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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저기로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를 읽고-
2019. 08. 백란주
문화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든 사회현상을 포괄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정신생활영역을 가리킨다고 한다. 문화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은 삶으로 살아가고, 살아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경험의 기록으로 날카롭게 들어오는 창끝을 무디게 도닥여준다. 비윤리적임과 타협하려는 양심이 무디어질 때는 송곳처럼 날카롭게 나의 정신을 깨우치게도 한다. 철학은 자신의 삶으로 이끌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김정탁 교수는 “우리 사회도 이제는 합리적공동체를 넘어서 화리적공동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또한 “합리合理는 ‘작은 지혜’에 해당한다면 화리和理는 ‘큰 지혜’라 한다. 합리는 옳고 그름을 따지고 이치에 합당하면 옳고, 합당하지 않으면 그르다고 본다. 그래서 시시비비를 가린다. 자꾸만 쪼개고 쪼개서 옳고 그름을 나눈다. 그럴수록 우리 사회는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져 자꾸만 벌어진다. 장자가 말한 ‘큰 지혜’는 다르다. 시시비비를 따져서 적과 동지로 나누는 것보다 우리 사회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더욱 중시한다. 그래서 ‘화리’다”라 했다.
브리지스의 말에 의하면 경력이나 인생의 전환기는 무언가가 시작되는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일이 끝나는 시기다. 거꾸로 말하면 무언가가 끝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대부분 후자의 ‘새로운 시작’에만 주목해 대체 무엇이 끝났는지, 무엇을 끝내야 하는지 ‘끝’에 관한 물음에 진지하게 맞서지 못한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말한다. 위기를 잘 마무리하지 못하면 기회가 될 수 없다.
8월 24일 류현진은 뉴욕 양키스와의 경기에서 2회 초 무사 2·3루였지만 왠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있었다. 상대투수의 강속구에 비해 느린 변화구는 고도의 심리전을 이겨내야 했다. 경우의 수를 분석하며 사람이 갖는 고유영역 직관을 믿으며 투구해야 하기에 얼마만큼의 부담일지 시청자들은 알 수 있다. 공이 끝까지 제구 되지 않으면 언제든 홈런이 될 수 있는 메이저리그 타자들, 보는 재미는 긴장감에 비례했다. 세 타자를 아웃시켰다. “그렇지!”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공격권을 갖게 된 LA에게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경기는 5회 만루 홈런을 맞으며 강판되었다.
그간 거론되던 ‘사이영상’후보에 대함도 종지부를 찍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7년 만에 ‘류현진’이란 한글 이름을 새긴 유니폼을 입고 약간의 들뜸과 긴장감이 그를 힘들게 했는지 모른다. 메이저리그에서 처음으로 맞은 만루 홈런이 그의 선수생활에서 전환점이 되길 바랐다. 매회 마다 제대로 끝이 나야 공격과 수비를 전환할 수 있다. 한 경기가 끝나야 다음 경기를 대비할 수 있다. 한 시즌을 제대로 끝내야 다음 시즌을 계약할 수 있다. 결국 시작은 끝이라는 동업자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성과를 보상받을 수 있다. 비록 실패일지라도 그 끝은 마무리를 해야 한다. 무엇을 끝내야 그가 더 멋진 선수가 될 수 있는지 류현진은 아마도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결혼 후 직장생활을 하지 말고 남편 생활을 챙겨 달라는 어머님의 말씀에 따라 직장생활에 대한 생각이나 미련을 두지 않았다. 아이들이 태어났고 쉼 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이지만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였다. 산후우울증 조차도 드러내지 못하고 지나간 것 같다. 아이들이 약했기 때문에 늘 병원 진료에 맞추어야 했기에 다른 틈이 없었다.
가끔씩 아직도 아이들과 탯줄을 끊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을 때가 있다. 아이들과 나를 따로 분리 독립해서 보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나를 보게 되었다.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책은 나를 고민하게 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역할에서 ‘지나침’이라 단정 지으며 ‘기본’으로 돌아서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새로운 시작에만 주목했지 내가 남편과 아이들에게서 무엇을 끝내야 하는지를 몰랐다. 약간의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끝’에 관해 진지하게 맞섰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며 왜 하고 싶으며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 내가 있어야, 내가 행복해야하기 때문이었다. 가족모두에게 적당한 거리가 필요함을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하고 수용했다.
역시 철학은 세계와 인간의 본성을 고찰하는 행위다. 안다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바뀐다’는 뜻이라고 했다. 바뀌어 가고 있다. 삶속으로 진행하고 있다.
인간이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해서 생기는 오류로 베이컨은 ‘네 가지 우상’을 제시했다.
종족의 우상, 즉 ‘착각’으로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이 실제보다 크게 보인다거나 단 것을 먹은 뒤 귤을 먹으면 시게 느껴지는 것이 전형적인 종족의 우상이다.
동굴의 우상, ‘독선’이다. 자신이 받은 교육과 경험이라는 편협한 범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단정해 버리는 오류다. 이를테면 외국인 동료와 ‘어쩌다’ 갈등을 경험한 사람이 ‘원래’ 외국인은 까탈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형적인 동굴의 우상이다.
시장의 우상, ‘거짓말’이나 ‘전해들은 말’을 진실이라고 믿고 현혹되는 것이다. 종종 인터넷 게시판 사이트에서 읽은 이야기를 정확한 소식인 양 남에게 전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러한 사람이 걸려들기 쉬운 것이 시장의 우상이다. 시장이라고 한 이유는 시장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고 갖가지 거짓말이 난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극장의 우상 ‘편견’을 뜻한다. 텔레비전이나 잡지에 자주 등장하는 평론가의 주장을 무조건 믿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이러한 사람을 전형적으로 극장의 우상에 현혹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은 틀림없이 ‘미디어의 우상’에 휩싸여 있다.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의 근거를 이루는 인식이 네 가지 우상 중 어느 것에 의해 왜곡되어 있지는 않은가 보아야 한다. 또한 타인의 의견에 반론할 때 주장의 근거를 이루는 전제가 이들 네 가지 우상으로 인해 왜곡되어 있지는 않은가 보아야 한다.
인간의 지성은 이들 우상으로 인해 한 번 믿으면 모든 것을 그에 맞춰 만들어 가는 성향이 있다고 베이컨은 강조한다. 이 집요한 믿음은 설령 그 사고에 반하는 사례가 드러난다 해도 그 사례들을 무시하거나 경시하기 쉽다. 그래서 베이컨은 이 네 가지 우상을 제거해야 비로소 사람은 진리에 다다르게 되고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고 피력한 것이다.
가짜 뉴스 속에서 진실을 판단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때로는 이 우상에 속아 진실을 넘겨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실에서 획일적으로 보면 안 되고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때로는 획일적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타자 이해의 어려움’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가 된다는 에포케. 결국 우리가 객관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한번 보류해 보라고 한다. 반대에 의한 반대가 되는 것은 아닌지. 시장의 우상에 속아서 진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편협함으로 독선이 되는 동굴의 우상에 갇힌 것은 아닌지. 그로 인해 편견에 치우치지는 않았는지. 일반화된 법칙에서 개별의 결론을 추론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저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때, 자신에게 보이는 세상과 상대에게 보이는 세상은 크게 다를 수 있으며 양자가 모두 자신의 세계관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으면 그 어긋난 차이가 해소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객관적인 세계관은 애초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 세계관을 확신하지도 말고 버리지도 않는, 어중간한 경과 조치로 일단 잠시 멈춰보는 중용의 자세가 바로 에포케다. 에포케 ‘괄호 안에 넣다’, ‘판단을 보류하다’, ‘판단을 정지하다’라는 뜻으로 단정하기를 멈추고 대상을 자세히 보자는 것이 현상학의 주장이라고 한다. 나의 선입견은 없는지, 되물어보며 그 대상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의미는 나 자신도 돌아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객관적’ 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은 실은 자신의 의식 속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즉 ‘주관적인 나의 의식 가운데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적 실체를 주관적 인식으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정말 그게 옳은 걸까?’라는 의문을 던져 분명히 그렇게 생각되지만 일단 그 생각에 대한 판단을 멈추는 것. 감정이든 상황이든 자세히 들여다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기에 현대 사회에서 에포케는 필요한 쉼인 것 같다.
공자는 『논어』를 통해 군자와 소인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했다. 군자는 모든 사람과 두루 어울릴 뿐 특별히 어떤 사람들하고만 편을 이루지 않지만 소인은 편을 갈라 어떤 사람들과만 짝을 지을 뿐 모든 사람과 두루 어울리지 못한다. 군자는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누구와도 함께 어울리면서 파당을 짓지 않지만, 소인은 그렇지 못하여 으레 파당 짓기를 좋아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군자는 남의 좋은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되 나쁜 일은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하지만 소인은 그와 반대라고 하였다. 군자는 잘못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지만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고 했다. 군자는 남과 잘 어울릴 뿐 같아지지 않지만 소인은 남과 같아지는 일은 잘 하면서도 남과 어울리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즉 군자는 주체성을 지닌 존재이지만 소인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으로 남과 같아지는 것만을 잘 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존재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그 사람이 없더라도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이 그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과 잘 어울린다는 것은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남을 주체적인 존재로 대하는 것, 참된 어울림은 어우러지는 모든 구성원이 각자 주체로서 대등하게 만날 때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군자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밝지만 소인은 자기의 이해관계를 따지는데 밝은데서 오는 것이라 말했다. 그 결과로 군자는 늘 마음이 편안하고 넓지만 소인은 늘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며 군자는 편안하면서 교만하지 않지만 소인은 교만하면서 편안하지 못할 뿐이라 한다.
맹자는 4단을 바탕으로 삼아 인간은 날 때부터 착한 본성을 지녔다고 했다. 남의 어려움을 보았을 때 마음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수오지심. 남에게 양보하는 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시비지심. 4단은 ‘인의예지’의 실마리라고도 부를 수 있다한다.
『한국철학 에세이』에서 김교빈 저자는 말한다. 어떤 사람은 화를 잘 내고 어떤 사람은 잘 울고 어떤 사람은 차갑고 어떤 사람은 온화한 것은 사람마다 다 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대승은 이 기질지성을 물속에 비친 달과 같다고 하였다. 물론 4단과 7정은 모두 기질지성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물속에 비친 달의 경우와 비슷하다. 비록 있는 자리는 다르지만 하늘에 있는 달만 달이라고 하고 물속에 비친 달을 물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기대승의 입장이다. 기대승의 생각은 같은 감정이기 때문에 4단을 7정 속에 포함시키려고 하였던 것처럼 타고 난 순수한 본성도 현실적인 인간의 본성인 기질지성 속에 포함시켜 이해하려 한 것이다.
해는 항상 본래 모습 그대로 있지만 구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맑을 수도 있고 흐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흐린가 맑은가는 구름에 달려있을 뿐이다. 그리고 흐렸다가도 구름이 걷히면 해의 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거기에는 조금이라도 더하거나 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황은 참다운 인간이 되기 위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요점을 경(敬)이라고 하였다. 이 때의 敬은 공경이나 존경의 경우처럼 누군가를 높인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삼가고 조심한다는 뜻으로 경건하다거나 근신한다는 의미에 가깝게 해석되어진다.
이황의 학문을 평가할 때 학자들은 그의 학문이 출발이나 귀결 모두를 敬으로 꿰뚫고 있다고 한다. 이황은 “敬은 마음의 주재자이고 모든 일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경건한 마음을 갖는 것이 진리를 깨닫는 문(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중심은 사람이며, 사람의 중심은 마음이고 그 마음의 주재자가 바로 경건성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경건성을 바탕으로 마음속에서 욕심을 없애고 인간의 순수한 참모습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한다.
유학은 종교적 성격을 지녔지만 종교가 아닌 이유는 인과응보나 내세 관념이 약한 점이라 말한다. 악한 행동을 해도 벌을 줄 신이 없다. 다만 그러한 행동에 따른 수치심이 스스로를 벌할 뿐이며 스스로를 벌하는 수치심은 바로 양심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유학자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라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과정이 곧 마음속에 경건함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일이라 말한다.
지금보다 경험과 생각이 적었을 때, 서양철학은 물증이 드러나는 명쾌한 느낌이었다. 그에 비해 동양철학은 왠지 뜬구름을 잡는 것 같고 무언지 모를 심증으로만 다가오는 막연함이었다. 나의 생각도, 경험도 직선이고 단순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여자이고 싶었다. 그렇게 때로는 잠정적 보류, 판단보류, 판단 정지가 될 수 있는 에포케로 만나고 싶다.
이분법적 사고로 나눌 수 없는 무수함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물증으로 드러난 사실보다 심증으로 느껴지는 진실 또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이 벌하지 않았다고 해서 물증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밝혀질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양심’이란 저울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것이 제일 큰 형벌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인간은 착하게가 아닌 바르게 살아야 한다. 또한 남에게 보여짐에 치우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군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더라도 소인의 삶과 타협하지는 않아야겠다. 내게 있어 철학은 가르침이 된다. 경험으로 남는다. 그렇게 나를 지켜주게 된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철학책을 읽는 이유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살면서 드러나는 감정에 대해 조율하며 소인의 길로 가지 않도록 나를 단련시키는 시간이 철학을 읽는 시간이 된다.
니체는 “착한 사람들은 모두 약하다.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착한 사람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착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사회로부터 말살당하고 싶지 않아서, 즉 악행을 저지를 만한 용기가 없어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 양심에 찔려서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거라고 믿고 있다. 뻔뻔스럽게도 자신을 미화하고 있는 것이라며 ‘착한 사람’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니체가 비판하는 착한 사람이란 약하고, 안전을 추구하고, 동정하고, 거짓말을 하고, 무리를 짓고, 원한을 품은 자들이다. 착한 사람은 시스템에 편승하려는 사람, 강자에게 넙죽 엎드리는 사람, 자기 안위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이다.
르상티망.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강자에게 품는 질투, 원한, 증오, 열등감들이 뒤섞인 감정으로 시기심이라 할 수 있다. 니체가 제시한 르상티망은 우리가 시기심이라고 여기지 않는 감정과 행동까지도 포함한 조금 더 폭 넓은 개념이다.
부를 경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너무 신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부를 얻을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 부를 경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부를 얻게 되면 그들만큼 상대하기 곤란한 사람은 없다.
-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 수상록』 -
자신이 무언가를 원할 때, 그 욕구가 ‘진짜’ 자신의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타인이 불러일으킨 르상티망에 의해 가동된 것인지를 판별해야한다. ‘자신다운 인생’을 살아가기가 쉽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철학은 삶의 무기가 될 수 있으며 위로가 될 수 있다. 나의 삶은 여전히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恀)’의 시간으로 걸어가고자 한다.
지금 여기 있는 나를 단련시켜 우리가 꿈꾸는 저기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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