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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태연자약 유유자적하며 살기>의 줄거리:
온 세상을 만들어 놓으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지으시어 그 세상 속에서 살도록 하실 때, 창조주 하나님께서 가지신 꿈은 무엇이었을까요? 굴곡진 세상 속에서 살게 될 인간의 태연자약함과 유유자적함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간절하신 꿈을 간파한 사단이 개입하여 결과된 것이 바로 노심초사, 좌불안석의 인간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속에서 태연자약 유유자적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꿈은 결코 포기될 수 없어 마침내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것이지요.
태연자약 유유자적하며 살기
(욥기 40:1~24)
15.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16. 그것의 힘은 허리에 있고 그 뚝심은 배의 힘줄에 있고
17. 그것이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얽혀 있으며
18.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뼈대는 쇠막대기 같으니
19.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
20. 모든 들짐승들이 뛰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내느니라
21. 그것이 연 잎 아래에나 갈대 그늘에서나 늪 속에 엎드리니
22. 연 잎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그를 감싸는도다
23. 강물이 소용돌이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 물이 쏟아져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하니
24. 그것이 눈을 뜨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것의 코를 꿸 수 있겠느냐
오늘 말씀 중심으로 <태연자약 유유자적하며 살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태연자약 유유자적하며 살기’
하나님께서도 꿈이 있으십니다. 이 세상을 만드셨고 이 세상 안에서 인간들이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만드신 세상 속에서 인간이 살도록 지으셨을 때에 인간에 대해 꿈을 갖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소망과 바람이 생기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 속에서 살게 될 인간에 대해 떠올리신 모습이 있는데 바로 태연자약함과 유유자적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간절한 꿈을 간파한 사탄은 세상에 개입하여 인간을 유혹해서 노심초사하고 좌불안석하게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사탄에 의해서 노심초사하고 좌불안석하게 된 상태를 본래의 태연자약함과 유유자적함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태연자약(泰然自若)과 유유자적(悠悠自適)”이라는 한자 단어는 굉장히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의미를 본문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봅니다.
‘태연자약’은 헬레니즘 시대의 사상가들의 목표와 상통합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내맡김’이라는 뜻의 독일어 ‘겔라센하이트(Gelassenheit)’라는 단어와도 닮았습니다. 이 겔라센하이트를 굉장히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었던 철학자가 하이데거입니다. 동양사상에도 태연자약함과 유유자적은 군자의 모범적인 이상형이었습니다. 이러한 철학사적인 의미를 넘어서 복음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며 하나님의 꿈을 헤아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38장 39장에 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지만 주제는 명확하게 나뉘어 있습니다. 38장에서는 온 세상을 채우고 있는 삼라만상들이 모두 하나님의 주체성의 표현이라는 주제였습니다. 지금 www(World Wide Web)로 대표되는 인터넷이 온 세상을 덮어버린 것처럼, 온 우주와 지구의 모든 섭리를 연결시키는 그물망이 하나님의 주체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살고 있는 인간에게 주체적일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주체성을 죽이고 억누름으로서 하나님의 주체성이 삶에서 표현되게 하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그물망이 찢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생래적으로 하나님의 주체적인 생각과 의지와 의도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은 인격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부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주체성이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주체성을 활성화하면 할수록 온 세상을 덮은 하나님의 주체성의 그물망은 구멍이 생기고 찢어지는 일이 생겨나고 마침내 불행이 주어지게 됩니다. 39장에서는 야생동물의 생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야생동물에 대해 어떠한 주체적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과 나약함을 드러내시면서 하나님의 주체성이 100% 받아들여지도록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문 40장에서는 욥이 이러한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나무라십니다. 사실 욥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에 대한 점수를 매긴다면 욥은 1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욥이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인 한계는 재앙이 임하기 전까지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주체적인 의도에 의해서 재앙이 주어졌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마음으로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왜 이러한 참담한 재앙을 겪어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던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대체 무었을 잘못했기에 이러한 재앙을 겪어야 하는지를 소화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8절에서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라는 말로서 표현하십니다. 하나님의 행동은 공의롭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말씀과 행동이 모두 공의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욥에게 주신 재앙의 의도가 밝혀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울 수밖에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이 하나님의 주체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소화시키지 못함으로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부인하는 결과를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욥이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정도가 궁극적인 지점에 도달하지 못함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는 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할 수 있겠느냐는 것인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욥만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빌립보서 2장 8절에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되신 자신을 비우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단순히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온갖 모욕과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가룟 유다의 배신, 대제사장들의 거래, 빌라도의 재판 등 부당한 일들이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의 이유를 하나도 그들에게서 찾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로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궁극적 도달점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욥처럼 대단한 사람도 십자가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 지점에 도달할 수가 없었습니다. 늘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이 주셨으니 가져가시기도 한다고 여겼던 사람조차 넘어가지 못했던 구간이지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넘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지독한 상황이 주어질지라도 하나님의 주체성을 기쁨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하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15절을 보면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지으실 때에 비유적으로 하마의 모습과도 같게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고 하시면서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하마가 가진 이상적인 속성을 비유적으로 인간에게 주시길 바라셨던 것입니다. 23~24절에서 ‘강물이 소용돌이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 물이 쏟아져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하니 / 그것이 눈을 뜨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것의 코를 꿸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강물이 소용돌이치는 것과 같은 세상 속에서 태연자약한 모습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욥을 비롯한 인간을 지으시며 가지셨던 꿈입니다. 강물이 소용돌이치고 요단강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과 같은 세상에서 태연자약하고,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고 코를 꿰이지 않는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돈 문제가 소용돌이처럼 일어나면 노심초사하고 좌불안석이 되어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이러한 삶은 세상에 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마와 같이 태연자약하고 있을 때에 돈 문제도 그 사람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태연자약과 유유자적이라는 말을 십자가복음의 연관성 안에서 해석해보자면 어떤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태연자약(泰然自若)은 클 태(泰), 그러할 연(然), 스스로 자(自), 같을 약(若)자를 씁니다.
사전적으로는 어떠한 외부적인 자극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마음이 동요되지 아니하는 모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연’은 내가 발견하고 의식하여 영향력을 행하기전에 본래부터 그러함이 크다는 뜻입니다. ‘자약’은 마음이 그러한 태연함에 가 있을 때에 나는 계속 같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연(自然)이라고 부르는 것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본래 그러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꾸민 정원은 꽃과 나무와 물이 있어도 자연의 범주에 포함되질 못합니다. 태연자약함은 본래부터 커다란 그러함에 마음이 가 있으면 이 세상에서 어떠한 자극이 주어지더라도 동요함이 없이 계속 같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불은 태양(太陽)이고 가장 큰 바다는 태평양(太平洋)입니다. 물론 오늘 태연자약의 泰자와는 다르지만 크다는 의미는 같습니다. 본래 그러함 중에 가장 큰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자연이 생기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본래 그러하시게 계셨습니다. 이 하나님께 마음이 가있지 않다면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자극이 주어지는 가운데 태연자약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에 하마처럼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강물이 소용돌이치고 요단강물이 입 속으로 들어와도 하마는 눈을 껌뻑껌뻑하면서 태연자약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강물이 아니라 냇물만 흘러도 노심초사하고 좌불안석합니다. 이게 마귀의 결과입니다.
또한 유유자적(悠悠自適)이라는 말은 멀 유(悠)를 두 번 쓰고, 스스로 자(自), 마땅할 적(適)자를 씁니다. 삶에 변화무쌍한 변수들이 주어지는 가운데 그에 가장 합당하고 마땅한 태도를 취한다는 뜻입니다. 돈 문제가 생겼다면 돈 문제로부터 마음을 멀리 더 멀리 보냄으로서 합당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어디 한가한 곳에 가서 놀고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가한 곳에서는 유유자적의 의미는 상실됩니다. 북적이는 시장 통 같은 삶에서 유유자적할 때에 그 의미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도 마음은 장사에서 멀리 멀리 떨어뜨려놓습니다. 그럴 때에 가장 적합한 마음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은 본래 그러한 상황이 아닙니다. 건강이 안 좋아도 본래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두어야 할 곳은 본래 그러한 것인데 그 중에서 가장 큰 분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가기 위해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태연자약을 이루어서 하나님께 마음을 두면 주님께서 풍랑만난 배 위에서 잠을 주무셨던 것과 같이 유유자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꿈꾸신 인간이 바로 이러한 모습이었습니다.
건강문제가 생겼을 때에 가장 합당한 태도를 취하기 위해서는 건강 문제로부터 가능한 멀리 멀리 마음을 두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주 끝에 마음을 둘 수는 없습니다. 아예 차원을 바꾸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마음을 올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 마음은 건강이 안 좋든지 자녀가 문제든지 상관하지 않고 가장 적합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됩니다.
욥에게 재앙이 임했습니다. 욥은 마음을 멀리 멀리 떨어뜨릴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알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주체성을 알았지만 그 하나님과 1:1로 상대하는 방법까지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체적으로 역사하시는 현장만을 바라보았을 뿐, 본래 그러하신 하나님을 뵙지는 못했습니다. 자연조차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태연자약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본래 그러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오직 가장 크시고 본래 그러하신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 마음은 평강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유유자적의 의미대로 십자가를 통해서 지금 벌어지는 상황에서 마음을 멀리 멀리 두어야 합니다. 태(太)자의 가운데 점은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대(大)자를 두 번 쓴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에 가장 합당하고 올바른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욥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축복의 십자가복음을 활용해서 노심초사하고 좌불안석의 삶을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본래 꿈꾸셨던 태연자약 유유자적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작은 문제에서 큰 문제까지 태연자약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 본래의 꿈을 이루어드릴 수 있는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