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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통훈대부행무주부사김공묘갈명병서
우인(친구) 통훈대부 사헌부 장령 송명흠 글짓고
재종질(7촌조카) 가선대부 개성부유수 겸 관리사 치인 전자쓰고
불초남(아들) 치신 글을쓰다
국가의 역사가 오래되어 씀씀이가 점차 커지니, 담당 관청에서는 매번 재정이 부족하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신하들을 등용하였으나 이들이 다투어 가혹하고 조급하게 구는 것을 숭상하니, 백성들이 그 명령을 견디지 못하였다.
무주부사(茂朱府使) 김공(金公)이 홀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관직을 버리고 떠날지언정 이렇게는 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더욱 맑고 자애로운 정치를 베풀어 백성들과 함께 휴식하였다. 무릇 거두어들이는 세금이 있으면 그 빈부와 완급을 헤아려 기한을 정해주고 매질을 하지 않으니, 백성들 또한 감격하여 힘을 다하며 혹여나 남보다 뒤처질까 두려워하였다. 홀아비, 과부, 도망친 자들의 세금을 이웃이나 친족에게 책임을 지워야 할 경우에는 공이 자신의 녹봉을 덜어 대신 내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일은 순조롭게 풀리고 백성들은 소란스럽지 않았다.
공은 자신의 욕심을 극복하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수백 천(千)의 돈을 모아 보민청(補民廳)을 창설하고 백성들의 잡역을 면제해 주었다. 크게 흉년이 든 해를 맞아서는 정성을 다해 진휼하고 곡식을 빌려주니, 낡은 옷을 뒤집어쓰고 아이를 업은 채 몰려드는 자들이 줄을 이어 하루에도 수천 명에 달했다. 공은 가혹하게 캐묻지 않고 모두 장부에 올려, 따뜻하게 감싸고 측은하게 여기기를 마치 아이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듯 하니, 이웃 고을 사람으로서 이에 힘입어 목숨을 보전한 자가 매우 많았다.
공이 병이 나자 아전과 백성, 승려부터 떠도는 거지들에 이르기까지 목욕재계하고 눈물을 흘리며 산천에 기도하는 자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상(喪)을 당함에 미쳐서는 원근에서 분주히 달려와 통곡하는 것이 마치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는 듯하였다. 영구가 떠날 때 배웅하는 자들이 수십 리에 뻗쳤고, 고을 경계에 이르러 마땅히 운구할 사람을 교대해야 했으나 모두 분발하여 말하기를 "우리 사또의 영구를 어찌 차마 다른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하고는 끝내 산 아래까지 메고 가서 통곡하며 하직하고 돌아가니, 눈물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아아! 백성들의 마음이 흩어진 지 오래되었다. 윗사람의 죽음을 미워하여 보지 않는 자가 드문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성의 인심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공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과 백성이 공의 상을 치른 모습을 보면, 요순시대의 백성이나 지금이나 애초에 고금의 차이가 없음을 거의 알 수 있다.
공의 휘(이름)는 술로(述魯)요, 자는 술보(述甫)이며, 청풍(淸風) 사람이다. 휘 대유(大猷)는 고려 문하시중으로 청성부원군에 추증되셨고, 본조(조선)에 들어와 참의를 지내고 찬성에 추증된 휘 관(灌)은 공에게 11대조가 된다. 이분이 관찰사 휘 의지(義之)를 낳았다. 증조부의 휘는 극형(克亨)으로 정랑을 지내고 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에게 학문을 배웠고 호는 사천선생(沙川先生)이시다. 조부의 휘는 순(洵)으로 동지돈녕부사를 지냈고, 아버지의 휘는 고(槹)인데 대각에 출입하며 곧은 명성이 있었으며 관직이 승지에 그쳤으나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달성 서씨는 한성서윤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서종적(徐宗積)의 딸로, 인자하고 은혜로우며 예의가 있었다.
찬성공(증조부)은 학문에 힘쓰고 행실이 돈독하여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추중(推重)하는 바가 되었고, 동돈공(조부)은 젊어서부터 양송(兩宋, 송시열과 송준길) 선생의 문하에서 노닐며 효도와 의리로 이름이 났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훌륭했고, 자라면서 집안의 가풍에 더욱 훈도되어 용모와 거동이 맑고 순수하였다. 성품은 평안하고 부드러우며 겸손하고 공손하여, 남과 말할 때는 오직 그 뜻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엄밀하고 정확하였다. 어버이를 섬길 때는 깊은 사랑이 있어, 평소에는 공경을 다하고 병환이 나시면 근심을 다하였으며, 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였다. 대부인(어머니)을 봉양함에 있어서는 뜻을 받들고 물질적인 공양을 모두 다하니 대부인께서 매우 편안해하셨다. 여러 아우와 누이들과 우애가 깊었고, 이를 미루어 여러 조카와 며느리들에게도 자기 자식과 다름없이 대하였다. 종족과 옛 벗들에게도 은혜와 의리를 곡진하게 다하였으니, 뭇 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운 바였다.
공은 젊어서 가난하여 광릉(廣陵) 촌장에 살면서 농사짓는 것으로 생계를 삼았으나, 마음이 담담하여 마치 평생을 그렇게 지낼 것 같았다. 공의 가문은 귀하고 번성하여 여러 종조부와 형제들이 잇달아 정권을 잡았으므로, 사람들은 간혹 공의 졸박(拙朴)함을 비웃기도 하였다.
갑자년에 처음 벼슬에 나아가 선공감 가감역이 되었고, 겨울에는 악기 제조를 감독하여 그 공로로 와서별제로 승진하였으며, 의금부도사로 옮겼다. 가산(嘉山)에서 역당을 체포한 공로로 사재감 주부로 옮겼다.
병인년에 외직으로 나가 영동현(永同縣)을 다스리니 관찰사가 훌륭한 치적을 칭찬하여 위에 보고하였다. 기사년 가을에 금산군수(錦山郡守)로 승진하였고, 임기를 마칠 무렵 열 번의 고과에서 열 번 모두 최상(上)의 등급을 받아 장악원 첨정으로 체직되었다.
을해년 봄에 무주부사에 제수되었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한결같이 인애(仁愛)와 근신(謹愼)함으로 임했고, 백성들을 위해 이익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제거해 주었다. 죄지은 자가 있으면 그를 위해 곡진하게 경계하고 타일러 스스로 죄를 깨닫게 하였고, 그래도 뉘우치지 않은 뒤에야 벌하였다. 이에 아전과 백성들이 서로 경계하며 형벌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옥사(獄事)를 처결하는 것을 매우 신중히 하여 매번 죽을 상황 속에서도 살길을 찾아주었다. 금산과 옥천에 살인 옥사가 있어 진술과 증거가 이미 갖추어져 있었으나, 공이 그 억울함을 살피고 마침내 풀어주니 감사가 그의 자애롭고 명철함을 칭찬하였다.
농사를 권장하는 데 부지런하여 방을 붙여 타이르고 몸소 점검하며 종자와 식량을 보조해 주니 모두 실질적인 효과가 있었다. 틈이 나면 선비들을 모아 학문을 강론하고, 효제와 예의를 거듭 강조하였다. 항상 중문(겹문)을 활짝 열어두어 객이 제집처럼 편히 머물게 하였다. 스스로를 받드는 데에는 간소하여 입는 옷이 가난한 선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형제는 외람되이 음서로 벼슬에 나아가 십여 년간 녹봉으로 봉양했으니 뜻과 소원이 족하다. 어찌 감히 내 몸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받들어, 평소의 지조를 잃고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겠는가!" 하였다. 항상 옥주(沃州: 옥천)의 산수를 사랑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쉴 뜻을 가졌었다.
정축년 5월, 임피(臨陂) 관아에 근친(覲親)하러 갔다가 이질(痢疾)에 걸렸다. 대부인께 근심을 끼칠까 두려워 스스로 힘을 내어 가마를 타고 돌아왔으나 병이 더욱 위독해져, 마침내 그해 6월 27일에 환수정(喚睡亭무주의 남대천가에 있는 정자)에서 생을 마쳤다. 계미년 11월 6일에 태어났으니 향년 55세이다. 임종을 앞두고 남긴 말에 집안일은 언급하지 않고, 오직 늙으신 대부인께 슬픔을 남기게 된 것을 지극한 아픔으로 여겼다. 8월 24일, 옥천 읍내 남쪽 천곡리(泉谷里) 진좌(辰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죽산 안씨(竹山安氏)로 목사 안종해(安宗海)의 딸이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 치건(致健)은 백부의 후사로 출계하였고, 차남은 치신(致信)이다. 세 사위는 윤면운(尹勉運), 권시응(權時應), 이집규(李輯圭)이다. 치건은 5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종장(鍾章), 종소(鍾韶)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치신은 1남 종경(鍾慶)을 두었다.
나(글쓴이)는 공과 5대에 걸친 친교가 있다. 나의 조부이신 도사공(都事公)께서 숙종 기사년에 벼슬을 버리고 광릉에 임시로 거처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뒤를 이을 후사가 없었다. 이에 동돈공(김술로의 조부 김순)께서 여러 붕우를 불러 상사를 치르고 손수 묏자리를 구하여 장사 지내 주셨다. 그 후 40여 년이 지나 금산으로 이장하게 되었을 때, 공(김술로)이 마침 군수로 와 있었다. 그가 묘소를 돌보고 공경을 다하는 것이 혈육보다 나은 점이 있었으니, 대개 선대의 옛 의리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예전에 내가 설산(雪山)으로부터 환수정을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와 공 모두 아우의 상을 당한 상태였다. 공이 서로 탄식하고 슬퍼하다가 이윽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가장 차마 보지 못할 것은 늙으신 어버이입니다." 하였다. 나는 우리의 정서가 비슷한 것을 슬퍼하면서도, 공의 깊은 마음과 지극한 효성이 늙어서도 쇠하지 않음에 감탄하였다. 찬찬히 그 정사를 살펴보니, 아전과 군졸들은 모두 노복처럼 순종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러 찾아오는 백성들은 모두 자식처럼 대하였다. 공은 화사한 얼굴과 웃음으로 처사하여 억지로 애쓰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그 고을을 보니 마치 풍년이 든 해처럼 화락(陶然)하였다.
내가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술보(述甫) 같은 이야말로 참으로 이른바 '안정되고 성실하며, 일 년의 계획에 여유가 있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술보에게 효도와 우애라는 실질적인 행실이 없었다면, 어찌 능히 이를 미루어 행하여 아랫사람을 교화하는 것이 저토록 쉬웠겠는가! 한(漢)나라 때에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의 선발을 중시하면서도, 반드시 효제(孝悌)를 힘써 행하는 자를 뽑아 인재를 비축한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진실로 오늘날 간절히 바라건대 모두 술보 같은 사람을 얻을 수 있다면 나라의 근본(백성)이 위태로워지지 않을 것이다. 듣는 이들이 간혹 탄식하며 사리를 아는 훌륭한 말(知言)이라 여겼다.
이제 치신(차남)이 상복 차림의 초췌한 모습으로 행장을 가지고 와서 비명을 지어주기를 청하니, 굽어보고 우러러 옛날과 지금을 생각하며 그를 위해 한바탕 눈물을 흘린다. 삼가 간략히 보고 기억하는 바를 위와 같이 적고, 이어 명(銘)을 지어 말한다.
차공의덕 유원근본(嗟公懿德 有源有本)
아아! 공의 훌륭한 덕은 연원이 있고 근본이 있도다.
효제근검 자상신순(孝悌勤儉 慈祥信順)
효도하고 우애하며 근면하고 검소하였고, 자상하고 미덥고 순응하였네.
시어유정 혜선회유(施於有政 惠鮮懷柔)
이러한 바탕을 정사에 베푸니, 은혜롭고 선명하며 부드럽게 감싸주었지.
고인소현 금인소악(古人所賢 今人所惡)
옛사람들은 어질다 여길 바이나, 요즘 사람들은 꺼리는 바이니,
순량시공 역미위지(循良視公 亦未爲知)
순량한 관리들조차 공을 보면, 또한 그 깊이를 다 알지 못하리라.
숙인군자 공기서기(淑人君子 公其庶幾)
맑고 선한 군자에, 공은 거의 가까웠다네.
유옥지산 유공소락(維沃之山 維公所樂)
저 옥천의 산수여, 오직 공이 즐거워하던 곳이네.
아필무괴 효자전석(我筆無媿 孝子鐫石)
내 붓끝에 부끄러움이 없으니, 효자가 이를 돌에 새기리라.
1759년 7월 일 세우다
(비문에는 崇禎三己卯로 쓰였지만 紀元後가 생락된 것으로 판단됨)
※ 이글은 늑천(櫟泉)집(송명흠의 호)에 있는 무주부사김공묘갈명을 가져온것이며 한국고전DB에 공개된 문집에서 발취한 것이다.
有明朝鮮通訓大夫行茂州府使金公墓碣銘 幷序
(유명조선통훈대부행무주부사김공묘갈명 병서)
友人通訓大夫司憲府掌令 宋明欽 撰
再從姪嘉善大夫開城府留守兼管理使致仁 謹篆
不 肖 男 致信 謹書
國家歷世旣多。費用浸廣。有司每告財屈。於是進用辦事之臣。競以苛急相尙。民不堪命。茂朱府使金公獨歎曰。我有去而已。不能爲是也。乃益淸淨慈惠。與民休息。凡有徵賦。度其貧富緩急而爲之期。不施箠楚。民亦感激盡力。猶恐或後。其鰥寡流亡當責隣族者。則爲之捐俸代輸。由是事集而民不擾。公克己節用。得錢千數百。刱補民廳。蠲民雜役。値歲大歉。竭誠賑貸。蒙袂繦屬。日以千數。公無所苛問。悉以附籍。喣濡惻怛。若腹寘而乳哺。傍邑人賴以全活者甚衆。公之病也。吏民僧徒。以至流丏。齊沐涕泣。禱山川者。日夜不絶。及喪。遠近奔走號慟。如哭父母。柩行。送者亘數十里。至境當遞。咸奮曰。吾府君靈輀。何忍付他人。竟舁致山下。哭辭而歸。無不涕下至地。嗚呼。民散久矣。鮮有不疾視其長上之死者。則曰民不古若也。觀公之所以治民。民之所以喪公者。則庶知堯舜其民。初無古今之異也。公諱述魯。字述甫。淸風人。有諱大猷。高麗門下侍中贈淸城府院君。入本朝。參議 贈贊成諱灌。於公爲十一代。生諱義之。觀察使。曾祖諱克亨。正郞贈贊成。受學於朴潛冶知誡。號沙川先生。祖諱洵。同敦寧。考諱槹。出入臺閣。有直聲。官止承旨贈吏曹參判。母貞夫人達城徐氏。漢城庶尹贈吏曹判書宗積之女。仁惠而有禮。贊成公力學篤行。爲尤菴宋先生所推重。同敦公自少。游兩宋先生之門。以孝義聞。公生質美。長益擩染。容儀淸粹。性樂易謙恭。與人言。惟恐傷其意。然存心處事。嚴密精確。其事親有深愛。居致敬。病致憂。居喪盡哀。奉大夫人。備盡志物之養。大夫人甚安之。友諸弟妹。推及諸姪 及婦。無異己子。與宗族故舊。曲盡恩義。多人所難及。公少貧居廣陵邨庄。耕稼爲生。泊然若將終身。公門戶貴盛。諸從父兄相繼秉政。人或笑公之拙。甲子。筮仕爲繕工假監役。冬。監造樂器。敍勞。陞瓦署別提。遷禁府都事。捕逆黨於嘉山。換司宰監主簿。丙寅。出監永同縣。道臣褒聞善績。己巳秋。陞錦山郡守。秩滿。以十考十上。遞付掌樂院僉正。乙亥春。除茂朱府使。其居官一於仁愛謹愼。爲民興利除害。其有罪。爲之委曲戒諭。使自知罪。不悛然後罰之。吏民相戒恥於犯刑。尤愼折獄。每於死中求生。錦,沃有殺獄。辭證已具。公察其寃。竟出之。監司稱其慈明。勤於勸農。榜諭躳檢。補助種糧。皆有實效。暇則會士講學。申申於孝悌禮義。常洞開重閽。客歸如家。簡於自奉。被服無異寒士。嘗曰。吾兄弟猥以蔭仕。十數年祿養。志願足矣。何敢奉身華侈。喪素守而負國恩。常愛沃州山水。有歸休之志。丁丑五月。覲于臨陂衙。患痢。恐貽大夫人憂。自力舁歸。疾益㞃。竟以其六月二十七日。終于喚睡亭。距其生癸未十一月六日。享年五十五。顧言不及家事。惟以貽慽大夫人爲至痛。八月二十四日。葬于沃川治南泉谷里辰坐之原。配竹山安氏。牧使宗海 之女。生二子。長致健。出爲伯父后。次致信。三女婿。尹勉運,權時應,李輯圭。致健五男二女。男鍾章,鍾韶。餘幼。致信一男。鍾慶。余與公有五世之好。余祖都事公。當肅宗己巳。棄官。僑居廣陵。歿而無后。同敦公召諸朋友。治喪事。自求山地以葬。後四十餘年。改葬于錦山。而公來爲守。其看護式恭。有踰骨肉。葢不替先故之義也。曩余自雪山。過喚睡亭。余與公。俱有弟之喪。公相與嗟悼。已而泣曰。最不忍者。老親也。余旣悲情緖之相似。而歎公因心至性。老而不衰。徐察其爲政。則吏卒皆奴僕。而民之赴愬者。皆子也。公則色笑 以處。不見其有爲。而視其境。陶然如樂歲。余歸而語人曰。若述甫者。眞所謂安靜悃愊。歲計有餘者。然使述甫無孝友實行。則何能推行。化下如彼其易哉。漢代所以重牧民之選。而又必由孝悌力行。以儲其材也。苟使今日。緊望盡得如述甫者。則邦本庶其不蹶乎。聽者或歎以爲知言。今致信纍然手狀來謁銘。俯仰今昔。爲之一涕。謹略著其所覩記者如右。系之以銘曰。
嗟公懿德。有源有本。孝悌勤儉。慈祥信順。施於有政。惠鮮懷柔。古人所賢。今人所惡。循良視公。亦未爲知。淑人君子。公其庶幾。維沃之山。維公所樂。我筆無媿。孝子鐫石。
崇禎三己卯 七月 日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