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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불교 강동교당 원문보기 글쓴이: 강미현(알라)
병든 사회와 그 치료법 9월 12일 ~ 9월 19일
제15장 병든 사회와 그 치료법
사람도 병이 들어 낫지 못하면 불구자가 되든지 혹은 폐인이 되든지 혹은 죽기까지도 하는 것과 같이, 한 사회도 병이 들었으나 그 지도자가 병든 줄을 알지 못한다든지 설사 안다 할지라도 치료의 성의가 없다든지 하여 그 시일이 오래되고 보면 그 사회는 불완전한 사회가 될 것이며, 혹은 부패한 사회가 될 수도 있으며, 혹은 파멸의 사회가 될 수도 있나니, 한 사회가 병들어가는 증거를 대강 들어 말하자면 각자가 서로 자기 잘못은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하는 것만 많이 드러내는 것이며, 또는 부정당한 의뢰 생활을 하는 것이며, 또는 지도 받을 자리에서 정당한 지도를 잘 받지 아니하는 것이며, 또는 지도할 자리에서 정당한 지도로써 교화할 줄을 모르는 것이며, 또는 착한 사람은 찬성하고 악한 사람은 불쌍히 여기며, 이로운 것은 저 사람에게 주고 해로운 것은 내가 가지며, 편안한 것은 저 사람을 주고 괴로운 것은 내가 가지는 등의 공익심이 없는 연고이니, 이 병을 치료하기로 하면 자기의 잘못을 항상 조사할 것이며, 부정당한 의뢰 생활을 하지 말 것이며, 지도 받을 자리에서 정당한 지도를 잘 받을 것이며, 지도할 자리에서 정당한 지도로써 교화를 잘 할 것이며, 자리(自利) 주의를 버리고 이타 주의로 나아가면 그 치료가 잘 될 것이며 따라서 그 병이 완쾌되는 동시에 건전하고 평화한 사회가 될 것이니라.
1. 대의
제목 자체를 살펴보자.
병든 사회와 그 치료법! 병든 사람과 그 치료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종사님께서는 병든 사람과 그 치료법이라고 하지 않고 ‘병든 사회와 그 치료법’이라고 하셨다. 대종사님의 병맥진단은 개교표어(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와 연결된다.
세상, 사회가 병든다. 물질 만능의 시대가 와서 사회자체가 병든다는 것이다. 사회가 병들면 그 구성원들은 같이 병들기 마련이다.
사회도 치료하고, 그 구성원인 사람도 당연히 같이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법문이다.
병든 사회의 반대는 건전한 사회인데, 건전한 사회가 되면 그 구성원들도 건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법문의 요지는 사회자체를 치료하여 개인도 함께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이 법문의 중요성은 대종사님께서 개인과 사회를 구분해서 보셨다는 것이다. 대단히 탁월하신 점이다.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면, 결론적으로 사람들의 생활도 건전하고 행복해진다고 보신 것이다. 대종사님께서 사회를 바라보시는 분명한 관점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을 공부하신 어른은 아니지만, 사회를 보는 관점이 분명하여 병든 사회와 그 치료법이라고 하셨다.
사회학에서 사회를 보는 관점은 ①사회명목론 ②사회실재론 두 가지가 있다.* 어느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사회학에서도 확실한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경향은 대체적으로 결정된 상태이다.
①사회명목론은 사회는 개인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람 하나를 놓고 사회라고 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사회가 이루어진다. 대인관계속에서 사회는 형성되는데, 그 사회는 개인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개인이 흩어지면 사회는 없어진다고 본다. 개인의 집합에 불과한 사회를 보는 관점에서는 사회가 인간 개인에게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 사회는 이름만 있는 것이고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②사회실재론은 개인이 모여서 사회가 형성되었지만, 그 사회는 하나의 실재하는 존재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개인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원불교 교단도 하나의 사회이다. 원불교에 들어오면 창립정신을 강조하는데, 실재하는 집단에서 영향력을 개인에게 미치는 것이다. 개인을 구속하기도 하고 해방하기도 하고 돕기도 하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사회실재론의 관점이다.
대종사님께서는 사회실재론에 근거해서 이 법문을 내리신 것이다. 실재론적 입장에서 볼 때, 사회도 사회불이다. 사요는 인간불에 대한 불공법이라고 말했었다. 사은보은은 불공의 대상이 우주만유 삼라만상 전체이고, 우주만유불중에서 가장 권능이 뛰어난 인간에 대한 불공을 사요로 말씀하셨다. 인간들이 모이면 사회가 되는데, 사회명목론입장에서 보면 사회는 인간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실재론 입장에서 보면 사회는 엄연히 존재하는 단체이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회불이라고 하는 단어가 형성이 되고, 사회불에 대한 불공의 방법을 제시하신 것이 사요가 된다. 사요할 때 이야기 했는데, 잊어버리는 것도 좋다. 그래야 강의를 할 내용이 또 생기는 거지.
대종사님께서는 사회실재론적 입장에서 사회를 바라보셨다.
* 사회 명목론(社會名目論) : 사회는 개인들의 집합체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라는 관점
사회는 수많은 개인들의 집합체에 대한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므로 실재하는 것은 개인뿐이라는 관점이다. 즉, 사회보다는 개인이 우위에 있으며, 사회라는 개념은 명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7~18세기 영국 및 프랑스의 시민 혁명에서 중요한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사회 계약설에 의하면 사회란 개인들이 자연권을 보장받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인공물로서 개인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에 불과하므로 국가(사회)는 개인의 천부 인권각주[1] , 즉 자연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에 명목상 존재하는 사회는 실체인 개인의 자유를 구속할 수 없으며 개인은 의지(필요)에 따라 사회를 다시 구성, 재계약하면 된다는 관점이므로 사회 명목론과 사회 계약설은 동일한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회 실재론(社會實在論) : 사회를 개인의 단순한 총합이 아닌 실체적 존재로 보는 관점
개인들은 단지 사회를 구성하는 단위에 불과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전체 사회뿐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즉, 사회는 개인보다 더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 개인의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한 개인이 사라져도 사회가 지속되는 것이 그 근거이다. 사회 구조는 하나의 유기체와 같으므로 사회 구조를 이루는 구성물, 즉 유기체 내의 어느 한 부분은 각각의 기능자로서 전체가 살게 된다는 사회 유기체설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사회 유기체설은 사회라는 유기체로서의 생물이 존재하기 위해 개인을 하나의 기관(organ)에 비유하는 것으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관점이다. 사회는 사회 체계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균형성과 이 균형 상태로 돌아가려는 항상성을 지닌다. 이렇게 사회가 하나의 체계로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이는 사회 구성원인 개인을 구속하는 실체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회 실재론은 실체로서의 사회가 작용하는 기능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사회는 해당 기능을 수행하면서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추구 · 부여하므로 기능론적 관점과 동일한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A. 병든 사회
⑴ 불안정한 사회가 된다. 안정성이 깨어진다.
-> 사회의 안정이 깨어진다.
가정이 편안하다는 의미에서 보금자리라 한다. 이 가정자체가 보금자리이면 편안하고, 쉬게 된다.
병든 사회가 되면 가정의 안정이 깨어지는 것이고, 가정이나 조직, 단체가 마찬가지이다.
우리 국가를 살펴보면, 지난 세월호사건 이후에 우리 사회 전체가 불안정하다. 이것이 병든 사회의 증상이다. 지도자가 잘못되었든지, 조직의 움직임이 잘못되었든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병든 사회가 되었다.
⑵ 부패한 사회가 된다.
부패의 반대는 청렴이다. 후진국일수록 부패가 심하다. 선진국일수록 청렴한 사회가 된다.
조직과 단체가 건전하려면 정직한 사회, 정직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추석때 영산성지에 갔는데, 어느 남자분이 서성이고 있더라. 말을 걸었더니 여수에서 왔다고 한다. 영산성지와 정관평에 대해 설명해주고, 원불교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그 분 대답이 원불교 하면 떠오르는 인상이 있는데, “정직, 청렴”이라고 했다. 원불교라는 사회불, 단체가 건전해서 사회에 심어준 인상이 정직과 깨끗함인데, 더 키워나가야 한다.
병든 사회는 정직이 깨져서 부정부패로 병들게 된다.
부패한 사회에서 제일 잘 통하는 것이 돈, 자본이다. 돈만 주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중국이나 인도에서 사업하는 사람 이야기로는 공무원을 상대하면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고 한다. 돈만 주면 다 된다고 한다. 이런 사회가 병든 사회이다.
대종사님께서 원불교를 이 땅에 창교하신 것은 부패한 사회를 청렴한 사회로 만들기 위함이다.
내가 군대생활을 오지게(?) 34개월 했다. 군에서 좋은 것도 배웠지만, 안 좋은 것도 많이 배웠다. 돈만 주면 다 통한다. 이런 사회를 부패한 조직이라 한다.
되는 것은 정확하게 되어야 하고, 안 되는 것은 안 되어야 한다. 원리와 원칙에 입각해서 해야 한다. 이것이 정립된 사회가 부패하지 않은 사회이다.
⑶ 파멸의 사회가 된다.
사회가 완전히 무너진다. 마지막에 가서 사회가 망하는 것이다.
2. 병든 사회의 증상
⑴ 자기 잘못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 드러낸다.
살다보면 흔히 있는 현상이다.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자기 잘못을 숨기고, 상대방에게 그 잘못을 전가시킨다.
지난 29일에 국회의장이 중앙총부를 방문했다. 국회의장을 정문에서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데 30분 지연되어 그 시간동안 중앙교의회의장, 교정원장, 익산시장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중앙교의회의장이 “나에게 원광대학, 수도권으로 안 갑니까?” 하고 이야기하기에, 내가 “기회가 되면 가야죠.” 대답했다. 그 이야기를 익산시장이 “어른님들이 말씀을 어찌 쉽게 하십니까?” 하더라. 내가 그 자리에 부장들도 있기에 다 들으라고 말을 했다.
“2011년도에 원광대학이 부실대학이 되었을 때, 내가 그 책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데, 익산시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중 한 사람도 원광대학을 살리자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동문들이 찾아 와서 사퇴하라고 하고, 시장도 한 마디도 안했다.” 부장들도 들으라고, 이럴 때는 이렇게 대처하라고 높은 목소리로 말 했다. “그 뒤에 남원에 있는 서남대학교도 부실대학교 되었는데, 매스컴에서 남원시민, 시민단체들이 모두 일어서서 서남대학교를 살리기 운동을 하더라. 이런데 익산시가 원광대학을 잡아넣을 자격이 있느냐.” 또 한마디 더 붙여서 “나는 이해한다. 종교적인 문제로 그럴 수 있다.” 원광대학은 원불교가 운영하고, 익산에는 다른 종교가 많으니 타종교가 원불교 잘되는 것을 꺼릴 수 있다. “시장님도 아시다시피 원불교는 배타성이 없다. 한국사회, 다종교사회에서 다른 종교간에 상호 대화와 협력을 추진해 나가는데 원불교가 그 매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이런 원불교가 운영하는 원광대학에 그렇게 할 수 있냐.”
나도 그렇게 퍼넘겼다.
자기 잘못은 돌아보지 않고, 그 잘못된 원인을 남에게 전가시킨다.
우리 교법으로 말하자면, ‘원망병’이다.
사회가 건전하려면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전가시키고 드러내면 안 된다.
⑵ 부정당한 의뢰생활을 한다.
서울에 가서 작은 대원회 법회를 보고 왔다. 서울대학교 원불교학생회를 줄여서 서원회라 한다. 고대는 고원회, 이대는 이원회라 한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면 대원회로 편입된다. 법회를 보고 늦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했는데, 이슬람 국가를 자주 가는 대원회 회원이 대종사님께서 말씀해주신 은생어해, 해생어은을 뼈저리게 느낀다고 한다. 중동에 석유가 많이 나니 돈을 많이 번다. 석유로 돈을 버는 나라들은 모든 국민들이 다 놀고 먹는다. 외국인노동자을 몇 백만명씩 돈 주고 일을 하게 한다. 이러니 해생어은이다. 석유가 나오는 건 은혜이다. 우리나라에다가 석유를 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진리가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 그런데, 결국은 그 은혜에서 해로움이 된다. 이게 바로 부정당한 의뢰생활이다.
부정당한 의뢰생활을 하면 결과적으로 해생어은이 된다. 부정당한 의뢰생활을 하면 개인의 능력이 사장된다.
교무가 되어 발령받아 나갈 때 어떤 곳으로 가느냐에 따라 개인의 능력이 발휘될 수도 있고, 사장될 수 있다.
인력소모현상, 나는 지금 소모된 인력인가, 소모되지 않은 인력인가? (학생이 소모된 인력이라 대답한다.) ^^ 퇴임을 하면 직업이 없으니 교단에서 부양을 해줘야 한다. 다행히 이 강의를 하라고 해서 조금 소모에서부터 벗어났다. 지방에서 법회보러 오라고 하니 소모에서 벗어난다. 잘 안 부른다. 부담스러운 가보다. 이 방송듣고 부담갖지 말로 부르시라. 소모되면 안 된다. 우리 교단을 위해서 죽을 때까지 노력하고 공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임지를 선택하는 인사발령이 아니지만, 직장에 가면 자기가 소모된 인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단에 빚지는 일이다.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 교단에 공헌을 해야 부정당한 의뢰생활이 되지 않는 것이다.
교단에 들어온 이상, 공중사와 공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서 부정당한 의뢰생활을 하지 않아야 한다.
⑶ 지도 받을 자리에 정당한 지도를 받지 않는다.
지도 받을 자리에 정당한 지도를 받지 않으면 지자의 능력이 사장된다.
지도 받을 자리에 지도를 받으면 지자가 살아난다.
이 강의에도 여러분들이 왔기에 내가 지자로서 내 능력이 살아나는 것이다. 만약 아무도 안 왔다면 나는 물 먹는 거 아닌가. ^^
배울 자리에 있는데 배우지 않는다면 그 사회의 지자 능력이 사장되고 지자가 지자노릇을 하지 못한다. 결국 사회 자체가 침체된다.
지도 받을 자리에 지도를 잘 받자는 것을 현대 말로 한다면 엑셀런스형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강의를 하기 위해서 준비하는데, 과거에 알았던 이야기도 다시 보니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하면 할수록 이 분야에 대한 내 능력이 개발된다. 정전강의에 있어서 내가 원불교에서 괜찮은 사람이 아니냐.^^
지도 받을 자리에 지도를 받으면 그 사람을 더 잘 하는 사람으로 키워주게 된다. 엑셀런스, 즉 우수성을 더 키워가게 된다.
부정당한 의뢰생활은 개인의 능력이 사장되고, 지도받지 않으면 지자의 능력이 사장된다.
⑷ 지도할 자리에 정당한 지도로 교화를 할 줄 모른다.
지도의 위치에 있을 때 확실하게 지도를 해서 가르쳐야 한다.
지도를 못 하는 것은 관료의식 때문이다. 관료의식이 있으면 밑에 사람이 가르치려고 하면 지도받지 않는다. 무조건 윗사람만 가르치는 것이다.
계급에 관계없이 지도할 자리에서 지도를 해야 건전한 사회가 된다.
총부식당에 점심 먹으러 가면, 앉는 자리가 있다. 교정원장하고 나하고 몇 사람이 앉는 자리가 있다. 나는 젊은 사람과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내 자리를 피해서 뒤로 간다. 그래서 식사 때마다 속이 좀 상하다. 거기에 앉으면 옆 사람들이 막 뭐라고 해서 못 앉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밥 먹는데 자리가 뭐가 중요하냐. 어디 앉으면 어떠냐. 젊음 사람과 가깝게 하고 싶은데, 나는 너무나 먼 당신이야. 나이먹고 높아지면 외로워진다. 안 외로우려면 자기가 내려가야 한다.
⑸ 공익심이 없는 병
공익심이 없는 병을 세 가지로 제시하셨다.
① 착한 사람은 찬성해주고 악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못 하는 것
선한 사람에게는 잘 한다고 말해 주고, 못 하는 사람은 불쌍하게 생각해야 한다.
상대심이 있으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
부처님의 슬픔(자비의 비)은 잘못하는 중생들을 보고 슬퍼하는 것이다. 우리의 슬픔과 부처의 슬픔은 다르다.
② 이로운 것은 나에게 주고 해로움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
이로운 것은 남에게 주고 해로움은 내가 하는 것, 자해타리가 되어야 한다.
자해도 진리적으로 보면 자리가 된다. 자해를 자리 삼을 줄 알아야 한다.
사회분위기가 자해타리가 되어야 건전한 사회가 된다. 자리해타가 되어서는 안 된다.
③ 편안한 것은 나에게 주고 괴로움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
편안한 것은 저 사람에게 주고 괴로움은 내가 담당해야 한다.
공익심은 우리 신앙행위의 극치이다.
3. 치료방법
⑴ 자기 잘못을 항상 대조할 것
곧, 잘못을 상대방에게 전가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을 바루는 가장 기초가 자기 스스로를 먼저 바루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먼저 바르게 해야 세상을 바르게 할 수 있다.
대외관계에서 항상 감사하라는 것이다.
감사는 원망병의 근본적인 치료방법이다. 감사할 자리에 감사 한 번 못하고 원망할 것을 찾아다니는 경우도 있다. 원망하는 사람은 원망할 거리를 찾아서 원망하게 된다. 이 회상을 만나 그런 삶을 살 수도 있다. 병든 사회 치료에 가장 근원적인 치료는 감사이다. 은혜의 핵을 터뜨려야 한다. 대각개교절 주제가 ‘모두가 은혜입니다.’이다. 대종사님은 은혜의 성자이시다. 은혜의 성자로 이 땅에 오셔서 세상병 치료하기 위해 은혜를 알려주셨다. 감사는 약재이다. 인생의 요도는 약재이고, 공부의 요도는 의술이다. 인생의 요도는 사은사요이니 감사가 약재이다. 사은에 대한 감사라는 약재로 세상병을 치료하려 하셨다. 대종사님의 포부가 확실하게 들어와야 한다.
⑵ 부정당한 의뢰생활을 하지 말자 = 자력양성을 하자
개인적인 자력뿐 아니라 집단적 자력을 세워야 한다.
자력의 반대, 의뢰에는 정당한 의뢰와 부정당한 의뢰가 있다.
아플 때 자력이 없어지고, 어릴 때도 자력이 없어서 부모님에게 의뢰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모은을 말씀하셨다. 늙어서 자력이 없어질 때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정당한 경우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의뢰하는 것이 부정당한 의뢰이다. 부정당한 의뢰 때문에 세상이 병이 든다.
부정당한 의뢰를 하지 않으면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불공하는 것이다.
방청소 하는 것도 쉽지 않다. 교구장, 교정원장, 학교 이사장할 때는 사람들이 방청소도 해주고, 세탁기도 다 돌려주었다. 그 때부터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데 잘 못 되었다. 지금은 내가 세탁기를 돌리는데 버튼 3개 누르면 탈수까지 끝나서 털어서 널면 된다. 배우면 되더라. 청소, 나도 하기 싫다. 지금 내가 한다. 할 수 있을 때까지 일을 자기가 해야 하다.
부정당한 의뢰생활을 많이 하는 사람이 많이 생길수록 그 사회는 병든 사회가 되고, 부정당한 의뢰생활을 안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건전한 사회가 된다.
자기 불공이 되고, 내가 자력으로 하니 나를 도와주워야 할 상대도 편안해지니 상대 불공도 된다.
우리교단에 수위단선거가 있다. 선거를 해보면, 안 좋은 이야기는 가까운 사람, 같이 살았던 사람에게서 나온다. 좋은 이야기도 가까운 사람에게 나온다. 선거 때 개인의 사생활이 소문으로 돌아다닌다. 부정당한 의뢰생활을 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지방에 법회보러 나갈 때도 교당에 의뢰하지 않고 내 자력으로 갔다가 내 자력으로 올라오려 한다. 왜냐하면, 교당교무님들에게 불편을 드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불공하는 거다. 내 스스로에게도 불공이지만, 교당교무님에게도 불공하는 것이다. 차를 내라, 어떻게 하라고 해서 복잡해지면 안 부르게 된다.
사소한 문제이지만 정당한 의뢰와 부정당한 의뢰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⑶ 지도 받을 자리에 정당한 지도를 잘 받을 것
사요에서는 지자본위를 잘 해라고 하였다.
계급, 직위, 자본 등에 끌리지 말고 지자본위를 제대로 해야 한다.
지자본위를 잘 하라는 것은 선천시대에 생겨난 제도와 조직, 질서의 요소를 깨어버리는 것이다.
이 걸 깨어 버리지 못하면 지자본위를 잘 할 수 없다.
사람을 잘 키우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대조해 봐야 한다.
사람을 잘 키우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 재주를 자기 재주 삼을 줄 아는 사람이다.
대종경에서도 다른 사람 재주를 내 재주 삼는 것이 제일 큰 재주라고 하였다.*
지자본위를 확실히 하는 것이 사람을 잘 키우는 것이다.
조직의 장을 맡으면 그 조직 구성원 중에서 키울 사람을 제대로 잘 키워내야 한다. 지도자들이 지금 이것을 잘 못하고 있다.
서울은 토요일에 못 가겠더라. 토요일의 서울은 지옥이더라. 그것도 모르고 시간 맞추어서 표를 끊어 올라갔는데, 법회에 한 시간이 늦었다. 그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대원회에 간 이유는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교단에 살면서 인재를 키우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인재키우는 방법은 지자본위를 잘 하는 것이다.
*인도품 13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큰 재주 있는 사람은 남의 재주를 자기 재주 삼을 줄 아나니, 그런 사람이 가정에 있으면 그 가정을 흥하게 하고, 나라에 있으면 나라를 흥하게 하고, 천하에 있으면 천하를 흥하게 하나니라.]
⑷ 지도할 자리에 정당한 지도로써 교화를 잘 할 것
가르치는 불공을 잘 하는 것이다.
가르치는 불공을 잘 하려면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실력은 노력 안하면 안 된다. 실력은 곧 노력이다. (실력 = 노력)
한 법회를 보면, 자기가 갖춘 노력을 다 동원해서 준비해야 한다. 20~30분 동안 대중에게 감명을 줘야 한다. 감명을 주지 않는 설교는 필요 없다. 카톨릭이나 불교는 오랜 역사의 문화가 있어서, 미사나 법회속에서 느끼는 웅장한 의식의 장엄이 있다. 그래서 교화가 쉽다. 우리는 역사가 첨단하기 때문에 교화의 핵심과 핵은 설교이다. 설교가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설교를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교도들로부터 교무님의 설교가 만족이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다는 생각으로 노력해서 실력을 갖추어 가자.
⑸ 자리(自利)주의를 버리고 이타(利他)주의로 나가라.
공익심을 통해서 병든 사회를 치료하는 것이다.
이타가 바로 자리가 된다.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자리, 자기가 이롭게 되는 것이다.
이타는 절대로 자해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인과를 모르면 이 실천을 못 한다.
이 실천을 하는가, 못 하는가를 보고 인과를 깨쳤는가, 안 깨쳤는가가 결정된다.
공익심은 신앙문, 불공의 극치이다.
4. 결과
건전하고 평화한 사회가 된다. 이 약재를 써서 치료하게 되면 사회가 건전하고 평화하게 된다. 개교의 동기에서는 광대무량한 낙원세계라고 말씀하셨다.
사은사요는 병든 사회를 치료하는 처방전이다. 예스맨, 맞다고만 하는 사람만 있으면 건전한 사회가 안 된다. 노우(no)라고 할 수 있어야 가르칠 수 있다.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는 예스와 노우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진다.
예스와 노우를 함께 활용하여 그 사회를 건전한 사회로 만들어 가자.
리더의 요건중의 하나는 갈등관계를 통해서 조직을 통합,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갈등관계에서는 노우가 병존하므로 그 노우를 조절 통합할 수 있어야 지도자가 된다고 서양이론에서도 이야기를 한다. 이런 이론과 대종사님의 병든 사회와 그 치료법의 이론이 하나로 일맥상통하게 같이 가고 있다는 알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