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물빛 출품작 / 김학원
08-11-01 19:46
구름바다
조회 수 485 댓글 0
1 마지막 의미인가 대답인가
홀로 깨우친 것을 말하려하나
골방에 앉아있을 때와 같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오래된 성벽조차 냉혹한 비명으로 떠는 것처럼
생의 난해함 또한 불립문자로 나타나니
언어 이전의 세계는 알 수가 없다
세상사란 뜬구름 같아 있기는 하고 없기도 하여
버리기엔 서운하고 버거운 것인지도 몰라
일체를 뛰어넘는 힘에 해답을 얻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본 것은 아침의 한때인가
일몰의 저녁 한때인가,
잎 떨어지고 그림자 사라진
돌 틈의 귀뚜라미 한 마리
그것이 내가 얻은 마지막 의미인지,
대답인지도 모르겠다
2 축혼가
어느 때나 너는 너무나 조용하다
웃는 너를 보고 있으면 내 마음 봄날처럼 훈훈하다
너에게는 삼월하늘 같은 아련한 부드러움이 어울리고
너는 모든 아름다움 감추고 있으나 해풍처럼 드러난다
밭에서 일하며 노래하는 아일랜드 아가씨처럼 건강하고
실로암 백합꽃보다 희고 청순하다
너를 생각하면 뜨거운 연민의 정 가슴속에 끓어오르고
애잔하고 고운 너의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다면,
세상 온갖 근심 사라지고 새로운 시의 샘이 솟아난다
어쩌면 너는 장중한 기도소리로 움터나기도 하고
단순한 바람소리로 근심 없이 태어나는구나
오오 작고 귀여운 아가씨 나의 보석이여
내 너에게 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운율로 노래하나
이미 내 능력은 보다 못한 차선의 가락을 취할 뿐
너의 아름다움 고결한 정신의 미덕 무후한 순결
어느 하나라도 옳게 너를 노래할 순 없으나
오래오래 행복하라 드맑고 높은
지복한 사랑으로 넘치어라
3 사월, 어느 날
안개 자욱한 아침 버들잎은 싱그럽다
사월의 꽃을 받든 저들 잘디잔 숨결은 일어나
꽃핀 자리에서 오월을 기다린다
가슴속에 일어난 찬바람 헛간과 장독대를 돌다
뒷산 까치집 그늘에 부딪힌다
풀잎은 쪼그리고 도라지 잎은 기지개를 편다
세우청강細雨靑江이라 옛 시의 그늘로 오는 시간에
들길을 걸어 송림으로 돌아오는데
파리한 아픔은 심장의 벽을 헐어낸다
너에게 가는 사랑은 아직도 마음을 괴롭히고
화살 되어 내 심장 깊숙이 꽂힌다
시의 시원을 찾아 헤맬 때도 그랬다
가슴에 붐비는 소란 지난 날의 아픔,
4월의 바람 속으로 날려보낸다
4 너희들 오는 소리
지나간 날들 마음벽에 그린다
달은 버드나무가지를 지나 서천에 안기고
나는 밤마다 너희들 재잘대는 소리,
바다가 물결을 밀어내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당신을 기다린 날 보다 세월이 많다
당신에 대한 연민은
조수처럼 밀려가고 밀려오며
바다의 소리를 대신 전하는듯
바닷빛살 같은 향연을 벌인다
바람은 사건을 품고 구름은
황홀한 순간을 품으니
거기 나무 그늘에서
여인들 신선한 알몸이 햇살 받듯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나 너희들을 향하여 손짓한다
여기에 보석 반짝임 같은
당신 음성 더한다면
5 꽃대궁
메마른 대궁에서
지난해 봄이 남긴 꽃잎을 살피다
책갈피에 끼워둔 꽃잎이 꽃잎을 끌어내어
유약 발라구은 듯 빛나던 때를 정리하다,
보전으로 대궁의 聯想을 통하여 꽃핀 봄날
우리에 갇힌 짐승 울부짖는 겨울날
인적 드문 보리밭에 차를 세운다 원두막 素月池 저쪽,
무학산 노을이 번져가고 상암천 물소린
댓잎 흔들리는 소리로 멀어진다
바닥을 치고 오른 저 생명의 꿈틀거림을
화선지에 옮겨온 대궁 비밀을 열면,
마른 꽃잎과 물오른 대궁의 꽃잎 사이로
가만, 불길이 들락거린다 봄의 귀로 들린다
허상과 현실 循環을 반복하여
대궁에 꿀벌이 날아온들
꽃대궁에 피어날 봄을 기다린다
수만 울음 터트릴 날을
6 풀벌레
풀벌레 소리 풀벌레 소리
낮게 낮게 흐르는 실개천
작두로도 못자를 소리를
병상 밑 휴지통에 버릴 수도 없어
자연의 소리를 병상의 유리병에 담아두었다
구급차 사이렌 소리에 유리병,
산산 조각 난 너희들 혹독하다
고통이 체내를 돌고 병실은 고요하다
집집마다 살구꽃 지고
길모퉁이에선 징치는 소리가 들린다
마을 축제가 열리는가 보다
세상 고통을 하얀 무명으로 지우고
말목엔 고리만 남은 우시장
풀벌레 소리 다시 들린다
밟혀도 살아나는 잡초로
7 秋日午後
낮은 집들은 버들 숲에 반쯤 가리고
바람과 구름은 날짐승처럼 하늘을 비상한다
가을날 창백한 빛살 포도밭을 지나
작은 오솔길에 닿는다
그곳에서 또다시 시작되는 뿌연 들길
산꿩이 송림에서 울고 있다
가을날 오후 나는 시 쓰기에 열중하고
서문다리 밑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만
내 귀에 찰랑인다
도립병원지붕 위에선 비둘기
구구구 시를 쓴다
8 봄밤
어스름한 들길을 걷고 있으면
논둑길 저만치 머구리는 다시 울어라
지새는 봄밤 창문에 또렷이 들려라
우리 님 가고 난 밤에도 울고
추녀 끝에 달 뜬 밤에도 울어라
앵두꽃 꽃잎 지는 날에는 더욱 울어라
9 그림 없는 액자
그림 없는 액자 속에 들어가
피카소를 그리다 내 자화상을 그린다
싸락눈 오는 날은 골목길 집들을 그리다,
홍시 있는 마을 너머 강촌을 그린다
마늘 눈 싹터난 푸른 아침을 그리고
놋대야에 떨어지는 빗소리로 산사풍경을 울린다
쇠죽가마에 여물 끓는 저녁을 보고
해지기전 불 켠 우사의 소들을 돌아본다
길가는 나그네 그림자 길게 누운
어스름 산촌의 등불이고 싶다
10 낮달
낮달이 사금파리로 빛난다
차고 투명한 것들이 낮달에 걸리고
폐품처럼 번져가는 헛간의 정적
복사꽃 피고 난 후 열매하나 툭 떨어진
흰 집 들어선 골목길 정경 아름답다
길을 떠나다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생각하자
푸르게 살아난 행간의 일절이
나를 슬프게 하고 그녀는
무너져 슬픈 꽃으로 피어났다
물끄러미 길가의 사시나무를 바라보자,
낮달도 무심히 나를 보고
11 나는 숨죽이고
별들은 창문에 몰려와
투명한 보석으로 박힌다
바람은 어둑한 뜰을 돌다,
외등 위로 올라가
후박나무를 흔든다
문득 죽은 아내의 내음이 난다
목욕에서 갓 나온 그런 풋풋한 내음이다
액자 속 그녀가 웃고
그녀가 웃자
내 아이도 키득키득 웃고,
뭇별들은 반짝인다
나는 숨죽이고
12 강촌
억새풀 서늘하게 눕고
강상의 배들 산그늘 싣고 간다
언덕에서서 저녁 해 기우는
능선 위로 부리긴 새 날아가다,
흐린 눈에 점으로 사라지고
서쪽 길 가로질러와
노린재나무에 감도는 바람
토해놓은 가혹한 노을의 형해,
강기슭으로 돌아오는 배들
강촌엔 저녁연기 오르고
여물 끓이는 아이들
13 표충사에서
밀양 민속촌 강변에서 바라본
세 개의 바위모양이 특이하였다
흐르는 강물에서 하늘을 건져 올리고
바람의 음계音階를 타고 올라가자
집과 산이 거미집같이 보였다
허공의 높이에서 현기를 느낀 나는
지상이 그리워져 다시 내려와
집과 사람을 만나니 빈 허공보다,
외로움은 덜하였으나
표충사 경내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과
절집의 적요 나무 끝에 앉은 것을 보았고
순간 적멸의 즐거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14 낮달
낮달이 사금파리로 빛난다
차고 투명한 것들이 낮달에 걸리고
폐품처럼 번져가는 헛간의 정적
복사꽃 피고 난 후 열매하나 툭 떨어진
흰 집 들어선 골목길 정경 아름답다
길을 떠나다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생각하자
푸르게 살아난 행간의 일절이
나를 슬프게 하고 그녀는
무너져 슬픈 꽃으로 피어났다
물끄러미 길가의 사시나무를 바라보자,
낮달도 무심히 나를 보고
15 처자의 뒷모습
헛간에서 놀다간 가을 햇살
구절초에 위에 앉는다 잠자리가 날고
갈수록 좁아지는 구절초 그늘이
동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보았는가
사과밭 옆 개천 바위를 치는 물소리
닭들은 꼬끼오 울고 가을 하늘은 창백하다
염소가 집에 돌아간 후 정적은
풀벌레 울음소리로 채운다
물동이를 이고 가는 처자의 뒷모습,
환하게 빛나고 햇살도 물동이를 따라간다
가을은 짧아지고 처자의 모습만
내 눈에 각인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