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갑사에 부는 바람
이 명 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갑사를 들어가면서 먼 산에 잎을 떨군 나무들의 빽빽한 군상을 본다. 바로 양옆에는 아름드리 裸木들이 크고 작은 나무들과 서로 몸을 부비며 추운 겨울을 나고 있다.
일주문 밖 장승들도 추위에 떨고 있는 듯하다.
노송이며 느티나무도 천년 고찰 갑사의 품에 안겨 바람이 전해주는 옛 이야기를 속삭인다.
절 주변의 수려한 경치 또한 甲寺가 계룡산에서 으뜸(甲)임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가람(伽藍)이란 승원(僧園) 또는 중원(衆園)의 의미를 지니는데, 당(堂)ㆍ탑(塔)ㆍ가람(伽藍)을 포함한 복합적인 개념이며, 사원 자체, 사원의 구조를 말하기도 한다.
사원의 이름 앞에는 반드시 산 이름을 붙이게 되어 있는데, 갑사의 일주문은 계룡산갑사(鷄龍山甲寺)라고 현판이 붙어 있다.
어느 절에 가나 일주문에는 문이 없다.
이는 불교가 무신교(無神敎)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는, 불교의 절대평등 사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다.
갑사는 불교신앙의 대상인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와 삼보에 대한 신앙적 전개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해설사 선생님들의 뒤를 따른다.
갑사의 사천왕을 지난다.
특이하게도 갑사에는 문화관광해설사가 없었다.
그러니 다른 절에서는 그냥 들어가야 할 우리들이 돈을 주고 들어가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천왕의 부릅뜬 눈이 나이 들어 그냥 들어간 나에게, “나이 많은 게 무슨 권리냐?”는 듯 호통을 치는 것 같다.
사천왕은 본래 불교의 신들이 아니다. 불교 이전의 인도의 베다신앙의 신들이었다.
베다신앙은 다신교로써 지금의 힌두교로 변했는데, 제석천과 사천왕을 불교에서 수용하면서, 불교의 외호신으로 두 번째 문에 배치한 것이다.
절마다 특성이 있는 사천왕, 남방불교냐 북방불교냐에 따라 사천왕의 이름도 다르고, 형상도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며 대웅전지역으로 들어갔다.
갑사는 마곡사(麻谷寺)의 수말사(首末寺)다.
갑사의 대웅전은 양편에 계곡을 끼고 있는 지봉(支峯)의 끝부분 중심에 서향으로 좌향을 잡았다.
대웅전 주변의 울창한 裸木들은 기둥의 주련(柱聯)의 뜻을 목탁소리 따라온 바람에게 배운다.
淨極光通達(정극광통달) : 맑음 다한 빛 통달함이여
寂照含虛空(적조함허공) : 고요히 저 허공 다 비추네
却來觀世間(각래관세간) : 마음의 번뇌를 물리친 후 세간을 관찰해보니
猶如夢中事(유여몽중사) : 모두가 꿈속의 일과 같도다
雖見諸根動(수견제근동) : 비록 모든 근원의 움직임을 볼지라도(六根)
要以一機抽(요이일기추) : 요컨대 단번에 뽑아버릴지어다.
‘다함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빛과 허공인데, 번뇌를 물리치고 세상을 보니, 모두가 꿈만 같구나.
육근의 작용을 볼지라도 무명을 단번에 뽑아버리고 깨달음을 얻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천년 세월 골짜기에 퍼져 간다.
갑사의 가람은 대체로 대웅전지역과 팔상전지역, 표충원지역, 대적전지역 등의 4개 지역으로 부분되는데, 우리가 먼저 도착한 곳이 대웅전지역이다.
대웅전 안에는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우측에는 아미타불, 좌측에는 약사불을 봉안하여 삼세불(三世佛)의 봉안형식을 취하였으며, 협시불로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의 4대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이는 석가불의 협시는 문수ㆍ보현보살, 아미타불의 협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또는 지장보살이며, 약사불의 협시는 일광ㆍ월광보살이라는 원칙을 깨고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생략하고 있다.
이것은 여래상과 여래상 사이에 1협시씩만 봉안한데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4협시의 배치형식은 석가의 우측에 관음을, 석가의 좌측에 문수를, 아미타의 우측에 보현을, 약사의 좌측에 세지를 배치하였다.
아미타를 중심으로 보면 관음, 보현, 석가를 중심으로 보아도 관음, 문수, 약사 또한 문수, 세지로 전연 맞지 않는다.
이는 약사의 협시인 일광ㆍ월광보살은 4대보살에 비하여 그 신앙의 정도가 일반화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생략된 것이리라.
석가ㆍ아미타ㆍ약사의 삼세불 형식은 석가의 교화적, 신앙적 기능을 아미타와 약사가 분담하여 나타내고 있으나 이들 기능이 다시 석가에게로 통섭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갑사의 대웅전은 석가의 절대자로서의 기능을 개합(開合)의 원리로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삼존불 양식에 나타난 보살은 어디까지나 보조적 기능으로서의 협시에 지나지 않으나, 諸如來는 독립된 불격과 불국토를 지닌다는 특징을 갖는다.
사실 절에 와서 알음아리를 낸다는 것은 오히려 상(相)에 집착하여 그 사찰의 중요한 요소를 못보고 지나칠 수 있다.
그래서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관광의 일반상식을 버려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불화(佛畵)를 보고 상단, 중단, 하단신앙을 논한다든지, 영산회상도와 아미타회상도와 약사여래회상도 등을 구분 설명한다는 것은 고루함과 지루함만 더할 뿐이다.
팔상전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을 8폭의 그림으로 그린 것을 보고, 삼성각에서 칠성, 산신, 독성의 삼성을 따로따로 전각을 마련하지 않고 한 전각 안에 봉안하고 있음을 보았다.
상(相)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고, 사물이나 형체는 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마음을 멀리하고 불보살 탱화 등의 밖에서 부처를 찾고, 지혜가 아닌 지식으로 사물을 보려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본다.
삼성(三聖)은 본래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토속신앙의 신들이었다.
그러한 신들을 불교에서 수용하여 불교화 한 호법신앙의 대상인 것이다.
옛 사람들의 신앙형태를 현대와 만나볼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는 것 같다.
믿음의 형태란 천차만별이며, 토속신앙을 수용하는 형태도 불교위주이기 때문에, 별도의 전각에 모신 삼성각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명부전(殿)보다 한 단계 낮은 당(堂)이나 각(閣)이라 칭하는데, 그것은 불보살과 나한까지만 殿을 쓰는 불교의 본래 신들과 구별하고자 함이리라.
갑사의 중심 가람이 애당초에는 이 대적전 지역이었는데 이후 어느 때인가 오늘의 대웅전지역으로 옮겨왔다는 것. 천년의 세월 동안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 대적전(大寂殿) 앞에는 보물 제257호인 고려시대의 부도가 세월의 무게를 온 몸으로 견디며 옛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듯하였다.
대적전 안의 삼존불은 석가삼존이라 하고 있으나 수인으로 보아 아미타삼존으로 보였다.
석가이든 아미타이든 대적광전에는 법신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그 협시로 석가모니불(화신)과 노사나불(보신)을 두어 삼신불(三身佛)체계를 갖게 되는 것이 상례이다.
왜 이렇게 배치되었는지는 당시 불상을 조성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편액이 틀렸거나 아니면 불상의 봉안이 잘못된 것이라 하겠는데, 내 좁은 소견은 불상의 봉안이 후대에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다.
부도는 본래 가람형성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부도가 대적전 앞에 있는 것도 후대에 잘못된 배치의 소산일 것이다.
산중에 있는 것을 옮겨온 것이라 하니 잘못 배치된 것이 틀림없지 않은가.
당간은 사찰 입구 등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배치함이 원칙이다.
그 사찰의 불력을 외부에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절 앞에 세우는 깃대인 당간, 불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내쫓는 기능을 가진 당이라는 깃발을 달기 위한 깃대이며, 당간지주는 당간을 좌우에서 지탱하기 위한 버팀기둥을 말한다.
갑사의 당간은 지름 50cm의 철통 24개를 이어놓은 것으로 높이는 약 15m이다.
철당간이 하도 높아 한 번에 사진을 찍지 못하고 두 번에 걸쳐 찍었다.
기술문제도 있지만 내려오면서 멀리서 전체를 찍을 수 있는 예측을 하지 못한 우둔함이 더 크다.
아는 것이 얕으면 겉모양만을 보는 법이다.
나도 손해요 남 또한 미혹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나 잘 거두자.
이미 머리 희어진지 오래다.
‘네 마음이 부처다’는 말 지금도 아리송하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 역시 아득할 뿐이다.
해는 저물어가고 있다.
현재를 과거로 밀어내는 순간이 너무 급하여 ‘신원사’ 입구에서 차를 돌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