 치분, 홍남비누같은 것을 차려놓고 앉은 사람도 있었다. 이학송은 오십 원을 내고 그 유명한 평양냉면 한그릇을 사먹고 앉아, 목전에 닥친 생명의 위협에도 끄떡하지 않고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상인들의 그 지독스러움에 새삼 놀라는 한편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다. 인간이 갖는 삶의 치열성이라는 것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평양을 거치면서 알게 된 일인데, 바로 그들이 국방군과 미군이 평양으로 밀려들었을 때 가장 먼저 태극기를 흔들며 길거리로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또 장사를 하고, 기관의 끄나풀 노릇까지 하다가 남쪽으로 짐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학송은 그때서야 비로소 상인들이 갖는 기회주의적 속성이 무엇인지를 실감나게 깨달을 수가있었다. 공산주의가 노동자, 농민은 믿되 왜 그들을 믿지 않는가도 구체적으로 납득할 수 있었다. 그들은 노동생산물의 이윤 추구만을 일삼는 중간착취자일 뿐만 아니라, 그 목적달성을 위해 끝없이 거짓말을 하는 속에서 기회주의가 골수에 박혀버린 구제불능의 부류들이었던것이다. 그들이 자본주의를 내세운 남쪽으로 짐을 챙겨 떠난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십구일이 시작되어 네 시간이 지난 새벽, 해방일보 일행은 잠이 덜깬 채 베개삼고 자던 짐들을 들고 신문사 마당으로 쏟아져나왔다. 어둠 속에서 포성이 멀게 그러나 자주 울려오고 있었다. 한 시간 뒤인 다섯시에 대동강 다리가 폭파될 거라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와 서로 얼굴을 분간할 수 없도록 진한 어둠 속을 이리저리 떠다녔다. 그들은 앞사람의 옷자락을 줄줄이 잡고 새벽별빛만 유난히 반짝이는 어둠을 헤치며 다시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평양을 벗어나 날이 밝자 이삼 일 동안 뜸한 것 같았던 비행기들의 맹폭이 감행되었다. 네 대만이 아니라 여덟 대로 편대를 이룬 비행기들은 끔찍스럽게 폭탄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가을물이 들면서 헤성해지기 시작한 나무숲을 파고들어 또 억지 휴식을 취해야했다. 아무 거칠 것 없이 멋대로 날아다니며 도시에는 폭탄을 퍼부어대고, 사람에게는 기총소사를 해대는 비행기들을 이학송은 망연히 올려다본 채, 저리도 끝없이 폭탄을 퍼부어댈수 있는 미국이란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 어마어마한 화력으로 무차별 공격을 가해한 민족을 살해하고 그 땅을 황폐화시키면서 그 민족이 가고자 하는 역사를 가로막고 나선 저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비감한 마음으로 같은 생각을 되씹어 삼키고 있었다.
"그 운전수 여성동무 무사히 피했는지 모르겠군요." 김미선이 갈대꽃을 꺾으며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피했으니 그 동무도 피했겠지요." 김미선의 평양 기억은 그 젊은 여자운전수가 될 거라고 생각하며 이학송은 웃음지었다. 그 웃음은 가을숲만큼 썰렁했다. 비행기와 숨바꼭질을 해가며 산자락을 밟아 북행길을 재촉했다. 비행기가 나타나면 재빨리 나무 밑이고 바위 뒤로 몸을 감추어야 했고, 비행기가 사라지면 한 걸음이라고 더 걸어야 하는 애타는 발길이었다. 서울을 떠날 때처럼 낮에 쉬고 밤에 걷는 방법으로 할 수가 없는 것이 뒤쫓아오는 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것이다. 한 뼘 길이의 기관포탄이 박혀있는 길바닥에는 으레 인민군들이나 피난민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터지고 찢어진 시체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들은 비행기를 피하려던 마지막 동작들이었다. 어떤 시체는 머리를 풀숲에 감춘 채 기관포를 맞아 엉덩이가 파헤쳐져 있었다. 사인자을 거쳐 순천(順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할 뿐이어서 순천을 우회하기 위해 개천으로 빠지는 산길을 막 돌아나서던 그들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맞은편 하늘이 은빛으로 뒤덮인 것처럼 수십 대의 비행기가 떠오고 있었던 것이다.
"피해요, 빨리!"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때서야 그들은 야산 다복솔 틈바구니로 머리부터 박으며 기어들었다. "저 비행기는 소리도 모양도 이상하잖소?" 누군가가 숨가쁜 소리로 말했다. 한결 가까워진 비행기들의 모양은 폭격기도 제트기도 아니었다. 몸체가 두 갈래로 갈라진 괴상한 생김이었다.
"아니, 저 막 쏟아지는 건 뭐요?" "가만 있자, 사람 같잖아?" "맞아요, 낙하산, 낙하산 부댑니다." 흰 버섯 모양의 낙하산들이 수십 개의 쥘부채를 빠르게 펼쳐대듯이 하늘에서 팍팍 펼쳐지고 있었다. "순천에 낙하산부대가 떨어지는군." 누군가의 한숨 섞인 소리였다. "순천은 이십 리밖에 안돼요. 이러고 있다가는 꼼짝없이 포위당합니다. 빨리 떠야 해요." 이 말에 모두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투어 산등성이를 내려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성급한 행동이 그런 전쟁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무모함이라는 것을 그 다음에야 깨달았다. 낙하산부대가 투하되기 전에는 만일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그 예정지역에 반드시 맹폭이 가해지고, 낙하산부대가 투하되면서는 외곽지역에서 가해오는 공격을 차단시켜주기 위해 또 그 주변지역에 맹폭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급한 마음으로 큰길을 뛰기 시작했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인민군 소대병력도 뛰고 있었고, 낮에는 절대로 이동이 금지되어 있는 트럭 한 대도 어디선가 느닷없이 나타나 달리고 있었다. 한 십여 분을 달렸을까. 뒤에서부터 기총소사가 가해져왔다. 이학송은 넘어짐과 동시에 길가 비탈을 뺑뺑이치며 굴러 논가 개굴창으로 처박혔다. 그는 정신이 아뜩해지는 걸 느꼈다. 어금니를 악물며 정신을 다잡으려고 부르르 떨었다. 그때 고막이 터져나가고 심장이 짓이겨지는 것 같은 비행기의 폭음과 콩 볶는 총소리가 덮쳐왔다. 그는 정신이 번쩍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눈을 떴는데, 바로 자신을 향해 비행기 한 대가 곤두박질치며 달려들고 있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는구나! 머리를 친 생각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같은 폭음과 연발총 소리가 또 휩쓸고 지나갔다. 그는 다시 눈을 부릅떴다. 또 비행기 한 대가 자신을 향해 곤두박혀오고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서, 표적은 자신이 아니라 저 위쪽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막힌 숨을 토해냈다. 미군이 그렇게 쉽게 이 땅에서 손을 뗄 것 같습니까? 김범우의 말이 문득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학송은 김범우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편, 평양을 향해 서울을 떠난 김범우는 그 시간에 개성을 지나고 있었다. 지프차의 뒷자락에 앉은 김범우는 미군복차림이었다. 그러나 모자나 옷 어디에도 군인이라는 표지가 없었다. 같은 차림새인 미국사람 셋도 마찬가지였다. 차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내맡긴 김범우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스쳐지나가는 것들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전투부대가 휩쓸고 지나간 이른바 평정지역을 뒤따르고 있는 그로서는 전쟁으로 파괴된 온갖 모습들을 보지 않을래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당신은 우울하고 언제나 말이 없소?" 옆에 앉은 심슨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며칠 전에 한 말이었다. "아니, 사람이 저렇게 마구 죽어가고 도시란 도시는 크나 작으나 다 파괴되고 있는데, 그럼 나더러 유쾌하게 웃으란 말이오?" 김범우는 쏴질러 버렸다. "이건 전쟁이오." 김범우는 더 대꾸하지 않고 픽 웃어버렸다. 그러나, 너희 나라에서 이런 꼴이 벌어져도 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 하는 말을 참아내고 있었다. 그나 그의 동료들은 말상대가 되지 않는 미국인들이었고 그리고 정보원들이었다. 그들에게 섣부르게 감정노출을 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일 뿐이었다. 김범우는 전주에서 바로 서울로 보내졌다. 용산 어느 부대에서 발가벗겨져 목욕을 하고 신체검사를 받았다. 신체검사라는 것은 무조건 네 대의 주사를 찔러대는 것이었다. 그 행위는 버마 전선을 탈출해 영국군을 거쳐 미군에게 넘겨졌을 때와 어쩌면 그리도 변함없이 똑같은지 몰랐다. 그때는 말라리아나 풍토병 같은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가 되었지만, 지금은 무조건 전염병보균자로 취급당하는 모독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고나서 팬티부터 손수건까지 미군 것으로 뒤집어써야했다. 다시 지프차를 타고 효자동으로 옮겨갔다.
"우린 당신의 경력을 존중하고 믿는 바이오.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협조해주기 바라겠소. 당신이 맡을 임무는 통역이오. 충실하고 성실한 통역, 그것에만 전념하시오. 그리고 그이외의 일에 대해선 알려고도 하지 말고, 관심 쓸 필요도 없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는, 그리고 그것을 어겼을 때는 어찌 되는지는 OSS훈련을 거쳤으니 설명이 필요치 않으리라고생각하오." 육중한 체구의 대머리는 손가락보다 더 굵고 긴 시가를 질겅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삐져나올 듯이 살이 찐 그의 얼굴에 묻어 있는 거만함보다 말이 더욱 거만하게 들렸다. 그곳은 짐작했던 대로 CIC의 분실이었다. 김범우는 전주로 실려가면서부터 지금까지, 두 여자가 당하게 된 것을 그냥 못 본 척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아니 그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수백 번도 더 엎었다 뒤집었다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CIC의 통역을 해야 한다고 결정이 나버리자 그때의 일이 엄청난 후회로 고정되어버리고, 자신의 행동이 더없이 경솔했던 것으로 결말이 나고 말았다. 두 여자의 정조의 가치와, 정보통역으로 저질러야 하는 잘못과...... 그 일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 알았더라면 두 여자가 추행당하는 것을 단호히 외면했을 것이다. 김범우는 그 동안 별 식욕이 없던 입맛을 완전히 잃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다음날부터 시작된 통역 일은 예상대로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곳에 붙들려온 사람들은 더 말할 것 없이 철저한 공산당원에다가 정보적 가치가 있는 직위에 있었거나 그런 직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 앞에서 미군을 위해 통역을 한다는 것은 죽기보다 괴로운일이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그런 내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요구한 대로 충실하고 성실한 통역이 되도록 애썼다. 왜냐하면 자신은 시험대 이에 올려져 있다는 것을 망각해선 안되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의심이 많아 그들 나름의 몇 단계 시험을 거치지 않고는 국적이 다른 사람을 믿지 않으며, 특히 유색인종에게는 더 심하다고 하와이 포로 수용소의 도라지가 귀띔해 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여기는 정보기관이었다. 자신의 옆에 앉은 서너명 중에서 그 누가 우리말을 대충이나마 알아듣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우선 그들에게 신뢰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마주앉은 남자는 마흔이 다 되어 보였는데, 얼굴에 고문당한 흔적을 상처와 멍으로 가지고 있었다. 파삭타서 갈가리 터진 입술에 실피를 물고 있는 그의 눈은 이상스러운 빛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김범우는 그 사람과 마주앉으면서부터 등줄기에 섬뜩하게 찬바람이 이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포로가 아니오.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정보활동을 하다 체포되었으므로 당신의 생사여부는 곧 본조사의 협조여부에 달렸소. 본조사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귀한 생명을 구하는 동시에 자유를 찾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소." 김범우가 막 통역을 마쳤을 때였다. 그 사람이 침을 뱉았다. 김범우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을 때는 이미 침이 얼굴에 달라붙은 다음이었다.
"이 개만도 못한 놈! 민족을 팔아먹는 똥만도 못한 놈!" 그 사람이 김범우를 노려보며 외친 소리였다. 그의 눈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김범우는 침을 닦지 않은 채 똑바로 앉아 그 사람의 눈을 맞쳐다보고 있었다. "저 자식 끌어내!" 조장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 사람이 끌려나가고 나서 김범우는 천천히 침을닦았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그 사람이 남긴 말을 통역했다. 그러나 '민족을 팔아먹는'이란 부분은 통역하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위해서도, 미국인의 감정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 사람의 만일의 생존을 위해서도. "왜 참았소, 한 대 갈길 줄 알았는데." 심슨이 야릇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난 통역관일 뿐이오." 김범우는 잘라 말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당신은 잔인하도록 냉정한 사람이오. 그 인내에 놀랐소." 심슨이 뒤에서 말했다. 김범우는 가슴을 긁어내리는 고통에 신음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반감금상태인 생활을 보내고 서울을 떠날 때쯤 해서 그들은 농담을 던질 정도로 친숙감을 나타냈다. 김범우는 그런 그들의 변화를 분명하게 의식해나가고 있다. "평양여자들이 한국에서 제일 예쁘다면서?" 심슨이 심심해죽겠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나도 안 봐서 몰라." 김범우는 속으로, 개애새끼! 하면서도 대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했다. 지프차는 덜컹대면서도 평양을 향해 줄기차게 굴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