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쑤저우에서의 첫 일정은 우원(耦园)입니다.. 반려자와 함께 여생을 보내며 꽃밭을 일구던 한 뼘 원림이라... 한 뼘 치고는 으리으리하지만, 그 뜻을 기려보고자 이 매력적인 원림을 이제 들러보려고 합니다...
* 남원빈관의 멋진 조식 부페에서 배부르게 아침을 해결하고는 또 버스로 편하게 답사지 주차장까지 들르는 호사를 누리는 우리들... 이 곳은 또다른 선경(仙景)입니다...
남원빈관 주차장을 출발한 버스는 그래도 이른 아침이라, 다행히 그닥 많이 막히지 않았던 쑤저우 시내를 천천히 빠져나가며, 해자를 따라 북쪽으로 돌아가다 어느덧, 해자를 건너 구시가지를 들어와, 해자를 따라 남쪽으로 천천히 물길을 따라 어느덧 주차장에 다다랐습니다..
쑤저우 강남 고전 원림 세계문화유산의 한 일원이면서, 비교적 늦은 시기에 조성된 우원(耦园)에 드디어, 3년을 별러서 이제 들여다 봅니다...
수천년을 이 모습 그대로 수많은 성시산림(城市山林)을 품어온 고도 쑤저우의 모습은, 아래의 평강부(平江府)와 지금의 시내가 그렇게 많이 달라보이지 않습니다^^;;;
우원(耦园)으로 향하는 길 옆 저 멀리 해자와 운하로는 물이 흐르고, 그 물길 건너에는 육중한 높다란 담장과 누각이 눈에 들어와, 물가의 한가하며 여유로운 분위기와는 조금 대조적입니다... 위의 지도에 표시된 경로처럼 약간은 복잡한 경로를 따라 운하를 따라가다가 건너다가 다리를 건너다가, 어느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중식당 옆을 지나쳐서, 차단기도 몇 번씩 지나가, 드디어 아래 지도 가장 오른쪽 운하 건너편 공터, 주차장에 버스가 다다랐습니다...
오늘 첫 일정, 우원(耦园)입니다...
우원(耦园)은 강소성(江蘇省) 쑤저우시(蘇州市) 동쪽 소신교항(小新橋巷)에 있고, 처음에는 섭원(涉园), 혹은 소울림(小郁林)이라 불렸다고 하네요...
청(清) 옹정(雍正, 1723-1735) 연간에 보령지부(保宁知府) 육금(陆锦)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현재의 동화원(东花园) 땅에 원림을 짓기 시작하였고, 도연명(陶渊明, 365-427)의 귀거래사(归去来兮辞) 중, “园日涉以成趣”에서 이름을 따와 섭원(涉园)이라 명명했습니다.
귀거래혜사(归去来兮辞)는 지난 중국 답사 때 양저우의 하원 후기에서도 한 번 언급했었는데, 기실 중국 전통 원림에 있어 정신적 지분이 상당한 역사적, 사상적 기둥 역할을 톡톡히 해왔습니다...
도연명(陶渊明) 이전까지 은일(隱逸)은, 요순(堯舜) 시대의 소부(巢父)․허유(許由)의 경우처럼 세상과 완전히 결별하고 문자 그대로 산속에 숨어 사는 것이었지만, 서진(西晉)이 통일을 이룬 뒤(265), 정치적 도피의 측면보다는, 오히려 은둔지의 정취와 자연풍광을 칭송하는 내용이 주가 되고, 도가사상이 성행하고 은일을 동경하게 되면서, 본래의 개념을 벗어나 은일을 위한 은일이 유행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황제들은 경쟁적으로 저명한 은사들에게 조정에의 출사를 종용하면서, 당연히 은사들의 사회적 명망이 더욱 높아졌고, 이를 지켜보는 당시 사대부들은 출사(出仕)와 은일(隱逸)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고, 이는 문학작품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를 반영하듯, 출사(出仕)와 은일(隱逸)을 갈등하던 서진(西晉)의 사대부 사이에 유가의 ‘名敎’와 도가의 ‘自然’이라는 상충되는 두 사상을 포괄하기 위한 현학(玄學)이 성행하면서, 더더욱 은일(隱逸)이 보편적 가치가 되어, 이윽고, 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정신적인 은일의 경지를 누리는 ‘朝隱’이라는 현실타협적 은일 풍조가 생겨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런 처지의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 전통적인 의미의 은일, 즉 속세를 벗어나 산 속에 기거하는 것을 ‘소은(小隱)’이라 하고, 속세에서 속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정신세계에서는 은일을 실현하는 것을 ‘대은(大隱)’이라고까지 자칭했습니다...
405년, 도잠(陶潜, 365-427)의 나이 41세 때, 최후의 관직인 팽택현(彭泽县)의 지사(知事)를 내던지고 고향인 시골로 돌아오는 심경을 읊은 것이 귀거래혜사(归去来兮辞)인데, 당시 혼탁했던 동진 왕조, 세속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으로, 직접 쓴 서문에는 누이동생의 죽음을 슬퍼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나, 훗날 양(梁)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 501-531)이 정리한 '도연명전(陶淵明傳)'에 의하면, 감독관이 순시할 때 이를 의관속대(衣冠束帶)하고 배알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비분강개하여, 고작 오두미(五斗米)의 박봉을 지키려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하며, 그 날로 사직하였다고 하네요...
명실상부, 은둔을 선언했던 도연명의 기개를 보여주는 순간이자, 문학사적으로도 절정에 이른 순간입니다...
지나치며 보이는 박리된 회벽 밑으로는 붉은 벽돌벽이 아래에 드러나 보여, 이 원림의 뭔가 파란만장한 남다른 이력이 궁금해졌습니다...
주차장에서 건너가는 길, 버스가 주차장으로 들어서던 그 길, 모두 운하를 끼고 있어, 뭔가 이국적입니다@@
언듯 봐도 우원은, 삼면이 운하이고 나머지 한 면은 쑤저우 시내로 이어져, 문 앞, 그리고 주택 뒤편으로 선착장을 거쳐 수로와 육로로 모두 드나들 수 있는 구조인 덕에, 이른바 '집집마다 강을 끼고 있는' 쑤저우 주택건축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소요할 충분한 시간을 여비하기 위해 동화원의 주청당인 성곡초당(城曲草堂)까지 안내를 미리 가이드에게 부탁하며, 우원(耦园)을 마무리할 시간도 생각해보면서, 우리는 가이드가 매표하는 것을 기다려, 우원(耦园)으로 입장했습니다...
가슴이 설레입니다... 물가를 따라 난 인도 오른쪽으로 단정한 정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앞서 의논했던 대로, 우리는 성곡초당(城曲草堂)을 먼저 향합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문 위 편액에 '平泉小隱'이라 쓰여 있습니다.
도시의 번잡한 저자거리를 바로 옆에다 두고서도 감히, '소은(小隱)'이라 자칭하며 은일하고픈 소망이 그 위 편액에 담겨 있네요... 여기서 '平泉'은 원래 당(唐) 현종(玄宗) - 숙종(肅宗) - 대종(代宗) - 덕종(德宗), 4대에 걸쳐 대신이었던 이필(李泌, 722-789)의 별서(别墅) 이름이었고, 모쪼록 불의에 굽히지 않고 사직하고 은거하였던 뜻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겠죠..
교청(轿厅) 안에 들어가니, 이번엔 '偕隐双山'이라는 편액이 또 눈에 뜨입니다...
여주인이었던 엄영화(严永华)의 시(詩)인, “偕隐双山门,一尘差可托”에서 따왔다고 하고, 양쪽에 걸려 있는 주련에는 전서로, “逍遥于城市而外,仿佛乎山水之间”이라 적혀 있어, 아마도 내외 간에 은일하고자 머물렀던 이 곳이 정녕 소은의 뜻으로 산 속에 와있는 듯하다는 시상을 이렇게 적어놓았나 보네요^^;;
이후 한때 서법가인 곽봉량(郭凤梁)가 빌려 살기도 했고, 숭명 축씨(崇明祝氏)의 별장이 되기도 했다가, 드디어 안휘순무(安徽巡抚), 양강총독(两江总督)이었던 호주(湖州) 사람 심병성(沈秉成, 1823-1895) 대에 이르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몇몇 남지 않은 기록 속에서, 강직한 기개를 보여온 그의 모습은, 안휘순무(安徽巡抚)를 맡았을 때에도, 1854년 이후 설치된 프랑스 조계지에서 근무할 때에도 공정함에 힘써 주민들이 존경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반면에 순탄치 않았던 그의 관력과 함께 개인적으로도 불운이 겹쳐 처자식을 연이어 여의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지쳤던 거 같고, 이에 관직을 그만두고 쑤저우로 낙향하였는데, 1874년에 3,000 냥의 은자(银子)을 들여, 당시 이미 함풍(咸丰) 연간(1851-1861)의 병화로 훼손되었던 섭원(涉园) 터를 사들이고는, 화가 고운(顾沄, 1835-1896)을 초대해 일택양원(一宅两园)으로 새로 설계하여 넓혀 지어, 1876년에 완성되었는데, 우원(耦园)이라 이름지으며, 부부가 서로 깃들어 은거하여, 유유자적하며 오래 늙어가려는 뜻을 담았습니다.
더 지나가다 보면, 이번엔 문 위 편액에 '厚德载福'이라 적혀 있네요^^;;; 한자의 연속@@ 이 문구는 실제로, 이 일대, 특히 쑤저우 동산 인근에 많은 주택마다 이 문구가 많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 '덕을 후하게 베풀면, 복이 가득하리라'는 ???
우원(耦园)의 중부주택(中部住宅) 구역에는, 남북 방향으로 차례로 문청(门厅), 교청(轿厅), 대청(大厅), 루청(楼厅)이 있는데, 그 중 대청(大厅)은 1950년 실화로 소실되어, 1993년 중건되었고, “재주당(载酒堂)”이라고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개방적이면서 장엄한 분위기의 폭 다섯 칸의 요(凹) 자형 건물인 재주당(载酒堂)을 찾아가다 보면, '诗酒联欢'라 적힌 편액이 눈에 뜨입니다.. 문화혁명때 훼손되기도 했다는데, 과연 그 바로 뒤의 주청당 재주당 입구에 걸맞네요~~ ^^
드디어 다다른 재주당(载酒堂), 이 건물에서 초청한 손님들을 맞이하여 대접했다고 하고, 그 이름은, 송(宋) 나라 시인 대복고(戴复古, 1167-1252)의 시 '初夏游张园'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初夏游张园 - 대복고(戴复古)
초여름 장원(张园)에서 노닐며
乳鸭池塘水浅深,熟梅天气半晴阴。
얕은 연못엔 아기오리 노닐고, 매실 익어가는 하늘은 맑은 듯 흐린 듯.
东园载酒西园醉,摘尽枇杷一树金。
동쪽 뜰에 차린 술상 서쪽 뜰에서 취하고, 다 딴 비파나무 한 그루가 금이로다.
술을 좋아했던, 술을 대접하는 것을 좋아했던 주인 내외의 익살이 여실히 드러나는 듯~~ ㅎㅎ
기실 2층 건물인 재주당(载酒堂) 북쪽으로 '凹'자로 누청이 나란히 이어져 있는데, 동화원(东花园)의 쌍조루(双照楼)를 거쳐 보독구서루(补读旧书楼), 서화원(西花园)의 장서루(藏书楼)로 연결되어, 주마루(走马楼)라고도 불립니다.
그런데, 가이드 분이 잠깐 착각하여, 들어가자 마자 왼쪽으로 틀어 끝까지 가다보니 나타나는 어느 원림에 먼저 들어서버렸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서화원 영역이었네요@@
내친 김에, 여기서부터, 원래 의도했던 대로 동화원까지 마저 인도해달라고 부탁하고는 부지런히 성곡초당(城曲草堂)까지 찾아갔습니다^^;; 우연찮게 이렇게, 원래부터 그리 크지 않았던 원림에서도 그 끝에서 다른 끝까지 오게 되어서, 저절로 웅원의 규모를 발걸음으로 잴 수 있게 되었네요^^;;
5 무(亩) 넓이의 동화원(东花园) 가운데에는 장중한 황석가산(黄石假山)이 있어 단순하면서도 장엄함이 소주원림(苏州园林) 가산(假山) 중에서도 절품입니다... 이 황석가산(黄石假山)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성곡초당, 남쪽에는 수월지(受月池)로 서로 대비되는 두 영역이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수월지(受月池)로 향하다 보면, 동쪽에 유운수(留云岫)라 명명된 주산이 있고, 도서(桃屿)라 명명된 자그마한 산이 또한 그 서쪽에 있는데, 그 사이로 수곡(邃谷)이라 불리는 깍아지른 듯한 계곡이 수월지(受月池)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수월지(受月池)의 동쪽 벽을 따라 회랑이 이어져 있고, 연못 위로는 구불구불한 다리가 대나무 회랑까지 가로지르며, 회랑을 따라 연못 동쪽에 망월정(望月亭)과 오애정(吾愛亭)이, 남쪽으로는 물에 반쯤 나온 산수간(山水间)이 서 있습니다.
성곡초당 앞 마당에 모인 우리는, 서둘러 다시 만날 약속과 간단한 설명, 여러 소회를 나누고는 다시 소요를 즐기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ㅎㅎ
성곡초당(城曲草堂)은 동화원(东花园)의 중심건물로, 40미터에 달하는 중첨(重檐) 누각의 독서루(读书楼) 건축군의 중심이며, 누각 앞에는 황석가산(黄石假山)로 가로막힌 월대(月台)가 펼쳐져 있습니다.
아래에는 성곡초당(城曲草堂), 위에는 보독구서루(补读旧书楼)인데, 초당 안을 들여다 보면서, 안쪽으로 나있는 계단을 올라가보니, 찻집으로 활용되고 있는 보독구서루(补读旧书楼)에 들어서게 되었네요^^~~ 때마침, 저 아래 월대를 거닐고 있던 벗들과 인사하면서, 아래위로 오가면서, 즐거운 추억 하나 갈피에 채워졌네요^^;;
'ㄷ'자 평면으로 세워져 있는 2층 누각 건물 동쪽 끝은 약간 남쪽으로 굽어 전체적으로는 곡척(曲尺) 형으로 튀어나와 있는데, 위에는 쌍조루(双照楼), 아래에는 환연재(还砚斋)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한편, 1884년, 심병성(沈秉成)이 다른 지방의 관리로 임명되어, 전 가족이 옮겨갔다가, 1895년, 심병성(沈秉成)이 치료차 소주에 되돌아왔지만, 차도없이 우원(耦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후 원림은 나날이 쇠락하여, 경내에는 민가가 속속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1898년,교육가 조선창(赵善昌)이 한때 이 곳에 살았고, 진사홍(陈士弘), 심자기(沈子期), 장인곡(章寅谷), 장위농(章慰农) 이후 남경(南京) 중앙대학 농학원 원장 왕계우(汪启愚) 등도 이 곳을 거쳐갔습니다. 1932년에 이르러서는, 양음유(杨荫榆, 1884-1938)가 동화원(东花园)을 빌려 이락여자학사(二乐女子学社)를 설립하였고, 1938년 쑤저우를 침탈했던 일본군에 의해 양음유(杨荫榆)가 피살된 후, 동화원(东花园)은 황폐해졌습니다.
1939년,당대의 국학(国学)의 대부 전목(钱穆, 1895-1990)이 식구들과 함께 어머니를 모셔와 동화원(东花园)에서 살았었는데, 큰 조카 전위장(钱伟长, 1912-2010)도 이 원림에 같이 살았습니다. 1941년, 상주(常州) 출신 사업가 유국균(刘国均, 1887-1978)이 당시 버려져 폐허가 되다시피한 원림을 사들여 보수하였는데, 그때는 이미 가운데 주택 영역에 민가가 우후죽순 들어서버린 다음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1950년에는, 그 가운데 대청(大厅)이 화재로 훼손되었습니다.
1956년, 진아사직창(振亚丝织厂)이 원림을 관리하면서, 창고, 숙사, 탁아소 등이 들어서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1960년에 이르러서야, 시정부(市政府)와 시 산하 원림관리처(苏州市园林管理处)가 관리하였고, 1965년 4월 결국 동화원(东花园)은 보수되어 5월 개방되었습니다. 이때 보수기간 중이었던 1963년부터는 당시 서화원(西花园) 구역에 보수인력이 머물면서 정비하였는데, 그 와중에, 1967년,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으로 우원(耦园)을 비롯한 여러 소주고전원림(苏州古典园林) 전체가 피해를 입어 이 곳도 폐쇄되기에 이르렀고, 1968년에는 이름도 성동화원(城东花园)으로 바뀌었습니다.
성곡초당(城曲草堂) 양쪽으로는 회랑이 감싸안 듯 둘러싸고 있는데, 동쪽으로 이어진 균랑(筠廊) 가운데 즈음에는 반정(半亭)이 있고, 그 안에는 청초(清初)의 문인 왕문치(王文治, 1730-1802)의 작품을 새긴 윤원도(抡元图) 비석이 있고, 그 위엔 심씨 부부의 발문(跋文)이 있습니다.
초당(草堂) 서쪽으로 서 있는 저향관(储香馆), 즉 서랑(樨廊)이 있는데, 실제로 바깥으로 계수나무(樨)가 심어져 있습니다. 회랑 남쪽으로는 등화방(藤花舫)”, “무속운헌(无俗韵轩)이 서로 닿아 있고, 월동문(月洞门)과 반정(半亭)으로 이어져, 곧바로 원림 동남쪽 모서리의 누각에 다다릅니다. 이로써 원림 전체 건물들은 흩어져 있되 끊어져 있지 않게 됩니다.
특히, 무속운헌(无俗韵轩)의 창문 가에는 전각 예서(隶书)로 , '耦园住佳耦,城曲作诗城'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 글귀가 워낙 유명하여, 건물 이름도 속칭 침파헌(枕波轩)이라 불리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가로로, “침파쌍은(枕波双隐)”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원림 주인이었던 심병성(沈秉成)의 부인 엄영화(严永华)가 지은 것이라고 하구요... '침파(枕波)'는 기실 진(晋) 대의 저명한 은자였던 손초(孙楚,?-293)의 “枕流漱石” 고사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즉슨, 남조(南朝) 송(宋) 유의경(刘义庆, 403-444)의 세설신어(世说新语) 배조(排调) 편 - 풍자를 담은 일화 모음, 진서(晋书) 권 오십육 열전(列传) 이십육 손초전(孙楚传)에 각각 거의 동일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세설신어(世说新语) - 배조(排调)
유의경(刘义庆)
孙子荆年少时欲隐,语王武子「当枕石漱流」,误曰「漱石枕流」。
손초가 어릴 적 숨어 있기를 즐겨, 친구 왕제에게 말하길, '마땅히 돌을 베고, 물에 양치하겠다.'는 말을 잘못하여, '돌에 양치하고, 물을 베겠다.'라고 했다.
王曰:「流可枕,石可漱乎?」孙曰:「所以枕流,欲洗其耳;所以漱石,欲砺其齿。」
왕제는, '물을 베고, 돌에 양치할 수 있나?' 했더니, 손초는, '물을 베는 것은, 귀를 씻고자 하는 것이고, 돌에 양치하는 것은, 이를 돌에 갈겠다는 것이야.'라고 했다.
진서(晋书) 권오십육
열전(列传) 이십육 - 손초(孙楚)
...
楚少时欲隐居,谓济曰:「当欲枕石漱流。」误云「漱石枕流」。
손초가 어릴 적 숨어 지내기를 즐겨, 왕제에게 말하길, '마땅히 돌을 베고, 물에 양치하고자 한다.'는 말을 잘못하여, '돌에 양치하고, 물을 벤다.'라고 했다.
济曰:「流非可枕,石非可漱。」楚曰:「所以枕流,欲洗其耳;所以漱石,欲厉其齿。」
왕제는, '물은 벨 수 없고, 돌은 양치 못하지 않나 ?' 했더니, 손초는, '물을 베는 것은 귀를 씻고자 하는 것이고, 돌에 양치하는 것은, 이를 돌에 갈겠다는 것이야.'라고 했다.
...
물론 비꼬는 일화에 언급되긴 했지만, 어쨌든, 은거하고자 한다는 댓구로, '枕流漱石'라 얘기했던 데서 나온 고사입니다.^^;; 여기에서 침류(枕流)가 침파(枕波)로 시상(詩想)이 이어져 이 곳에 담겼네요..
그 아래 창문 양쪽에는 '耦园住佳偶,城曲筑诗城'라고 엄영화(严永华)의 싯구가 걸려 있습니다...
즉슨, 쑤저우에 낙향한 후 어느 날, 심병성(沈秉成)은 15살 아래의 강절(江浙) 출신의 재녀(才女), 엄영화(严永华)를 만났고, 책과 시를 좋아했던 심병성과, 역시 시 짓기를 즐겼던 엄영화(严永华)의 자취가 원림 곳곳에 남아 있어, 특히 이 문구, '耦园住佳偶,城曲筑诗城'은 바로 부인이었던 엄영화가 지은 것으로, '耦'는 '偶', '城'는 '成'의 뜻과 통하여, '佳偶天成', 즉 하늘 뜻으로 좋은 배필과 인연을 맺었노라는 소회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화원을 바삐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이 글귀를 보고는 아차 싶었네요@@설명하는 자리가 여기가 더 적합했겠다는@@ 죄송~~
성곡초당 앞에서는 마땅히 단체사진을 찍을 만한 풍경이 언듯 보이지 않아서, 산수간과 오애정(吾爱亭)이 한눈에 보이는 다리 위로 바삐 이동합니다...
그래도 다른 인파와 많이 곂치지 않아서, 조금 기다리고는 낼름, 사진 찍을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오애정으로 달려가 자리를 잡습니다^^;;; 풍광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은 것이 함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시간 우리 모두 멋진 풍광 속에 같이 있었음을 기억하면서, 이후 남은 모든 시간을 짜내 소요를 해봅니다~~
사진을 위해 자리 잡으려고 서둘렀던 바로 그 오애정(吾爱亭) 역시, 도연명(陶渊明)의 시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도잠(陶潛) - 산해경을 읽으며(讀山海經) 열세 수 중 첫 수
孟夏草木長,繞屋樹扶疏。
초여름이라 풀과 나무 자라나, 집 앞 나무들은 가지런히 무성해졌네.
眾鳥欣有託,吾亦愛吾廬。
새들은 즐거이 머무르고, 나 역시 이 오두막을 아꼈다네.
既耕亦已種,時還讀我書。
밭 다 갈고 파종까지 하고 나니, 이젠 돌아와 책을 읽네.
窮巷隔深轍,頗迴故人車。
외진 거리엔 수레바퀴 자국 닿지 않아, 친구의 수레도 번번히 돌아가네.
歡然酌春酒,摘我園中蔬。
봄에 담근 술을 즐거이 따르고, 내 밭의 채소를 딴다네.
微雨從東來,好風與之俱。
동쪽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함께 불어온 바람에 기분이 좋네.
泛覽《周王傳》,流觀《山海圖》。
주왕전(周王傳)도 두루 읽어 보고, 산해도(山海圖)도 두루 살펴본다네.
俯仰終宇宙,不樂復何如?
굽어보고 올려보며 온 우주를 보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할까 ?
도연명(陶渊明)처럼 심병성(沈秉成) 부부도 전원생활을 동경했고, 오애정(吾爱亭)에서 물고기를 바라보기도 하고, 멀리 서랑(樨廊)과 균랑(筠廊)을 감상하기도 했습니다... 오애정(吾爱亭)과 망월정(望月亭), 그리고 서랑(樨廊)의 반정(半亭)은 수월지(受月池)의 둘레에서 서로 대비를 이룹니다..
오애정 동쪽으로 걸어가다보면, 약간 높은 지대에 서있는 수사(水榭)가 보이는데, 이름, '山水间'도 독특합니다... 북송(北宋) 대의 문장가 구양수(欧阳修, 1007-1072)의 취옹정기(醉翁亭记) 중의 한 구절, '醉翁之意不在酒,在乎山水之间也'에서 뜻을 따왔다고 합니다.... 즉슨, '高山流水'의 함의를 품은 과장이 이 아담한 건물에 담겨 있습니다... ^^
醉翁亭记(취옹정기) -구양수(欧阳修)
环滁、皆山也。
저주성(滁州城)은 온통 주위가 산이다.
其西南诸峰,林壑尤美。
그 서남쪽 여러 산봉우리는, 숲과 계곡이 특히 아름답다.
望之蔚然而深秀者,琅琊也。
멀리서 보면 울창할 뿐만 아니라 깊고도 수려한데, 낭야산(琅琊山)이다.
山行六七里,渐闻水声潺潺而泻出于两峰之间者,酿泉也。
산을 따라 육칠 리를 가다보면, 점점 물소리가 들리다가 양쪽 봉우리 사이에서 졸졸 쏟아져 나오는데, 양천(酿泉)이다.
峰回路转,有亭翼然、临于泉上者,醉翁亭也。
봉우리는 굴곡지고 산길은 구불구불하며, 정자는 날개 펼친 새와도 같고, 샘터 위에 앉아 있는데, 취옹정(醉翁亭)이다.
作亭者谁?山之僧智仙也。
정자를 지은 자는 누구인가 ? 산 속의 승려 지선(智仙)이었다.
名之者谁?太守自谓也。
그럼 이름을 붙인 자는 누구인가? 태수가 자기의 별호(別號)로 이름을 붙였다.
太守与客来饮于此,饮少辄醉,而年又最高,故自号曰醉翁也。
태수는 손님들과 함께 여기에 와서 술을 마셨는데, 조금 마셔도 바로 취해버렸고, 또 최연장자라, 자신의 별호를 취옹(醉翁)이라 지었다.
醉翁之意不在酒,在乎山水之间也。
실은, 취옹(醉翁)의 뜻은 술에 있지 않고, 산수(山水) 사이에 있다는 데에 있었다.
山水之乐,得之心而寓之酒也。
산수(山水)를 즐긴다는 것은, 마음으로 깨닫고 이를 술에 맡긴다는 것이다.
若夫日出而林霏开,云归而岩穴暝,晦明变化者,山间之朝暮也。
만약 해가 나올시 숲에 안개가 걷히고, 구름이 몰려올시 바위동굴은 어두워지니,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는 것이, 산 속의 아침과 저녁이다.
野芳发而幽香,佳木秀而繁阴,风霜高洁,水落而石出者,山间之四时也。
들꽃은 그윽한 향기가 나고, 나무는 아름답게 꽃피우고 열매맺으며 그늘도 무성하고, 바람과 서리로 고상하고 순결하다가도, 물이 줄면 돌바닥이 드러나는 것이, 산 속의 사계절이다.
朝而往,暮而归,四时之景不同,而乐亦无穷也。
아침이면 산에 들어갔다, 저녁이면 돌아오는데, 경치는 사계절이 다르니, 즐거움 또한 무궁무진하다.
至于负者歌于途,行者休于树,前者呼,后者应,伛偻提携,往来而不绝者,滁人游也。
짐 진 이는 길을 가며 노래하고, 길을 가는 이는 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고, 앞선 이가 부르면, 뒤따르는 이가 답을 하고, 허리 굽은 노인이 애들 손 잡고 가고, 끊임없이 오고가니, 이렇게, 저주(滁州) 사람들이 유람하고 있다.
临溪而渔,溪深而鱼肥。
계곡에서 고기를 잡는데, 계곡 물이 깊어 고기가 살쪄 있다.
酿泉为酒,泉香而酒洌;
양천(酿泉) 샘물로 술을 빚었는데, 샘물이 향기로와 술도 맑고 ;
山肴野蔌,杂然而前陈者,太守宴也。
산과 들에서 난 고기와 야채를 뒤섞어 앞에 놓아 둔 것은, 태수가 잔치를 베푼 것이다.
宴酣之乐,非丝非竹,射者中,弈者胜,觥筹交错,起坐而喧哗者,众宾欢也。
술이 거나한 잔치에서의 즐거움은, 주악에 있지 않으니 ; 투호를 던지면 적중하고, 바둑을 두면 이기니, 번거로이 술잔이 오고 가고 ; 수시로 일어섰다 앉는 사람들로 시끌한 것은, 손님들이 진정 즐거워하고 있음이다.
苍颜白发,颓然乎其间者,太守醉也。
창백한 얼굴과 흰 머리에,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그 사이에 쓰러져 있는 자는, 태수가 취했음이다.
已而夕阳在山,人影散乱,太守归而宾客从也。
산에는 이미 석양이 졌으니, 사람의 그림자는 어지러이 흩어져, 태수가 돌아가니 손님들도 뒤를 따랐다.
树林阴翳,鸣声上下,游人去而禽鸟乐也。
울창한 숲, 위아래로 새들이 울고, 노닐던 이 가버리니 새도 짐승도 좋아하였다.
然而禽鸟知山林之乐,而不知人之乐;
이렇듯 새나 짐승들은 숲 속의 즐거움은 알아도, 사람들 즐거움은 알지 못하고 ;
人知从太守游而乐,而不知太守之乐其乐也。
사람들은 태수 따라 놀고 즐길 줄은 알았지만,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태수가 즐거워했던 것은알지 못하였다.
醉能同其乐,醒能述以文者,太守也。
취하며 능히 그 즐거움을 같이 하다가도, 깨어나면 능히 그 기쁨으로 글을 짓는 이는, 태수이다.
太守谓谁? 庐陵欧阳修也。
태수는 누구를 말하는가? 여릉(庐陵) 사람 구양수이다.
깊은 산 속 벗들과 더불어 거나하게 취하면서 노닐던 구양수의 호기로운 글 속에, 술과 친구을 아끼던 모습에 심병성(沈秉成) 부부 자신을 투영한 듯, 이 곳에선 술이라도 한 잔 기울여 봄직 한 듯하지만, 여튼 우리는 그 정도까지는 여유가 없네요@@
이후, 원림 보수공사는 1981년 고전원림건축공사(古典园林建筑公司)에 합병될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후 서화원(西花园) 영역은 원림기공학교(园林技工学校)로 계속해서 활용되었다가 같은 해 5월부터는 원림기교(园林技校)가 우원(耦园)을 관리하면서, 기교실험기지(技校实验基地)로 이용되었습니다.
1980년부터 시정부(市政府) 주도로 동화원(东花园)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기 시작하여, 1982년 7월, 먼저 우원(耦园)을 별도로 개방하였고, 1985년에는 서화원(西花园) 구역을 점하고 있던 기교(技校)를 호구(虎丘) 방면으로 옮기면서, 서화원(西花园) 일대를 정비하기 시작하여, 1993년부터는 다시 시정부(市政府)에서 중부 주택구역까지 포함하여 대대적으로 보수하여,1999년에 이르러 준공되면서 동화원(东花园)과 같이 개방되었습니다.
2000년 11월 우원(耦园)은 다른 소주고전원림(苏州古典园林)과 함께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마침 화보를 찍는지, 예쁘게 차려입은 소녀 둘이 양산을 받쳐들고 삼곡교 위에 자리잡네요^^ 누군가 제대로 화보를 찍겠구나 싶어, 맞은 편을 살펴보니, (아마도) 육중한 DSLR로 이리저리 앵글을 재어보고 있는 어느 아주머니(??)가 보였습니다^^;;
저도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그 모습을 담아보고자 연못 주위를 오가다 보니, 그 새에 그 소품, 양산을 쓴 모습을 해보고 싶은 어느 두 중국인 아주머니(??)가 소녀들에게 다가가 뭐라뭐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네요@@ 당황해하는 소녀들의 표정, 거기에 아랑곳 않는 아주머니들의 기세,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좀 겸연쩍어하는 표정을 언듯 흘겨보면서, 남은 풍광을 좇아 자리를 떠났습니다...
위에 보면 아예, 우산까지 뺏어 들다시피하고 있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사진에 담겼네요^^;;
약속 시간은 거의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서화원(西花园)을 제대로 들여다보질 못했습니다@@ 후다닥 들러보기라도 하자고, 한 달음에 서쪽으로 향합니다...
원림 서쪽에는 조금 더 작은 넓이의 서화원(西花园) 구역이 있는데, 원앙청(鸳鸯厅) 양식의 직렴노옥(织帘老屋) 서재가 중심이 되어, 동, 남, 북쪽으로 각각 원락(院落)이 붙어 있습니다. 직렴노옥(织帘老屋)의 남쪽엔 호석가산(湖石假山)으로 꾸며져 있어, 동화원(东花园)의 황석가산(黄石假山)과 호응을 이룹니다.
직렴노옥(织帘老屋)의 동쪽은 세 변의 평방(平房)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두 변에 이방(耳房), 남쪽엔 담장문, 북쪽엔 정원(庭院)에 이어서 장서루(藏书楼)가 있어, 서화원(西花园)은 소주(苏州)의 서재화원(书斋花园)의 특색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직렴노옥(织帘老屋)은 남조(南朝) 은사인 오홍(吴兴) 사람 심인사(沈驎士)가 생계를 위해 발을 짜며(织帘), 글을 읽고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뜻을 따왔습니다...
즉슨 심병성(沈秉成)의 자칭 “万卷图书传世富”라 하여, 전후로 원림 주인의 전원생활에의 동경, 즉 발을 짜며 밭을 갈며 틈틈이 책을 읽고자 하는 뜻을 이들 두 건물의 이름에 담았습니다... 건물 안에는 직렴도(织帘图) 한 폭이 걸려 있고, 그 양쪽 대련에는, "织帘高士传家法, 卜筑平泉负令名" 걸려 있습니다.... '
织帘高士传家法, 卜筑平泉负令名
심(沈)씨 가문의 선조의 직렴(织帘)의 뜻을 자신이 이어받고자 하며, 이에 평천(平泉)을 짓고 이름짓는다'
인 듯 한데, 그 안을 제대로 살펴보질 못하고, 급하게 휘리릭 원림을 둘러보고 나와야 했네요 @@ 공부삼아 남겨둡니다...
기실 동원(东园)의 황석가산(黄石假山)과 서원(西园)의 호석가산(湖石假山)은 서로 호응하며, 태호석(太湖石)의 정교하게 아름다운 특징과 황석가산(黄石假山)의 질박하되 굳건한 특징이 서로 대비되어, 그 어우러진 아름다움은 쑤저우에서도 발군이긴 합니다@@
전해오는 말에는 육금(陆锦)이 섭원(涉园)을 만들때 이미 가산(假山)이 있었다고 하고 기실 명(明) 대 첩산(叠山)의 대가 장남원(张南园,1517-1596)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원을 아쉽게나마 마무리하면서, 오전의 다음 답사지 환수산장을 향합니다... 이 곳 역시 이전 답사때 아쉽게 들르지 못했던 것을 이제서야 들르게 되어 많이 설렙니다^^;; 그니사랑 님이 예전에 쑤저우에서 일할 때 몇 번 들렀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더더욱 각별할 듯^^
고소 성 안의 원림으로는 마지막 답사지, 환수산장, 아직은 시간은 아직 충분합니다... 이렇게 자각하지 못한 사이 시간이 쌓이고 쌓여, 나중에 소련장에서 번갯불에 콩을 볶아야 할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