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4대 가축은 소, 말, 개, 돼지다. 왜 돼지만 두 음절일까? 사람 새끼는 '아기', 가축 새끼는 '아지'다. 그래서 송아지, 망아지, 강아지, 도야지다. 돼지는 도야지가 준 말로서, 다 자란 것은 '돝'이라고 했다. 돝이라는 말이 사라진 것은 아마도 이 가축에게는 시킬 일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먹기 위해 키우는 가축을 다 자란 뒤에도 계속 먹이는 것은 낭비였다.
꽤 오래전, 프랑스의 배우이자 동물 애호 운동가인 브리지트 바르도가 한국인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당신네 한국인들은 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그 선량하고 충직한 눈을ㆍㆍㆍ.'' 한국의 민속학자 한 사람이 공개답신을 썼다. ''당신네 프랑스인들은 소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농경 중심 사회에서는 소가 가장 중요한 가축이었다. 소는 몇 사람 몫의 일을 하면서도 먹이는 비용이 아주 적게 들었고, 죽은 뒤에는 농경민들에게 부족하기 쉬운 동물성 단백질을 제공해주었다. 가죽과 뿔 등도 수공업에 필수 재료였다.
우리 조상들이 흉악하게 생긴 사람을 흔히 '소도둑 같다'고 한 것도, 소를 가장 중시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부릴 수 있는 소를 죽이지 못하게 막는 우금(牛禁)이 수시로 시행되었고, 관의 허가 없이 쇠고기를 먹다가 처벌받은 사람도 많았다.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1910년께 한반도의 소는 130만마리로 일본 열도 전역의 소 마릿수와 거의 같았다. 당시 일본 인구가 조선 인구보다 3배 정도 많았으니,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3배 정도 많은 소를 기르고 소비했던 셈이다.
1924년, 소 대신 일하는 경운기가 이 땅에 첫선을 보였다. 그러나 소보다 비싸고 유지비가 많이 들며, 고장 나면 그냥 버릴 기계를 사용하는 농민은 없었다. 경운기가 논밭에서 소를 축출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께부터였다.
그 후 고작 40년, 한우의 평균 수명은 5살 미만으로 줄었다. 한국에 수입되는 외국산 쇠고기는 채 30개월을 살지 못한 송아지의 것이다. 쟁기와 수레를 끌던 소는 20년 이상 살았으나, 현대의 일 없는 소는 다 자라자마자 죽는다. 인간 대신 기계가 일할 시대에, 인간은 다른 인간들에게 어떤 존재가 될까?
2019년 1월17일(단기 4352년 무술 12월12일 갑인) 목요일자 한겨레신문 <현대를 만든 물건들> 꼭지에 실린 전우용 역사학자의 [경운기]를 2019년 12월17일 밤에 심천(心泉) 소병화가 옮겨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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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둥이의 길, 경운기와 수호신 점삼이 성(상)]
ㅡ소병화 6년 후 작가ㅡ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 온 때가 내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서였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막둥이의 길로 낑낑대며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던 때, 전기불도 없는 우리집 마당에 경운기가 갑자기 놓여졌다. 해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뺑뺑이를 돌려 2번을 뽑아 이수중학교에 배정되었다. 통학용 자전거를 손보고 있을 때, 튜브에 실바람 빵꾸를 떼우고, 찐줄(체인)에 구리스를 칠하며 학교 다닐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쯤이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져 마당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대동경운기.
일곱째로 태어난 넷째 형은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 점삼이였다. 점삼이 성은 나보다 3살 위의 형으로 어릴적 나의 '수호신'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엉덩이인지, 어딘가에 큰 점이 3개가 있어서 '점삼이'로 불렀다고 한다. 이름에 쓰는 한자도 유별나다. 큰 형은 병남(秉男), 둘째는 병균(秉均), 셋째는 병관(秉官), 다섯째는 병화(秉和)인데, 넷째만은 병란(秉鸞)이다. 아마 자신의 한자 이름을 익히느라 진땀을 뺏을 것이다.
다른 형제들과는 많이 다른 모습, 피부도 검고 머리도 직모이고, 특히 하는 행동이 독특해서 광양 진지깨 다리 밑에서 주워왔노라는 식구들의 놀림을 받았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진짜 엄마를 찾아서 광양 진지깨 다리 밑까지 다녀왔다고 했다. 의문이 가는 온갖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엄마에게 얻어 맞아가면서 물어보고 졸졸 따라다녔다고 한다.
형이 4살 때, 내가 태어나던 때 쯤, 할머니가 일본 동경올림픽을 다녀오던 1964년에는 점삼이 성이 엄마를 한참 귀찮게 하던 때라고 한다. 그 모습을 지켜 본, 그 해 동짓달에 시집을 간 큰누나의 증언을 들을 때면 모든 식구들의 포복절도를 하며 빠진 배꼽을 찾느라 부산스럽다. 그 중에서도 점삼이 성을 잘 부려먹은 끝주신센과의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할머니의 외가쪽 일가인 홍주신센이 한동네에 살았다. 큰아들인 홍주신센은 둘째 이주, 셋째 삼주를 장가 보내었고, 막내인 끝주는 고모집인 울할머니집에 머슴살이 보내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어려운 형편을 구사했다 한다.
뒷방에 거처를 하고서 우리 집안의 작고 굵은 일을 도맡아하던 끝주신센은 할머니의 외가 조카였으니 우리집 한식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끝주신센은 '점삼이 성'을 '메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끝주 신센이 ''아이, 메주야!''하면 눈을 크게 부라리고 주먹을 쥐어 보이며 ''캭! 나 메주 아니당께'' 하면, ''아! 너, 메주 말고 저 간짓대에 매달린 메주 말이다''하면 금새 씩 웃곤 했단다. 그러다가도 끝주신센이 ''메주야! 소몰고 나오니라, 밭에 가자!''하면 득달같이 외양간으로 뛰어가 어느새 소고삐를 잡고 대문 밖에 소고삐를 자보 섰더란다.
내가 기억하는 점삼이 성의 최총의 만행은 원기소 사건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마흔살이었다. 젖이 말라서 제대로 못먹이다 보니 막내는 돌이 넘어서도 엄마 젖을 독차지 하고 있었고, 점삼이 성은 엄마 젖꼭지에 아까징끼(빨간 소독약)를 발라 놓아서 막내를 엄마 젖에서 떼어 놓았다는 사건은 기억을 못하는 일이니 참고 넘어가자. 그런데 원기소 사건은 두고두고 아직도 분하다.
엄마 젖을 못다먹고 자랐다고 해서 원기소를 막내 전용으로만 사오신 아버지, 점삼이 성은 막내에게서 원기소를 뺏어 먹을 궁리를 했다. 점삼이 성의 계략은 교묘했다. 부모님의 눈을 피해서 가운데 방에 보관된 원기소 통을 꺼내 내가 몰래 먹고 있을 때다. ''야 막둥아! 이거 뭘로 맹근줄 아냐?'' ''몰라! 아부지가 나만 묵으라 해떠. 이씨!''하며 웅크렸다. 뺏기지 않으려는 필사의 모션. ''너 이거 뭘로 맹그는지 모르제?'' ''ㆍㆍㆍ?'' ''이거 닭똥으로 만든거여! 이 바보야!''
나는 처음에는 너무 맛이 있어 잘 먹었지만 그 말을 듣고나서 냄새를 맡아보니 꼭 그 닭똥 냄새가 나는 것이다. 이후 원기소에 손을 놓았다. 원기소는 점삼이 성이 부모님의 눈을 피해 다 먹었던 것이다. 닭똥 묻은 원기소를 먹는다고 ''니는 닭똥을 집어 먹냐?''며 놀린 형의 계략에 통째로 원기소를 갈취당한 탓일까? 아직도 나는 비실비실, 형은 불여튼튼이다.
조례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3년 위의 형은 나의 수호신이었다. 또래 아이들과 달리 형 친구들과 공차기를 했고, 형을 따라 선험한 모든 놀이와 운동들이 선행학습이 된 셈이었다. 형을 따라 들판을 나서면 개구리 잡기의 명수인 형에 비해 나는 개구리를 쫒아버리는 존재가 되었다. 개구리 잡는 비결을 다 전수 받았고, 가장 높이 나는 연을 만드는 비법도 전수 받았다. 동네에서 제일 오래 도는 팽이 깍는 법, 앉은뱅이 스케이트 만드는 법도 전수 받았다.
참 신출귀몰햏다. 낚시를 무척 좋아하는 형은 부모님이 낚시대는 커녕 낚시바늘조차도 사주지 않자 중학교 기술시간에 배운 것을 시도했다. 굵은 철사를 펜치로 잘라 소죽 끓이는 작은 부엌에서 불에 달구었다가 소죽통에 넣었다가를 반복하는 담글질을 하고, 두드리고 구부리고 갈고 바늘코 자국을 내어 수제 낚시바늘을 만들어서 낚시를 하러 갈 정도로 잡기에 능했다. 새를 잡는 새총은 물론 우산대를 이용한 화약총과 권총도 만들어 새를 잡으러 다녔다. 실지로 대밭에서 새를 잡았으니 신출귀몰 그 자체였다.
원기소를 다 뺏어 먹은 덕인지 형은 운동에만 만능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전남체육고등학교에 가입학하여 합숙기간을 보내고 있는 점삼이 성을 아버지가 자퇴를 시켜서 가방채 챙겨 집으로 데려왔다. 집으로 끌려온 점삼이 성에게 맡겨진, 마당에 놓여진 대동경운기.
자식 중에 한 명은 농사를 지어야 한다며 아버지는 아직 어린 점삼이 성에게 모든 농사일을 맡기셨다.
2019.1.18. [경운기와 점삼이 성(상)]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