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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은 성경적인가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히1:6)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8:19)
사도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새 사도신경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12사도들이 작성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초기 세례예비자용 문답례에서 발전했다. 200년경 로마에서 사용된 문답례의 한 실례가 히폴리토의 〈사도전승〉에 보존되어 있다. 긍정적인 명제로 씌어진 이 진술들은 신조가 되었으며, 이후에 세례신조로 알려졌다.
현재의 사도신경 본문은 3, 4세기 로마에서 사용한 세례신조와 비슷하며, 그 최종적인 형식은 6세기말 또는 7세기초 프랑스 남서부지방에서 확립되었다.
이것은 점차 세례신조를 대신하게 되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 재위)가 서방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 신앙 진술로 인정했다.
동방정교회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12사도들이 작성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초기의 세례예비자용 문답례에서 발전했다. 200년경 로마에서 사용한 문답례의 한 실례가 히폴리토가 쓴 〈사도전승 Apostolic Tradition〉에 보존되어 있다. 주교는 "당신은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으십니까?"와 같은 그리스도교의 주요신앙에 대해 질문하곤 했다. 긍정적인 명제로 씌어진 이 진술들은 신조가 되었으며, 이 신조들은 이후에 세례신조로 알려졌다.
현재의 사도신경 본문은 3, 4세기에 로마에서 사용한 세례신조와 비슷하며, 그 최종적인 형식은 6세기말 또는 7세기초 프랑스 남서부지방에서 확립되었다. 이것은 점차 세례신조를 대신하게 되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 재위)가 서방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 진술로 인정했다.
이 당시 채택된 라틴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Credo in Deum Patrem omnipoténtem, Creatórem cæli et terræ, et in Iesum Christum, Fílium Eius unicum, Dóminum nostrum, qui concéptus est de Spíritu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
passus sub Póntio Piláto, crucifixus, mórtuus, et sepúltus, descéndit ad ínferos, tértia die resurréxit a mórtuis, ascéndit ad cælos, sedet ad déxteram Dei Patris omnipoténtis, inde ventúrus est iudicáre vivos et mórtuos.
Et in Spíritum Sanctum, sanctam Ecclésiam cathólicam, sanctórum communiónem, remissiónem peccatórum, carnis resurrectiónem, vitam ætérnam. Amen."
현재 한국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다음과 같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다음 지식백과-
현재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 각자의 신앙을 고백하며, 이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교회는 이단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신경이 성경적으로 맞는 지 아니면 성경적이지 않는 사람의 전통으로 내려 온 것인지 비교해서 우리의 신앙을 성경에서 요구한 대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외아들’인가 ‘맏아들’인가
‘외아들’의 사전적인 뜻은 다른 자식이 없이 단 하나뿐인 아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외아들로 믿는 사람들은 오직 예수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교회 다니는 당신은 누구의 아들입니까?
성경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외아들이라 표현한 구절이 있습니까?
단 한 번도 예수님을 외아들이라 말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외아들을 예배시간마다 고백하는 것이 성경적일까요?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다고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질문합니다.
그런 당신은 성경에도 없는 외아들을 고백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까?
그 아들은 누가 인정하는 것입니까?
성경에도 없는 외아들을 믿는데 하나님이 당신을 인정해 주실까요?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7)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말씀하시며”(히1:6)
성경에 예수님을 ‘맏아들’로 말씀한 구절이 세 번 나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외아들’로 말씀한 구절은 단 한 번도 안 나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떤 아들로 믿어야 됩니까.
예수님이 외아들이 되시면 예수님 외에 하나님의 아들은 단 한 사람도 나올 수 없게 됩니다.
이 무슨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을 망치는 일입니까?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3-5)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세우신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을 당신의 친아들들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 중 ‘자기의 아들’이라 말씀하지 않고 ‘아들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외아들’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을 방해하는 일을 하는 것이며 성경대로 믿지 않고 사람의 유전을 믿기 때문에 절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성경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외아들’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쌍하게 보시고 아들 아닌 자를 데려다 아들로 삼아 준
양자”라 합니다. 물론 ‘양자’라는 말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나온 ‘양자’는 지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아들이고 믿는 사람은(나는) 친아들이 아니라 하는 사람들!
친아들은 아버지가 생명을 줘 낳은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친아들이 맞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1:21)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러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히5:5)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낳은 친아들입니다. 그러면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친아들 아닙니까?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약1:18)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시고”(히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은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찌 우리는 하나님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일까요.
혹시 내가 하나님의 친아들이라 당당하게 말하면 참람하고 예의 없다고 생각해서 친아들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지.
왜 예수님이 외아들이 아닌가는 히2:11절에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우리도 예수님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난 자이므로 예수님과 나는 한 아버지를 갖은 친형제가 됩니다.
외아들은 아들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이고 맏아들은 맏이 밑에 동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5:26)
이 말씀이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라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나는 아들 될 수 없는 그런 존재였는데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셔서 나를 아들 삼아 주셨다”고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생명관계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주고 아들은 그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친아들이 될 수 있는 관계.
요5:26절과 히2:11절 말씀이 “내가 하나님의 친아들”이라 보증하는 말씀이며 내가 하나님의 친아들이므로 예수님과 나는 형제 관계가 되고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 아니라 맏아들이 됩니다.
2.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42-43)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후 몇 일만에 부활하셨는가!
위에 있는 눅23:42-43절 말씀을 보면 죽으시고 바로 부활하셔서 강도와 함께 낙원에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죽으실 것을 세 번 말씀하시면서(마17:22-23,마20:17-19)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말씀이 맞습니까? 예수님은 언제 부활셨습니까?
교회에서 전하는 죽음과 부활의 시간 순서는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죽으시고 토요일은 예수님의 육체는 무덤에 있고 영은 옥에 가서 전도하시다가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시간으로 보면 약 36시간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약 36시간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알아본 사람이 없습니다.
3년6개월을 따라 다니고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많은 이적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이 36시간 예수님을 안 봤다고 예수님을 못 알아 본다는 것이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요20:14)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 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3-16)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 삼일’을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말씀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러 가로되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눅13:31-32)
이 말씀에 완전하여질 ‘제 삼일’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죽은 자를 세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삼’은 상태를 말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의 완전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세 사람을 살리심은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한 완전한 사랑과 사람 살리심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시기 위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을 세 번 말씀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이유도 그 분의 죽으심은 사람으로서 완전한 죽으심이고 부활도 완전한 부활임을 사람으로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죽으신 그 날 바로 부활하셨습니다.
3.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성경 개역 한글판과 개역 개정판 어디에도 ‘아버지 하나님 우편’이란 말이 안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3:1)
혹자는 ‘하나님 우편’과 ‘아버지 하나님 우편’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우편을 아버지 우편이라 생각하고 믿는 순간 하나님은 두 분으로 나눠집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는 형체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면 두 분 하나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부 목사,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했지만 결국 한 분 하나님을 나눠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한 결과 교회에서 예배 시간마다 신앙고백을 하면서 하나님을 한 분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두 분 하나님으로 고백해 버리는 사단의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여 잔해하고”(갈1:13)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유대교에 대한 열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하면서 “나처럼 하나님 일을 잘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사울이 예수 믿고 본인의 신앙을 고백한 것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목사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생각과 기준으로 짜깁기해서 당연히 아버지가 계시니 아들이 계시고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은 보좌 중앙에 앉아계시고 아들 예수님을 그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성경에도 없는 ‘아버지 하나님 우편’이란 말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어디에도 하늘에 보좌가 두 개, 세 개가 있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하늘에 보좌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양태론이 아닙니다.
성경을 한 번 찾아보세요.
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늘에 보좌도 세 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보좌는 없습니다.
아니면 아버지만 보좌에 앉아 계시고 예수님은 그 오른편에 서 계시다고 생각하든지.
‘우편’을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말씀하는 우편은 사람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그런 장소가 아닙니다. 성경에 우편에 대한 구절 중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채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것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권능의 우편의 상태로 위엄의 우편의 상태로 계심을 말씀한 것이지 하늘에 보좌가 두 개가 있어서 아버지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권능이나 위엄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권능이나 위엄이 왼쪽 오른쪽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16:8)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시121:5-6)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의 우편에 계신다고 했는데 성경 어디에도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에게 나타나셔서 다윗의 우편에 계셨다는 구절이 없고 다윗이 여호와를 항상 앞에 모신다고 했는데 마찬가지 다윗앞에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계신 적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과 다윗과 함께 하는 상태를 다윗이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은 어느 왕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경배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모심이여”이고 그런 다윗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해 주시는 표현이 바로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우편도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우편을 가둬버렸기 때문에 하늘도, 우편도 믿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저 곳’이며 살아 있어서 갈 수 없는 곳, 죽어서만 가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하늘이나 보좌는 하나님이 계신 그 곳이 바로 하늘이면서 보좌입니다.
4.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주제(Title) : 사도신경 해설(Apostles Creed Commentary)
부제(Sub-Title) :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성경 본문(Bible Text) : 요한계시록(Revelation) 20장 12~15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 20:12)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감람산(The Olive Mountain)에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천사 둘이 나타나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이 세상 끝 날에 다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온 우주를 새롭게 하시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토록 성도들과 함께 만왕의 왕으로서 다스리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면서 사도신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과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고백해야만 합니다.
1. 거기로부터(From Thence)
거기(하나님 보좌 우편)로부터는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우편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때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에서 떠나 지상으로 심판하시기 위해 재림하십니다.
2.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the quick and the dead)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가 누구인지 설명해 보자면 사람이 죽었느냐 혹은 살았느냐를 논할 때 성경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적인 관점에서 생사를 논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관점에서 생사를 논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영적인 관점에서 생사를 논한다면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의 행하셨던 것과 가르치심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은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육신은 살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라고 합니다.(엡 2:1~3 -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육신적인 관점에서 생사를 논한다면 살아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언급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지상에서 육신의 생명이 살아 있어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자들이거나 혹은 육신이 죽어 땅에 묻혀있거나 소멸되었던 사람들로서 그들의 육신은 죽어서 땅에 묻혀 있거나 소멸되어 있을 수 있지만 영혼은 소멸될 수 없으므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을 받기 위해 영혼과 육신이 다시 결합하여 부활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3. 심판하러 오시리라.(He shall come to judge)
예수님은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최후의 심판대에는 두 종류의 책이 펴져있습니다. 하나는 심판대 앞에 서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있을 때 행하였던 행위들을 기록한 행위록이며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생명책입니다.(계 20:12)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불순종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가 기록된 행위록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각자의 행위에 따라 합당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불신앙 가운데 행했던 악행의 정도에 따라 그들의 지옥의 형벌도 차등적으로 주어질 것입니다.(계 20:13~15)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이 세상에서 지었던 허물과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함을 얻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롬 8:1)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오히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성령의 역사를 따라 행하였던 거룩하고 선한 행위에 따라 하늘의 상급(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계 21:1~4)
사도신경의 이 신앙고백에 따라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재림하시는 예수님께서 온 세상 사람들을 그들이 행위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를 믿고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우리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천국에서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믿음과 순종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실 것을 믿고 계십니까?」
- 인터넷 다음에서 어느 목사님의 설교내용 발췌
➀ 거기로부터
“거기”가 어디인가. 아버지 하나님 우편이라고 믿습니다.
이 목사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이 거기를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왜 성경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
왜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13:13)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유대인들에게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한탄하셨던 말씀인데 이 말씀이 예수 잘 믿는다는 지금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아버지께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요17:11)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3)
예수님께서 아버지 어디로 가신다고 하셨을까요.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요16:28)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존재론적 삼위일체 교리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계신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7.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8.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결코 창조되지 않았다.
10.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영원한 분이시다.
22. 성자는 성부에게서 왔으나 지음을 받았거나 유래된 분이 아니다.
26. 다만 세 분이 함께 동등하다는 것이다.
31. 그는 성부의 본체이시며 이 세상이 생겨나기 전에 나신 자요 동시에 그 어머니 의 본질을 갖고 이 세상에 나신
분이시다.
-아타나시우스의 존재론적 44 신조
사도신경이 아타나시우스의 존재론적 삼위일체 신조 44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을 아버지와 따로 계시는 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7조 8조를 보면 각 세 분이 자체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 세 분이 창조되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22조에서 ‘성자는 성부에게서 왔다’는 말은 아버지 따로 계시는 성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31조에서는 ‘성자가 이 세상이 생겨나기 전에 나신 자’라고 말합니다.
7조 8조 10조에서는 창조되지 않았다고 말했으면서 31조에서는 이 세상이 생기기 전에 나셨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이 바로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16:28절에 ‘아버지께로 나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왔다’는 말은 나오시기 전에 안에 있었다는 말씀이 생략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안에 계셨습니다.
말씀을 확인해 봅시다.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요16:30)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17:8)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사람으로서 모든 일을 마치시고 원래 나오셨던 위치로 돌아가셨습니다.
요16:28절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아버지 오른편으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안으로 예수님의 영혼이 가셨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마28:50)
“예수께서 큰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23:46)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➁ 산 자와 죽은 자
“본문에서 언급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지상에서 육신의 생명이 살아 있어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자들이거나 혹은 육신이 죽어 땅에 묻혀있거나 소멸되었던 사람들로서 그들의 육신은 죽어서 땅에 묻혀 있거나 소멸되어 있을 수 있지만 영혼은 소멸될 수 없으므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을 받기 위해 영혼과 육신이 다시 결합하여 부활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산 자’와 ‘죽은 자’는 육체가 살아 있는 자를 ‘산 자’라 하지 않고 육체가 죽은 자를 ‘죽은 자’라 하지 않습니다. “내가 숨 쉬고 살아있으니까 산 자”라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8:21-22)
제자의 아버지가 죽자 장사를 먼저 치르고 예수님을 좇게 다는 제자에게 “거기는 죽은 자 밖에 없기 때문에 가지마라”고 하십니다.
장사는 육체가 살아 있는 사람이 육체가 죽은 자를 치르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육체가 죽은 자도 죽은 자요, 육체가 산 자도 죽은 자라고 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성경에서 ‘산 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안 계십니다. 사람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산 자’가 되려면 산 자이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22:32)
“내가 하나님 믿기 때문에 산 자이지, 내가 구원 받았으니까 산 자이지, 내가 성령으로 거듭났으니까 산 자이지” 혹시 하나님의 생명은 받았습니까?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5:26)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적이 없거나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고 하나님을 부르지 않습니까.
그 속에 하나님이 없는 자는 다 죽은 자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성경에서 말하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알기위해 아담이 언제 죽었는 지를 발견하면 해결됩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라는 계명을 주셨는데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창5:5) 그러면 아담이 언제 죽었습니까?
산 자와 죽은 자를 알기 위해 이 말씀이 정말 중요합니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18:4)
실과를 먹고 아담의 영혼은 즉시 죽었지만 아담의 육체는 구백 삼십 세를 살다가 죽었습니다.
반드시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을 구분해야 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주인은 영혼이므로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 전체가 다 죽었은 것입니다.
영혼이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연결, 교통이 끊어짐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방법은 직접 그 영 속에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8:10)
다시 마22장22절 말씀을 보면 육체가 죽은 자도 예수님 보시기에 죽은 자요, 육체는 살아 있으나 그 영혼이 죽은 자도 죽은 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속에 산 자이신 하나님이 없으면 육체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하나님을 믿고 교회 다닌 다고해서 산 자가 아닙니다.
반드시 그 속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신 사람만 산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육체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입니다.
혹 그리스도도 내 안에 계시고 앞으로 또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것을 믿는 자도 죽은 자입니다.
그런 그리스도는 안 계시고 그런 재림도 없습니다.
➂ 심판하러 오시리라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는 심판하시기 위해 오신가. 재림과 심판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5:22)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사람도 심판하지 아니하신다 말씀하셨는데,
“또 내가 보니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계20:11-12)
흰 보좌, 흔히 백보좌라 말합니다.
이 보좌에 앉아 계시는 분을 누구라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라 알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떤 구절은 이런 말씀 또 다른 구절에서는 저 말씀을, 이제 볼 말씀도 그 말씀의 속뜻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자기의 주관을 더해서 잘못 전하는 바 심판을 동시대에 동시간에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만 그런 심판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9:39)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요12:47)
세 구절을 살펴봤습니다.
예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혹자는 초림하신 예수님은 구원하러 오신 것이요 재림하실 예수님이 심판주로 오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시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벧전4:5)
재림과 심판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위 구절을 인용해서 재림하실 그리스도는 심판주로 오실 것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산 자’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당시 육체가 살아 있는 자를 말하고 ‘죽은 자’는 아담 이후부터 예수님 재림 때까지 육체가 죽어 무덤에 묻혀 있는 자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심판은 언제 이루지는가.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사람이 육체가 살아 있을 때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믿는 자도 믿지 않는 자도 육체가 죽어서 무덤에 있다가 예수님이 공중에 재림하시면 그 때 분리되었던 육체와 영혼이 다시 합체되어 심판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가 단순하게 육체가 죽어 무덤에 있는 자라면 그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한 여러 학설이 있는데 “인간은 죽음과 동시에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며 그 영혼은 중간기 처소인 ‘낙원’과 ‘음부’로 각각 들어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톨릭에서는 ‘연옥’이라고도 합니다.
요3:18절 ‘믿는다는 것’은 육체가 있을 때 믿는 것이요 육체가 살아 있을 때 믿지 아니하면 이 사람은 믿지 않음을 인해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을 ‘정죄’에 이르는 것이란 표현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면 살아서 육체가 있는 믿는 자는 심판을 받을까요?
믿는 자도 심판을 받습니다.
왜 심판은 받는가하면 죄 때문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첫 사람은 죄를 가지고 때어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그것으로 끝난 것 아닌가?”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전 인류의 죄 담당하심이고 하나님 편에서 죄 없다고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는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됩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심판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여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롬6:6-8)
믿는 자는 함께 죽음으로 심판을 받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을 받습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만일 예수님만 죽었다고 믿으면 그 사람은 여전히 죄가 있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았고 이 사람이 육체라는 기회가 있을 때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가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왜 영원히 불못에 가는 심판을 받지 않는가.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시작이 없는 아버지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언제 영생을 얻습니까. 죽어서 천국가서 얻습니까.
이렇게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단순하게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43.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영생으로 나가고 악을 행한 자는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이다.
-아나타시우스의 존재론적 삼위일체 44
이렇게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재림과 심판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재림과 심판은 예수님이 초림하셨던 모습처럼 사람 눈에 보이게 한 날 한 시에 지상으로 강림하셔서 그때까지 살아남은 자와 그 전에 죽은 자를 한꺼번에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재림과 심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재림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 있는 자 안에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오시는 것을 재림이라 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 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성경에 재림이라는 말은 안 나오지만 두 번째는 나옵니다.
두 번째가 곧 재림 아닙니까?
이 구절에서 심판하기 위해서 재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말씀하시며”(히1:6)
‘다시’는 두 번째를 이르는 말입니다.
다시 들어오시는 세상은 사람 밖에 있는 세상을 말하지 않고 사람 안에 있는 세상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3:17)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 안으로 두 번째, 다시, 재림하십니다.
바로 심판하시기 위해서. 무엇을 심판하실까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1-2)
그리스도가 안에 오시기 전의 사람의 상태는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마귀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죄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
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5:17)
재림하시는 이유는 사람은 구원하시고 사람 속에 있는 세상 임금, 곧 사망을 심판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12:31)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곧 세상 임금이 쫓겨날 것이다.
그런데 세상 임금은 사람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고 따라서 재림하셔서 사람 안으로 오셔야 세상 임금을 심판할 수 있지 기독교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사람 밖에 오시면 어떻게 세상 임금을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해도 1,700년이 넘도록 아타나시우스의 존재론적 삼위일체에서 나온 사도신경에 세뇌당하고 있으니……
과연 무엇이 상식입니까.
누가 이단이겠습니까?
초림하셔서 사람 밖에 오셨던 예수님이 세상 임금을 심판하셨습니까?
어차피 사람 밖에 하실 것 같으면 초림하셨을 때 마귀를 심판하셨으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재림하실 예수도 사람 밖에 오시길 기대하고 있으니 사람 안에 있는 세상 임금은 언제 심판을 받을까요.
계20장에 나오는 천년왕국을 기다립니까.
천년왕국이 끝나면 그때 마귀가 심판을 받습니까?
그런 천년왕국은 언제 오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살아 있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의 육체가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여전히 여러분 안에 있는 세상 임금은 심판 받지 못하고 결국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데 천국 간다고 믿으십니까?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16:11)
요12:31절 말씀은 ‘아직’이지만 요16:11절 말씀은 ‘이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아직이 이미로 바뀔까요.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그가 오시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7절 ‘보혜사’라 하시고 13절은 ‘진리의 성령’이라 하십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7)
그가 오시면 어디로, 믿는 자 안으로 오시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고 쫓겨나는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 임금이 심판 받는 것이 히9:28절 말씀이 이루어지 것이며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따라서 재림과 구원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 재림 따로 있고 구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오시는 ‘그’가 누구이며 어디로 오시는 지만 알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는 보혜사며 진리의 성령이며. 그리스도입니다. 요14:17절 ‘내가’온 다고 하신 ‘나’는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씀이 히9:28절 말씀과 연결됩니다.
또한 믿는 자 안에 성령도 오십니다.
믿는 자 안에 오시는 성령은 아버지의 생명이며 하나님의 영이지만 그리스도는 아들의 영입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4:6)
아들의 영이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이 아들의 영을 하나님께서 어디로 보내십니까.
그렇습니다.
믿는 자 마음 가운데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8:9-10)
사도 바울은 재림과 심판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 안에 하나님의 영인 성령과 아들의 영인 그리스도의 영이 계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는데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23)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는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아버지와 아들이 믿는 자에 들오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이 다시 인용한 것입니다.
그가 믿는 자 안으로 오시어 세상 임금을 심판하시는 것이 바로 재림이고 구원입니다.
5.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성도의 교제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사도신경의 고백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합니다.
여기서 ‘교통(交通)’이라는 단어를 한자로 보면 교통 사귈 교(交), 통할 통(通)입니다. 이 말은 ‘교제’, ‘사귐’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성도 간의 친교(교제)’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성도들끼리 교제하면 되는 것이지.....굳이 성도의 교제를 신앙고백으로까지 고백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예,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것은 단순한 ‘성도의 교제’를 넘어서는 의미입니다.
영어 번역을 보면 사도신경의 본래의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The communion of saints’,
성도들의 연합체, 연합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즉 정확하게 번역하면
‘성도들이 연합되어 있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지체들 하나하나가 긴밀하게 상호 관련을 맺어 연합된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갈라지고
우리가 서로 멀어지면 하나님의 몸이 갈가리 찢어지게 되고 우리가 서로 미워하면
하나님의 몸이 멍들게 됩니다. 지체 자신에게도 큰 문제가 생깁니다.
성도 간에 교제에서 실패하면 예배에서 실패하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의 사도신경 설교 내용 중-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믿는 모든 교인들은 ‘성도의 교제’에 대해서 100% 이렇게 알고 있고 모든 목사님들은 이런 내용으로 설교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사도신경에 나오는 ‘성도’라는 단어에 대해서 개신교에서 알고 있는 ‘성도’와 가톨릭에서 말하는 ‘성도’는 완전 다릅니다. 지금 개신교회에서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들의 신앙과 완전 다른 신앙들입니다. 주후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325년 니케아 회의를 거쳐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삼위일체가 공식화되면서 그 후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아타나시우스의 존재론적 삼위일체 44개 신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가톨릭의 유물이지 예수님이 원하시는 신앙고백도 아니요, 순교 당한 제자들의 사도행전적인 신앙고백도 아닙니다. 가톨릭에서 하는 신앙고백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는 무슨 뜻일까?
「성인의 통공(聖人~通功, 라틴어: Communio Sanctorum) 혹은 성도의 교제란 교회 구성원들 즉 살아있는 신자들과 죽은 신자들 간의 영적 결합(spiritual union)을 의미하며, 지상과 천국, 연옥 등에 있는 모든 성도의 공로와 기도가 서로 통한다는 기독교의 믿음이다. 여기서 통공(通功)이란, 공(功)이 서로 통(通)한다는 뜻이다. 즉 공로와 선행이 서로 통한다는 의미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신자들과 천국에 있는 영혼들 그리고 연옥에서 단련을 받고 있는 영혼들 모두 교회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기도와 희생과 선행 등으로 서로 도울 수 있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가톨릭에서의 성인의 통공
사도신경을 바칠 때,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하고 신앙을 고백한다.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 성인의 통공은 전투 교회(지상에 살아있는 이들), 단련 교회(연옥에서 정화 과정에 있는 이들), 개선 교회(천국의 영광 속에 있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은 성인의 통공에서 제외된다. 살아있는 신자들은 천국에 있는 성인들에게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에게 빌어 달라고 전구를 청하며, 연옥에서 단련을 받고 있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도 그들이 연옥의 정화 과정을 끝내고 하루속히 천국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느님에게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바친다. 또한, 성인들은 지상에 있을 당시 쌓은 공로를 하느님에게 보여주며 지상에 있는 신자들을 위해 끊임없이 전구한다고 믿는다. 그들의 전구는 지상 교회 신도들에게 격려와 힘이 된다고 가르친다.」 -위키백과-
가톨릭에서 말하고 있는 ‘성인(saints)’은 개신교회에서 알고 있는 성도가 아니라 죽은 자를 말합니다. 이들을 ‘성자’라는 호칭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육체가 죽은 자들과 교통하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까?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가톨릭은 죽은 자들에게 기도하고, 교통하고, 죽은 자를 기리는 축제일을 정해서 지키고 있습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특히 전례력에 축일이 별도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기리는 날이다.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된 이 축일은 609년 보니파시오 4세 교황 때부터 서방 교회에서도 지내게 되었다. 5월 13일에 지내던 이 축일을 9세기 중엽 11월 1일로 변경하였다. 교회는 이날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 뒤의 새로운 삶을 바라며 살아가도록 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지상의 우리와 천국의 모든 성인 사이의 연대성도 깨우쳐 준다.」
여러분 알고 신앙고백하시고 성경에 없으면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오래전부터 해왔고 지금도 하기 때문에 한다는 식의 사도신경은 이제 알았으면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왜? 성경에 없기 때문에!!!
6. 몸이 다시 사는 것과, 몸의 부활과,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몸의 부활과 영생을 어떻게 믿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어 장사된 지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
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하나님께
서 말씀으로 선포하시고 약속하시므로 우리는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그것은 신실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약속하신 것입니다(요한복음 6:30∼
40; 47∼58). 마지막 날에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소생함을 받아 우
리의 영혼과 다시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고전
15:42∼44)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히면 몸은 썩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의 몸의 요소
들이 다시 결합하여 부활한다는 것을 두고 구태여 물질 보전의 법칙을 들어
변증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는 것은 모든 과
학적인 설명을 초월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
우리를 모태에서 조성하시는 하나님
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능력으로 우리의 몸
을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부활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
저 부활하심으로 그것을 실증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12∼20).
부활의 교리는 우리의 전인격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는 것임을 가르치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선하게 지으셨음을 의미합니다. 물질 세계는 악에 속하고
영적인 세계는 선에 속한다는 이원론적인 세계관과 우리의 몸은 악에 속했으
므로 몸을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하는 잘못된 인간관과 구원관을 배격
합니다.
성경에서 동물적인 삶을 헬라어로 ‘비오스'(bios)라고 하고 하나님과 더불
어 누리는 참 삶을 ‘조에'(zoe)라고 합니다. 영생은 동물적인 삶의 연장이나
영혼의 불사가 아니고 우리의 전 인격이 하나님의 신성과 사랑에 참여하며 하
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며 기뻐하고 찬양하는 참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믿
는 자는 아들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께서 주셔서 이미 소유하고 있
습니다(요한1서 4:11).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죽음 후의 세계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이 모든 종
교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종교적’이란 말은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와 인간
의 상태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며, 그런 관심에서 현세와 사물을 보고 삶을 영
위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 종교들이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것이라고 말하며 영혼의 불멸
을 믿습니다. 즉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썩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
고 믿습니다. 죽어 몸을 떠난 영혼이 어떻게 되며 어디로 가느냐에 대한 설명
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 설명은 각자의 신관과 관계가 있습니다.
무신론적이며 범신론적인 불교나 힌두교에서는 윤생(輪生)을 믿습니다. 도
를 닦아 극락에 이르지 못한 영혼은 현세의 사람이나 다른 동물로 환생한다
고 합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성경 말씀에 따르면 터무니없는 거짓입니다.
성경도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음을 가르치며 사람이 죽는 현상을 영혼이 육
체를 떠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육체와 영혼을 이원론
적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이원론적인 이해는 육체는 썩어지나 영혼은 영원
히 죽지 않는다는 것이며, 더러는 육체는 악에 속하나 영혼은 선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영혼과 육체의 전인격이 죄를 지은
것으로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구원은 영혼과 육체, 즉
전인격의 구원임을 말씀합니다. 사람은 죽음으로 인하여 육체와 영혼은 나누
어지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장차 주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
으로 죽었던 몸이 썩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성도들을 위한 사도신경해설(11) 김영재 교수
기독교개혁신보 -2002년 11월 27일08
성도들을 위한 사도신경해설(11)
김영재 교수/ 합신 역사신학」
기독교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몸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나와 영혼과 몸(육)이 다시 합하여 지는 것, 그러나 살아 있을 때의 몸이 아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모델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찾아 짝을 맞춰보고 연결하여 과연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몸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를 믿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16:10)
믿는 자들에게 의를 이루기 위함, 곧 믿는 자 안에서 의가 되시고 그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며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믿는 자 안으로 오시기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가시기 위해 몸을 버리신 예수님은 ‘다시 볼 수 없다’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부활 후 다신 나타난 예수는 누구란 말인가!” 이런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8-39)
살과 뼈가 있는 예수는 누구인가!
이 말씀을 부활 근거로 믿는 자들도 신령한 몸, 살과 뼈가 있는 몸으로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요16:10절에 다시 볼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은 몸을 버리시고 영혼이 부활하셔서 그 영혼이 아버지 속으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마28:50)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니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23:46)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디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다시 가실 때 영혼이 가셨습니다.
영, 혼, 몸이 가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안다는 분들은 이 구절로 반문할 것입니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3:19)
그리고 삼일 후 몸을 다시 입고 부활하셨다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초림하신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첫째, 갈2:20절 분명히 몸을 버리신 예수를 믿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요16:10 부활하신 예수님은 몸을 버리시고 영혼이 아버지께로 가니 다시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육체라 할지라도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예수님의 육체도 죄만 없을 뿐이지 사람의 육체와 같기 때문에 반드시 육체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넷째, 믿는 자의 몸이 예수의 몸이 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당신의 몸을 버리셔야 믿는 자 안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오시어 믿는 자들의 육체를 얻는 것이 몸이 다시 사는 것이며 몸의 부활입니다.
지금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신령체(몸)로 부활하셨다고 믿어버리면 고전12:27절 말씀이나 빌1:20절 말씀은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이 되고 믿는 자는 부활로 거듭난다는 말씀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없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
그러면 부활 후 몸을 가지고 나타나신 예수님은 누구인가!
예수님이 하실 일을 알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보낸 천사입니다.
부활 후 나타나신 예수는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이 하실 일을 대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계1:1)
계시록을 시작할 때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하시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니까 예수님이 직접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한 것이 아니라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간과하면 계시록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초림하셨던 예수님과 같은 분으로 오해해 버립니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계1:17-18)
처음이요 나중인 분, 전에 죽으셨던 분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계1:1절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17-18절에 말씀하신 분을 예수님으로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마지막 장에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냈도다”(계22:6)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계22:8)
요한이 천사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하니까 ‘그리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했을까?
지금까지 요한 앞에 나타난 분이 천사라는 것을 요한은 알았지만 예수님과 똑같은 위엄과 권세로 말씀함을 보였기 때문에 그리했던 것입니다.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7:53)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구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출3:2)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출3:4)
2절에는 ‘여호와 사자’가 모세에게 나타났는데 4절은 ‘여호와’로 바뀝니다.
이 말씀중에 여호와의 사자와 여호와께서 함께 나타나셨다는 말씀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결국 구약에도 여호와의 나타남은 천사를 통해서 대행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은 빛 자체시며 거룩 자체시기 때문에 죄인은 절대 볼 수 없습니다.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33:20)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딤전6:16)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하니 형체가 없어서 볼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 본체는 죄인들이 보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민12:8)
모세가 대면해서 본 하나님은 본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대행한 천사를 본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도 천사를 본 사람들이 있고 그런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출20장에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십계명(율법)을 받았을 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행7:53절 말씀으로 천사가 나타나서 전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나타나신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의 예수님과 같은 분이라면 왜 부활 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라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요20:13-14)
안식 후 첫날 무덤에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는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는가?
죽으신 모습을 본 후 약36시간이 지났는데 그 시간이 지났다고 예수님인 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요21:4)
예수님을 3년6개월 따라 다니면서 많은 이적과 표적을 본 제자들이 36시간이 지나다시 나타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까요.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3-16)
이 말씀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제자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막16:12-13)
왜 사람들이 알보지 못했는가!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실 때마다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예수님이 사망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원래 모습 그대로 나타나시면 그 모습을 본 사람들 모두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타나실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을까요?
이것은 믿는 자들의 몸의 부활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버리신 예수님은 영으로 믿는 자들 안으로 오셔서 믿는 자들의 몸을 얻으시는 것이 예수님의 몸의 부활이요, 그리스도의 영이 믿는 자들 안으로 재림하셔서 믿는 자들이 새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예수님 자신의 몸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믿는 사람들의 몸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믿는 자의 영으로 들오시어(롬8:9) 그 사람의 몸을 얻으면 이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몸의 부활입니다.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가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얻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다시 봅시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
살과 뼈가 있는 예수는 누구인가. 바로 믿는 자들, 육체가 있으면서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오셔서(롬8:10) 믿는 자들의 살과 뼈를 얻은 믿는 자들이 바로 살과 뼈가 있는 예수들입니다.
비슷한 예로 예수님 당시 성전은 지어진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더 이상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신의 육체가 성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말씀하신
것이라”(요2:20-21)
성전이 건물이 아닌 예수님의 육체임을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육체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 가셨다면 성전도 하늘로 올라가버린 것이 됩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성전이 이제는 믿는 자의 몸이 된다는 말씀이 거짓말이 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6:16)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믿는 자의 몸에 하나님이 사시면 믿는 자가 성전이 됩니다.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므로 믿는 자의 몸에 그리스도가 사시면 바로 믿는 자가 그리스도 예수가 되며 이것이 몸이 사는 것이며 몸의 부활이고 예수님의 몸의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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