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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웬수웨이에서 한중 가는 길
오늘은 티웬수웨이(天水)에서 기차를 타고 바오지(寶鷄)로 가 버스를 타고 험준한 친링산맥을 넘어 조조가 계륵이라고 한 한중(漢中)까지 이동할 예정이다. 중원과 서쪽 변방인 쓰촨을 갈라주는 친링(秦岭:진령)산맥은 그 험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중국의 詩仙 이백은 촉도난(蜀道難)이라는 시에서 촉의 쓰촨지역을 넘어가는 길은 푸른 하늘로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한중이라는 지역은 중국 사람에게는 무척 중요한 땅으로 중국의 정신으로 추앙하는 漢이라는 단어의 시작이 한중에서 시작했다고 하니 정신적 지주가 되는 곳이 바로 한중이다.
▶ 바오지에서 한중 가는 미니버스
새벽 5시 55분 기차표를 예매한 관계로 아침도 못 먹고 눈을 뜨자마자 숙소를 나서 바로 길 건너에 있는 티웬수웨이 기차역으로 간다. 기차는 연착해 6시가 넘어서야 역으로 들어와 험한 산길을 달려 날이 밝아지기 시작한 8시 35분에 바오지 역에 도착한다. 바오지역에서 기차를 내려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한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3일 전 오장원에서 바오지로 올 때 내렸던 버스터미널로 간다. 9시에 터미널에 도착해 9시 30분에 출발하는 한중행 버스표를 산다.(1人/60元) 바오지에서 한중까지는 170km에 불과하지만 친링산맥의 험준한 산길을 넘어야 하기에 몇 시간 걸릴지 몰라 빵과 과일 등 먹거리를 미리 산다.
▶ 험준한 친링산맥을 오르는 도로
우리를 태운 버스는 바오지 시내를 벗어나더니 이내 험한 산을 헉헉거리며 오른다. 바오지는 좀 더운 날씨였지만, 산으로 올라오니 싸늘한 기운이 돈다.
▶ 고촉도
▶ 한중에서 장안(시안)으로 가는 길
한중에서 장안에 이르는 길을 놓고 제갈량은 깊은 고민을 한다. 한중에서 장안까지 직선거리는 230km지만 중간에는 친링산맥(秦嶺山脈)이 가로놓여 있고 특히 이 산맥의 가장 최고봉인 타이바이산(太白山 3,767m)이 떡하니 중간을 가로막고 있다. 다른 길은 펑션(鳳縣), 바오지(寶鷄)를 거쳐 서안으로 향하는 길인데 거리가 370km로 만만치 않다. 물론 이 경우 한중에서 바오지에 이르는 170km도 역시 험난한 산길이지만 바오지에서 장안까지는 거의 평원이란 장점이 있다. 만약 공명이 불벌에 나설 당시 이 산맥을 수만의 병기와 군수품을 갖고 넘어 온다고 생각해보니, 이 산길을 넘어 북벌에 나선 공명의 군사들은 전투도 하기 전에 지쳤을 것이다. 왜? 공명이 棧道를 고집해서 만들었는지 이해가 된다.
▶ 구불구불하지만 친링산맥을 넘는 포장도로
▶ 곳곳에 이렇게 시원한 계곡이 있다
▶ 한중으로 오다 쉰 주유소 부근 풍경
이제 버스는 또 산길을 오르내리며 힘들게 달린다. 친링산맥은 참으로 험한 곳이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이곳에도 봄이 성큼 들어서 있다. 곳곳에 짙어져 가는 새싹들의 모습이 긴 여행에 지친 여행자를 즐겁게 한다. 바오지에서 출발해 세 시간 정도 달리던 버스도 힘들었는지 길가 주유소에 잠시 멈추자 승객들도 모두 버스에서 내려 휴식을 취하며 가지고 온 음식으로 허기를 달랜다. 버스도 역시 배가 고팠는지 주유를 하고 냉각기에 물을 채운다.
▶ 포사고잔도 이정표석
한참 달리다 보니 돌에 포사고잔도(褒斜古棧道)라고 새긴 이정표가 보인다. 바로 우리가 버스를 타고 달리는 이 길이 공명이 북벌을 위해 오르내렸던 바로 그 길인 포사도라는 길인가 보다.
▶ 석문호수
▶ 석문잔도 안내판
또 좀 달리니 우측에 커다란 호수가 보이고 호수 아래쪽으로 좀 더 달리니 깎아지른 듯한 절벽 사이를 막은 댐이 보인다. 댐을 지나 차에서 내다보니 문이 보이고 그곳엔 석문잔도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석문잔도는 공명의 북벌만이 아니라 중원과 쓰촨의 소통이 이 잔도를 통해 이루어졌기에 유방에게도 아주 중요한 잔도로 사람과 문명의 소통뿐만 아니라 전쟁과 침략을 위한 도로이기도 했다. 유방이 항우에게 밀려 이곳 한중왕으로 오며 혹시 항우가 군사를 보낼까 두려워 불을 질렀던 잔도가 바로 석문잔도다.
그렇게 6시간 가까이 달려 오후 3시가 넘어 한중에 도착한다. 새벽 6시가 좀 넘어 티웬수웨이에서 기차를 타고 바오지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한중까지 9시간이 넘게 걸린 것이다. 한중 버스 터미널에 내린 우리는 한중에서 머무르면서 미엔현 정군산과 소화고성 그리고 석문잔도를 구경할 계획이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한 버스터미널 부근에 숙소를 정한다. 장시간 차에 시달려 피곤하긴 하지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한중 시내에 있는 고한대라는 박물관을 구경할 수 있어 숙소에 여장을 풀자마자 택시를 타고 고한대로 향한다.
▶ 고한대(한중박물관) 북문
고한대에 도착하니 오후 4시 30분이다. 정문에는 고한대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고한대는 유방이 여기 한중왕으로 있을 때 궁궐자리라고 하는데 지금은 한중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고한대는 높이 8m로 3단의 계단을 북에서 남으로 올라가게 만들었다. 고한대는 입장료를 받지는 않으나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한다. 여권을 보여 주었더니 폐관시간이 30분 밖에 남지 않았으니 빨리 보고 나오란다.
▶ 고한대 안내도
▶ 망강루 후면(위)과 전면(아래)
문을 들어서면 먼저 앞을 가로막은 축대가 보이고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망강루(望江樓)라는 건물이 보인다. 처마가 하늘로 낭창 치솟아 날아갈 듯한 이 건물은 청나라 때 세운 것으로 높이가 17m란다. 망강루라는 이름은 아마 한중(漢中)이라는 지명이 한수(漢水)의 중간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니 한수를 바라보는 누각일 것이다. 한중이 바로 한수의 기를 받아 이곳에 터를 잡았고 또 이곳을 근간으로 해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웠으니 한수를 바라보는 망강루야 말로 한나라의 입장에선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망강루 위로 올라가 보고 싶었으나 문을 잠가놓았다.
▶ 계음당
망강루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계음당(桂荫堂)이라는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도 잠겨 있다.
▶ 한대비림
안으로 들어가면 후원처럼 생긴 곳에 담장이 있고 그 담장 안쪽에는 한대비림(漢臺碑林)이라고 하여 비각을 붙여놓았다. 들어가는 문 안에는 양쪽으로 그림이 걸려있다.
▶ 한대비림 누각 내에 그려진 홍문연 도
하나는 유방을 죽이기 위해 항우가 연회를 열어 유방을 초청해 놓고 칼춤을 추는 장면인 홍문연을 그린 그림 같다. 홍문연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유방을 항우는 한중으로 보냈는데 유방은 한중에서 아무도 몰래 힘을 길러 결국 항우를 무너뜨리고 한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 한대비림 누각 내 유방이 한신을 대장군으로 추대하는 그림
또 하나의 그림은 유방이 한신을 대장군으로 추대하는 그림이다. 유방은 소하의 의견에 따라 한신을 그냥 대장군으로 임명하는 게 아니라 배장단이라는 곳에서 대장군으로 모신다는 느낌이 들도록 폼 나게 추대한다. 그렇게 추대된 한신은 항우를 사면초가에 몰아넣어 유방이 패권을 장악하는데 일등공신이 되지만 한나라를 개국한 후 유방에 의해 숙청되어 토사구팽 당하게 된다.
▶ 하마석
누각 안에 둥근 돌이 보이고 그 옆엔 하마석(下馬石)이란 비석이 서 있다. 이곳에서 유방이 말을 타고 내릴 때 오르내렸던 바로 그 돌로 유방이 말에 오르다 이 돌을 잘못 밟아 그만 미끄러지자 유방은 칼을 뽑아 사정없이 이 돌에 화풀이했던 돌이라 한다.
▶ 포사고잔도진열실
▶ 석문13품진열실
박물관 가장 안쪽에는 잔도와 관련된 포야(褒斜)고잔도진열실과, 석문(石門)13품진열실이 있다. 진열실 안에는 사진촬영 금지 표시가 붙어 있고 전시실마다 직원이 지키고 있다. 그러나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고 찍는 것은 모른 척한다.
▶ 조조가 썼다는 곤설
▶ 곤설에 대한 설명
조승상부에서도 보았던 곤설(袞雪)이라는 글이다. 이 글은 조조가 한중에 왔을 때 포사잔도 석벽에 썼다고 알려진 지금까지 남은 조조의 유일한 필체라고 한다. 잘 보면 왼쪽 끝에 위왕(魏王)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조조는 평생 한중을 두 차례 찾았는데 첫 번째는 215년 오두미도(五斗米道)와 장로를 토벌하기 위해 한중을 공략한 것이며, 두 번째는 219년 유비와의 한중 쟁탈전을 벌일 때였다. 한중 쟁탈전 당시 배수진을 친 정군산 전투에서 하후연이 황충의 칼에 목이 날아가며 나며 조조는 수세에 몰리고 유비가 한중전투의 유리한 지형을 점령해 우위를 확보하면서 조조는 유비를 상대로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며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조조는 이런 상황에서도 포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결이 바위에 부딪혀 사방에 흩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물방울이 마치 눈처럼 흩어져 내리는 듯하다”하여 그 자리에서 곤설이라는 두 글자를 썼다고 한다. 조조가 붓을 들어 곤설이라는 글을 쓰자 이를 바라보던 부하가 "곤(袞) 자에 삼수변(水)이 빠졌나이다.” 라고 아뢰자 조조는 크게 웃으며 “이 친구야! 여기에 이처럼 많은 물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물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그러니 자네는 평생을 그렇게 사는 게야!”하며 계곡을 흐르며 바위에 부딪혀 튀어 오르는 물방울을 가리켰다고 하니 그곳에 있던 많은 이들이 조조의 재치에 감탄했다고 한다.
▶ 석호란 글씨
▶ 석호에 대한 설명
석호(石虎)라고 쓴 글이라고 한다. 포곡 석문 입구에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의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포효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이곳에 은거해 살던 정자진이란 아주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그곳의 모습을 석호라고 부르며 글을 남겼다고 한다. 워낙 인품이 뛰어났기에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은 정자진은 당시 왕봉(王鳳)이라는 장수가 찾아와 지도자로 모시고 싶다고 했으나 점잖게 사양했고 당나라 때 시인 이백도 정자진의 인품과 학식을 높이 사 존경했다고 한다.
▶ 포사도를 따라 간 북벌도
▶ 포사잔도 모형
▶ 석문잔도 모형
포사잔도와 석문잔도를 만들 때의 그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 잔도공사에 쓰였던 돌
▶ 조조가 곤설이란 글을 쓰는 그림
▶ 잔도가 계곡의 구름과 어울리는 그림
▶ 잔도에 동원된 석공을 그린 그림
가장 눈에 들어온 그림은 잔도를 만드는 석공(石工)을 그린 그림이다. 사슬에 묶인 채 노예처럼 고된 노동을 묵묵히, 아니 억지로 견뎌낼 수밖에 없는 석공의 그림을 보니 뭔가 가슴을 무겁게 억누른다. 과연 밥이나 하루 두 끼 제대로 먹었을까? 발목에 묶인 저 쇠사슬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울까? 그야말로 대소변은 다 어찌 했을까?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잠은 또.....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잔도를 타고 전쟁만 한 것은 아니고 사람에게 필요한 물자들이 오고가고, 우편물이 정기적으로 운송되는 통로이기도 했고 계곡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또 다른 감흥을 주기도 한다.
▶ 잔도를 중심으로 한 지도
▶ 1938년 당시의 잔도 사진
▶ 서화청
▶ 서화청 내 전시된 유물들
서화청이란 건물 내에는 한나라시대 이후 한중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겨우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한중 박물관 고한대(古漢臺)는 박물관으로는 그리 볼 게 없다. 규모가 크지도 않고 전시 유물도 변변한 게 없다. 다만 석문잔도가 댐 건설로 물에 잠기며 수몰되는 석벽에 있던 훌륭한 작품을 뜯어와 전시한 것이 전부다. 그러니 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실망할 수밖에 없다.
▶ 음마지 주변 마을
▶ 음마지 표석
▶ 음마지 전경
고한대 구경을 마치고 나오니 아직 해가 남아 있다. 고한대를 끼고 뒤로 돌아가면 장비의 말이 물을 먹던 음마지(飮馬池)가 있다는 여행기를 읽은 기억이나 그리로 가 본다. 음마지 소학교가 있는 아주 오래된 옛 마을을 지나 학교 뒤로 돌아가니 음마지라는 표지석이 보이고 동네 한가운데 연못도 보인다.
▶ 담장에 새겨진 유룡즉령(有龍卽靈)
그런데 그곳 담장에 유룡즉령(有龍卽靈)이라는 새긴 글이 눈길을 끈다. 유룡즉령(有龍卽靈)이라는 말은 당나라 때 유명한 시인인 유우석(劉禹錫)이라는 사람이 쓴 시인 누실명(陋室銘) 중에 나오는 말이다. 山不在高(산부재고) 有仙則名(유선즉명), 水不在深(수부재심) 有龍則靈(유룡즉령)라는 말에서 나온 이야기로 "산은 높아서만 명산이 아니라 신선이 살아야 명성을 얻고, 물은 깊어서 신령한 게 아니라 용이 산다면 저절로 영험해지지."라는 말로 외형적인 화려함보다는 그 실체가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요즘 우리 사회에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치장보단 스스로 내실을 기해 명품이 되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 이 연못에 용이라도 산다는 말인가? 용 커녕 이무기도 살지 않을 듯하다.
▶ 배장단 정문
음마지를 보고 유방이 한신을 대장군으로 모시는 거대한 의식을 치렀던 배장단을 찾아간다. 소학교를 나와 걷다 동네 아저씨께 물으니 우리를 그리로 안내한다. 아저씨를 따라 골목길로 가다 아저씨가 골목 끝을 가리키며 그곳을 돌아가라 한다. 알려준 곳으로 나가 돌아가니 배장단(拜將壇)이라는 곳이다.
▶ 배장단
배장단은 유방의 천하통일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출발점으로 유방이 모든 여건이 뛰어난 항우를 제압하고 천하통일을 이룬 데는 바로 한신과 같은 인재등용에 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인 점도 빼놓을 수 없지만. 한신의 등용에 대해 사마천의 사기(史記) 회음후 열전에는 『유방은 “왕께서 그를 대장으로 임명하려 한다면 반드시 좋은 날을 골라 재계(齋戒)하시고 단장(壇場)을 설치하여 의식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라는 소하(蕭何)의 진언에 따라 배장단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재를 모시려면 제대로 폼 나게 대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신하가 보는 가운데 자신의 옷을 벗어 입혀줌으로 한신에게 신임함을 보여준다. 이렇게 한신을 대장군으로 모신 유방은 이곳에서 군사를 키워 중원으로 진출하며 당시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대업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이미 문은 잠겨 있다. 담 구멍 사이로 들여다보니 별로 볼 게 없고 그냥 높이 쌓은 단 하나만 보인다. 들어가 봐도 별 것 없을 것 같아 듯해 그냥 돌아서 시내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