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이라는 의미는 음악적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연주하고 들으며 즐길 수 있는 음악을 의미한다. 때문에 대중음악은 시대를 아우르는 유행적인 요소와 유희적 오락성, 그리고 상업성을 지니고 있다. 대중음악의 토대는 구전으로만 이루어지던 방식에서 녹음 기술에 의해 저장과 소장의 개념이 생기면서 산업으로 성장해 나왔다.
최초 ‘유행가’라는 용어로 지칭되던 한국대중음악은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각 시대별로 시대의 거울과 같았던 한국대중음악은 정치, 사회, 경제적 흐름에 맞춰지거나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해 나오며 발전해 나왔다.
민요와 유행 창가의 시대를 지나 일제강점기에 태동되었던 한국대중음악은 나라를 잃은 조선인의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며 비장하게 출발했다. 해방의 감격을 함께 맞이한 한국대중음악은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빚어진 분단과 민족적 비극인 한국전쟁으로 신음하던 한국인에게 기쁨과 위로의 기능을 발휘했으며,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토와 가난의 상징인 보릿고개를 극복시킨 60년대에는 국가 재건과 문예부흥에 일조하기도 했다.
전세계적인 음악적 기류가 넓게 번지기 시작하면서 사전검열 등으로 대중문화 자체가 위축되기도 했던 70년대의 한국대중음악은 청년문화를 잉태하며 순수와 낭만적 분위기를 꽃피우는 단계를 거쳤다. 그리고 민주화와 국제화에 박차를 가했던 격변의 80년대에는 다양한 장르를 양산했으며, 경제적 풍요와 IMF환란 등으로 나라경제가 흔들리던 90년대에는 대중음악의 새로운 정립과 활로가 개척되면서 한류문화를 탄생시켰다. LP와 CD의 시기를 지나 MP3 등 디지털 방식으로 감상이 대체된 2000년대에 이르러 한국대중음악은 SNS를 통해 K-POP의 우수성을 세계인에게 알리며 국가 브랜드마저 높이고 있다.
벅스와 한국대중음악박물관(kpopmuseum.com)에서는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면서 한국대중음악 100년의 역사를 기념하고자 ‘한국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이라는 타이틀로 본 연재를 게재한다.
우리나라 사람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기계에 담긴 사례는 고종 24년인 1887년, 선교사 알렌(N.H.Allen)에 의해 녹음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에는 가격과 위험성 면에서 유성기가 아닌 뮤직박스에 그 소리를 담은 것으로 추정된다. 공식적으로 국내 음반역사는 1907년 미국 콜롬비아레코드에서 [Korean Song]으로 제작한 유성기 음반에서 시작되었다. ‘소리가 나는 마술 상자’로 불렸던 유성기 음반(SP, Standard playing)은 10인치 크기로 앞 뒤 면에 한 곡씩을 담았는데, 간혹 7인치 형태의 음반이 제작되기도 했다. 1908년 미국 빅터레코드 역시 한국인의 소리를 담은 음반제작을 시작했는데, 이동백의 판소리 '적벽가'가 대표적인 예이다.
국내에서 초창기 음반에 참여한 이들은 권번 기생들이나 국악을 하던 여성들을 중심으로 국악 장르가 주를 이뤘다. 또한 초창기 음반 제작은 미국과 일본이 주도했으며,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는 대부분 일본에서 제작될 수밖에 없었다. 1907년 일미축음기제조회사(日米蓄音機製造會社)를 발족한 일본은 1910년 ‘일본축음기상회’로 사명을 바꾼 1911년 9월부터 한국인의 음반을 녹음하기 시작했으며, 1913년 ‘NIPPONOPHONE’ 라벨을 사용해서 [조선 신음보 1호]라는 타이틀로 판소리와 속요, 찬송가 등의 양면 반을 발매했다.
음악에 있어서 어느 시대, 어떤 장르에서건 최초의 논쟁은 있기 마련이다. 음악은 음반으로 기록되고 기억된다. 때문에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에 대한 의견은 아직까지도 분분한 것이 사실이다. 최초의 대중가요에 대해 일동축음기주식회사에서 1926년에 발표된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가장 많이 언급한다.
이 곡은 윤심덕의 동생 윤성덕이 피아노를 담당했으며, 엄밀히 이 곡은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Ivanovici)의 관현악 왈츠인 ‘다뉴브 강의 잔물결(Danube Waltz)’의 선율에 한국어 가사를 붙인 번안곡이라는 점 때문에 최초 논쟁에서 다소 예외일 수 있다. 다만 1920년대 발표된 음악 가운데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노래라는 이유가 크기에 최초의 논쟁 안에 여전히 놓이고 있다.
애닯은 가사와 안정된 멜로디가 인상적인 안기영의 ‘내 고향을 이별하고’는 정사인이 작사하고, 작곡을 한 순수 창작곡이다. 현제명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젊은 테너가수였던 안기영이 공교롭게도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녹음한 곡이 바로 ‘내 고향을 이별하고’이다. 분단 이후 북한에서는 ‘사향가’라는 제목으로 편곡이 되어 불려 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곡은 창가의 멜로디 구성과 판이하게 다른 독특한 음의 진행으로 완성된 곡이지만, 대중가요가 아닌 가곡으로 보는 시각이 일각에서 제기되면서 최초 논쟁에서 일편 부담스러운 위치에 놓여 있다.
일각에서는 단성사에서 1927년 개봉되었던 이구영 감독의 무성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가로 삽입되었고, 1929년에 음반으로 발매된 이정숙의 ‘낙화유수(강남달)’를 한국인이 창작한 최초의 대중가요로 보는 시각이 큰 편이다. 3절로 구성된 이 노래는 4분의 3박자의 왈츠리듬으로 5음계 기법이 적용된 노래로서 전문적인 기교보다는 소소한 멋을 지닌 곡으로 통한다.
또한 이 곡은 당시에 주를 이루던 전형적인 일본식 창법을 벗어난 곡으로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과 동요를 주로 불렀던 이정숙이 가창을 담당했다는 점도 돋보인다. 이후 ‘낙화유수’는 1930년 인기 배우 김연실이 처음 리메이크한 이후 황금심과 신카나리아, 한영애에 이르기까지 많은 가수들에 의해 새롭게 불려 지면서 정감있는 대중가요로 남겨져 있다.
이 밖에도 1925년 11월 동아일보에 실린 음반광고에는 김인식의 ‘거룩한 성’, 도월색의 ‘압록장절’, 김산원의 ’장한몽가‘ 등의 창작곡이 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이 곡들은 모두 일본 유행가를 번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다.
한국대중음악박물관에는 최초의 대중가요 논쟁의 중심에 있는 4장의 음반 외에도 여러 희귀 유성반이 국내 최초로 상설 전시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 최초 대중가요에 대한 정확한 정례는 학자와 평단, 음악관계자들에 의해 정리가 필요한 대목이겠다.
1907년 첫 음반이 발매된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대중음악 100년사의 주요 흐름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소개한다.
국내 음반의 역사는 1907년 미국 콜롬비아레코드에서 [Korean Song]으로 제작한 유성기 음반부터 시작되었다. 1908년 미국 빅터레코드는 이동백의 판소리 ‘적벽가’를 발매하는 등 초기 국내 음반 제작은 민요와 국악이 주가 되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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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기반의 대중음악의 변화는 글로벌 문화로 진화되었다. H.O.T의 북경 공연 이후 ‘한류’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2010년 소녀시대를 필두로 카라,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등이 국내외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90년대 언더그라운드라 할 수 있는 인디가 꾸준하게 유지되면서 장기하와 얼굴들을 필두로 하는 새로운 대중음악과 싸이의 기록적인 히트는 K-POP의 우수성을 지구촌으로 확대시키는 역할을 담당해 나오고 있다.
[출처 : 벅스 뮤직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