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과 진성여왕 서른 번째 이야기_여성, 시대를 앞서가다 1
曼聖女主 九塔讓位 (만성여주 구탑양위) 선덕여왕은 황룡사 9층탑을 세웠고, 진성여왕은 임금의 자리를 어진 사람에게 물려주었다. 지혜의 여신, 선덕여왕이 예언한 세 가지 일'曼聖女主(만성여주)'에서 曼(만)은 신라 제27대 임금인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이름인 덕만(德曼)을 뜻하고, 聖(성)은 통일신라시대 진성여왕(眞聖女王 : 제51대 임금)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女主(여주)는 여왕(女王)과 같은 뜻입니다.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 최초로, 여성의 몸으로 지존(至尊)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그녀의 아버지 진평왕(眞平王 : 제26대)은 슬하에 아들을 두지 못하고, 세 명의 딸만 두었습니다. 선덕여왕은 그 중 맏딸입니다. 둘째 딸 천명(天明)공주는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어머니이고, 셋째 딸은 백제 무왕(武王)과 결혼한 선화(善花)공주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덕만공주를 왕위에 옹립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KBS 역사 스페셜〉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나?'편에서는, 당시 왕위 계승의 자격을 갖춘 성골(聖骨) 출신의 남자가 없었고, 또한 김춘추 및 김유신과 같은 유력 귀족 세력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필자는 여기에 다른 한 가지 이유, 즉 '지혜의 여신(女神)'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뛰어난 예지력(叡智力)을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선덕여왕이 보여준 세 가지 예지력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왕(女王)의 예지력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는 진평왕(眞平王)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당(唐)나라 황제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모란꽃 그림과 씨앗 세 되를 진평왕에게 보내 왔습니다. 그림과 씨앗을 받아 본 덕만공주(선덕여왕)는 대뜸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진평왕이 그녀에게 모란꽃 그림과 씨앗만을 보고 어떻게 향기가 없는 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덕만공주는 그림에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는 줄 알았다면서, 꽃에 향기가 있으면 반드시 벌과 나비가 따르게 마련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그 씨앗을 뜰에 심고 꽃이 핀 뒤 살펴보니, 정말로 향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선덕여왕이 즉위한 지 5년째 되는 해에 일어났습니다. 그 해 여름 5월에 궁궐 서쪽의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수많은 두꺼비들이 모여 사나흘 동안 울어대는 괴이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두꺼비의 성난 눈은 병사의 모습을 뜻한다면서, 서남쪽 국경 지대에 옥문곡(혹은 여근곡)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웃나라의 군사가 이곳에 몰래 잠입해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이 군사를 이끌고 수색해 보니, 백제의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을 습격하기 위해 정예병 5백 명을 거느리고 매복해 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신라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군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선덕여왕의 죽음 이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왕은 병도 없고 건강이 나쁘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신하들에게 자신이 죽을 날짜를 예언하면서 도리천 가운데 장사지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하들이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여왕에게 묻자, 낭산(狼山)의 남쪽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예언한 날 죽었고, 유언에 따라 신하들은 낭산 남쪽에 그녀를 장사지냈습니다. 그 뒤 10년이 지나 문무왕(文武王)이 여왕의 무덤 아래쪽에 사천왕사(四川王寺)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불교 경전(經典)에 보면, 사천왕천(四川王川) 위쪽에 도리천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천왕사는 사천왕천을 나타내기 때문에, 여왕(女王)의 무덤은 도리천이 됩니다. 여왕은 자신의 예언대로 도리천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동아시아 최고의 목탑 - 황룡사9층목탑 선덕여왕의 뛰어난 예지력은 과학기술과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빛났습니다. 천문관측대인 첨성대(瞻星臺)가 여왕의 과학기술에 대한 예지력이라면, 황룡사(黃龍寺)에 세운 9층목탑(九層木塔)은 문화예술에 대한 예지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황룡사9층목탑은 당시 백제·고구려는 물론 당나라와 왜국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예술적이고 아름다웠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황룡사9층목탑은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지만 1,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커다란 명성을 누리고 있습니다.
선덕여왕은 『삼국사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지혜와 현명함을 두루 갖춘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왕은 밖으로는 백제와 고구려의 잦은 공격과 고립정책(孤立政策)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안으로는 정치적 반대 세력들의 도전과 반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에 당나라에서 불경을 공부하고 돌아온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여왕에게 안팎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황룡사에 불탑을 세우도록 권유했습니다. 당시 여왕은 백제에서 아비지(阿非知)라고 하는 뛰어난 공장(工匠)을 보물과 비단을 주고 데려와, 신라의 공장(工匠) 200여 명과 함께 탑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불탑이 바로 황룡사9층목탑입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는, 신라가 이웃 나라의 잦은 침략으로 인한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황룡사9층목탑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불탑의 1층은 왜(倭 : 일본)·2층은 중화(中華 : 중국)·3층은 오월(吳越)·4층은 탁라(托羅)·5층은 응유(鷹遊)·6층은 말갈(靺鞨)·7층은 거란(丹國)·8층은 여적(女狄)·9층은 예맥(濊貊)의 침략과 재앙을 제압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황룡사9층목탑을 세운 후 천하가 태평을 누리고, 신라는 마침내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목탑 하나 때문에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면, 모두 웃겠지요? 그러나 필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황룡사9층목탑은 신라가 선덕여왕 시대부터 이미 통일시대를 열 만한 문화적·정신적 역량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증거물이라고 말입니다. 상대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한다고 해도 그 나라와 백성들을 포섭할 수 있는 문화적·정신적 역량과 영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면, 실제 한 나라로의 통합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기록은, 선덕여왕 시대부터 신라가 훗날 삼국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문화적·정신적 역량과 영향력을 쌓아나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보면 황룡사9층목탑의 건설은 선덕여왕이 다가올 삼국통일을 위해 다시 한 번 예지력을 발휘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진성여왕은 음녀(淫女)인가 아니면 어진 임금이었는가? 신라에는 모두 3명의 여왕이 있었습니다. 선덕여왕과 바로 그 뒤를 이은 진덕여왕(眞德女王)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의 여왕인 진성여왕(眞聖女王)입니다. 그런데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모두 삼국통일의 길을 닦은 어질고 현명한 임금으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 유독 진성여왕은 희대의 음녀(淫女)이자 천년왕국(千年王國) 신라를 무너뜨린 장본인으로 비난받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진성여왕이 각간 위홍(魏弘)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 궁궐에 미소년들을 끌어들여 음탕한 짓을 일삼고, 총신(寵臣)들이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뇌물이 판을 쳐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또한 진성여왕이 즉위한 초기부터, 전국 도처에서 굶주린 백성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사벌주(沙伐州 : 상주)에서는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큰 반란을 일으켰고, 북쪽에서는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거대한 반란 세력을 이루었으며, 또한 서남쪽 완산주(完山州 : 전주)에서는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세웠다고 했습니다. 이 기록만으로 보면, 진성여왕은 향락에 빠져 백성들을 핍박하고 나라를 망친 음녀(淫女)이자 폭군(暴君)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나 진성여왕을 음녀이자 폭군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후대 사람들의 일방적인 매도일 뿐이라고 항변하는 역사학자들도 있습니다.
역사평론가 이덕일은 『여인열전(女人列傳)』에서, 진성여왕과 각간(角干)인 숙부 위홍(魏弘)의 관계는 유학자인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金富軾)이나 현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부정한 관계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당시 신라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공식적이고 상식적인 관계였다고 해석합니다. 또한 조세(租稅)·부역(負役)·병제(兵制)의 혼란과 붕괴, 굶주린 백성들의 봉기와 반란 등은 진성여왕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신라 귀족계급의 부패와 무능력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의 저자 박영규 역시 신라의 여자들은 대개 같은 씨족(氏族)의 남자에게 시집을 갔는데, 특히 왕실과 귀족의 여자들은 숙부를 남편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숙부가 이미 결혼했다고 해도, 본처(本妻)보다 후처(後妻)가 신분이 높은 경우 본처 자리를 차지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진성여왕과 숙부 위홍의 관계는 불륜 관계가 아닌 공식적인 부부관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성여왕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삼국사기』에도, 여왕이 마냥 향락에만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기록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여왕'편에 보면, 여왕이 즉위 8년째 되는 해에 당대의 석학(碩學) 최치원(崔致遠)이 올린 '시국과 정무에 관한 의견 10여 조목'을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때 여왕은 최치원을 6두품의 최고 관직인 아찬(阿湌)에 임명하여 개혁을 진두지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최치원의 개혁책(改革策)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귀족계급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좌절당하고 맙니다.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등용해, 귀족계급의 권력 독점을 막고 쓰러져가는 신라를 일으킬 대개혁을 구상하고 추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귀족계급은 국가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쓰러져가는 신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진성여왕의 대의(大義)를 꺾어버렸습니다. 신라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모든 계획과 꿈이 수포로 돌아간 다음, 진성여왕은 무엇을 선택했을까요? 여왕은 양위(讓位)를 결심합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진성여왕이 숙부 위홍과의 사이에서 양패(良貝)라는 막내아들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여왕에게는 임금의 자리를 물려줄 1명 이상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성여왕은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대신, 오빠인 헌강왕(憲康王 : 제49대)의 서자인 요(嶢)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당시 진성여왕이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밝힌 단 한 가지 이유는, 부덕(不德)한 자신을 대신할 어진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최치원의 시무책이나 조카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면서 밝힌 '양위(讓位)의 변(辯)'만으로도, 진성여왕을 음녀나 폭군으로 몰아붙일 수 없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한자 익히기曼(길게 끌 만) 聖(성인 성) 女(계집 녀) 主(임금 주) 九(아홉 구) 塔(탑 탑) 讓(사양할 양) 位(자리 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