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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7장 19-24절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로 인해 스스로를 나타내길 원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워졌을 때 유대로 올라가 자신을 세상에 나타낼 것은 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은 자신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이미 요한복음 6장에서 밝힌 바 있는 것처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요6:39). 즉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이 있는데, 그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내 놓으셔야 합니다. 죽으셔야 하고 반드시 부활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 없이는, 그리고 그의 부활 없이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이 마지막 날에 다시 사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죽으시기 위해 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으시기 위해 왔다고 해서 자신의 목숨을 함부로 내주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죽음도 하나님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문제와 함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저들 입장에서는 신성모독을 행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그런 말씀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마음이 매우 좋지 않을 때 굳이 유대로 가서 다니려고 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것을 다 지켜야 하는 분으로 있기 때문에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에는 율법에 따라 기꺼이 올라가셨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셨습니다. 다만 위협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지혜롭게 행동하시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셨습니다.
그럼 명절 동안 계속해서 자신을 숨기시고 계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고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결코 권위 있는 자의 가르침과는 멀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가르침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외식하는 자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주님의 백성을 위하여 자신을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명절에는 은밀히 올라가셨지만, 명절 중간이 되었을 때는 성전에서 공적으로 가르치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가르침에 대하여 유대인들의 반응은 그의 가르침의 내용보다는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글을 아는가가 논쟁 꺼리였습니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전혀 배운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참되게 가르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교훈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자라면 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달리 말하면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요,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면 내 교훈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 수 있지만, 지금 너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내 교훈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드러내신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이시기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의 영광만을 구하지만,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다고 말씀하십니다. 달리 이해하면 너희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가르침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가르침만이 참되다고 한다면 너희가 가르치는 것은 참된 것이 아니라 불의하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교훈하십니다. 우선 19절에 보시면 유대인 입장에서 볼 때 민감하게 반응할 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이미 살핀 바 있지만 요한복음 5장으로 가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또 죽이려고 하는 이유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은 사건은 안식일에 일어난 일인데,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걸림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16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또한 유대인들에게 걸림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이 말은 하나님을 자신의 친 아버지로 여기는 말로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 18절에 보시면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즉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이유는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다고 여기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율법을 재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인성을 취하심으로 율법 아래 나시고 율법에 순종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완전하게 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그런 분이 38년 된 병자조차 치유하셨다는 것은 그 일이 결코 율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있어 너희는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을 했다고 따진다는 것입니다. 이 일로 박해하려고 하고, 나아가 죽이려고 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너희가 모세로부터 받은바 율법을 지키는 자라면 내가 안식일에 행한 일이 결코 모세의 율법으로 볼 때 불순종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그가 기뻐하시는 것은 자비를 원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12:7-8,12). 율법의 핵심도 사실은 다르지 않습니다. 율법의 요약을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이라고 할 때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하는 것은 결코 율법에 저촉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의미에서의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행한 일, 그 일은 육적일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병든 자이기에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한 것인데 그 일로 인하여 시비를 걸고, 박해하려고 하고, 죽이려고까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너희가 모세로부터 받은 율법에 대하여 지키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앞에 있는 내용과 함께 이해하자면 모세로부터 받은 율법에 대하여 지키지 못하는 자로 있기 때문에 너희가 내 교훈에 대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거저 이 사람은 글을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는가로만 따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 입장에서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는 말씀은 굉장히 당황스러워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태도와 생각은 진지하고도 굉장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기록하는데, 로마서 2장 17절 이하에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롬2:17-20) 여러분, 율법을 의지한다는 것은 율법이 곧 그들의 신앙과 삶의 규범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율법의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는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비춰주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들의 선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롬2:23a) 하나님에 대한 열심만큼(롬10:2a) 율법에 대한 열심도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 속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시니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더군다나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고자 하느냐는 말씀을 하심으로 공공연하게 드러난 사실, 그러나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고 반문하게 되는데, 그런 사실도 드러내놓기를 원하지 않는 저들에게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지만 그 사실을 감추고자 하는 것 자체가 양심의 법으로 볼 때, 나아가 하나님의 율법으로 볼 때 정당하지 않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처럼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것,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신성모독적 발언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가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라고 할 때 그 말은 신성모독이 아니라 진실이요, 진리임을 증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믿지 않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고, 이로 인해 죽이고자 하나 서로가 자신이 옳다고 하는 상황 가운데 있기 때문에, 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예수님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마치 오리발을 내미는 것처럼 말하는데, 20절입니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일단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당신을 죽이려고 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귀신 들린 것이 아니냐? 제정신이라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장에서, 그리고 요한복음 7장 1절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예수를 죽일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공공연하게 알려졌다는 것은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25절 말씀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이미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을 부정합니다. 우리는 죽이려고 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죽이려고 한 적이 없는데, 죽이려고 한 것처럼 말하기 때문에 오히려 네가 귀신 들린 것이 아니냐, 미친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런 자세는 늘 있어 왔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들을 고쳐주시자(22) 거기에 있던 무리들이 놀라면서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는 말을 하게 됩니다(23). 그때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24) 이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 저들의 말이 결코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25-26) 그러니까 유대인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리고 그가 행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한번도 정상적인 듣고 정상적으로 본적이 없습니다. 눈이 있어서 보기는 보지만 귀가 있어서 듣기는 듣지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그들 스스로 자신의 눈과 귀를 막았기 때문이요, 그들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에 대한 이해가 하나님의 뜻과 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은 21절 이하의 본문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이 율법에 어긋나지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역으로 말하면 너희의 율법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자신의 옳음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이 율법에 어긋나지 않음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2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여기서 한 가지 일을 행한 것은 23절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온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너희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병이 나은 자로 하여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가라는 것으로 인해 율법을 범한 것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긴다는 것은 그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오히려 분노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다르지 않는 일을 너희도 율법을 따라 행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22절을 보시면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예수님께서도 율법에 따라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지만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태어난 지 8일이 되면 할례를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례는 모세 시대 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브라함 시대 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괄호를 통해 좀 더 정확하게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할례는 언약의 표징으로서 언약의 핵심인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이상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할례를 받은 모든 자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아들만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이삭에 앞서 육신을 따라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실 때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는데(창17:26), 문제는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일지라도 약속을 따라 난 자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약속을 따라 난 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으로부터 난 자이기에 언약의 표인 할례는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언약과 언약의 표를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택한 백성 사이에 맺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외에 이 언약이 맺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언약이 맺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마엘처럼 유기자로 나타난다면 하나님은 언약에 있어 신실하지 않는 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맺으신 분이 결국 실패한 것이 되는데,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언약은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과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표는 적어도 외적으로 언약을 고백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에게는 주시는 형태로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례를 베푼다고 할 때 한 명의 믿는 부모가 있으면 유아에게 세례를 주는 것처럼, 또한 참된 신앙 고백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기만 하면 그 고백이 참된 고백인지 사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세례를 베풀기도 합니다. 구원의 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는 구원의 표일 뿐입니다. 구원 자체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례와 같은 성례를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례를 재정하여 교회의 유익을 위해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 할례의 내용 속에서만 보더라도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된다고 말씀하기도 하시는데(창17:14),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할례의 중요성을 나타내기도 하셨던 겁니다.
어쨌든 모세의 율법에 따라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한다고 할 때 안식일이라고 해서 할례를 행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23절을 보시면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지금 예수님은 무엇과 무엇을 비교하고 있는가 하면 너희가 안식일에도 행하고 있는 할례와 내가 안식일에 행한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했지만 할례는 구원의 표로 주신 것입니다. 할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 자로 있게 됩니다. 그러나 언약의 실행이 할례를 받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할례는 언약 자체가 아니라 언약의 표입니다. 이런 할례가 아브라함 때부터 전해 오다가 모세의 율법으로 명령되었을 때 그들은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사건, 단지 병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전신, 사람의 전부를 건전하게 한 사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칼빈의 주석을 참고하여 설명하면 지금 예수님은 큰 것과 작은 것을 비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자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이 큰 것이고, 할례는 작은 것으로 비교하고 계십니다. 특히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과 관련해 사람의 전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신체의 전부를 의미하기보다는 사람의 전부, 다시 말해 영육을 포괄하는 전 인간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38년 된 병자의 육신만 고쳐주셨다면 할례가 영혼에 주는 유익이 더 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적어도 영적인 교훈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례보다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이 더 큰 것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때는 영육의 전인을 고쳐 건전하게 하셨다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일을 안식일에 하셨는데, 이 일에 대하여 너희가 노여워한다는 게 어떻게 율법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도리어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에 대하여 노여워하는 너희가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 속에서 예수님은 24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지금 유대인들은 외모로 판단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있고, 나타나 있는 것만 보고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핀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요7:15)고 묻는 것이 외모로 판단한 것입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6:42) 이것도 외모로 판단한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이것도 외모로 판단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외모로만 판단하면 사람으로는 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보지 못합니다. 여기에 어떻게 구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율법의 이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은 율법의 참된 뜻보다는 율법의 외적인 면만을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하시면서 비판하신 말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5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5-28)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 그러나 단지 육적인 병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병까지 고치시면서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사건은 외모로 판단하는 저들에게 있어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좀 더 정확하게 보자면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율법에 대하여 해석한 것에 대하여 저촉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지만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할 때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하는 것은 결코 율법에서 금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율법에 대하여 저들은 여러 가지 항목들을 만들어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만들다보니 율법의 참된 의미보다는 외모로 판단하는 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결코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 어떻게 판단하는 것이 옳은가? 예수님께서는 공의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공의로 판단하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5장에 있는 말씀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저들은 율법을 외모로만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하여 단지 외적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주실 때부터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는 무엇인가? 외적으로 살인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것도 살인이요, 형제에 대하여 욕하는 것도 살인이요, 형제에 대하여 업신여기는 것도 살인이라는 의미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한 부분만 더 보면 마태복음 5장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 동일하게 저들은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하여 외적으로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해석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면서 간음하지 말라고 하실 때 본래 의도하신 바는 외적으로 간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지 않는 것까지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공의로 판단하라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율법에서 하라고 명하시면 하라고 명하신 반대의 말씀, 하지 말라는 말씀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외적으로 무엇을 명하시면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는 무엇을 명하시는지, 또 명하시는 바가 있다면 무엇을 금하시는지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전체 말씀을 통해 그 한 부분이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는 가르침, 하나님의 뜻인 그의 말씀 전체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공의로 판단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24절에 근거하자면 교회의 부패란 외모로 판단하는 데서 나옵니다. 실제로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외모로 인해 차별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십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2:1-9)
그러므로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외모로 판단하도록 가르쳐서도 안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가톨릭의 공로사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공로사상이 오늘날 교회 안에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열심을 말하면서 그런 열심이 마땅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상급과 함께 가르치면서 그것이 공로가 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 이것이 외모로 판단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천국에서 가장 큰 상급을 받는가?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이 가장 큰 상급을 받는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베드로와 바울의 상급이 가장 크다. 그러나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신(창15:1) 하나님 자신보다 더 큰 상급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 세상의 것으로 비교하는 것처럼 비교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외모로 판단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런 가르침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좀 더 열심을 내도록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로마서를 통해 말씀하신 바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2절과 3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에 구원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공의로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러나 하나님의 전체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한 부분을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우리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는 것, 여기에 하나님만을 출처로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결국 이런 말씀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오늘 본문 19절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 앞에서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율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유대인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은 공의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의 전체 말씀으로 말미암아 한 부분이 해석되고, 해석된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아니고서는 결국 사람의 의를 따르는 것이고, 사람의 의를 따르다보면 결국 하나님의 의는 거절하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는 구원의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무엇인가? 공의를 따라 판단하라고 하신 이 말씀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